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에서 1603년 태어나다
정명공주가 태어나 83년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건 발생과 주요사건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인물관계도를 보면
선조의 제 1왕비 의인왕후는 자녀가 없슴
제2황비 인목대비사이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정명공주는 홍주원을 혼인
제1후궁 공빈 김씨사이 임해군과 광해군이 태어난다
제2후궁 인빈 김씨사이에서는 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이 태어나고 정원군의 아들이 능양군 인조
정명공주와 관련된 궁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명공주는 어느 대군,옹주,공주,군과 다르게 2살때부터 이미 공주라는 봉작 되어 선조와 인목왕후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2살 공주 봉작에 주어진 정명공주의 환경은 2살때부터 명실상부한 천석꾼으로서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거부가 되었는데 이는 선조의
지극한 사랑이 가져온 결과이다
6살때 선조가 세상을 떠나기전까지는 정명공주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결정된 생활환경이지만 그 환경속에서 부모와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몸과 마음 모두 여유롭게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정명공주의 삶은 부모인 선조나 인목왕후보다는 오히려 영창대군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받았기에 정명공주의 삶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창대군의 삶을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목소리조차도 듣기 싫어했다
정명공주가 8살이었을때 세상 눈치도 늘고 꾀도 늘어 광해군이 왜 문안인사를 오지 않는지, 또 인목대비는 왜 불안해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했을것이다
정명공주는 본능적으로 인목대비와 광해군을 화해시키려 하지 않았을까
그런 분능으로 정명공주는 이복오빠 광해군에게 더 살갑고 더 다정하게 대했을 것이며 온갖 애교도 부리지 않았을까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자랄수록
불안만 커지고 있었지만 정명공주에게는 친근감을 드러냈다
정명공주 12살에 보모상궁 권씨가 잡혀나가고 11살 때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계속해 인목대비전의 측근궁녀들이 대거
죽고 또 동생 영창대군이 끌려 나가는 일들을 겪고 인목대비와 서럽게 울었다
12살 정명공주의 울음은 서러운 울음이기도 했고 두려운 울음이기도했다
이렇게 울며 정명공주는 중환이 같은 배신자를 미워하는 마음이 깊어졌고 나아가 자신을 못살게 구는 김개시와 광해군에 대한 적대감도
깊어졌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친정가족들과 영창대군,가까운 궁녀들이 모조리 죽음으로 가는 것을 겪고 후궁으로 정명공주는 서인으로 강등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정명공주 16살되던해 일어났다
조선 500년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시킨 "서궁유폐
인목대비가 후궁으로 강등되자 정명공주는 따라서 강등되니 후궁의 딸은 옹주가 되어야했다
정명공주는 평민인 서인으로 강등 되었다
다만 선조의 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생활안정 차원에서 봉급을 지금하고 혼인때에 특별히 옹주의 예에 의한다는 예외조항이 들어 갔을 뿐이다
공주의 호를 이미 낮춘 이상 서궁과 함께 살 수 없으니 속히 바깥의 집으로 옮겨 두도록 하라는 상소문이 올려져 광해군이 허락함으로써
정명공주는 대비전을 떠나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정명공주와 인목대비는 이미 영창대군이 출궁을 겪어 출궁하면 어떤일이 벌어질지 잘 알았다
정명공주는 죽어도 나가지 않으려 했고 인목대비 역시 죽어도 내보내지 않으려 했다
광해군이 사람을 보내 찾을때마다 인목대비는 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둘러댔다
광해군이 대비전을 샅샅이 뒤졌다면 정명공주는 발각되어 끌려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여동생인 정명공주는 광해군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그런 정명공주 때문에 인목대비를 막다른 골목으로까지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떤 것이다
당시 16살 정명공주는 거처 모후 인목대비의 거처와 별도로 있었다 이젠 정명공주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된 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6살 부터 정명공주는 모후 인목대비의 침실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인목대비는 정명공주가 자신의 눈앞에 보여야 안심이 되었고 또 자신의 침실에 숨겨 두어야 뺏길 염려가 없었던것이다 이렇게 5년을 함께 사는
동안 정명공주와 인목대비의 심리적 유대는 더욱 강력해졌을것이다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두려워할 마마로 죽음직전까지 갔다 살아났기에 두려움 이상으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가 더 강력했을 것이다
