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흑백사진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중해지는 것이 있다. 스쳐갔고 스며들었던 파리에서의 일상은 차가웠고 포근했고 서늘했고 혹독했으며 따스했다.
- P11

다시 갈 수 없어 그리운 걸까.
다시 가고 싶어 그리운 걸까.
- P17

처음엔 낯설었던 것들도
오랜 시간 함께 하면 익숙해진다.
존재가 무뎌지거나 그저 일상이 된다.
- P32

소식을 적당히 알지 못해 불필요한 잡생각이 적었다.
굳이 내 소식을 시시콜콜 전하지 않아도 되어서 사람들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 P45

나중에 한국에 돌아갈 때 데려갈 방법을 확인하고 한 달 생활비를 쪼개 고양이와 공유할 수있는지 체크했다. 그다음 물품을 갖추고 묘연이있는 고양이를 만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다 우연히 눈길이 가는 고양이가 생겨서 입양을 신청했다.
- P54

찬란하고 우울했던 시간
글을 읽는 것과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 다르듯
파리를 여행하는 것과 살아보는 것은 다르다.
- P148

절벽 위에 있어도 날개를 충분히 편다면 멋진 항해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그 항해를 위해 도약을 하고 날개를 준비하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으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추락하게 하거나, 위험하다고 뛰어내릴 기회조차 없애지 말라.
- P155

하지만 어떤 사람은 파리의 가을을 사랑한다고 했다. 파리의 같은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구는 우울하다 느끼고 어떤 사람은 낭만적이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 P167

반짝이는 에펠탑을 매일 볼 수 없었고 내 감정이 매일 반짝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파리의 우중충함을 사랑하게 되었고 비 내리는 파리를 걷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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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에게 위로는 때로 예상치 않은 형식으로 찾아오며,
그것이 예술일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만 말해두자.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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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은이)   문학동네   2023-08-07, 352쪽, 소설

2023.9월 완독

🎑

인물들이 애틋하다. 사소한것들, 그냥 무정히 지나칠 수도 있는 걸,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 마음. 그런 마음들을 인물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위로를 준다. 쉽지 않은 세상속에서 우리가 우리일 수 있게 해주는게, 그런 연약하지만 강한자들의 힘이라고 생각해본다.

단편집을 읽으면 최애 글을 고르기도 하는데, 고르는게 쉽지 않았다. 아픈건 답신이 제일 강했는데, 일 년의 다희도 그렇고,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의 기남도... 고를 필요는 없을 듯 하다.

완독하고 나면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따뜻하지만 어떤 때엔 너무 무겁게 다가와서 기분 좋은 느낌으로만 오진 않는다. 그래도 그 마음 아프고 불편한 느낌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소설 속 인물들과 소설 밖 우리들에게 떳떳할 수 있을 듯.

🌈 마음에 남은 구절

햇볕이 잘 드는 담장 앞에 앉아 황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일, 다시 길을 가려고 하면 졸졸 쫓아오는 황구가 자기 집을 못 찾아갈까봐 쫓아오지 마, 쫓아오지 마, 소리치며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던 골목, 
18(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비록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지금의 나는생각한다.
42(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65 (몫)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것 같고, 세상 소심한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했고.
103(일 년)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115(일 년)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127 (답신)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150 (답신)

이모의 태도가 감정적 방임에 가까웠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너무 쉬우니까. 나는 그런 쉬운 방식으로 이모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다.
217 (이모에게)

나는 농담을 가장한 그런 말들과 ‘희진이 엄마가걱정돼서 그렇지‘로 시작되는 걱정을 빙자한 말들 속에서 엄마가 내게 끝끝내 숨기고자 했던 우리 가족의 진짜 문제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227(이모에게)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319(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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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들의 말에 동조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그런 평가의 도마 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안심했을까.
- P221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 P222

