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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타임슬립 ㅣ 필립 K. 딕 걸작선 1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서부개척시대의 미국 정신과 아들과 아버지의 대립이 의도치 않는 비극을 낳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조지 루카스의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4(에피소드 1이 아니라 4가 1977년에 처음 개봉되었다)는 시대를 넘어서는 화려한 비주얼과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SF영화의 지평을 열었다.
이로 인해 시작된 SF장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스타워즈의 주인공 해리슨포드가 출연한다는 또 다른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개봉정보를 접하게 되며 열광하였지만 막상 이 영화를 접하게 되었을 때는 기대했던 현란한 액션과 달리 철학적인 주제와 음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어린나이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많았다. 비단 다소 상반된 세계관과 음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지 않았거나 화려한 액션이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 는 인간이 만든 인조인간이 영생을 얻기 위해 탈출하면서 이를 쫓는 주인공과 쫓기는 안드로이드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결여’에 대한 끊임없는 채움으로서 욕망 등이 사춘기에 접어든 내겐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부담이 되었으리라. 어쨌든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기념비적인 SF영화로 추앙받기 시작했고 덩달아 원작 소설가 필립 K 딕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와 함께 SF장르 3대 작가로 꼽히는 필립 K 딕은 인간의 정체성과 자아분열, 그리고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물음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묘사가 작가의 상상력과 함께 씨줄과 날줄이 되어 탄탄한 구성으로 많은 독자팬들의 열광과 더불어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화를 원하게 되었고 결국 <토탈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 <임포스터>, <컨트롤러> 등의 영화로 재탄생된다.
그에 대한 원작소설을 접하는데 쉽지 않았던 요즘, 그의 장편 및 단편들을 모아 새로인 재출간되었다고 한다. <화성의 타임슬립>은 재출간 시리즈 중 첫 번째 소설이다. 딕의 저작중 시기상 중기에 해당되는 이 책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꿈꾸는가>등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1994년(1964년 작품이다 보니 우리가 지나온지 20년이 다된 지난 94년이 미래의 배경이 된다) 식민지 화성이 배경이다. 심각한 환경오염과 인구 증가로 더 이상 지구에서 쾌적한 삶을 영위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화성으로 이민한 사람들은 루이스 타운, 뉴 이스라엘 등 지구의 지명이나 국가명을 차용하여 마을의 이름을 붙이고 제각기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화성은 근본적으로 물이 부족하고 물자 또한 빈약하여 물은 지구로부터 오는 배급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수자원조합의 힘이 지구의 UN 못지않게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주인공 잭 볼렌은 ‘이 컴퍼니’의 수리공으로 재직중인 평범한 가장이다. 그와 아내 실비아 볼렌, 아들 데이비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와 월남전의 실질적인 패배 전의 미국의 전성기인 1950-60년대에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가정의 모습과 등치된다. 하지만 후반부의 실비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고 나무랄데 없는 가족이지만 그 나른한 일상에서 오는 권태로움은 언제든지 비수가 되어 그들 자신을 겨눌 수 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수자원조합을 이끄는 어니 코트는 화성이라는 먹이사슬에 최상위 포식자이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화성 식민지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들을 몰래 유통시키는 업자에게 무자비한 탄압도 불사하는 탐욕스러움을 숨기지 않는다. 시대만 달리할 뿐 세계 곳곳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개발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성은 여기 화성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우리나라 역시 부조리한 세상을 겪어왔고 지금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어렵지 않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연관될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두 인물이 우연히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자폐아 만프레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니 코트가 만프레드의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얽히게 되자 이 소설은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며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스포일러 차원에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주인공 잭 볼렌은 정신분열증을 겪은 전력이 있는 자다. 그로 인해 지구를 떠나 화성으로 온 그는 만프레드를 특별 관리하라는 어니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다시금 자아의 분열을 겪게 되고 이는 각양각색의 공포증, 우울증과 망상증을 겪었던 저자의 페르소나가 된다. 하지만 이 파국에서 그는 그 어떠한 결말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관찰자적 지위에 머물고 만다. 개인의 탐욕은 끝이 났을지 몰라도 또다른 암울한 미래는 탐욕의 종말로 끝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끔찍한 디스토피아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스케일 큰 화려한 액션과 잠시도 눈을 가만두지 않게 만드는 CG의 눈속임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상당히 답답하고 또 이해가 가지 않는 스토리상 끊김으로 인해 불편해 할지도 모른다. 시간상 저자가 살았던 시기와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의 갭이 큰 지라 독자들이 텍스트를 통해 펼치는 상상의 나래 역시 다소 밋밋할 수밖에 없는 점도 실망요인일 것이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유령군단> 등 존 스칼지의 작품들이 더 어울릴테고 그간 SF마니아층 독자들에게 환영받았던 점도 이해가 갈 것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이 아님을 전제로 당시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하게 미래인 20세기 후반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어니 코트의 탐욕과 비참한 말로는 부동산 투기에 빠져들어 지난 199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촉발된 부동산 거품의 붕괴가 가져온 미국의 파멸이자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이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이지 점쟁이로서 능력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등장인물들간의 갈등이 고조되어야 할 시점에서 정신분열적 상황의 묘사가 매끄러운 번역이었음에도 거리감을 느끼게 해 쉽사리 감정적 동조를 하지 못하게 된 점도 있지만 적어도 위의 요인으로 인해 그의 시리즈중 첫 번째를 펼치게 된 것마저 후회하거나 주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SF의 고전 여행을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