검은 고양이 네로 동화 보물창고 13
엘케 하이덴라이히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김지영 옮김 / 보물창고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 한다.

처음 회사 생활을 할대 회사로 가는 골목에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였는데 그럼 나는 꼼작 못하고 서 있곤 했다.

참으로 요망한 것이 고양이라고 고양이는 저를 무서워하는 나를 멈춰빤히 바라봐서 나를 오싹하게 만들곤 했다.

한번은 무서워서 구멍가게로 뛰어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가게 주인왈

아니 아가씨 무슨 띠인데 고양이를 무서워해?

나는헉 했다.

아 그래서 무서워했군하고 말이다.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도 고양이가 많다.

그런데 하나같이 살이 쪄서 몸이 둔하다.

무언가 먹을 걸 발견했다가도 사람이 오면 재빨리 피해야 하는데

우리 동네 고양이는 느려터져서 살찐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차 밑이다 골목뒤로 숨는다.

때론 다 숨기지 못해 꼬리가 보이기도 하니

고양이를 무서워 하는 나는 갑자기 웃음이 나오며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난 뒤 고양이들의 생활과 그들의 세상이 떠올라 또 한번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따뜻한 햇살아래 웅크린 고양이

눈을 게슴치레 뜨고 졸고 있고 있는 고양이

살이 진 줄무늬 고양이.

정말 개성있으면서도 낯설지 않은 우리 네 삶과 닮아 보였다.

검은 고양이 네로는

전에 두레 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나온 적이 있는책이다. 물론 제목은 다르지만 이 검은 고양이 네로를 읽으면서 나는 바로 그책이었군 하고 알아차렸다

사실 읽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건 특별한 몇권을 제외하고는 드문 일인데

이 책을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보는 느낌은 아주 남달랐다.

한대 말썽꾸러기에 무서운 것이 없는 고양이가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 독일로 가서 겪는 이야기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

고향과 농부는 아주 그다지 말이 없고 묵묵히 그들의 자리에 있어

아주 든든해 보였다.

그게 고향이고 부모이고 마음의 보금자리 같았다.

다시금 고양이에 대해 생각해 보며 고향과 그리움과 사랑과 관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주는 이야기이다.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빠질 수 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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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나물이 아홉가지여야 한다는데...

고사리나물, 무나물, 호박고지나물, 시래기나물, 도리지나물, 취나물, 가지나물, 콩나물, 고구마줄기나물

이런데 우린 어제 취나물, 호박고지나물, 그리고 난데없는 다래순나물을 먹었다.

그러니까 결국 대보름 나물은 두가지였던 셈이다.

나는 5가진줄 착각했다.

나 : 엄마 5가지여야지~

엄마 : 야, 그냥 접시로 때워~

접시가 5개였다는 것이다.

밥은 오곡밥따로 할 필요없이 늘 먹는 것이고...

반찬은 그 세가지 나물에 비지찌개, 생미역 초고추장 찍어먹기...

크억~

그런데 9가지라니...

그랬다해도 먹은셈 치라고 하셨을지 모른다. 아마 밥그릇도 포함하시거나 접시수를 늘리셨을지도...

오늘 축구도 졌으니 가만히 있어야지.

대보름날인데 뭐니~

축구는 지고...

님들은 잘 드셨기를 바랍니다~

냉장고 안의 콩나물은 왜 안하셨냐고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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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2-12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나물 몇가지와 맛난 밥을 먹었지요~ 오홍홍홍..

하늘바람 2006-02-12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런데 왜 오늘 나물을 먹을까요? ^^
 

1. 맞춤법의 한계


오늘날에는 점점 문어적 언어보다, 구어적 언어가 발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맞춤법은 이런 구어적 언어를 만족시키기에는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데요.. 

'바라다'의 명사형 '바람'과 '바래다'의 명사형 '바램'이 자꾸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어적으로 보았을 때, '바래요', '그러길 바래' 같은 표현은 '바라요', '그러길 바라'와 같이 사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지 않지요 . 뉘앙스라는 것은 현대와 같은 감각적인 시대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인데, 맞춤법을 맞추려고 '바라요'라고 쓰면 이상하지 않을까요. 맞춤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천정(天井)이라는 말은 윤동주 시인의 시집에서도 나와 있는 단어지만, 이제는 천장(天場)이라는 말로 순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정부지(天井不知)는 아직도 쓰이고 있죠.

