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보는 길 - 정채봉 에세이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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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젠가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속에서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 친한 느낌을 주는 친구와 함께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꾸 나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난 꿈속에서 그 친구를 실컷 때려주었다. 잠을 자며 꿈꾸고 있는 내가 시원함을 만끽할 정도로 많이 때려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에게 밀려오는 것은 커다란 후회였다. 잠시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친구를 용서하기는커녕 그 친구를 실컷 두들겨주었던 나의 못난 모습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울면 울수록 나의 못난 모습이 더욱 두드러져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다 지쳐 잠에서 깨었는데, 꿈속에서 뿐이 아니라 실제로도 울고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꿈속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잠이 깬 후에도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던 내 모습. 그 울음만으로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비록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아니 그래서 다시 되찾아야 할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 듯한 경험이었다.

정채봉님의 글들은 내가 꾸었던 꿈속의 반성처럼 자신을 반성케 하게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은 친근하고 편안한 언어로 다가오지만 커다란 힘으로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의 글들은 일상의 삶이 느껴지면서도 일상을 벗어난 그래서 마치 꿈을 쫓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의 글들이 일상을 벗어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실제 그와 같은 삶을 살지 못하기에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한 삶이 우리네의 삶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의 글들은 커다란 변화를 요구하지 않고 인간으로써의 최소한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러한 아름다움의 근원을 상당수 동심의 세상으로 풀어간다. 우리의 몸이나 정신, 그리고 이성이 성장하고 우리의 생활수준이 높아짐에도 오히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어린이의 마음 바로 동심의 세상, 즉 인간다움의 회복임을 그는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최소한의 요구이지만 이 요구는 결국 온전한 인간다움의 회복을 뜻하기에 커다란 결단과 변화를 필요로 한다.

결국 그의 글들을 통해 최소한의 것마저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며, 몸뚱이는 커져 버렸지만, 인간다움은 작아져 버린 나를 반성케 한다.

편안하고 따뜻한 언어로 묘사하는 그 작은 삶의 모습들이 결국 행하기에 소원한 듯한 진리에의 삶임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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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박재순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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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서 속의 욥기는 성서뿐만이 아니라, 여타문학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는 평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에 욥에 대한 이야기는 비단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줄거리가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상 욥기의 온전한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드물다. 단지 알고 있는 내용이란, 욥기 전체 42장 중에서 1-2장과 마지막 42장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욥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욥기는 단순히 쉬운 이야기가 아닌 상당히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본서는 이처럼, 종교를 떠나서 사랑 받고 있으며, 또한 그럼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욥기에 대한 묵상이다. 지은이인 박재순 목사는 욥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생존현실로부터 풀어간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아픔과 한숨이 바로 욥기 이야기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스라엘의 아픔이 배어있는 욥기가 어렵게 느껴지고 공감이 되지 않는 이유를 바로 독자들의 경험 부재에 있다고 보기에 고난 당하였던 지은이 자신의 이야기와 주위의 많은 한숨과 눈물의 이야기가 욥기 묵상에 커다란 자료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그토록 엄청난 고난가운데서 처절하게 절규하고 하나님께 투정하던 욥이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욥의 그토록 아픈 현실 때문임을 말하며, 아울러 욥을 위로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지만, 욥을 위로하기보다는 오히려 욥을 정죄하는 친구들의 모습은 바로 그들에게 생존현실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그들의 이론이 오히려 위로 받을 자를 위로치 못하고 더욱 아프게 하는 무기가 됨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 특히 종교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또한 각자 나름대로의 많은 교리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지식과 교리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의 교리라 하더라도 이것이 실제로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정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저자는 욥기 해석에 있어서 문맥을 따라 살피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내용의 잘잘못은 그 내용을 말하는 자의 마음에 있다는 접근을 한다. 예를 들면, 우리네 식당 곳곳에 부적처럼 걸려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성경구절은 실제로는 욥을 정죄하는 친구 중 하나가 한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근본적으로 옳은 의도로 씌여지지 않은 욥기 전체가 옳지 않다고 보는 사상 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실제로 식당들 곳곳에 걸려 있는 그 구절은 아주 잘못된 접근이다). 하지만, 저자의 접근대로라면,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앞 뒤 문맥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대포 정신으로 사용하고 있는 위의 구절의 사용이 꼭 잘못되었다고 만은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하지만 그럼에도 이 구절 사용이 잘못된 것은 이 구절 사용이 바로 자신들만의 부귀를 위한 부적으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

단지, 본서의 아쉬운 점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위주로 성경을 묵상하기에 욥기 본 저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간혹 간과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본서가 욥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작업이 아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묵상이기 때문에 그러한 접근방법이 큰 단점은 아니리라 여겨진다.