그들은 삼촌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제대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혜인이 아는 한 그런 말을 했던 사람 중에 삼촌보다 더 행복한 이는 없었으니까. 겪어보지 못한 일을 상상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삶에 기대어 삼촌의 불행을 어림짐작했다.
- P222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 P223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덜 아플 거라고 어른들은 생각했었던것 같다. 나중에 조용히 말해주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 P225

창밖으로 해가 지는 들판이 보였다. 들판 위로, 언덕 위로, 지붕 위로 따뜻한 햇살이 내렸고, 그건 마치 하늘이 본연의 빛으로 세상에 홀러내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는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에서 아름다움을봤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을까. 그러나 내게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지 그때의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 P256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하민은 종종 그 말을 했다.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나는 하민이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할 때, 그래서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 P265

그런데 그 여자 생각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래 보여서 추측하는거야?
알지.
그녀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서 나를 봤다. 무슨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고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그 사람이니까.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붉어졌다.
- P273

그 일이 있은 후에도 그녀는 예전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하민을 대했다.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모습 그대로. 그런 태도가 자신을 향해 세운 벽이었다는 것을 하민은 그제야 이해했다. 
- P280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 P282

삶의 희미함과 대조되는 죽음의 분명함을. 삶은 단 한순간의 미래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 P283

최은영의 소설은 민감한 감각과 감정들로 가득차 있다. 수줍음과 어색함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순정한 인물들은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일렁이는 잔물결이나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겨우겨우 짐작하면서눈물을 참아내기에 (「지나가는 밤」, 100쪽), 우리는 그 헤아림 앞에서어쩔 수 없이 "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 (아치디에서」.
269쪽)을 받게 된다. 최은영의 첫 소설집을 두고 쏟아진 감탄사들은 대개 이 섬세한 따뜻함을 향해 있었다. 
- P303

우리는 결국 이 우주속에서 각자의 궤도를 홀로 돌고 있을 뿐이라는 걸 새삼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일까.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이것이 짙은 애상을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이 단절에서 어떤 결정적인 이유나 잘못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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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여름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김신회 (지은이)   제철소   2020-05-29, 172쪽, 에세이

2023.9월 완독

🎑 친한친구에게 아무튼 시리즈를 많이 들었는데도 읽어 볼 생각을 못하다가, 도서관서 우연히 보고 표지가, 여름이란 단어가 너무 좋아 읽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한 권의 글을 쓴다는 건 얼만큼의 애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일까. 그 글은 흔히 말하는 잘쓴 글이냐 아니냐가 좋은 글의 기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얼만큼 추앙할 수 있는지, 나와 그 주제만의 관계를 주접질 할 수 있는지를 당당히 보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너무 싫어해서 쓸 수도 있겠단 생각도 했다. 아무튼 시리즈 중에 서재,스릴러, 떡볶이, 피아노, 달리기, 요가는 읽어보고 싶은 주제다. 그리고 나도 이런 연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음.

🌈 마음에 남은 구절


내 글을 누구보다 엄격하게 검열하고, 비판하고,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런 자세는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일상의 많은 순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123

5월이 되면, 올해도 전국의 덩굴장미들이 건강히 피어주기를 바라는 일. 그게 바로 내 여름의 시작이다. 그러다 9월이 오면 허전한 마음에 작은 한숨을 쉬면서도 얼른 내년 여름에 또 다른 덩굴장미를 만날 날을 기대하는 일. 그게 바로 내 가을의 시작이다.
130

하지만 금세 그걸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나무 돗자리가 사라지면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기 때문이다. 여름의 시작은 많고 많지만 여름의 끝은 단 하나, 대나무 돗자리를 집어넣는 날이다.
151

‘아무튼 시리즈‘는 내성적인 덕후들의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내성적이면 혼자 좋아하는것에 대해 생각하고, 곱씹고, 글 쓰고 책까지 낸단말인가, 징글징글한 사람들이다. 
169

하긴, 이렇게 많은 추억을 안겨준 계절을 사랑하지 않는 게 더 어렵지.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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