2. 오역의 발견


꼭 맞춤법을 지켜야 건전한 언어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의심이 생깁니다. 안냐세여, 방가 등의 표현은 어느 정도 현대를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맞춤법이라면 어느 정도 보수성은 갖춰야겠기에, 사전에 등재되기는 힘들겠죠.


제가 재미있게 보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이 오역을 제대로 활용한 코너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개콘'의 '다중이'입니다. 다중이는 제일 처음에 자기를 소개할 때 '다중이인니다'라고 합니다. '입니다'가 아니지요. 적당히 비틀어서 캐릭터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라이벌 프로그램 '웃찾사'에 '4가지 합창단'도 이런 게 하나 있습니다. 가운데 좀 통통하게 생긴 개그우먼 있잖습니다. '난 맨~날배고빠' 하는 애. 귀여운 이미지와 유아적 이미지를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어휘를 제대로 골랐습니다. '아, 나 동그랑땡 먹고치따' 먹고싶다가 아닌 것이지요. 이런 오역들은 즐거운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맞춤법에 뒤안길에 널려 있는 말들이지요.


꼭 맞춤법에 맞춰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글맞춤법을 이야기하며, 그 한계에 대해서도 소개를 할까 합니다. 이렇게 맞춤법의 한계부터 시작하는 이유는 우리의 언어생활을 좀 더 유연하게 살펴보자는 의미에서입니다.


한 가지 사물에는 반드시 한 가지 언어가 존재한다는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에 따르면 그 한 가지가 반드시 한글맞춤법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금까지 몸풀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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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6-02-1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여기서 제 글을 보니 반갑군요. 빠뜨리신 게 있어요.
위의 의문을 정리해서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답변이 나왔습니다.

위의 의문점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답변입니다.

1. 기본형 ‘바라다’의 어간 ‘바라-’에 해체 종결 어미 ‘-아’가 결합한 ‘바라’가 ‘바램’으로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어에서도 ‘바라요’, ‘그러길 바라’로 쓰실 것을 권합니다.

2. ‘천정(天井)’은 ‘천장(天障)’의 잘못된 표기이며 순화의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천장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물가 따위가 한없이 오르기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천정부지(天井不知)’는 ‘하늘 높은 줄 모름’으로 순화되었습니다.

3. '살사리꽃'이 코스모스의 우리말인지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 검토하여 그 사실이 맞는 경우에는 앞으로 개정될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살사리꽃'을 코스모스의 우리말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전에 살사리꽃은 코스모스의 비표준어로 올라 있으므로 표준어인 코스모스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늘바람 2006-02-12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승주 나무님 너무 감사해요. 승주나무님 살사리꽃에 대한 유래는 없나요? 마침 코스모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긴 했는데

하늘바람 2006-02-1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에서는 살사리꽃이 코스모스를 가리키는 북한말이라네요

진주 2006-02-1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코스모스란 낱말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살사리꽃이란 말이 어색하게 보이지만 꽃의 생김새를 생각해보면 쉽게 연상되는 말이지요. 꽃대가 약해서 하늘 하늘, 살랑 살랑 움직이는 모습을 살린 의태어입니다.
남한이 영어를 아무 거름망 없이 쉽게 수용한 것에 비해 북한이 보인 반미적인 모습은 언어영역까지 예외는 아니어서 때론 지나치게 억지스런 어휘들도 많지만 덕분에 고유의 우리말을 더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라일락을 수수꽃다리(물론 이건 남한에서도 남아 있는 말이지만 어지간한 사전에는 올라와 있지도 않군요. 표준말이 아닌가 보죠). 남의 나라 언어에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말의 현주소로는 과연 얼음보숭이(북한말)라는 말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수수꽃다리, 얼음보숭이...정말 되새길 수록 예쁘고 정감어린 말이라고 느껴집니다.