본서는 분명 삶의 무게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위안을 줄 수 있는 글임에 분명하다. 또한 이런 위안이 공허한 울림이 아닌 공감의 위안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위안이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형성된 어떤 '판'에 의하여 날마다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에서 허덕이는 희생자들이 더 이상 없는 사회가 이 땅에 건설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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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복음 - 그들의 삶과 철학
E. T. 시튼 지음, 김원중 옮김 / 두레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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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문명국가라고 하면 흔히 '선진국'이라 지칭되는 국가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미개국가라 하면 아메리카의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의 흑인들, 그리고 제3세계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을 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시튼이 쓴 '인디언의 복음'이라는 책이다. 시튼은 '동물기'로 유명한 학자로 '작은 인디언의 숲'이란 유명한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시튼의 '인디언의 복음'을 읽어 가면 자연스럽게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가게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최대 문명국가이고, 풍요의 나라이며, 꿈의 국가라는 미국. 이 나라는 인디언들의 피 위에 세워진 나라이며, 또한 모든 제3세계 국가들의 눈물과 착취 위에 운영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말이다.

인디언들에게 있어, '내가 동족들에게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하는 것이 그들의 성공 척도라 한다. 과연 우리들에게 있어 성공 척도는 무엇인가? 선진국을 좋아하며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 온 국민들을 세뇌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성공 척도는 분명 다른 이들 위에 내가 우뚝 서는 것이다. 이는 아직도 학교교육에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사회 전반에서 강요당하고 있는 진리(?)이다.

다른 사람 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위에 선다는 것은 분명 그 밑에서 희생당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 국가가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그 선진국을 선진국 되게 하기 위한 무수히 많은 후진국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꿈의 국가라는 미명으로 포장되어 있는 미국이란 나라의 진실이다. 그들의 풍요는 분명 수많은 생명들의 억압과 착취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인디언들 그들은 또한 자연을 진정으로 활용할 줄 아는 문명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가 상호적이라는 것도 알고 그 알음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의 축복 속에서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문명적인 삶은 그 땅의 착취자들에게 어리석음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땅을 공유하는 그들의 사상 역시 어리석음으로 해석되어졌기에 그들은 인디언들의 호의를 악의로 갚으며, 그들에게 술을 공급하며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켜 나갔다. 한쪽에서는 드러내는 폭력으로, 다른 한쪽에선 술과 몇 가지 물품을 앞세운 영혼의 타락의 꾀하였던 것이다. 바로 문명인임을 자처하는 그들이 말이다.

또한 백인들은 인디언의 종교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그들을 사교집단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종교를 탄압해 나갔다. 그것도 종교의 자유를 찾아 바다를 건너온 청교도들이 말이다. 이러한 만행은 분명 문명이라 칭하기에 꺼려지는 행위들이 분명하다. 또한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문명 전도사인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인디언의 문화는 미개한 문화였으며, 그들은 미개한 족속이라는 세뇌를 자행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과감하게 '백인의 문명은 실패다.'라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한 명의 백만장자를 만들기 위해 100만 명의 거지를 만드는 것이 백인들의 문명'이라고 말한다. 문명이란 단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온 인류가 함께 공존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것. 이것이 바로 문명이 추구해야 할 바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나의 안락함을 위해 타인의 피와 땀을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함께 '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공생의 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희생이다. 자기희생이 없는 '공생의 길'은 공허한 울림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본서를 통해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며 회복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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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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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손님'은 이 땅에 언제인가 '손님'으로 찾아와 지금껏 '주인'의 행세를 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 그리고 그들 아래에서 주인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손님'의 눈치를 보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네 슬픈 현실이 먼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물론 저자는 본서에서 '손님'을 이 땅에 찾아온 기독교와 맑시즘이라는 두 가지 거대 이데올로기를 지칭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땅의 '주인'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무교(巫敎)의 최대 종교제의인 '굿'의 형태를 빌어 소설을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되어 형제와 이웃간에 서로 정죄하고 이념의 차이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행태를 저질렀던 해방이후 우리네 민족의 아픈 과거를 두 '손님'인 이데올로기의 맹점으로 보고 저자는 소설을 풀어간다. 또한 우리네 주체적 종교행위인 굿의 하나인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12마당을 기본 틀로 산자와 죽은자들의 각각의 회상과 현실의 만남,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의 만남들을 통해 이 땅의 '주인'이면서도 사실은 '손님'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주체성을 잃고 자신의 인성마저 잃어버리고 정신을 이데올로기에 빼앗겨 버렸던 과거의 슬픔을 작가는 하나하나 풀어간다. 여기에서 저자는 각각의 등장인물의 경중을 떠나 그들 각각의 시각에서 풀어나감으로써 '손님'의 희생자들이 되었지만 결국 작품에서는 각자 '주인'의 역할을 하게 하는 재미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굿의 진정한 목표는 이 땅의 조화와 우주의 화해에 있다. 산자와 산자간, 산자와 죽은자간, 또는 죽은자와 죽은자간의 한을 풀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것이 바로 굿이 지향하는 궁극점이다. 이런 면에서 작가는 각기 '손님'의 희생자들인 등장인물들의 화해를 향해 글을 풀어간다. 굿이 산자와 죽은자 서로간의 화해를 지향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 역시 죽은자와 산자의 자유로운 연출을 통해 이들의 화해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굿에서 화해의 가장 커다란 도구인 카타르시스가 작품 중에는 적게 등장하는 것이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독자들에게 주고자 함에 저자가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카타르시스가 약한 이유는 아직 우리사회가 그런 카타르시스를 통한 화해를 산출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작가가 반영한 것일 수도...

