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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상업주의 - 정치적 소통의 문화정치학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3년 1월
평점 :
국정원의 댓글 선거개입과 통진당 의원의 내란예비음모 논란까지 온통 나라가 어수선하다. 보수(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보수라 불리는 이들은 보수라 부르기에도 창피한 수구세력이지만 통상적으로 그들을 지칭하기에 보수라 하겠다)와 진보는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극한의 대결을 위한 새로운 라운드를 준비중이며 그 끝은 어딜지 궁금하기 보단 피로감이 더해만 간다.
서로를 짓밟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 사회적으로 3족을 멸해야 하고 부관참시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금의 정치판은 소통을 부르 짖지만 그야말로 증오로 점철된 정치판이고 이를 들여다 보며 쾌감을 느끼게 해주는 관음적 복마전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지경으로까지 간 걸까? 지향점이 다르다지만 보수와 진보가 함께 할 방법은 없을까? 소통은 그 가치있는 명제로서 역할을 커녕 유권자이자 정치소비자인 국민을 현혹시키기 위해 사용된 트렌드이자 하나의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증오 상업주의>는 올해 1월에 출간되었다. 불과 보름전쯤 우리나라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들은 환호와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지만 상대방 후보의 지지자들은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이라고 좌절하면서 이민(?)까지 운운하는 슬픔을 보여줬고 극도의 증오심을 담아냈다.(어느 선거나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때 부정선거까지 기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승자의 편에서 보는 건 아니라도 말이다) 진정 승복이란 어려운 것인가? 새누리당도 민주당 지지자도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진일보하는 것이 미치도록 싫단 말인가? 진심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납득할 만한 결과라면 승패를 떠나 승복할텐데 말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그 납득의 기제를 증오가 헝클어 놓는다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뛰어 넘는 감성적 폭발성이 휘감어 버렸다면? 증오가 가진 힘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손놓고 볼 순 없지 않은가?
즉, 저자는 <증오상업주의>를 통해 정치에서 증오가 가지는 가치, 원동력으로서의 폭발력과 그로 인한 영향을 다룬다. “진정한 적이 없다면 진정한 친구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아닌 것을 증오하지 않는다면 우리 것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정치는 ‘공격성 분출의 제도적 승화’로 탄생한 것인바, 정치적 원동력이 증오라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증오가 가져오는 사회적 갈등과 분열, 진영간 대립으로 인한 과도하고 불필요한 비용의 발생은 장기적으로 사회의 건강함을 해치고 국민의 화합을 붕괴시키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증오를 일정부분 수용하고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서 해결방향을 찾아보고 진정한 소통이라는 명제를 대비시켜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일조해야 겠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저자의 집필의도일 것이다. 당최 끝이 안 보이는 대선후 분열국면이 이를 조장하는 원동력인 증오에 대한 컨트롤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 증오의 근원과 사례를 보여주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니면 공존해야 할지를 저자가 제시한다.
증오의 심화를 기반으로 한 정치적 갈등의 특징은 전세계 어디에나 등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진보성을 기반으로 저널리즘을 구축해 왔던 미국의 기존 공중파방송이나 MSNBC등 케이블 방송이 보수의 회귀와 지지를 가치로 태어난 루퍼트 머독의 ‘폭스 뉴스’와 보수주의자들의 확증편향(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에 기대어 그들의 오감을 만족시키는데 충실한 우익의 프로파간다 제조기 로저 에일스의 보도편성방침은 폭스 뉴스를 편 가르기의 아이콘으로 등극시켜 버렸다. 이는 저자가 사례로 첫 번째 언급하였듯이 폭스뉴스의 증오를 상품화하여 이익을 얻는데 가장 충실한 전략에 ‘증오상업주의’의 극명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폭스 뉴스의 ‘적 만들기’전략, 호전적 애국주의, 반엘리트 포퓰리즘은 CNN등 경쟁방송의 시청률을 반토막 내며 승승장구했으며 이런 선정주의는 국내 종편의 대선정국에서 방송전략으로 이용되어 쏠쏠한 재미를 보게 만들었다한다. ‘증오 상업주의’가 비단 미국의 사례가 아닌, 우리나라의 저널리즘의 상업화로 쏠림현상을 만들어 냈다.
이런 극단은 또다른 극단을 낳는다. 미국에서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지지하기 위해 출발한 무브온 운동이 보수세력 티파티에 버금가는 새로운 진보운동으로 자리잡으면서 낳게된 양진영간 대립은 물론 중도와 온건세력의 몰락을 가져오면서 더 심화되는 현상을 이 책에서는 우려한다. 우리나라에서 전체 유권자의 40%는 중도층인데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자리가 없어진다면 심각한 왜곡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극단적 현상의 해결방향으로 솔 알린스키를 소개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는 것을 강조하며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로서 타협을 강조한다고 조언한다. 알린스키의 주장을 담은 책들을 섭렵하다 보면 우리나라 진보 주류의 논지는 진보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알린스키의 이론과 행동에서 ‘winner takes it all’의 증오가 아닌 51대 49의 이성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그 대안의 현실적 징표로 안철수의 등장을 꼽는다. 비록 안철수의 정치참여와 실험은 아직 발아전이지만 저자의 기대는 상당히 큰 편이다.
증오가 횡행하는 세상이 아닌, 타협과 소통이 대한민국 대중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날이 올때까지 길고 긴 진통의 터널은 어둡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린 가야 할 것이다.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