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현실에 머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관심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함께 렌더링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곳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것이다. - P215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기적이라는 것뿐이었다. 남자친구가 사와서 지금 우리 아파트에 태연하게 걸려 있는 할리 베이트먼Halie Bateman 의 그림을 생각했다. 거리 풍경을 담은 그림에는 보도와 건물, 하늘 사이사이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우리는 모두 이곳에 함께 있으며, 그 이유는 모른다. - P221
월리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선택은 방금 내 앞을 가로막은 사륜구동 지프차의 운전자가 어쩌면 아이를 서둘러 병원에 데려가는 중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나야말로 그 사람의 길을 가로막은것입니다." 내 앞에 줄을 서서 방금 내게 소리를 지른 여자는 어쩌면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상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와 똑같은 깊이를 가진 타인의 현실을 위한 공간이 생긴다. 이는 타인을 내 길을 가로막는 타성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자기중심적 ‘디폴트 세팅‘에서 명백하게 이탈하는 것이다. - P222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좀 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더이상 세상의 중심 같지 않았다. 이제 거리는 이러한 ‘중심들‘로 가득했고 각 중심에는 다른 삶과 다른 공간, 잠자리에 들며 다음 날의 일을 걱정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추상적인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실제로 와닿지는 않았었다. 이미 이웃과 알고 지내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겐 바보 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는 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관심의 확장을 통해 경험한 내용, 즉 한번 확장된 관심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 P229
인생 대부분을 뮤지션으로 살아온 나의 아버지는 바로 그것이 좋은 음악의 정의라고 말한다. 좋은 음악은 ‘나에게 몰래 다가와‘ 나를 변화시키는 음악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를 변화시킬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둘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힘들의 집합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 있다. 여기서 뜻밖에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을 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나를 통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안정적이고 두렷한 자아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이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원자적 자아 개념을 버린 뒤 이러한 내려놓음이 내가 살아 있다는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232
이와 달리 무언가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알고리즘은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 이유에 대해 늘 안정적인 답안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나를 점점 파묻어버리는 것 같다. 사업의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광고와 퍼스널브랜드의 언어가 너 자신이 되라고 요구할 때, 그 속에는 ‘더더욱 너 자신이 되어라‘는 진짜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너 자신‘은 습관과 욕망, 동기로 이루어진 일관적이고 인식 가능한 패턴이며, 이러한 패턴은 더 쉽게 광고의 타깃으로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퍼스널브랜드가 애매모호함이나 모순의 여지 없이 ‘나 이거 좋아‘, ‘나 이거 싫어‘라고 결론 내리는 성급한 판단에서 나온 확실하고 변함없는 패턴이 아니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 P233
더 구체적인 버전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소로가 시민 불복종의 의무에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로 묘사한 것이 떠오른다. 만약 나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내가 전부 안다면,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도 전부 안다면(이 모든 것이 미래로 끝없이 이어져 나의정체성이나 내가 나라고 지칭하는 것의 경계가 그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나는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책을 읽는데 갈수록 내용이 앞과 비슷해져서 결국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게 된다면 아마 그 책을 덮어버릴 것이다. - P233
공통점이 많은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파편 바깥으로 관심을 확장하지 않으면 상대의 가치나 나와의 관계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나-그것‘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를 뒤집어 엎고 나의 우주를 새로 구축할 사람, 나를 크게 변화시킬 사람과 만날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 P234
자신을 독립적이고 방어 가능하며 ‘효율적‘인 무엇으로 여기는 마음이 특히 비극적인 이유는 그러한 마음이 매우 지겨운(그리고 지겨워하는) 사람을 낳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타인을 포함한 이 세상과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이 완벽한 착오이기 때문에 이 마음은 더욱 비극적이다. 물론 이것은 안정감과 차별성을 갈구하는 매우 인간적인 갈망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는 이 욕망이 아이러니하게도 변화에 대한 두려움, 시간과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개념,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 같은, 상상 속 자아의 안팎에 있는 여러 힘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온다고 본다. - P235
홀로 장미 정원으로 피신한 이야기로 시작한 이 책에서 타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윌리엄 데레저위츠가 [고독과 리더십」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려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경고한 것을 기억하자. - P237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적절한 거리라면,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과 시끄러운 여론의 과도한 영향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것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 P238
