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자욱 멀리가는 향기 3
정채봉 지음, 김복태 그림 / 샘터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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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내가 그를 안 것은 그의 몇몇 글들을 통해서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느낌은 오랜 동안 사귄 지인처럼 여겨진다. 아마 그의 글들이 잔잔한 느낌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도 꽤 된 듯 하다. 그가 이 땅을 떠났다는 소식을 신문기사를 통해 접하고 참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언제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의 길에 빛을 제공하고 있다.

난 그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의 종교는 아마 나와 다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왠지 내가 믿는 종교에서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그곳에 그 역시 이미 들어갔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글을 보면 그의 마음이 한없이 따뜻하고 순수하며 맑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오늘도 나에게 바른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려준다.

본서인 '향기 자욱'은 바로 그런 책이다. 분량은 얼마 되지 않음에도 그 내용의 크기는 한없는 책이 바로 본서이다. 불과 30분 남짓이면 읽어내려 갈 분량임에도 언제까지나 옆에 두고 새로이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 중 3권인 본서는 특히 그 내용에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일상에서의 작은 것에 만족하게 하며, 또한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여 차츰 자신의 본질 전체를 잠식해 들어갈 수 있는 악의 속성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한다. 아울러 일상의 삶 속에서 희망을 품고 살수 있는 조그마한 방법들을 독자들이 깨달아가게 하며, 현재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 작은 동화들로 가득한 책이다.

갈수록 사랑을 잃어가며 삭막해져 가는 이 땅, 타인보다는 자신만을 위하는 오늘, 타인의 불행까지도 자신의 이익의 기회로 삼으려하는 이 악다구리 같은 현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어두운 공간에 점차 물들어 감에도 이미 어두움에 지각이 무뎌져서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의 삶. 이처럼 희망을 둘 곳 없는 현실 속에서 이 작은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작은 희망들을 가슴에 품고 또한 그 마음을 주위에 전할 수 있는 조그마한 시작들이 되길...... 그래서 이 땅이 정말 아름답고 사랑으로 가득한 곳으로 변화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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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 믿음의 글들 19
엔도 슈사꾸 지음, 김광림 옮김 / 홍성사 / 198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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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기독교의 대부분의 교리에서 예수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이는 말로는 쉽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일반신도들 뿐 아니라 많은 신학자들도 이 중 어느 하나를 더욱 강조하고 반면 다른 하나는 무시하는 경향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한국 기독교에서는 유독 예수의 인성보다는 예수의 신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듯하다(이는 모든 한국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닌 전반적인 분위기를 말한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기복신앙의 토양 위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한쪽에 치우침은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바로 엔도 슈샤꾸의 '예수의 일생'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적 존재인 예수를 철저히 배제하며, 완전히 인간적인 예수의 생애에로 접근한다. 대부분의 내용들은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보편적인 해석에 근거하지만 소설가다운 뛰어난 상상력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단순히 무근한 상상이라기보다는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는 상상이다.

저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사실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신앙의 공동체들에 의해 약간의 각색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본서가 우리의 신앙을 뒤흔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신앙인들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신앙의 소산으로써 모든 글들은 진실이라는 관점에서 예수 이야기를 풀어간다.

예수가 어떻게 하여 갈릴리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발휘하게 되며, 또 그들 중에서 제자를 삼게 되는가를 보여주며, 왜 그토록 예수에게 열광하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예수를 떠나게 되며 마침내는 예수를 십자가로 몰아넣는가를 저자는 매끄럽게 제시한다. 또한 저자가 말하는 예수는 성경전반에서 강조되는 기적의 예수이기보다는 무력하고 무능한 예수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에 있어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면서까지 아니 매달려서까지 자신을 배반한 유다와 자신을 부인한 제자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아우르는 예수, 이는 신성은 배제되었음에도, 여타 종교의 어느 신보다 더욱 큰 모습의 예수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많은 분들이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무능하고 무력하지마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하려고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랑을 붙잡고 있는 예수의 안타까운 모습과 연약한 모습, 그리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모습으로 승화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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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기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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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부모란 존재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존재임에도 그 사랑이 너무나 크며 또한 끊임없기 때문에 그 사랑을 쉽사리 잊기가 쉬우며 일면 그 사랑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존재이다. 물론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인해 현재의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이들은 자신의 노력과 훈련으로 오늘의 자기를 만들어왔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가정의 의미가 상당수 무너져 버린 현실에서는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자각은 소원하기까지 하다. 그러한 때에 부모의 사랑을 몸서리치게 느낄 수 있는 책이 바로 조창인의 소설인 <가시고기>이다.

