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 세계를 뒤흔든 교황, 그 뜨거운 가슴의 비밀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이상한도서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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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교황에 대한 책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아무리 교황의 방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열기가 상당히 뜨겁다. 이는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관심 받고, 인기를 누릴 수밖에 없다. 교황으로 선출된 과정부터 시작하여 여타 교황과는 다른 출발을 했다. 2013년 2월 11일, 유래 없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선언, 그로 인해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예상 외로 5번의 투표 만에 손쉽게(?) 선출된 교황, 최초의 아메리카 출신 교황, 최초의 예수회 소속 교황, 교황으로는 최초로 사용된 이름 프란치스코. 이처럼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여러모로 많은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인해 교황이 이처럼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것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그가 선택한 이름, 프란치스코처럼 현 교황은 약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깊기 때문 아닐까? 작은 자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님의 관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에 선출된 이후로도 여전히 낡은 자가용을 타는 교황, 권위와 군림의 자리에서 우정과 소통의 자리로 내려온 교황이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마치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인카네이션 했던 예수님처럼. 그렇기에 세계가 사랑하고 열광하는 것 아닐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교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 교황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은 현 교황이 닮고 싶어 하는 사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이해할 때, 현재의 프란치스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었던 프란치스코, 심지어 동물까지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같은 피조물로 여겼던 프란치스코, 그 정신을 잇고자 하는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약자들의 친구가 되고자 한다.

 

본서의 프롤로그에서는 세월호와 람페두사의 한 배를 연관 짓고 있다. 탁월한 시각이며,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침몰되었던 초호화여객선 콩코르디아호와 세월호를 비교하였다. 두 배의 선장 모두, 배의 침몰 앞에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서는 같은 이탈리아에서 침몰한 또 하나의 이름 없는 배와 세월호를 비교한다. 문제의 핵심은 선장의 도망침에 있지 않고(승객을 버리고 도망친 선장이 잘 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배를 침몰로 내몰았던 시대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2013년 10월 3일 이탈리아 시칠리아 앞바다의 그림 같은 섬 람페두사에서 불과 800미터 떨어진 곳에서 20여 미터 크기의 조그만 고깃배가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그 배에 타고 있던 500여명의 승객(?) 중 350여명이 바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채 사라져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탈리아 정부가 허용치 않았던 아프리카 난민들이었기 때문. 자신들의 유익을 지켜내기 위한 정부의 결정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하는 난민들은 눈앞에 있는 구조대원들의 방치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며 수장되어 갔다.

 

바로 이 사건과 세월호가 비슷하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 세월호 역시 인간의 생명을 우선하기보다는 눈 앞의 이익, 더 많은 유익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우선이었기에 발생한 사건 아닌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애정과 관심보다는 자신의 욕심이 먼저이고, 자신의 생명만이 먼저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자리 지켜내기에만 급급한 관료들, 아니 생명은 뒷전인 채 자신의 정치적 생명만을 좇았던 수많은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 아닐까?

 

이처럼 닮아 있는 두 배를 연관 지으며 책을 시작하는 이유는 람페두사 사건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진가와 추구하는 바를 알게 되기 때문. 약자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운 슬픔 앞에 프란치스코는 슬픔의 분노를 발한다. 그리고 약자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촉구한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관심이 계속되길 소망한다.

 

우리 모두가 약자들에 대한 돌아봄을 행할 때, 세상은 더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참되게 새겨야 한다.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 음식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헐벗었을 때 옷을 주고, 아플 때 돌보아 주었다.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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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에 피어난 꿈 - 전주 한지 이야기 한국의 재발견 1
한영미 지음, 강화경 그림 / 개암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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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한지에 피어난 꿈』은 한국의 재발견 첫 번째 이야기로 한지를 소재로 삼은 동화이다. 이 책은 동화를 통해,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재발견을 촉구한다. 편리함과 효율성에 밀려, 점차 그 맥을 잃어가는 세대 속에서도 여전히 옛 방식 그대로, 옛 문화를 잇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10년을 살았던 전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특별한 관심이 가는 책이기도 하다.