< 현재 사전에 살사리꽃은 코스모스의 비표준어로 올라 있으므로 표준어인 코스모스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표준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표현이 참 거시기합니다 ㅡ.ㅡ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표준말>에 대한 정의도 마음에 안 들고, 표준말이 아니라고 무조건 무시하고 격하시키는 풍조는 정말 안타깝습니다. 표준어에 들어가지 않는 말 중에 '사투리'는 우리말의 보고와 같아서 아주 중요한 영역인데 표준어에 밀려 자꾸만 사라져 가고 있지요. 방언론에 대한 연구도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하늘바람 2006-02-12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도움되는 말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06-02-12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국립국어원이라도, 어휘 선택은 잘 안 되는 영역인가 보네요.
진주님의 해설을 들으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 내공이 만만치 않으신 분^^

진주 2006-02-12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주나무님, 아..아닙니다. 별 말씀을...^^;

하늘바람 2006-02-1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진주님 내공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두분 모두 제게도 전수해 주셔야합니다
 
 전출처 : 놀자 > [벤트1] 엽서 보내주세요.^^

 

저도 한번 엽서라는 녀석을 받아보고 싶습니다.^^

엽서도착했습니다... 카테고리 걸었으니 이쪽으로

엽서 주시면 됩니다...

그냥 많이 해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아무거나 다 되요~

시도 좋고요~

그림도 좋고요~

저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

올해 백수되었습니다..ㅠㅠ

백수로서 필요한 자세라든지..ㅎㅎ

 

다 받겠습니다~~

엽서 벤트 종료일은 45678 캡쳐가 끝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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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인으로서의 정지용, 그리고 정지용이 쓴 동시_전 병 호



일반적으로 정지용 시인은 대중들에게 「향수」를 쓴 ‘시의 거장’으로 그 이미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지만 동시인으로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일찍이 1930년대 문단을 풍미한 김기림은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간파한 적이 있다. 그 말에 걸맞게 지용은 지금도 변함 없이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최초의 모더니스트요, 탁월한 이미지스트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 최고 시의 성좌(星座)’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이 같은 선구적 위치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그가 일찍이 수준 높은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지용이 쓴 동시는 몇 편일까
정지용 동시를 말하기 전에 먼저 대상 작품을 선정하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느껴진다. 왜냐 하면 지용이 생전에 동시집을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펴낸 책 중에서 시집은 『정지용 시집』과 『백록담』 두 권뿐이다. 그 중에서 『정지용 시집』 제3부에 실린 시의 일부가 오늘날 말하는 정지용 동시인 것이다. 박용철은 제3부에 실린 작품을 가리켜서 ‘자연동요의 풍조를 그대로 띤 동요류와 민요풍 시편’이라고 말했다. 제3부에 실린 시는 모두 23편이다. 일반적으로 전반부 16편은 동시이고, 후반부 7편은 민요풍 시로 나뉜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좇아 정지용 동시를 16편으로 묶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먼저 「호수 1」을 보자.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호수 1」 전문

틀림없는 동시이다. 그것도 너무나 앙증맞고 귀여운 갈래머리를 한 여자 아이의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는 동시인 것이다. 또 「호수 2」는 어떠한가.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꾸 간지러워(「호수 2」 전문)’ 이 작품도 동시이다. 이 시들은 『정지용 시집』의 제2부에 실린 시들이다. 정지용 동시를 말하는데 이 시들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밖에 고르는 이에 따라서 제2부의 시를 일부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지용에게는 시의 전반부는 동시이고 후반부에 가서 어른 목소리를 드러내는 소위 ‘동시적 발상이 주조를 이루는 성인시’도 의외로 많다.
한편 작년(2004년)에는 박태일이 동시 두 편 「넘어가는 해」1), 「겨울밤」2)을 발굴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신소년’ 1926년 11월호에 ‘지용’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 두 편은 지용의 다른 시집에는 실리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정지용 동시는 제3부의 작품을 중심으로 고르는 이의 기준에 따라서 얼마간 달라진다. 그렇지만 넉넉잡아 30편은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1) 불까막이/불까막이//들녘지붕/파먹어라//내려왔다/쫓겨갔나//서쪽 서산/불야 불야
   (「넘어가는 해」 전문)
2) 동네집에/강아지는/주석방을//칠성산에/열흘 달은/백통방을//갸웃갸웃/고양이는/무엇 찻나
   (「겨울밤」 전문)

