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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진보 -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8월
평점 :
세월호 참사 1주기와 경남기업 성완종 회장의 자살을 둘러싼 정치권 로비리스트로 시끄러웠던 4. 29 보궐선거는 야당의 참패로 끝났다. 국민을 국정의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현 정권의 세월호 참사 수습과정에서 보여줬던 파렴치함과 무능함, 비리 정치인들의 전횡이 낳은 부끄러운 자화상 성완종리스트 등 여당의 약점을 충분히 파고들면 야당으로서는 민심을 돌려 세울 호기를 잡았음에도 이를 활용하기는 커녕 내부로부터의 붕괴와 분열로 자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가져왔던 이들이라면 이번 보궐선거도 야당의 참패를 예상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새누리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는 이상 선거를 통한 승리와 변화는 어렵다’고....
지지세력은 전체 유권자에서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감안해 보자. 보수(솔직히 대한민국에 보수가 어디있는가? 친일매판세력들의 자손들이 이합집산으로 뭉쳐 스스로를 보수라고 참칭하지만 그들은 민족과 국가관은 눈꼽만치도 없는 주제에 자신들의 이익에만 야비하게 추구하는 ‘수구’다)와 진보(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종북세력을 몰아내는 것만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진보로서 포지셔닝이 가능할 것이다. 수구세력 보다 더 증오하는 것이 바로 이들 종북이다)세력 지지자들을 총유권자의 60%정도로 가정할때 나머지 40% 유권자 중 20%는 정치무관심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보수, 진보 지지자와 정치무관심층을 제외한 나머지 20%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 선거전에서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 <싸가지 없는 진보>의 담론은 출발한다.
진보의 싸가지 없음... 왜 싸가지 없어 보일까? 아니 그전에 정책방향과 수권능력, 비전제시 등 국가에 대한 봉사관만 충실하면 되는 것 아닐까? 왜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줄까? 진보세력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20%의 유권자들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의 시각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는데 정치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들의 태도와 품성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보세력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우월감, 언행불일치, 무례함 등이 20%의 유권자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히 보수세력 지지자는 물론 우호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진보세력의 경멸에 가까운 시각이나 비꼼은 도덕적 우월의식의 발로이지만 유권자들에게는 ‘싸가지 없음’으로 비춰져 확대재생산되고 보수언론의 집중공격에 노출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발전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 일으킬만하다. 같은 진보 내에서조차 지난 2005년 김영춘의원이 유시민에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는 표현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이 국민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감성을 고취시키는 접근은 아예 배제하고 이성적인 부분에만 치우쳐 오로지 보수와 차별화를 두는데서 실패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근원부터 친일매판세력과 독재정권의 피를 이어받은 정치적 배경의 보수세력과 달리 깨끗하며 이성적으로 정치 잘하고 행정능력 출중하면 그깟 싸가지 없음이야 충분히 이해되지 않을까하는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은 우월감이 보궐선거 참패처럼 실패를 거듭하고 앞으로도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주장하며 보수와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는데 보수와 같은 당권다툼이라던가 비리 등에 연루되면 언행불일치에 따른 진보의 타격은 오히려 더 크다는 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들은 오랜 기간 청춘을 바쳐 민주화에 기여해 온 투사라는 자부심이 유권자들에게 민주주의 등 정치에 대해 계도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무례함(예를 들어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의원의 노인 폄하 발언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어 버렸다)으로 비춰지고 시도때도 없는 ‘진정성’타령도 국민들의 마음을 떠나버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진보는 자신과 보수를 민주와 반민주로 규정짓는 행위가 국민들한테 삶의 질을 향상시킬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닌지 냉철하게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굳이 심각하게 연구할 필요도 없다. 이미 끊임없이 선거철마다 ‘심판론’을 내세우지만 반민주(?) 보수세력에게 처참하게 패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대안은? 바로 ‘풀뿌리 건설’이 살길이라고 한다. 정치컨설턴트 박성민씨가 제안한 바도 있는 이 대안은 교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교회가 신도들을 끌어들이고 확장하는 방식, ‘생활공동체’기능이 바로 진보세력이 벤치마킹해야 할 점이라고 조언한다. 아프면 교인들이 와서 간병하고 마치 대가족제처럼 형제, 자매로 호칭해가며 정서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조성하고 노인정은 물론 어린이집도 운영하는 등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정당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도 국민 생활의 일상으로 파고들어 무료 법률자문이라든가 인문학 강좌등 고안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국민들과의 공존하는 접점을 확장하는 것이 그들로부터 진정성과 지지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진보세력은 구태의연한 ‘심판론’만 들고 나와 표 던져주면 잘될 것이라고 막연하고 공허한 호소만을 외칠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
끝으로 저자는 새 정치를 실현하는데 있어 새누리당을 위시한 보수세력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풀뿌리 건설’에 새누리당을 동참시켜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하며 이를 통해 ‘싸가지 없음’을 넘어서야 제대로 된 적대와 증오도 국민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적필패(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한다)의 진리를 수도없이 확인하면서도 정신 못차리는 야당과 새로운 정치를 꿈꾸는 진보세력은 심각히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얼마나 이를 수용할지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회의적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느 한편에 손을 들어주지 않지만 변화와 혁신을 위해 비교적 진보세력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 있는 정치적 스탠스를 고려할 때 이 책은 뼈를 깎는 자아비판일 것이다. 이 책의 집필도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주구장창 ‘심판론’만 외치며 표를 구걸하는 야당의 무능이 더 뼈아팠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의 저작은 정치, 사회, 역사를 넘나들며 다양하고도 심도깊은 연구의 결과물이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으면 지금쯤 정치판 한 쪽에서 나름의 지분을 갖고 있었겠지만 진정한 변혁을 위해 타자(他者)의 역할을 자청한데 대해 적잖은 놀라움과 고마움을 느꼈던 적이 생각난다. 이 책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이끌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제발 적어도 ‘멘붕’상태에 있는 진보세력들의 반성과 성찰을 이끌어내는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