저자가 가장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손님'에게 주체성을 빼앗겨 버린 '주인'의 잘못을 꼬집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또한 여기에서 더욱 발전시켜 현실 속의 우리네 삶에서 우리네가 '손님'에게 '주인'자리를 내주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고자 함이 아닐까? 특히, '손님'인 미국이 오히려 우리의 '주인'이 된 현실에야...

본서는 또한 인간이 어디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서로간의 복수의 끝이 결국 어디인지를 떠올려준다. 지금의 현실에선 더욱 그런 반성을 하게 한다. 끔찍한 테러와 그의 보복이란 명목으로 또 다른 형태로 아니 더욱 무자비한 형태로 가해지고 있는 미국의 공격, 이러한 폭력 앞에 과감히 반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손님'인 미국의 눈치를 보며, 전쟁에 동조를 공언한 전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또한 세상의 '주인'을 자처하는 우리네 '손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전쟁을 외치는 우리네 백성들, 그리고 자신들의 대립구도에 종교라는 허울을 이용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그 종교의 맹목성에 함몰되어 통찰력을 상실한 많은 종교인들.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나를 '손님(어떤 손님이던 간에)'에게 내주고 나 자신을 상실한 수많은 '주인'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는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슬픈 현실이 단순히 테러가 그 시발점이 아니라, 테러를 일으킨 그 생존현실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력을 상실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데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손님'에 나를 맡겨버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저자는 우리네 삶에서 우리들이 '손님'에 나를 빼앗기지 않고 진정한 '주인'을 찾아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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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
한젬마 지음 / 명진출판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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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그림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그랬기에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이다. 그런 나에게 그림이란 분야에 대해 작은 관심을 안겨준 책이 바로 한젬마씨의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란 책이다. 이 책은 저자 나름의 작품 해석과 또한 자신이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타인의 작품과 잘 버무려 놓은 그런 작품이다. 쉽게 그림에 접할 기회가 없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다양한 그림들을 사진으로나마 접할 기회를 제공하며 아울러 그림 감상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 책, 미술의 세계란 것이 꼭 눈에 보이는 미술이란 매체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 바로 본서이다.

본인은 작은 시골마을에서 신학의 세계에 눈뜨고자 애쓰고 있는 신학도이다. 언뜻 내가 가야 할 길과 이 책이 제시하는 세계는 별개의 세계인 것처럼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본서를 읽어감에 신학함이란 것이 예술의 세계로 인해 도전 받음을 경험하게 된다.

'예술의 목표는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예술은 단지 그 길을 가기 위한 방편'이라는 최종태씨의 글을 인용하며, '좋은 그림을 그리고자 서두르기보다 먼저 바른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이 안심하고 찾아와 서식할 수 있는 마음을 닦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을 통해, 신학함의 길에 치기롭게 올라선 나의 마음가짐은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신학함을 자칭하는 우리네들의 인생은 과연 어떠한가를 돌아보게 한다. 혹,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신이라는 추상적 생각에 먼저 인간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네 신학함이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인가? 아님, 눈에 보이는 거룩함만을 추구하고 있진 않은가? 혹시 신성을 빙자한 자신의 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진 않은가?

일평생 70여 편의 자화상과 초상화 작업을 통해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했다던 램브란트. 예술가의 열정이 이러할진대, 신학의 길을 가고자 하는 나의 삶은 과연 이만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과연 일상의 삶 속에서 나 자신과 어느 정도의 대화를 수행하고 있는가? 일상 가운데, 나의 양심이 항상 깨어 빛을 발하고 있는지? 이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자비심을 잃고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자신과의 끊임없는 반성과 대화를 수행해야 함을 다짐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학생들에게 그림 그리는 방법이나 기술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치는 것, 세상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뭔가 다른 세상을 발견하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네 신학도들 역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야 할 것이며, 각자가 담당하는 신자들에게도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목회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로서도 이 책에 삽입되어 있는 몇몇 그림들은 나의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학생들 앞에서 한껏 지절거리곤 했던 내가 그 몇몇 그림들이 주는 메시지만큼 과연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길을 제시하였던가? 보다 삶을 고뇌하고 내적 고민가운데서 짜내는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한 나에겐 큰 도전을 준 책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런 도전은 나의 주관적 입장에서 받은 도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도전이 본서에 의해 제공되었음 역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그림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며, 또한 각자의 삶의 자리에 맞는 도전과 메시지를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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