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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지음, 이기동 옮김 / 프리뷰 / 2013년 8월
평점 :
지난 1950년대부터 약 40여년간 지속되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를 종식한 것은 동서간 치열한 스파이전쟁도 군비경쟁에 따른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죽어가는 대국 소련을 치유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운명을 받아들였던 한 남자의 과감한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개혁, 개방)의 결과물이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마지막 서기장이자 소련 최초이자 최후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그 남자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고르바초프가 직접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봤던 자서전을 보면 왜 개혁, 개방이 동서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냈는지 알게 된다.
<선택-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은 풍운의 시기, 소련의 중심에서 그 변화의 시작과 참담한 끝을 지켜봤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지난한 과거에 대한 추억을 기록한 책이다. 스타브로폴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고르바초프는 2차세계대전시기의 혹독한 고통과 굶주림 속에서 성장하면서 소련 국민의 피폐된 삶을 절감하게 되고 이는 장차 소련 스타브로폴 지방당 서기 뿐만 아니라 중앙 정치로 진출하여 서기장에 오르기까지 줄 곧 농업개혁은 물론 소련의 개혁, 개방을 이끄는 동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 책은 그가 어떻게 개혁, 개방을 하게 됐는지 독자들에게 자연스레 그의 이력과 당시 소련의 사회상을 묘사하면서 당위성을 갖춰 나간다. 일례로 개혁성향의 코시긴 총리가 스타브로폴에 방문했을 당시 고르바초프와 코시긴의 대화 속에서 나오는 고려인들(일제 치하시기 조선에서 이주했던 이들의 후손이다)들이 집단농장의 생산성을 뛰어 넘는 양파를 생산하는 엄청난 노동생산성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충분한 양파를 공급하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수익으로 보장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이를 중앙당에서 거부하고 추방한데서 당시 소련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인 사회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깨닫게 한다.
결국 개혁, 개방은 소련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창의성을 마련하며 활력을 불어 넣음으로서 국가의 미래를 확보하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음을 고르바초프는 독자들을 이해시킨다. 오랜 기간 폐쇄성을 통해 소련을 통치해 온 노령의 공산당 집권층은 사회를 경직되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갔음을 그의 회고록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 개방은 고르바초프 이전 단명했던 서기장이자 고르바초프의 후견인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 시절에도 시도되었으며 이는 고르바초프가 계승, 확대발전시킨 것이었다.
냉전의 한가운데서 미국과 협상을 통해 일궈냈던 핵무기 감축 등 냉전종식도 결국 소련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군비확장에 쏟아 붓는 재원을 민생으로 돌릴 수 있는 기회였음을 독자들은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개혁, 개방은 결국 실패로 끝난다. 철의 장막 뒤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정쟁은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들은 지나간 과거의 소련에 대해 지극히 적은 정보 속에서 전혀 사정을 몰랐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그 모습을 눈에 보이듯 재현해 내는데서 박진감과 함께 짙은 회한을 자아내게 한다.
개혁, 개방에는 너무나도 많은 정적과 방해공작이 뒷따랐다. 노멘클라투라로 불리우는 소련 공산당 기득권 관료층의 조직적인 태업내지는 방해는 경제위기와 재정위기에 대한 시의적절한 대응을 놓치면서 급진 개혁층과 보수층 양쪽 모두의 정치적 공세에 시달리게 됐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여건조성이 안된 상태에서 무지한 국민들에게 선사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오히려 불평불만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고르바초프는 무능한 서기장이자 대통령으로 비난받게 된다.
결국 포퓰리즘으로 국민들을 선동하는데 능수능란한 보리스 옐친과 그의 일당들이 혹세무민하며 획책하는 소련 해체 공작에 희생양으로 70년 소련 공산당과 소비에트 연방의 비참한 말로를 두 눈으로 지켜보는 고르바초프. 하지만 이런 오욕속에서도 그는 비록 소련이 해체되지만 당시의 결정이 국민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향상시킬 수 있다면 개혁, 개방은 옐친 정권하에 러시아에서도 지속되어야 하고 협력을 할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그의 순진한 바람으로 드러나고 만다.
섣부른 개혁, 개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옐친과 신흥 집권층은 국민들의 권리이자 소유로 들어가야 할 모든 과실을 밀실정치를 통해 나눠가지면서 소련 시절보다 더 큰 가난을 국민들에게 안겨줬다고 개탄하는 고르바초프... 그의 개혁 개방정책이 아니었어도 소련은 결국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은 진단했다고 한다. 이미 제국의 병폐는 돌이킬 수 없는 말기 암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고르바초프는 끝까지 잡으려 했고 실제로 가능했었지만 끊임없는 정적들의 방해공작과 옐친 등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선동 정치세력의 득세는 이를 무산시켜 버렸다.
하지만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은 바로 소련 국민들에게 있지 않을까? 물론 톱다운 형식으로 위로부터의 개혁, 개방은 실제로 국민들에게까지 전파되지 않았기에 정책시행 초기에 열화와 같은 지지와 성원이 지지부진으로 곧 불만과 폭동으로 번지게 되는 과정이 이 책 곳곳에 언급되어 있지만 애초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수용의지가 부족했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민주권주의를 부여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시작부터 실패를 예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세계를 양분했던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지금도 신망과 동시에 비난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고르바초프. 그의 고군분투는 얼마나 개혁이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한다. 그리고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지형과 사회상이 떠오르면서 지난한 세월 독재정권과의 투쟁 속에서 얻어냈던 민주주의가 그 뿌리부터 다시 흔들리는 절망감이 오버랩 되면서 몸서리치게 된다.
어찌면 우리 국민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한 점에서 당시의 소련 국민들과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역사는 후대가 평가한다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요즘이다.
<선택-미하일 고르바초프 최후의 자서전>은 감히 말하자면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아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그만큼 예상하지 않았지만 이 책을 만난데 대해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사족을 달자면 젊은 날의 라이사 여사의 미모는 마치 전성기 르네 젤위거의 미모를 연상케 한다. 모스크바대학시절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이 책의 또 하나의 재미를 선사한다. 전체적으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