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여겨봐 두었던 낡은 가위를 손보자, 거의 예정한 시각이 되었다. 집을 나서며 힐끗 뒤돌아볼 때는 어쩐 일인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 P161
그녀가 숙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춘부도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확실하게 보장한다. 만약 보증서가 필요하다면 도장이야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언제든 찍어줄 수있다. 그저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왕복표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재주가 없는 어리석은 여자였을 뿐이다. - P165
노예들의 구멍은 지금 길 오른쪽에 줄지어있다.……. 군데군데 삼태기를 끌고 가는 고랑의 곁가지가 있고, 그 끝에 묻혀 있는 닳아빠진 가마니가 구멍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가마니에는 새끼줄 사다리가 걸려 있지 않은 곳도 있지만, 걸려 있는 가마니가 더 많은 듯했다. 이미 탈출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뜻일까? - P168
<라디오와 거울…… 라디오와 거울......> 마치 인간의 생활이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성립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집념이다. 과연 라디오도 거울도, 타인과의 관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 관계되는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 P178
「하지만, 순조롭게 성공한 사람, 없어요……지금까지단 한 명도……」여자는 눈물 어린, 그러나 마치 남자의 실패를 변호하듯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친절함인가. 이 친절함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 P198
불현듯, 새벽빛 슬픔이 북받친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 P198
그 바늘의 춤에는 지구의 중심을 느끼게 할 만큼 무게가있었다.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P202
정말 생각해 보니,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의 기회가 찾아올지 전혀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기약 없이 그저 기다림에 길들어, 드디어 겨울잠의 계절이 끝났는데도 눈이 부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구걸도 사흘을 계속하면 그만두기 어렵다고 한다…... - P204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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