죽음직전까지의 병과 광해군의 난폭으로 정명공주는 시간을 보내면서 생명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명공주의 서예작품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이 "화정" 대자이다
여성보다는 남성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이렇게 힘과 기세가 펄펄 느껴지는 글자를 여성인 정명공주가 그것도 서궁 유폐 시절에 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명공주는 바로 이 서예 작품으로 조선시대 여성중에서 최고의 서예가로 꼽힌다
16살에서 21살때까지 10대의 청소년기에 그것도 암담한 청소년기에 이렇게 힘과 기세가 넘치는 성몌 작품을 썼다는 사실이 잘 믿겨지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공주는 혼인하여 4남 1녀를 두어 네아들 중 막내 아들이 물려 받은 작품이 화정 두글자였다고 한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시킨 대의명분은 역모였다
비록 어머니라고 해도 왕에게불충하면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여기서 광해군은 충을 우선시했다
충을 명분으로 내세우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구심과 불만, 적대감으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광해군은 자신의 뜻에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충으로 몰아 처벌했다
그 결과 폐모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폐모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나날이 높아졌다
그래서 이니목대비의 폐위는 절대다수의 뜻이라고 광해군은 확신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주로 광해군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하고 선동했다
과거 동양의 정치 사상가들은 군주에게
"인심유위"라는 말을 자주 했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다는 뜻
위태로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군주만이 진정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마음은 생사여탈권을 가진 권력자 앞에서 더욱
위태로워진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챈다
뿐만아니라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위해 아부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권력자는 그 아부를 진심이라
착각한다
위대한 군주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속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 사람들의 진심을 얻으려
노력한다
광해군은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의 진심을 헤아리지 못했다
결국 광해군은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동생을 죽인 패륜아로 규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반정에 호응했고 억눌린 속마음들은 그렇게 표출되었다
인조반정 1623년 3월 12일 한밤중에 거사되었다
정명공주 21살, 인목대비 40살, 광해군 49살
능양군(인조),이 반정에 성공하여 창덕궁을 장악했을때는 새벽 광해군은 북쪽 궁성을 넘어 도망간 뒤였다
원한에 골수에 사무친 인목대비는 반드시 광해군을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아무리 축출된 왕이라 해도 죽이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중종반정의 경우에도 연산군을 죽이지 않았던 고사를 들어
죽음만은 며낳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간신히 마음을 안정시킨 인목대비는 능양군을 왕으로 책봉하고 광해군을 폐서인하고 능양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공포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죄악을 38가지 조목조목 나열하고 속히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10년전 광해군이 내세웠던 폐비 명분보다 무려 4배나 많은 죄악을 거론한 것이었다
인목대비도 얼마나 광해군에게 사무쳤겠는가
어떻게 죽이고도 죽여도 다 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목대비 원한은 6명의 죽음으로 풀릴리가 없었다 나머지 궁녀들을 대부분 석방했던것이다
이것이 광해군과 인목대비의 차이점이다
광해군은 의구심과 불안감으로 끝없이 옥사를 확대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인조반정 이후 인목대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었고 그럴 수 있는 권력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끝까지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었다
아마도 인목대비에게 그렇게 하도록 조언한 사람은 정명공주가 아니었을까 싶다고 한다
