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Much As A Rat's Tail : Korean Slang, Invective & Euphemism - the Insider's guide
피터 N. 립탁.이시우 지음 / EXILE Press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이 책, "Korean Slang-As much as a rat's tail" 은 제목 그대로 우리말 가운데 ‘비속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 대상은 우리말을 배우기를 원하는 영어권 외국인이겠다. 책 내지의 책 정보를 보면, 우리나라와 미국 양국의 ISBN 넘버를 받아 출간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출판사는 미국출판사에서 작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책의 대상은 우리말을 배우기를 원하는 영어권 외국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속어만이 아닌 은어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몇몇 단어의 경우는 젊은 감각이 없다면 한국인도 잘 모를 법한 단어도 몇 개 눈에 띈다. 나름 우리의 젊은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속어들을 잘 설명하고 있어 우리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에게는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없진 않다. 몇몇 설명의 경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설명들도 없지 않으며, 잘못된 설명 역시 없지 않다. 예를 든다면, “몽땅”이란 단어에 대한 설명도 그런 예라 할 수 있겠다. “몽땅”이란 단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표현은 ‘모두’의 충청도 지방 사투리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또한 욕망, 탐욕을 의미하는 ‘몽’이라는 단어와 지구 혹은 대지를 뜻하는 ‘땅’이라는 단어가 결합되어 모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짧고 굵은 것을 뜻할 때도 쓰이는데 ‘몽땅연필’을 예로 들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몽땅”이란 단어는 예전부터 사용되어지던 표준어이다. 게다가 ‘몽’과 ‘땅’의 결합이 과연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많은 속어를 설명할 때,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과연 그 근거가 맞은 지, 아니면 저자들의 추측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짧은 연필을 ‘몽땅연필’이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누가 ‘몽땅연필’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요즘 젊은이들이 그렇게 잘못 발음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몽땅연필’이 아닌 ‘몽당연필’이 부른다(게다가 ‘몽당’은 비속어도 아니다). ‘몽땅연필’이라면 모두 연필이란 뜻일까? 이런 식으로 쎈 발음으로 우리의 언어를 변형시켜 접근하는 경우가 이 책에서는 많다. 이것 역시 우리의 언어를 잘못 전하는 나쁜 예가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많은 단어가 성과 관계가 있어, 물론 ‘비속어’라는 단서가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마치 우리 국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관심사가 성문제에 집중해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부작용도 없지 않나 싶다.

 

“만먹다”라는 단어의 경우, 굳이 이것을 우리의 속어라고 해야 할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책에서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맞먹다”의 발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너, 나랑 맞먹자는 거냐?”라는 표현에서 그 발음이 ‘만먹자는 거냐?’라는 식으로 발음되는 것이지, “만먹다”라는 속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속어라기보다 발음 그대로 적은 오용이다. 만일 요즘 젊은이들이 이런 단어인줄 알고 사용한다면 그것은 단어를 모르는 경우이지, 새로운 비속어는 아니리라 여겨진다. 이 책 등장하는 단어들 가운데는 이런 식으로 그저 발음상의 단어들을 새로운 속어인 양 기록하고 있는 단어 역시 적지 않아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요즘 젊은이들의 언어기록을 따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속어가 아닌, 그들만의 은어로 접근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런 구분이 없음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다가 우리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이 책에 실려 있는 단어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무난히 생활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여겨질 때, 굳이 외국인의 입장에서 이런 속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다. 그럼에도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내국인들을 상대하는 외국인들이라면 이 책이 대단히 유용하게 사용되어질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말 그대로 이 책은 ‘비속어’에 대한 책이다. 그러니 그것을 감안하고 접근하면 좋겠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흥미로운 작업을 한 저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80도 - 관점을 뒤바꾸는 재기발랄 그림 에세이
김수현 글.그림 / 마음의숲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세 번째 에세이집인 『180도』엔 이런 부제가 붙어 있다. “관점을 뒤바꾸는 재기발랄 공감 에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이 지향하는 내용은 관점을 뒤바꾸는 데에 있다. 책 제목마저 『180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솔직한 평가를 한다면, 관점을 뒤바꾸는 내용들은 글쎄다. 새롭게 접근하는 내용으로 본다면 그런 내용들은 별로 없다고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독자들의 생각을 바꿔주는 의미라고 본다면, 이런 단서를 붙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꿔줄 수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내용들은 어쩌면 독자들 역시 알고 있을, 또는 그렇게 실제 삶 속에서 살아내고 있을 내용들이기도 하다. 독자들에게 새롭다는 의미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디 해 아래 새것이 있겠는가! 우린 여전히 누군가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하지 않는가? 내가 모를 뿐이지, 여전히 누군가의 글과 사상에 영향을 받아 말하고, 글을 쓰고 하니 말이다.