'가시고기'는 민물고기의 이름이다. 암컷은 알을 낳은 후 어디론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수컷이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주위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알들의 부화를 지킨다. 이런 아빠 가시고기의 노고로 깨어나게 되는 새끼 가시고기들은 그들이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아빠 가시고기의 품을 떠나게 된다. 또 다시 홀로 남게 되는 아빠 가시고기는 암벽 틈에 머리를 박고 죽게 된다는 슬픈 생애를 타고나는 물고기이다.

이와 같이 본서인 <가시고기> 역시 비슷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자신의 꿈을 찾아 다른 남자와 함께 프랑스로 떠나 버린 아내. 되에 외로이 남게 된 아빠는 백혈병에 고통스러워하는 아들을 홀로 간병한다. 2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아이의 소생만을 갈망하며 자신의 모든 것은 한켠에 치워두고서 말이다.

아이는 결국 골수이식을 통해 생명의 끈을 잡게 되지만, 이와는 반대로 아빠는 간암으로 생명이 꺼져간다. 마치, 아빠의 생명을 담보로 아이의 생명이 연장되기라도 하였다는 듯이 말이다. 아빠는 이런 자신의 생명이 꺼져 감을 아이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아이를 프랑스의 엄마에게로 떠나보낸다. 가지 않기 위해 울부짖는 아이를 눈물을 짓 삼킨 채, 거짓된 위엄과 과장된 화를 드러내며......

본서는 아이와 아빠의 입장에서의 사건을 교차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서로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뿐이지만, 서로를 향한 온전한 의지와 사랑을 두 주인공의 시각에서 각각 읽어 나간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깊은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하지만, 이런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회복과 함께 깨어진다. 한 쪽에선 생명의 소생이, 다른 한 쪽에선 생명의 소멸이 진행되는 것이다.

본서는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또한 현재의 나의 효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가정의 의미가 상당히 무너져 내린 요즈음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끈끈하며 강한 사랑을 느껴보며, 그 사랑을 회복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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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사라진 동물들 - 도요새 문고 1
한상훈 지음, NHK위성방송 '생명의묵시록' 제작팀 엮음, WWF Japan 감수 / 도요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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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인가?'

본서를 읽으면서 계속하여 떠오르는 질문이 바로 위의 질문이었다. 본서는 이 지구상에서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91종의 동물들에 대한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수가 줄어든 것뿐이 아니라 종 자체가 없어져 버린, 그래서 이제는 사진이나 그림, 또는 그들을 절멸시킨 요인 중 하나인 박제로만 볼 수 있는 이들 동물들은 대부분, 아니 모두 인간들의 빗나간 욕망들에 의한 희생물이었다.

많은 조류들은 단지 그들의 깃털이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멸종당하였다. 하와이 왕의 외투를 장식하기 위해 8만 마리의 카고시 흑벌새 깃털이 채집되었다는 부분에서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한 벌의 외투를 위해 8만 마리의 새들의 깃털이 채집되었다니! 그럼에도 이들 원주민들은 그나마 낫다. 이 경우 8만 마리의 흑벌새 깃털이 채집되긴 하였어도 그들의 생명은 빼앗지 않았다 한다. 문제는 서구인들의 문명이라는 표지 안에 숨겨진 오만하고 광폭한 악마성이다. 그들은 단지 유행 때문에 많은 아름다운 조류들의 깃털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 아울러 빼앗았다.

모피를 얻기 위한 동물들의 살육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주민들도 역시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들을 사냥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위한 것으로써 동물들의 번식률에 상응하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자칭 문명인들인 서구인들이다. 그들은 허례와 사치를 위해 무수히 많은 동물의 목숨을 말살했다. 또한 그들은 재미로 동물들의 목숨을 앗아가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단 한 점의 죄의식조차 없었음이 더욱 큰 문제이다. 비록 동물이지만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그들은 원주민들에게조차 그런 관점이었으므로 어쩌면 그러한 결과는 당연하다). 반면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동물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에 있어 뚜렷한 제한이 있었으며, 그러한 행위에 대한 속죄의식까지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원주민들과 서구인들의 차이이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문명인인가?

본서를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과연 우리의 교육은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란 물음이었다. 우리는 '신사의 나라 영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식의 교육을 통해 그들 서구의 나라들을 높게 인식하였으며, 그들의 문화가 뛰어난 것이라 배워왔고, 그들의 팽창주의를 일면 동경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말은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목숨을 멸절하였으며, 그들을 마치 도구처럼 부렸으며, 아울러 그 대지들을 약탈하였는가를 알려주는 말이다.

