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모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들의 특징을 내 안에서 관념적으로 구성했고, 이모가 나쁘다고 하는 것들의 특징 또한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내가 무섭고 싫고 밉다는 말을 하게 됐을 때,
그 말에는 이모의 삶을 통과한 세계관과 해석이 들어 있었다.
- P225

어린 시절 나를 둘러싼 세계는 늘 모호했다. 어른들은 내게 뭔가를 감추고 있었고 나는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궁금했다. 나는 어른들의 대화에서 분명히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말이나 감춰진 감정의 진동을 느끼면서도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알 수가 없었다.
- P226

나는 농담을 가장한 그런 말들과 ‘희진이 엄마가걱정돼서 그렇지‘로 시작되는 걱정을 빙자한 말들 속에서 엄마가 내게 끝끝내 숨기고자 했던 우리 가족의 진짜 문제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 P227

"저건 건물주 문제야. 계단이 뭐라고 어르신이 일일이 닦게 하나..... ."
아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으면서, 엄마나 이모가 집에 없으면 밥통에 밥이 있어도 상을 차리지 않으면서, 늘 누군가 닦아놓은 변기를 사용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 P239

"오늘 재밌게 놀면 돼요."
"그럴게."
"약속해요."
"그래."
- P292

아침 태양 빛을 받은 바다의 표면이 구겨진 셀로판지처럼 반짝였다.
- P294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과 포옹하면서 기남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 포옹이 얼마나 좋았는지 기남은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 P302

기남은 바다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달이 눈앞의 바다를 파도치게 한다는 사실도 바닷속에서 길을 잃어 익사하는 거북이 있다는 사실도 기남은알지 못했었다. 
- P303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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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의 태도가 감정적 방임에 가까웠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이모를 판단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런 판단은 너무 쉬우니까. 나는 그런 쉬운 방식으로 이모에 대해 말하고싶지 않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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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 P88

 입사하기 전의 삶은 아주 멀게만 느껴졌고, 그때의 자신은 온전한 남처럼 기억됐다. 
- P91

아무리 낯가림이 없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하더라도 회사 선배와 처음으로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귤을 까먹으며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입사 초기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회사 사람들에게 애써 최선을 다하려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뒤의 낙담을.
- P93

그런 정보를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다희를 보면서 그녀는 다희가 솔직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상대에게 미리 자기가 지닌 패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 P94

 솔직하되 스스로를 낮추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실수를 해도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깨끗하게 사과할 뿐, 자학하듯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 P95

젊었을 때 같이 일했대요. 각자 결혼하고는 떨어져 살아서 실제로는 자주 본 사이도 아닌데, 그 마음이 뭘까 궁금했어요.
- P96

다희와 만나고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해온 대화가 사실은 서로를 향한 독백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을 메우기 위해 혹은 최소한의 사회적인 관계를 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그녀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으니까. 그제야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자기 방에서 온전히 혼자가 되기를 바랐던 마음,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듣기 싫었던 마음 안에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됐다.
- P102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것 같고, 세상 소심한 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했고,0.
- P103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그러나 그후에도 그녀는 잠들지 못하거나 질이 낮은 잠을 끊어 자며 아침을 맞았다. 
- P108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추한 가능성을 알아보았는지도몰랐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들 탓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은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 P110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 P115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 P123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 P127

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은 너에게 미련이 생기다가도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나이에 나와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할 수있는, 살아온 모든 시간을 망각 속에 던져버릴 수 있는 나이에 너는 나를 떠나보냈구나.
- P128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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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영에게는 타고난 관찰력과 자기 생각을 끝까지 끌어가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지력이 있었다.
- P59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 P59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어서 쓰는 마음, 마음을 다해서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처럼 당신 몸을 휘감고 아프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 P65

선배들은 우리가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난 해진이네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길 괴롭히면서까지 해야 할일 같은 건 없는 것 같아. 그래도..…희영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난 이번에 너랑 같이 작업하면서 좋았어. 
- P68

어렵고, 괴롭고, 지치고, 부끄러워 때때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밖에 느낄 수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 또한 글쓰기라는 사실에 당신은 마음을 빼앗겼다. 글쓰기로 자기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다시 글을 써 그 한계를 조금이나마 넘을 수 있다는행복, 당신은 그것을 알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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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조금 슬퍼하고 많이 기뻐하면 좋겠다.
읽으면서 생각하면서 버리면서 나아가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길 바란다.
- P7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은 사람, 엄마.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은 사람, 아들.
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효자일 수밖에 없는, 사람.

- P28

아들이 여행을 떠날 때 엄마는 항상 같은말을 반복했다.
‘잘 먹고, 조심하고.‘
- P68

엄마와 대화할수록 그를 이해할수 없게 되는 아들의 마음은 아득하다. 언젠가는 다가 올 엄마가 없는 아들의 삶은 불행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삶이 불행하지 않고 다만 조금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 엄마가 아들에게 말을 걸어줄 때 지체하지 않고 그 어떤 것이라도 대답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72

아들이 엄마에게 읽혀지는 마지막 책이라면, 구겨지고 찢어져 다시 그 어떤 누구나에게도 읽혀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서툰 고백이 담긴 애원의 표시를 이 책에 남겨둔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들은 엄마에게
‘흔적‘이 될 것이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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