 

그 다음 문구인 ‘공감 에세이’에서의 ‘공감’은 있다. 그리고 비록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나에게 공감을 주는 내용들을 붙잡고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을 함께 나눠본다면, “두 종류의 꿈”이란 글이다.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꿈이 있다. 현실로 이루기 위한 꿈과 현실을 미루기 위한 꿈. 현실을 미루기 위한 꿈은 현실을 외면하는 그럴듯한 명분이 되기도 하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을 타인에게 떠넘기기 위한 비겁한 변명이 되기도 한다. 그저, 노력 없이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꿈도 있는 것이다. (이하 생략)”(30쪽)

 

과연 내가 꿈꾸는 꿈은 현실로 이루기 위한 꿈인가? 현실을 미루기 위한 꿈인가? 다시 한 번 꿈을 향해 담금질 해보게 된다.

 

요즘 이 책처럼 별반 새롭지 않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어낼 만한 내용들을 모아, 저자의 창작인지, 인용인지 알 수 없는 글들과 여기에 예쁜 그림을 곁들여 출판되는 책이 적지 않다. 이것 역시 요즘의 유행 아닌 유행인가 보다. 솔직히, 우려하는 마음이 없진 않다. 그럼에도 뭐 어떠하랴. 나 역시 이렇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여전히 찾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름 공감을 느끼고, 뭔가를 붙잡을 수 있다면 이미 그것으로도 책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
앤 비티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앤 비티의 소설 이후 ‘비티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작품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앤 비티. 과연 어느 정도 길래 이런 찬사가 붙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장을 편다.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는 앤 비티의 9편의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이야기인 「낱말 바꾸기」만이 2001년 작품이고, 나머지 작품들은 그녀의 초기 작품들(1970년대)인 듯싶다.

 

다 읽은 후에 든 생각은 솔직히 ‘이게 뭐지?’ 였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일상의 한 단면을 잘라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들.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의아한 밋밋한 전개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래서 앤 비티가 글을 쓰던 당시를 한 번 떠올려본다. 그 당시는 히피문화가 미국전역을 휩쓸 때였다. 그래서인지,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에서는 이러한 히피문화를 느낄 수 있고, 일면 동경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로스쿨 진학을 위해 애쓰던 샘은 어느 날 갑자기 진학을 포기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샘은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행 중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서부로 오세요. 따뜻하고 아름답습니다. 시도해 보지 않고 어떻게 알겠어요?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이 그에게는 아름다운 행복을 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창조성은 히피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인지, 「온전한 나로 살지 않은 상처」에서의 샘이 음악교사인 엘런에게 해주는 아이디어들은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그 영혼에 이러한 창조성이 감춰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야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이 대체로 정돈되지 않은 뒤죽박죽의 삶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니트족처럼 일하지 않으려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일하려 하지 않고, 그저 마리화나나 피워대는 모습. 게다가 이혼이 빈번하며, 배우자보다는 개나 고양이를 더욱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습이 앤 비티가 당시 미국 사회를 향한 풍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이야기들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앤 비티의 능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책장을 덮는다. 책에서 인용한 글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어 적어본다.

 

“우리는 늑대 꿈을 꿔서 겁먹는 것이 아니다. 먼저 겁을 먹었기 때문에 늑대 꿈을 꾸는 것이다.”- Samuel Taylor Coleridge (112쪽 재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왜 이유없이 아픈 걸까 - 몸이 숨기지 못했던 마음의 깊은 상처에 관하여
기 코르노 지음, 강현주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어느 누구도 질병을 반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질병에 대해 색다른 접근을 보여주는 책이 있다. 『나는 왜 이유 없이 아픈 걸까』라는 이 책에서 저자는 질병을 하나의 신호(sign)로 접근한다.

 

육체적 질병은 우리 몸의 깊은 불균형을 나타내는 경고 신호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결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바로 질병이라는 접근이다. 그렇기에 질병은 우리의 몸을 깎아먹는 것이 아닌 오히려 생명력을 더욱 유지하려는 몸의 노력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몸의 균형이 깨어졌으니, 그 원인을 찾아 우리 몸을 불편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는 시도가 질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병은 도리어 우리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떤 갈등으로 인해 위험한 상태가 되면, 병은 최고의 생존 수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다.

 

모든 종류의 질병, 고통은 우리 몸의 균형이 깨졌다는 신호이기에, 우리는 고통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함을 말한다. 그렇게 귀를 기울임으로 우리는 우리의 몸,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인생까지도 치유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참 개연성이 있는 접근이다. 언젠가 어느 의사선생님의 특강을 듣는데, 그분은 나이가 들수록 몸 이곳저곳이 아파오는 것은 축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어찌 몸이 아픈 게 축복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분의 설명은 이렇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이빨이 흔들리기도 하고, 아파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신호란다. ‘당신은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니 오징어와 같은 질긴 것들은 씹지 말라’는 신호. 왜냐하면 이렇게 나이가 드는데도 이빨이 아프지 않게 된다면, 자신의 몸 상태에 과신하다가 마른 오징어가 맛있다고, 그리고 이빨도 튼튼하다고 마구 씹다가 턱관절이 완전히 나가게 된단다. 그러면 그건 인공관절도 넣을 수 없으니 엄청난 재앙이 된단다. 이 설명을 듣고 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 책, 『나는 왜 이유 없이 아픈 걸까』 역시 그런 입장으로 질병을 접근한다. 물론, 저자는 몸의 균형을 위협하는 거북한 상태, 불편한 상태를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가 계속 될 때, 실제 몸은 질병을 가져오게 되고, 이런 질병은 곧 그런 스트레스가 지속되지 않도록 하라는 신호라는 것이다.