>>지용은 그 당시 문단에서도 동요 동시 작가로 알려졌을까
지용은 그 당시에도 동요 동시 작가로 널리 알려져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를 가리켜 김환태는 ‘가장 완전하게 동심을 파악한 동요 동시 작가’라고 평했으며, 석은과 이양하는 정지용 동시의 뛰어남을 지면을 통해 밝힌 적도 있다. 그는 좌경적인 작품을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학가동맹에서는 아동분과위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가 아동분과위장으로 추대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체에서는 어떠한 활동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그가 일반으로부터 동요 동시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참고로 말하면 지용은 1933년 8월경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을 옹호하려는 취지로 구인회를 결성하고 이를 이끌어 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면서 ‘카톨릭 청년’지의 편집에 관여했던 만큼 카프파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정지용 동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대체적으로 정지용 동시는 1922년을 전후한 습작기의 소산으로 여기고 가볍게 처리해 온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박용철이 시집의 발문에서 ‘많은 눈물을 가벼이 진실로 가벼이 휘파람 불며 비누방울 날리든 때’의 부산물이라고 언급했고, 또 오탁번은 ‘민속적 정서에 바탕을 둔 가벼운 소품들’ 정도로 취급하기도 했다. 정지용 시의 본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현대 자유시이지, 동시와 민요시 또는 시조가 아니라는 전제가 강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이를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지용 동시를 폄하하거나 그렇게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정지용 시집』이 발간된 것은 1935년이다. 1935년이라면 지용이 시작의 원숙기에 들어선 시기이다. 지용은 첫 시집을 펴내면서 동시를 민요풍 시와 함께 별도의 장을 설정하여 수록했다. 시조를 제외시킨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이다. 이는 지용이 동시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내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정지용 동시에는 작품의 의미가 비교적 짙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지용의 일반시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단서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이에 대해 일찍이 김종철은 ‘대단히 높은 정신적 경지를 나타내는 지용의 시들은 그의 동시의 변형’이라는 견해를 피력했고, 김학동은 ‘초기의 동요나 민요풍의 시편들은 그 뒤로 전개되는 「바다」와 「신앙」과 「산」의 시편에서 보인 고고한 정신적 태도와 표현 기법의 바탕’이 되었다고 보았다.

>>지용은 언제부터 동시를 썼을까
지용은 1926년 6월에 발간된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일반 시 3편, 시조 9수와 함께 「서쪽 하늘」, 「띠」, 「감나무」, 「한울 혼자 보고」, 「딸레(인형)과 아주머니」 등 5편의 동시를 발표했다. 이것이 지용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발표한 동시이다. 지용의 이 동시들은 주로 일본유학 시절을 전후한 시기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용은 22살이 되던 해인 1923년에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서구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리고 28살이 되던 1929년 3월에 졸업한 이후 모교인 휘문고보에 영어과 교사로 취임한다.
정지용의 시작 과정을 작품 경향에 따라 살펴보면 대략 3단계로 나뉘는데 이 시기는 제1단계에 해당한다. 이 때 지용은 도시 이미지를 추구하는 모더니즘 계통의 시와 함께 토속적 향수와 실향 의식을 담은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들을 발표한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많은 동시들은 물론 노래로 작곡되어 널리 불려지고 있는 「향수」도 이 때 씌어졌다.


