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회 격변기를 거쳤을 것이 분명한 그에게 ‘노동‘이 공장/육체 노동을 지시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하기는 어렵지않다. 다만 문제적이라 느낀 것은 어째서 나의 노동은 ‘노동‘의 경계바깥에 있는 것으로 구분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 P144
그리하여 이번에는 내가 묻는다. 노동을 해보았느냐고? 삶은 무엇이고 노동은 무엇인가? 시에서 노동 읽기가 가능한 한 삶이 노동임을 누군가의 인준 없이도 인간이 인간 존재로서 인식하는 한, 사는 일과 노동은 무관하지 않다. 타인의 승인과 별개로 개인이 삶으로써 노동을 행하는 이상 우리는 시로부터 삶으로 점철된 노동을 목격할 수있다. - P160
‘생활이 전혀 안 된다‘고 생각해본 적 있다. 단지 ‘돈‘이 없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일‘을 하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그래야만 한다는 압박 때문에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원하는 방향대로 살지 못해 불행하다는 쪽에 가깝다. 우리는 ‘생활‘을 되찾아야 하며, 최지인의 시에서 그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의 시는 ‘생활‘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최지인은 이 세계에서 일을 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고민하며 사는 삶에 대해 쓴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혹은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 P163
우리가 사는 세계란 무언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삶을 지속할수 있도록 해주는 곳이다. "실업을 증명하"는 세상에서 화자는 자주 슬프기에 "슬픔은 지겹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곳에는 술에 취해 "새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산다. 지금 삶에 만족하지 못하며 새 삶을 살 기회가 거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술에 취해 그런 말을 "흥얼"거릴 텐데, 실현 가능한 목표라면 부단히 진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P165
"쓸모"의 차원에서 볼 때, 즉 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쓸모"없는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기때문이다. 그에게는 좀더 "성실"할 것이 요구되며 직장 상사의 독려는 이러한 압박을 일축하여 보여준다. 세상에 의문을 갖는 사람을 거부하는 세계에서 생활 노동자로 살아남는 일은 녹록지 않다.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한편 그렇게 하는 것이 어딘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은 자주 부딪친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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