 

100번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백지(百紙)라고 불리는 한지. 그토록 힘겨운 작업을 필요로 하지만, 그만큼에 대한 보상이 없는 일이기에, 이젠 다른 일을 찾아 나선 아버지와 평생을 딱내를 맡으며 살며, 한지 만드는 일에 대한 애정을 끊을 수 없는 할아버지 간의 갈등과 화해를 이 책은 이야기한다. 결국엔 할아버지의 뒤를 잇게 되는 아버지, 그 일로 인해 흩어졌던 가정이 다시 모임으로 온전한 가족공동체의 회복을 누리게 됨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물론 주인공 지호라는 아이의 눈길을 통해서.

 

또한 이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옛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주인 지호와 지호의 동생 창식, 이들의 손엔 언제나 스마트폰이 들려져 있다. 하지만, 그 스마트폰의 부정적 사용이 아닌, 긍정적 사용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을 통해, 할아버지의 한지 작업을 올리게 되고, 이 일이 또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지호는 SNS에 글을 올렸을 때, 누군가 알아주면 힘이 난다. 이것은 지호만이 아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분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그분들의 숨겨진 노력과 땀방울, 그분들의 아픔과 애환까지 알아줄 때, 그분들 역시 힘이 나서 비록 힘겨운 작업일지라도 기쁨으로 해내지 않을까? 이렇게 누군가 알아주고, 또 힘을 내서 그 일을 해나갈 때, 우리 문화의 뛰어남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야기 속에서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강씨 할아버지의 방해공작이다. 이 일을 통해, 찾아온 위기 앞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한지 작업을 행함으로, 도리어 위기는 마을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한지에 피어난 꿈』은 단순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것만이 아닌,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의 회복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또한 신구 문화의 조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단지, 대단히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이 글에서 사용되어지는 사투리. 이야기의 시점이 현대이다. 현대 전주에서는 이야기 속의 사투리를 사용하는 분들은 없다. 아무리 나이 드신 어른들이라 할지라도. 게다가 그 사투리는 전주 사투리라기보다는 남도 사투리이다. 같은 호남이라 할지라도 전주 사투리와 남도 사투리는 많이 다르다. 마치 경상도 사투리와 전라도 사투리가 다른 것만큼. 뿐 아니라, 저자가 사용하는 전주 사투리 속에는 전남 사투리만이 아닌, 경상도 사투리까지 사용된다. 유독 많이 사용되는 ‘강생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강생이’란 단어에 대해 국어사전은 “강아지의 경상도, 제주도 방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돌아봄을 촉구하는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자의 작은 실수들이 감동을 반감시킨다.

 

이 책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교육의 효과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이런 작은 실수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는 잘못된 가르침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다 더 특정 지역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한 창작활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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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수업 - 개콘 웃음 군단의 가슴 찡한 성장기
김준호 외 지음 / 크리스마스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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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행복한 수업』은 개그맨들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특강한 내용들을 정리한 책이다. 책 제목처럼 개그맨들의 입담으로 그 수업시간이 재미있는 “행복한 수업”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강의를 통해, 청소년들의 미래가 보다 ‘행복을 찾아가는’ 소중한 시간이어서 『행복한 수업』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개그맨들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라 해서 처음엔 그저 그렇고 그런 내용이겠거니 생각했음을 고백한다. 개그맨들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각층의 명사들이나 또는 존경받는 학자들이 행한 강의라면 왠지 내용 있고, 깊은 삶의 통찰력이 있을 것이라는 속물적인 생각. 이들 개그맨들이 청소년들에게 선사한 삶의 조언들이 과연 얼마나 깊이가 있겠나 싶은 그런 부끄러운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이 때론 좋은 책을 놓치게 할 수 있음을 먼저 생각해 본다.

 

이들의 강의는 힘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직접 걸어온 삶의 경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인정받는 개그맨들이지만, 그 자리에 올라가기까지 그들이 흘린 눈물과 좌절, 그리고 땀방울과 각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말에는 진정성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을 향한 그들의 충고는 단순히 재미난 강의가 아닌, 힘 있는 삶의 조언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개그맨들의 성장 환경이 웃음보다는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쌓일 법한 환경이었음에도 그런 환경을 딛고, 온 국민에게 웃음을 선사할 수 있음이 대단하다는 생각, 더 나아가 존경스러운 마음도 품게 된다.