>>>지용은 왜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을 쓴 것일까>
지용은 일본 경도에서 여섯 해를 보냈다. 지용은 유학 초기에 새로운 서구 문물을 접하면서 많은 경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현해탄 건너 멀리 이국의 하늘 밑에서 고향 옥천에 대한 향수와 고독도 절실히 느꼈다. 그는 압천(鴨川)이라는 냇가에 하숙을 정했다. 이 곳은 고향 마을의 자연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시상을 다듬으며 압천을 따라 거닐었다. 그러나 지용이 이 압천에서 만난 것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자연 풍경만이 아니었다. 압천 상류엔 케이블카 가설 공사장이 있었다. 그는 이 곳에 강제로 끌려와 중노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와 그들의 비극적 참상을 함께 보았다. 망국민의 비애를 처절하게 느낀 그는 그 당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지용문학독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수백명식 모이어 설레는 일판에 합비 따위 노동복들은 입었지만 동이어 맨 수건틈으로 날른대는 상투를 그대로 달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째앵한 봄볕에 아지랑이는 먼 불타듯하고 종달새 한끗 떠올라 지즐거리는데 그들은 조선의 흙빛같은 얼골이매 우리라야 알아듣는 왁살스런 사투리며 육자배기 산타령 아리랑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지용이 조선에서 온 유학생임이 밝혀지자 그토록 거칠고 사나웠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신랑 신부 볼모 잡듯이 그를 환대해 주었다고 한다. 지용은 그 때 고국에서 온 이 노동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그들을 찾아 향수를 달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현해탄 건너 고향에는 꿈에도 그리는 그들의 가족이 있었고 지용에게는 무척이나 사랑한 누이동생 계용이 있었다. 이처럼 압천 유역은 그에게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망국민의 비애와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런 심정을 시로 승화시켰다. 이것이 『정지용 시집』의 제3부에 실린 동요류 및 민요풍 시편들인 것이다. 이 시들은 망국의 설움을 달래고,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 고취와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간절한 심정에서 씌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지용 동시는 전승 설화, 세시풍속, 민요 등을 주요 소재로 한다. 또한 우리 시의 전통적인 율격을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다. 우리는 지용을 전통지향적 시인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그의 동시는 전통지향 정형적 동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향토적 색채가 짙다. 이것은 일본 경찰의 총검 아래서도 조선의 자연 풍토와 조선인의 정서와 우리 언어를 끝까지 고수하려고 했던 그의 항일의식을 드러 낸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용 동시를 가리켜 ‘고향으로 향하는 마음이 유년 시절의 동심과 조화되어 민요의 율조를 타고 고독과 비애로 표상’했다고 한 김학동의 말은 그의 동시가 어떤 배경에서 씌어졌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다. 지용의 동시는 사실상의 망향가이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서러움을 달래고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던 영혼의 노래였던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첫째는 지용이 민족시인으로 불리는 윤동주 및 청록파 시인들에게 끼친 동시에 대한 크나큰 영향이다. 잘 알다시피 청록파 시인은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이다. 이 중 박목월과 조지훈은 동시를 썼다. 특히 박목월은 박영종이라는 본명으로 많은 동시를 발표했고, 동시단에서도 또렷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 지용이 ‘문장’지에서 추천한 시인들 중에서 박남수도 동시를 썼다.
그런데 정지용과 윤동주의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지용은 1902년생이고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났으므로 15년 차이가 난다. 윤동주는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하던 중 1943년 사상범으로 몰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 정지용과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녔다. 윤동주는 유고시집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이 시집은 윤동주가 죽은 후인 1948년 그가 남긴 시 30편을 모아 펴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윤동주는 윤석중, 강소천, 일본의 오가와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한 시인은 정지용이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정지용의 동시를 애독했다. 그런 만큼 『정지용 시집』은 윤동주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두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두 사람이 다 민족의 수난기에 허망하게 희생되었다는 비극적 사실도 같다. 이처럼 당대 최고 시인인 정지용이 동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 당시 젊은 시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나 흥미롭다.
두 번째는 그의 최후 행방에 관한 것이다. 정지용의 시가 해금된 것은 1988년이다. 6·25 당시 녹번리 초당에서 지내다가 정치보위부에 의해 납북되었지만 월북인사로 분류되었다. 그 동안 그의 최후에 대해 여러 증언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1950년 미군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유력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지용 시인이 북한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 2000년 11월 1일자에 실린 한 편의 기사는 필자를 아연케 했다. 기사의 제목은 ‘정지용 시인의 기막힌 사연’이었다. 정지용 시인의 셋째 아들 이름은 정구인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행방불명 된 아버지를 찾는다며 집을 나섰던 셋째 아들이 50년 만에 아버지 정지용을 찾아 달라고 북에서 서울로 연락해 온 것이다. 그러면 월북했다던 정지용은 그 동안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같은 북녘 땅에 살면서도 아들의 안부조차 모르고 살았거나 아니면 아예 월북하지도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정지용 동시를 읽어 볼 수 있는 책

『정지용 전집』(민음사, 2003)
-시전집
『향수』(미래사, 2001)
-시선집(개정판)
『엄마야 누나야』(보리, 1999)
-앤솔러지, 동시선집
『해바라기 씨』(비룡소, 2002)
-그림책


▶▶▶전병호
청주에서 태어났으며, 청주교육대학을 졸업한 뒤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정지용 동시’를 연구했습니다. 1981년 ‘소년중앙문학상’과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계간 <아동문학평론>에 『재운이』, 『샛강 아이』 등 여러 권의 동시집 서평을 발표하였으며, 지은 책으로 『꽃봉오리는 꿈으로 큰다』, 『소금 얻으러 간 날』, 『꽃 속의 작은 촛불』, 『들꽃 초등 학교』 등이 있습니다.




(※ 이 글은 월간 <동화읽는가족> 2005년 2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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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6-02-1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충북 옥천 출생이지요...... 동시도 쓰셨군요~~~

하늘바람 2006-02-1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출생까지~ 역시 해박하셔요. 세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