당시 21살인 정명공주는 복수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도 절절히 겪었다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에 비해 젊었고 상대적으로 제 3자였다
서궁유폐 시절 불경을 사경하면서 터득한 자비심 역시 복수심을 억누르는데 큰 역할을
했을것이다
인목대비 역시 사경으로 얻은 자비심이 원한 못지 않게 컸기에 복수를 멈출 수 있었을
듯하다
지난 10여년의 고난을 통해 인목대비와 정명공주는 인간에 대한 자비심분만 아니라 이해심도
늘었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악순환이 반복 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그런 악순환에 빠졌다가 반정을
당했다
그런 광해군 때문에 인목대비 자신이 큰 피해를 당했다
그런 광해군을 인목대비는 한없이 원망하고 비난했는데 인목대비 역시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고
죽인다면 광해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말과 논리로 인목대비의 복수를 중단시킨 사람은 분명 정명공주였을 것이라고 한다
정명공주의 삶에서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난 1632년(인조 10년)부터 인조가 세상을 떠난 1649년(인조27)
17년간은 서궁 유폐 101년 못지 않게 불안한 시절이었다
어떻게 보면 더 위험한 사절이었다
서궁 유폐시절 정명공주는 10대에 불과했기에 광해군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목대비가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명공주는 30대로 접어들었고 세상을 알만한 나이를 지나 세상을 바꿀만한 나이였기에 인조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다
정명공주는 인생의 절정기인 30대와 40대를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유폐의 10대 시절 붓글씨에 매달렸다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30대와 40대에는 붓글씨를 일체 끊었다
붓글씨로 명성이 올라가도 큰일이었고 붓글씨를 매개로 양반들가 교류해도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정명공주는 정치문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였다 나라소식을 전하는 저도등은 보지도 않앗다
혹시라도 정치에 욕심이 있다는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서였다
정명공주는 몸소 바느질을 하며 가사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인조의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정명공주는 사경,굿,,불공등을 버리고 주자학으로 동아섬을써 저주 의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주류의 입장에 설 수
있었다
정명공주 중년이 되어서야 타고난 운명에는 더디고 빠름이 있음을 깨달앗다
그런 운명을 바꾸기 위해 사경을 하고 굿을 하고 또 불공을 드려도 부질없음도 깨달았다
정명공주는 효경과 공손 등 유교 핵심 덕복이 굿이나 불공보다 훨씬 요긴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주류인물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은 굿이나 불공이 아니라 효경과 공손이었다
정명공주는 항렬로 히면 인조에게 고모였지만 나이는 8살이나 아래였다
정명공주는 워낙 늦둥이였기 때문에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36년을 더 살았다
그 36년은 지난 47년간의 고난과 조심을 보상하듯 영광과 축복으로 가득했다
인조이후, 효종,현종,숙종은 정명고웆에게 최고의 예우를 바쳤다
83살까지 산 정명공주는 조선시대 공주들 중에서는 가장 장수한 공주였다
또한 7남 1녀의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며 그 자녀들과 후손들이 크게 영달하였다는 점에서도 오복을 두루 누린 공주로 칭송받았다
우암 송시열은 정명공주묘지에서 "공주는 부인의 존귀함으로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오복을 향유하였다고 극찬했다
정명공주가 말년에 큰 복을 받고 또 그 자손들까지 큰 복을 받은 것은 송시열의 언급대로 "겸손하고 공손하며 어질고 후덕하게" 사는 것이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며 나아가 복받는 길임을 깨닫고 실천했다
"적은 것에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한다
무릇 친척중에 가난한
자가 있으면 친소를 따지지 않고 성심을 다해 도왔으며 고아나 과부가 있으면 더 도왔다
모든 친척이 말하기를
"나에게 덕을 베푸셨다"
원숙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명공주는 어린 시절은 그렇게 고통스러웠나보다
이세상의 인생치고 그 어느 인생이 고귀하지 않으랴?
그 고귀한 인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바세계의 환난으로
괴로워한다
과거의인생도
현재의 인생도
또 고귀한 인생도
비천한 인생도 그렇지 않은 인생이 없다
국화꽃처럼 우리네 인생 역시 원숙한 깨달음을 위해서는 사바세계의 환난을 이겨 나가야만
한다
이땅을 살아갔고 또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
하나하나가 한국의 역사이고 철학이고 문학이다
다스림으로 혼란의 시대를 밝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