 

각자가 걸어온 삶의 여정이 다르기에 조언의 내용 역시 다름이 당연하다. 아니 어쩌면 서로의 조언들이 서로 상치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조언은 결코 정답이나 인생의 공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조언은 각자의 삶에서 본인들이 찾아갔던 해답들을 청소년들에게 제시하며, 청소년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하는 노력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글로 담겨져 있기에 현장에서의 감동을 그대로 느끼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들이 많은 청소년들에게 읽혀진다면, 청소년들의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일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에 아쉬움이 있다. 그들의 제스처가 담긴 표현들에서는 지문으로 설명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예를 들어, 글에 ‘이렇게’라는 표현이 있다면, 당시 강사가 ‘이렇게’라는 말과 함께 행한 제스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지문으로 남겨줬더라면, 보다 더 정확하고, 보다 더 현장감 있게, 당시 청소년들이 느꼈을 감동을 독자들도 엿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진정성 있는 조언이 청소년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삶의 조언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개그맨들의 녹취록을 정리한 작가의 코멘트 역시 많은 통찰력을 얻게 한다. 『행복한 수업』은 나에게 행복한 글 읽기의 시간이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향기와 색채로 벌과 나비를 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추운 겨울과 모진 가뭄을 거치면서 봉오리 속에 피어나고 싶은 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름답다면 지금 그가 멋지고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아픔과 상처를 견디면서 마음속에 지지 않는 꽃 하나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다. p.149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불행이나 실패는 미래에 생겨날 행복이라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 잠시 우리 곁에 생겨나는 상처일지도 모른다. 상처가 없이 새로운 근육이 생성되지 않듯이, 불행이 없다면 행복도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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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가 빌리를 만났을 때 - 자폐증 아이와 길고양이의 특별한 우정
루이스 부스 지음, 김혜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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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모든 부모는 아이가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갖게 될 것이다. 바로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라는 기도 말이다. 나 역시 두 아이의 아빠다. 늦둥이 둘째는 불과 한 달 전에 태어났다. 첫째 때는 아빠가 되었다는 감격에 온몸을 떨었다면, 늦둥이 둘째가 태어났을 땐, 아이의 손가락, 발가락이 다섯 개씩임이 감사하고 눈 코 입 귀가 제자리에 있음을 감사했다. 태어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림이 감사하고, 방귀를 끼고, 대소변을 누게 됨이 감사했다.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길 기원한다.

 

세상 모든 부모들의 제1번 기도의 제목이 자녀의 건강이 아닐까? 오죽하면, 내가 자랄 때에는 이런 광고 카피가 있을 정도였다. “못생겨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그렇다. 자녀의 건강만큼 커다란 축복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레이저가 빌리를 만났을 때』, 이 책의 주인공인 프레이저는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자폐증에 더하여 근긴장 저하증이라는 병까지. 이 아이의 장애로 인해, 그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을 흘렸을지 눈에 훤하다. 무엇보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사는 아이이기에 외부와의 접촉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부모에게도 그 문은 닫혀 있곤 했다. 그 엄마의 고백처럼, 프레이저는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은 그들만의 비밀이기도 했다. 그 점이 부모를 슬프게 한다.

 

그럼에도 프레이저를 세상으로 내어놓을 수 없음이 또 얼마나 힘겨웠을까? 그런 가정에 우연치 않게 찾아온 축복의 선물이 있었으니, 바로 빌리라는 고양이. 이 고양이는 프레이저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끈다. 빌리는 프레이저의 친구가 되어주고, 프레이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닫고, 그 도우미가 되어준다. 어쩌면, 프레이저와 빌리 사이에는 영적인 끈이 묶여 있지 않았을까?

 

프레이저와 빌리의 영적 교감을 통해,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일들이 그 가정에 펼쳐지게 된다. 결코 일반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던 전문가(?)의 단언에도 불구하고, 프레이저는 결국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뿐 아니라, 조금씩 자기만의 세상 속으로 주변 인물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인다. 아니, 어쩌면, 세상 속으로 프레이저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단을 자신의 힘으로 오르기도 하고, 대소변을 가리기도 한다. 할로윈 축제에 참여하여 춤을 추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뻐하기도 한다.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기도 한다. 친구의 생일 파티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프레이저의 가정에게는 결코 일상의 삶이 아닌,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들이다. 이 모든 일들이 빌리와의 작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들에게 허락된다.

 

이를 보며, 일상의 삶 속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큰 축복의 삶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언제나 감사하자. 그리고 축복하자.

