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 모든 것에는 명백한 비판이 따를 수 있다. 잠시 멈출 수 있는 여유가 일종의 특권에서 나온다는 비판이다. 내가 종종 장미 정원에가고 나무를 바라보고 언덕 위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일주일에 이틀만 학교에 가면 되는 일자리가 있기 때문이며, 그 밖에도 내겐 다른 특권이 많다.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일을 다시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 P49
첫 번째 무기는 회복의 시공간이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러한 시간과 장소가 없으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생각하고, 성찰하고, 치유하고, 자신을 지탱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과도한 자극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된 지금, 나는 #FOMO(the fear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를 #NOMO(the necessity of missing out,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로, 마음이 영 불편하다면 #NOSMO (the necessity of sometimes missing out, 가끔은 기회를 놓쳐야 할 필요성)로 다시 상상할 것을 제안한다. - P64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내가 제안하는 바는 언제나 우리를 지탱하고 놀라게 하는 연대라는 능력을 비롯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중 아직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보호하는 자세를 갖자는 것이다. 나는 비도구적이고 비상업적인 활동과 생각을 위해, 유지와 보존을 위해, 돌봄을 위해, 함께하는 기쁨을 위해 우리의 공간과 시간을 보호할 것을 제안한다. - P72
존 뮤어의 말처럼 "가장 긴 삶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낀 삶이다". 물론 이러한 해결책은 돈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고 혁신적인 것으로여겨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장미정원의 우묵한 자리에 앉아 인간과 비인간의 다양한 신체에 둘러싸여 나의 것을 비롯한 수많은 신체적 민감성이 뒤섞인 현실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실제로 재스민과 적당히 잘 익은 블랙베리의 향기가 내 신체의 경계를 침범한다), 나는 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이것은 어쩌면 감각 박탈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환하게 빛나는 자그마한 성과 지표의 세계는 산들바람, 빛과 그림자, 통제할 수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구체적 현실로 내게 말을 거는 내 눈앞의 세계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 P73
많은 사람이 하나의 실험으로 사회를 벗어난다. (…) 그래서 나도 사회에서 벗어나 이 경험이 얼마나 큰 깨달음을 주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별 깨달음은 없었다. 나는 떠나는 대신 삶의 한복판에 머물러야한다고 생각한다. -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 P77
뒤처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미디어 기업들은 일종의 ‘속보 경쟁‘을 벌이고, 이 경쟁이 우리의 관심을 악용해 생각할 시간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군대에서 포로를 고문할때 사용하는 수면 박탈 전략과 유사한데, 그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다. 2017년과 2018년에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에게서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져"라는 말을 들었다. - P118
18세기에 장바티스트 르 롱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는 ‘모든 시대에 디오게네스가 필요하다"라고 썼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에게 디오게네스가 필요한 것은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나 대안적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의 일화가 거부라는 단어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무시한 이야기를 들을 때 웃음을 터뜨리며 ‘바로 그거지!‘라고 생각하지 않기는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러고 싶은 우리의 소망을 위한 장소를 제공한다. - P131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할 만큼 내내 차분한 바틀비는 질문 근처의 공간을 드러내고 그 안에 머물며 질문의 권위를 훼손한다. 들뢰즈가 보기에 바틀비의 반응은 그 언어적 구조로 말미암아 "언어 안에 일종의 외국어를 개척함으로써 언어 전체를 침묵과 직면하게 하고그 안에 빠져들게 한다". - P136
이 프로젝트를 비워내는 실험으로 보면 많은 사람이 거부로 유명한 또 한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는 사회의 관습이나 편의에서 멀리 떨어진 오두막에서 간소하게 살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내 의도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에 직면하고 싶어서, 그것이 가르치는 바를 배울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제대로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지 않아서였다. (…) 나는 삶에 깊이 빠져들어 인생의 정수를 남김없이 빨아들이고 싶었다.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하게 살아가며 삶이 아닌 것을 깡그리 파괴하고, 깨끗하게 길을 내어 인생을 궁지에 몰아넣고, 최소한의 조건만 남기려 했다. 그리하여 만약 인생이 하찮은 것으로 드러나면 그 순수한 비참함을 받아들여 세상에 알리고,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경험한 뒤 다음 여행에서 그 숭고함을 제대로 설명해내고 싶었다.
- P140
그곳에서는 사물이 이전과 달리 보인다. 여기서 왜 소로의 세상이 디오게네스와 장자의 세상처럼 반전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법을 준수하는 기계가 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가장 선한사람이요, 가장 선한 사람은 가장 나쁜 사람이다. - P142
그러나 성공적인 집단적 저항에서는 그다음 수준의 절제와 훈련이 요구된다. 이때 다수의 개인은 서로를 지지하며 거부의 공간을 열어놓을 수 있는 유연한 합의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적 지지는 개인의 치열한 자기 절제의 결과물로 나타나는데, 마치 여러 명의 소로가 다 함께 거부에 나서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도피가 아닌 거부와 보이콧, 사보타주를 위한) ‘제3의 공간‘은 더 큰 규모의 대중에게 인식되는 불복종의 광경이 될 수 있다. - P144
문제는 많은 사람에게 두려워할 것이 있고,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거부라는 선택지를 취하려면 개인적 차원(거부의결과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과 사회적 차원(불복종을 대하는 법의 태도는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에서 여유와 자유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 P151
이 버스 보이콧 운동은 유의미한 거부 행위는 두려움과 분노, 히스테리가 아니라 조직적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집중력과 관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151
심지어 잃을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던 디오게네스도 일종의 여유가 있었다. 나비아는 디오게네스를 비판한 패런드 세이어 Farand Sayre 의 글을 언급한다. 세이어는 법과 날씨의 측면에서 그리스의 도시들이 디오게네스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말했다. 디오게네스가 삶에서 누린 행복은, 디오게네스 본인은 자신의 지혜 덕분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사실은 대개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우호적 환경 덕분이었다. 그리스의 날씨는 온화하고 기온 변화가 적어서 길 위에서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고, 코린트와 아테네정부는 외국인과 떠돌이를 용인했으며, 그 시대 그리스인들도 걸인들에게 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 P152
몸에 이상이 있는 상황에서도 전력 질주하며 자신의 건강을 절벽 밑으로 떨어뜨리는 모습은 ‘갈리거나 죽거나‘인 대학의 유독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의식적으로 비참해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나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 길티 플레저처럼느껴질 때가 있다. (・・・)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극도의 피로감과 좋은 학생을 동일시한다. - P158
제아무리 힘든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대학 측이나 일부 학생이 아무리 자기 돌봄을 강조한다 해도, 이 학생들은 우리 모두를 압박하는 시장 수요의 영향 아래 있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 봤을 때 이 학생들은 일이 좋아서 일 중독자가 되는 게 아니다. 일 중독은 대학 안팎에 존재하는 매우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매우 현실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 P159
어쩌면 거부라는 전략은 이미 많은 사회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 페이스북 없이도 사회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늘 접속 상태로 연결되지 않아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 이들은 캐슬린 누넌 Kathleen Noonan 이 2011년에말한 ‘스위치를 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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