그러나 대화는 그렇지 않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든 타인과의 대화든 마찬가지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대부분의 책이 그러리라 생각한다)은 수년 동안 인간 혹은 비인간과 나눠온 대화의 결과물이다. 그중 많은 대화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이루어졌으며, 이 대화들은 내 생각을 바꾸어놓았다. 당신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책은 당신과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 P238
장미 정원에 갈 때도 사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보통은 혼자 가긴 하지만, 다양한 방문객이 찾는 장미 정원은 단연코 그동안 내가 낯선 사람들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장소다. 인간과 나눈 대화만이 아니다. 나는 늘 ‘자연 속에서 홀로‘라는 표현이 재미있는 모순어법이라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장미정원에 사람이 한명도 없을 때도 나는 그곳을 어치와 큰까마귀, 검은눈방울새, 매, 칠면조, 잠자리, 나비, 빼놓을 수 없는 참나무와 미국삼나무, 칠엽수, 장미와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회적 공간으로 여긴다. - P238
예를 들어 우리 할머니는 나와 함께 화산 폭발로 무너져내린 세인트헬렌스산을 바라보다 영어로 "가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중에 나는 할머니가 산을 마치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림픽반도에서부터 오리건주 남부와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경계까지 이어지는 산맥에 관한 우리 부족의 설화에서 우리와 산의 관계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다. 세인트헬렌스산, 우리 말로는 루윗산에 대한 할머니의 짧은 말에는 다른 인간 존재에 연민을 느끼고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고, 할머니는 그 무엇도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 P245
"다름은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양극성의 자원으로 여겨야 하며, 변증법처럼 이 양극성의 간극에서 우리의 창의성이 샘솟는다. (・・・) 이때 상호의존의 필연성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 다름은 힘이며, 개인의 성장과 집단의 정치적 혁신을 가능케 하는 창의성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의 정치가 다름과 다양성, 만남에 부적합하게 설계된 플랫폼 위에서 펼쳐지는 지금, 로드의 말은 특히 깊은 울림을 갖는다. - P253
매년 뉴잉글랜드를 찾는 비둘기 수가 줄고 있다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우리의 숲은 더 이상 비둘기에게 깃대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찾는 생각도 매년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마음속의숲이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산책] - P259
어떤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맥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말은 매우 직관적이다. - P262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다른 체제에서 다른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의 체제(관심경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상상하는 건전한 소셜 네트워크는 현상의 공간이다. 이곳은 오랜 시간 친구와 함께한 산책, 전화 통화, 비밀 채팅방에서의 대화, 동네주민 모임 등 매개체를 경유한 만남과 대면 만남이 결합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적 자양분을 제공해주는 식사 자리와 모임, 행사에서 우리는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여러분과 함께 싸우러 이 자리에왔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기업이 운영하지 않는 탈중앙적 네트워킹기술을 이용해 대면 교류가 힘든 사람을 포함시키고, 한곳에 머무는 것이 점점 경제적 특권이 되어가는 이 시기에 여러 도시에서 지지의 교차점을 만들어낼 것이다. - P292
발전과 생산적인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나의 이러한 행동은 비행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중도 이탈자다. 그러나 장소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마침내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나의 삶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었던 사람이며, 나는 죽을 때 결국 이 사람에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날 지구에서 시간을 보냈다는것을 안다. 이런 순간이 오면 관심 경제에 대한 질문 자체도 사라져버린다. 누군가가 내게 대답을 요구한다면, 나는 아마 땅에서 자라고 기어다니는 것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 P300
이는 목적 없는 목표이자, 하나의 지점에서 끝나는 대신 끝없는 재협상 속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는 관점이다. 누군가에게는 목적 없는 목표나 목표 없는 계획 개념이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실제로이 개념은 오로지 목격하고, 쉴 곳이 되어주고, 믿기 힘들 정도의 인내를 보인 것이 유일한 ‘성취‘인 우리의 오랜 친구, 쓸모없는 나무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 P320
앞으로 고꾸라지지도, 뒤로 넘어지지도 않고 땅 위에 꼿꼿이 서서, 나는 펠리컨들이 만드는 뜻밖의 장관 앞에서 내가 느끼는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 답은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 그저 바라보는 것이었다. - P325
마지막으로, 매일 아침 나의 발코니를 방문해주고, 자기보다 볼품없는 호모사피엔스를 향해 낯선 관심을 보여준 두 까마귀 크로우와 크로우선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모두가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자기만의 뮤즈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 P327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 제목은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소셜미디어 (흔히 말하는 SNS)를 건강하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책을읽고 싶은 사람은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은 우리의 스크린 타임을 줄여주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이 책은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 가능한 정치·경제·문화 시스템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생태지역주의를 통해 자연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고 자신이 위치한시공간에 더욱 충실하게 존재하려는 한 시각 예술가의 시도다. - P329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생산성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압박을 넘어서겠다는 적극적 결정이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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