 

저자는 또한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약물을 통해 몸에 힘을 불어넣게 되는데, 이것이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내부에는 생명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의사다’라는 견해에 저자는 동의한다.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이 균형 잡힐 때,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 반대로 심리적인 갈등은 모든 육체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 몸의 치유에 있어 저자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애정(사랑)이나 우정(친밀감)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랑과 친밀감이 몸의 치유에 도움을 주고, 반대로 고독감과 단절감은 몸을 병들게 하고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엔 사랑이 우리의 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기쁨, 그 행복이 우리에게 건강을 부여하게 된다. 그러니 오늘 하루도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행복한 웃음을 짓자! 행복을 상상하자! 그럼으로 내 삶 속에 행복이 실제 이루어지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밀 아파트
엘렌 그레미용 지음, 장소미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는 아내 리산드라를 죽인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런 비토리오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화산 연구원이자 비토리오의 상담 환자인 에바 마리아만이 비토리오의 무죄를 확신하며 그를 돕기 위해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첫 번째 작업은 비토리오가 환자들을 상담할 때, 몰래 녹음한 테이프들을 듣고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는 작업이다. 이런 가운데,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자꾸 바뀌게 된다. 젊은 여자들을 모두 증오하는 여인 알리시아를 의심하였다가고, 그 다음에는 군부 독재 정권 아래에서 고문을 자행하던 장교 펠리페가 범인으로 의심되기도 한다. 에바 마리아는 계속하여 범인을 추적한다. 그런 가운데, 비토리오의 아내가 정부를 두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또한 비토리오 역시 정부를 두고 있음도 알게 됨으로 비토리오가 범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이 소설은 반전에 반전이 단연 돋보이는 소설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에바 마리아와 함께 범인을 추적해 가는 가운데, 함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낙심하기도 하며, 함께 올가미에 걸려 버둥거리기도 한다.

 

이 소설은 과연 비토리오의 미모의 아내를 죽인 범인은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심리 스릴러다. 하지만, 이런 개인적 사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 안에 또 하나의 음성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 정권의 망령이 채 사라지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다. 1976년부터 7년여 지속되었던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복원된 지 4년 뒤의 시대적 상황. 무엇보다 민주주의에의 열망이 가득하던 때, 말도 안 되는 법령이 제정된다. 바로 군부독재 치하에서 자행된 모든 범죄에 대한 형사처분금지법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자들을 잡아 고문하고 살인한 자들은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뿐더러 이제는 피해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그들이 모두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내 곁의 마음씨 좋은 웃음 짓는 이웃이 어쩌면 내 아들 딸을 고문하고, 살인한 살인광일 수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소설의 바탕으로 깔려 있다. 정신과 의사인 비토리오의 무죄를 위해 애쓰는 에바 마리아 역시 딸 스텔라를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잃은 어머니다. 그 뒤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인. 그 상처를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고, 정신과 의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는 여인이다. 그런 여인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정신과 의사 비토리오 역시 어쩌면 바로 그런 살인정권, 고문정권, 독재정권에 동조하였던 자일 수 있다(소설 속에서 고문의 또 다른 희생자인 미겔이 고문의 현장에서 들었던 정신과 의사의 음성, 그리고 뒤에 모임에서 다시 듣게 된 그 음성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소설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가능성은 열려 있다).

 

뿐 인가! 비토리오에게 정신상담 치료를 받는 펠리페는 가장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고문기술자다. 이처럼 같은 공간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번갈아 한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하며, 어쩌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구원하는(치료하는) 당사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아이러니를 작가는 소설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어찌 아르헨티나만의 것이겠나? 우리의 근현대사 역시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역사 아닌가. 여전히 친일의 입장에서 동족의 고혈을 빨았던 자들이 떵떵거리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 군사독재의 주류들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에서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 가득한 민족 아닌가.

 

또한 소설은 살인정권으로 인해 자행된 수많은 소년소녀들의 실종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하는 질문 역시 우리에게 던진다. 작가는 잉카문명의 희생제의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희생되어진 소년소녀들. 이는 지금 아르헨티나가 누리고 있는 안녕이 무엇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안녕은 무엇을 담보하고 있나? 이제 곧 세월호 1주기가 된다.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담보하여 우리는 어떤 안녕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 수많은 생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녕은 소원하기만 한 것은 아닌지. 소설을 읽고 잠시 돌아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