어찌 이러한 죄악이 팽창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정당화되고 교육되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찌 그들의 잔혹성이 한낮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예절이라는 허울 속에 감추어 질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예절을 동경하는 교육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교육을 통해 어찌 제대로 된 인격이 형성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교육 가운데 성장한 세대들이 어찌 생명을 귀하게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왜 이러한 사실들을 가르치지 않는가?

본서 전반에서 그들의 악마성이 드러남을 독자들은 간과하지 말기를 바란다. 아울러서 그들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의 자신은 어떠한가 반추해보며, 모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란다. 환경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바로 욕망의 절제와 모든 생명의 존중임을 깨닫기 바란다. 서구인들이 가졌던 다른 생명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은 환경 문제에 있어 가장 큰 적임을 자각하길 바란다.

모든 생명체는 상호간의 영향 없이 생활할 수 없다. 이 지구상의 동식물들이 죽어 사라진다면 결국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할 때 환경을 생각치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며, 타인을 향한 살인행위임을 독자들이 깨닫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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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원성 글.그림 / 이레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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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한 산자락에 바람결에 실려오는 청아한 풍경의 소리처럼 맑고 싱그러운 느낌과 한편으론 고즈넉하고 외로우면서도 따사로운 그리움과 한없는 정겨움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 바로 원성 스님의 <풍경>이다.

본서는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출가'는 어머니의 서원에 의해 여린 나이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스님의 외로움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수 없는 눈물과 서글픔 등이 면면히 흐른다. 자신은 잊었다 자위하지만 문득문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오를 때면 자연 속에서 이를 애써 잊기 위해 몸부림쳤을, 하지만 그러한 적적한 자연 속의 삶이었기에 더욱 그리움에 몸서리쳤을 애틋한 동자승의 모습. 또한 자신을 외면한 듯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분노도, 서글픔도, 목놓아 울음까지도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이해와 연민의 정으로 승화시키는 동자승의 모습은 글들 전반에 흐르는 여리고 작지만 외로움과 더불어 산사의 포근하고 따사로움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2부 '산사에서'는 행자시절 힘에 버거운 모습들과 이런 버거움 속에서도 도반들(함께 수행의 길을 걷는 동반자)간에 느끼는 우정과 치기, 그리고 차 향기에 묻어나는 넉넉함과 여유로움이 도도히 흐른다. 이곳 2부에서는 함께함의 필요성을 생각케 한다. 감당하기 힘든 수행 가운데에서도 도반들간의 끈끈한 보살핌과 우정으로 인해, 오히려 여유로움과 정을 찾으며 행복해 하는 모습. 이는 각박한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전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도전을 준다.

또한 3부 '깨달음을 찾아서'에서는 마냥 치기스럽기만 하던 동자승에서 어느새 차츰 깨달음의 사유를 하게 되는 성숙하고 원숙해진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1부에서 일면 느낄 수도 있는 암울한 분위기는 이곳에 이르러서는 깨달음과 희망의 분위기로 전환되며, 동자승은 자아성찰에 눈을 뜨게 된다.

마지막 4부 '열린 마음으로의 삶'에서는 여태껏 책의 전반부에 흐르던 애틋하고 풋풋한 동자승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마치 득도한 스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 곳 4부의 글들은 좋은 글들이지만 마치 세상의 모든 것에 득도한 고승의 깨달음을 차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여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커다란 양복을 입고 있듯이 '풍경'이라는 제목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인 듯하다.

원성 스님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각 페이지마다 실려있는 원성 스님의 그림들이다. 슬픈 듯한 눈망울, 그리고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을 소유한 동자승 그림들은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한다. 이들 동자승 그림들로 인해 그의 글들은 살아 우리의 가슴에 스며든다. 눈물이 고여 있는 눈망울조차도, 외로움에 떨고 있는 모습조차도 그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맑고 순수하다. 세상의 때가 묻어 있지 않다. 이러한 순수함은 바로 원성 스님 자신이 세속의 때에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맑고 청아한 풍경소리가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듯 원성 스님의 글과 그림들은 우리의 심신을 맑게 해주며, 세상을 더욱 밝고 아름답게 여기도록 한다. 많은 분들이 원성 스님의 '풍경'을 통하여 맑은 마음과 세상을 밝게 보는 눈을 가지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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