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들의 흰 드레스처럼 아무런 욕망도없고, 감정도 없는 시선처럼 냉랭한 것이었다. 그저 자리를 지키며 예의를 차리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면 식사와 모임이끝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서부에서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아쉬운 마음에 조급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을 지나칠 정도로 소중히 여긴다. - P24
그러나 도시의 하늘을 장식하는노란 창문들은, 밤거리에서 우연히 고개를 들어 아파트 꼭대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비밀을 속삭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 역시 올려다보고 그 비밀을 궁금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밖에도 존재했다. 놀랍도록 다양한 인간사에 매력과 혐오를 동시에 느끼면서 말이다. - P55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 마세요. 친구." 개츠비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친근한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다. - P80
대도시의 현란한 어둠 속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고 사람들도 쓸쓸해 보였다.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며 레스토랑 쇼윈도 앞을 서성이는 직장인들, 그들에게서 나는 떨쳐 버리기 힘든 인생의 고독을 느꼈다. - P8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본 덕목 중에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게 바로 정직함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정직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 P89
‘그 문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이 문제에 대해 귀찮음과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베이커를 만나는 건 개츠비의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개츠비의부탁이라는 게, 황당한 제안일 것이 뻔했다. 애초에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그의 저택에 발을 들여놓은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 P100
개츠비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고, 이번에는 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나는 모호한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솔직히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요? 그걸 왜 베이커가 대신해야 하는 건가요?" - P105
"그는 알고 싶어 해요." 베이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낮에 데이지를 초대하면, 자기도 불러 줄 수 있는지말이에요." 개츠비의 소박한 부탁에 나는 감동했다. 저렇게 큰 저택을 사고는 오 년이나 기다리면서 그저 날아드는 하루살이들에게 별빛을 베풀고 있던 셈이었다. 정작 자신은 남의 집에 초대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말이다. - P116
소파의 양 끝에 앉아 마주 보고 있었다. 어떤 질문 하나가 던져졌거나, 대답 없는 질문이 허공에 떠 있는 분위기였다. 처음의 당황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P132
그 창조적인 열정은 데이지의 현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했다. 개츠비는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독창적인 열정을 확대시키고 끊임없이 부풀렸다. 그리고 자기 앞에 떠도는 찬란한 깃털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애정이라도 한 남자의 가슴에 쌓아 둔 영적인 환상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 P143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의 제이 개츠비는 상상이 빚어낸 자신의 이상향이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 말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거대하면서도 통속적인 아름다움을 섬기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열일곱의 소년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제이 개츠비라는 인물을 설정해 놓고, 스스로 그 이름의 명예에 마지막까지 충실했던것이다. - P146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 없다고요? 아니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어요." 개츠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 P165
"모든 걸 예전으로 돌려놓을 겁니다." 그는 스스로 다짐하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개츠비는 과거에 대해 털어놓았다. 데이지를 사랑한 자신의 신념을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은 혼란과 무질서에 빠졌다. 그러나 만약 출발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서서히 되짚어 볼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P166
"단둘이 있었더라도 톰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데이지가 애처롭게 털어놓았다. "그건 진실이 아니니까요." - P203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네." 나는 이제 서른이 되었다. 앞으로 새로운 십 년이 펼쳐진다는 게 불안하고 두려웠다. - P208
인간의 공감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들의 비극적인 언쟁이 도시의 불빛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 P208
그렇지만 지금 내 곁에는 베이커가 있었다. 데이지와는 달리 아주 지혜로운 여자, 잃어버린 꿈을 질질 끌고 다닐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 P209
우리는 서늘한 저녁노을을 뚫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P209
"글쎄, 내가 핸들을 꺾으려는 순간・・・・・・." 개츠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진실을 직감했다. "데이지가 운전하고 있었군요?" "그렇소." - P221
개츠비는 거짓된 가면으로 데이지를 차지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경멸할 수도 있었다. 그가 있지도 않은 돈을 미끼로 흥정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은연중에 데이지가 그렇게 믿도록 유도했다. 자신도 그녀와 같은 상류층 출신이고, 그녀의 장래를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안정감을 심어 준 것이다. 사실 개츠비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 P228
개츠비는 부유함 속에서 젊음과 돈이 유지된다는 것, 데이지의 화려한 옷가지, 은빛으로 빛나는 신선한 생동감이 가난한 이들의 처절한 삶과는 무관하게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 P229
철로가 곡선을 그리며 꺾이자 서서히 태양도 멀어지고 있었다. 햇볕은 점점 낮게 기울고, 한때 데이지가 숨을 쉬던 사라져가는 도시 위에 축복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개츠비는 한 줌의공기라도 움켜쥐려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눈물에 흐려진 그의 눈에는 모든 게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34
나는 악수를 하고는 집을 떠났다. 울타리에 이르기 직전,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돌아섰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속물이에요."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이 그 인간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렇게 외친 것을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행동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은 개츠비를 향한 유일한 칭찬이었다. - P236
어쩌면 개츠비도 전화가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전화가 오든 말든 이미 상관할 바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만일 이런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는 분명히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잃었다고, 이룰 수 없는 단 하나의 꿈에 너무 오랫동안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는 장미꽃이 얼마나 흉측한 것인지, 또 갓 돋아난 풀밭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깨달았을 때, 나뭇잎사이로 보이는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몸서리를 쳤을 게 분명하다. 형체는 있으나 실재하지 않는 허상의 세계, 그곳에는 가엾은 영혼들이 공기처럼 꿈을 호흡하며 제멋대로 떠돌고, 잿빛 그림자의 환영은 어른거리는 나무들 사이로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 P247
우리는 개츠비의 시체를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정원사가 수영장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서 조지 윌슨의 시체를 발견했고, 학살극은 그렇게 끝이 났다. - P248
어떤 인간이라도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인간적인 관심을 받을 만한 권리가 있기 마련인데, 불행하게도 개츠비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 P251
그 중서부의 일부인 나는, 지금도 겨울이 오면 조금 엄숙한 기분이 든다. 또한 수십 년 동안 우리 가문의 이름이 마을 주소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우쭐함과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제 생각해 보면 이것은 결국 서부의 이야기였다. 톰과 개츠비, 데이지와 조던과 나는 모두 서부 사람이었고, 아마도 우리는 동부에서는 결코 잘 살지 못했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 P269
개츠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지는 그 초록 불빛의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때의 초록색 불빛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가될 것은 없었다. 내일이 되면 우리는 더 빨리 뛸 것이고, 그럴수록 두 팔은 더 멀리 뻗어 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화창한 날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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