 

물론, 아직 프레이저가 해쳐나가야 할 인생길은 멀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 열어 개방한 프레이저의 삶의 지평이 보다 더 넓어지게 될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앞길에서 또 다른 수많은 빌리들을 만나게 되길 소망하며, 우리 역시 이 땅에서 수많은 프레이저에게 빌리가 될 수 있길 바란다. 프레이저와 그 가정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조심스레 빌어본다.

빌리에게는 프레이저만이 속한 세상 속으로 들아갈 수 있는 어떤 능력이 있었다. 우리 중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빌리 덕분에 프레이저는 자신이 갇힌 세상 속에서 덜 외로울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빌리는 그 고립된 세상 속에서 아이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고, 아이는 점차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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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장석훈 옮김 / 판미동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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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제공도서 서평

 

본서는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세 사람,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에 대한 글이다. 그들의 어린 시절, 가족, 그리고 성문제, 소명과 인격, 가르침, 죽음, 후대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에 대한 것들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물론, 조금 산만한 느낌이 없진 않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들까지 열거함으로 오히려 핵심을 흐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본서는 본인에게 특별히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끌게 하였다. 솔직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깊이 알지 못함이 사실이다. 막연하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에 소크라테스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당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었다는 정도.

 

그런 나에게 본서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에 붙들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소크라테스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산파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산파’로 살아감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확신했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영혼의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다름 아닌 무지로 봤다. 그래서 알아야 하는데, 무엇을 알아야 하냐? 신에 대해서?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신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더 나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봤던 것. 이 일을 위해 소크라테스는 평생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이 질문들을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로 하여금 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함으로 그들이 내면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소크라테스는 이성적 지식만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이성적 지식과 함께, 이성을 넘어서는 지식, 즉 믿음, 직관 등을 붙잡았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시시때때로 신과의 접신(?)을 행하였으며, 내면의 목소리, 다이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았다.

 

또한 자신이 붙잡았던 인간의 삶, 즉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선을 위한 삶, 정의를 붙잡는 삶을 답으로 제시하였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비록 잘못된 판결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도망치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붙잡았던 정의를 자신이 뒤집는 것이 되기에, 자신의 말이 행동에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모습이 참 멋지게 다가왔다. 소크라테스뿐이겠는가? 저자가 인생의 스승으로 모신 세 사람, 모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아니겠나?

 

사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책의 뒷부분의 몇 단원만 읽어도 될 듯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세 사람이 추구하였던 내면의 자유는 결국 노예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 노예상태를 소크라테스는 무지, 예수는 원죄(사실 저자는 원죄라고 말하지만, 원죄라는 개념은 후기의 개념이고 그냥 죄라고 보는 것이 더 좋겠다), 붓다는 갈애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고, 자유함을 누릴 때, 그 자유를 가지고 옳고 바른 행동을 하게 되고, 또한 해야 한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진리에 합당한 삶은 무엇인가? 저자는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정의이며, 예수에게는 사랑, 붓다에게는 자비라고 봤다. 사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노예 상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 인생에 있어 붙들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인지 아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 믿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적 삶이다.

 

솔직히, 붓다가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욕과 좌선을 붙잡고, 이것을 통해 세상의 모든 욕망과 갈애,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너무 인간적이지 못해 공감은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믿었던 그것을 위해 평생을 살아갔기에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아는가 하는 것보다 그 앎을 실천에 옮기는 실천적 삶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다음 글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중략)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p.371)

 

그렇다. 앎도 중요하지만, 실천적 삶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공부함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지게 되길 소망한다.

 

불교에서는 싯다르타가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를 묘사할 때는 흐트러짐 하나 없고 항상 평정을 유지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초인 같다. 반대로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이자 인간인 신비한 존재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에서 그를 묘사할 때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슬픔, 기쁨, 낙심, 격정, 연민, 분노 등과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인간 말이다. 종종 눈물도 보인다.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p.120

소크라테스는 이성에 기반을 두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의 불가사의하고 초월적인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성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이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독단주의는 아니었다. pp.246-7

진리를 알았다면, 그 앎으로 인해 우리가 바르게 행동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앎이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유로 붓다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가르침은 궁극적으로 윤리에 대한 가르침이다. 성공한 삶이란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삶이다. ... 그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행적으로 그 가르침을 몸소 입증해 보였다.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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