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가고싶어지고,
부모님과 여행 또 가고싶어짐.
un-PC 처음 앎
unPolitically correct
중경삼림 다시 보고싶다!

엄마의 변화를 이끈 것은 찬장 안쪽 깊숙한 곳에 방치되어있던 빈티지 잔이 아니라 우연히 합류한 여행과 또래와의 만남 덕인 모양이었다. - P84
커튼 2년 전 그때 진저리를 치며 떼어내라던거실창의커튼이 다시 제위치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때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는 시점이 왔다는 표식처럼 보였다. - P85
나른한 눈빛으로 노인의 무릎을 베고 누운똑순이의 모습을 보면서 경진은 덩달아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노점에서 흘러나온 유행가가 여전히 아련하게 들려옴에도불구하고 어수선한 풍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 P94
"그럼 낮에도 조용한 데가 나와요?" "암만, 저기 뭐냐, 향교 근방에도 한옥숙박들 많잖니. 거기골목 사이사이 가 봐 한낮에도 고즈넉하니 담벼락 앞에서 고양이들이 일광욕하고 그런다니까 날 좋을 때는 아예 전주 천변 길을 걸어도 좋고, 치명자산도 시원하게 보이고 가을에는물억새가 장관이지." - P96
엄마는 향교 길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고양이 두 마리에게백미와 현미라는 별명도 붙여 주었다고 했다. 한 마리는 티끌하나 없이 하얘서 백미, 다른 한 마리는 흐릿하게 노르스름해서 현미였다. 둘이 워낙 찰싹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며 커플같다는 게 엄마의 짐작이었다. - P97
"그래. 그 어진을 모시고, 실록도 거기 있고. 그런 건물 물이 오순도순 딱 마주 보고 있잖아. 성당이랑 경기전이랑 그사잇길을 걷다가 보면 저기 또 농민혁명기념관이 나오잖아" 엄마가 검지를 들어 동학혁명기념관을 가리켰다. "이런 데가또 어딨겠니? 재밌어 정말 내가 한평생 전주 살면서도 이런재미를 모르다가 커피 마시고 카페도 따라 다니고 그렇게 여유 부리면서 이런 재미를 다 알게 된거야." - P98
"엄마, 어제부터 뭐에 씌었는지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막묻지도 않은 별별 얘기를 다 해 주더라고요. 엄마는 저한테뭐 하고 싶은 얘기 없어요?" 하기야 그때 얘기를 하기는 해야겠지." 엄마는 자못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하는 게 좋겠다." - P99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다고 한 후에 집까지 이동하고, 각자씻고 나서 커피젤리가 든 병을 말끔히 비우기까지 엄마는 머뭇거리며 선뜻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았다. 비로소 엄마 입에서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경진은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조각 나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재촉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 P99
"축 처져 있자니 종일 그냥 눈앞에 걱정거리가 둥둥 떠다니는 거야. 계속 보이는 거야. 아유,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나 모르겠다." "알죠." 경진이 동의했다. 그러면서 아마 자신이 엄마를 찾은 것은그 서러움이 극에 달했을 때였으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 P105
엄마는 한평생 며칠만 빈둥거려 봤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꿈꾸던 시간과는 전혀 달랐다고 했다. 허망함을 깔고, 걱정을 베고, 서러움을 덮고 누운 것 같은 날들이속절없이 이어졌다. - P107
계 모임에서 당일치기로 남원 다녀오자는 거 가 봤더니 한결 살겠는 거야. 그때부터 누가 어디 가자고 하면 다 따라 나갔어. 꽃집 걔네 가족이 경주 가자면 가고, 언니네 부부가 단양 좋다고 해서 따라가고, 전에 나 학습지 선생 할 때 거기 센터장이 자기네 남편 회사 산악회에서 단풍놀이 간다고 깍두기로 가자는 거까지 따라갔다니까? 앞뒤 생각 않고 부지런히 돌아다녔어. 내가그 덕에 산 거야.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나잇살 가지고 까는 건 좀 요즘 세상에 너무 언피시한 거 아니냐?" - P116
그러나 속으로는 웅의 넘치는활력을 부담스러워하던 터였다. 그로 인해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현수에게 엷은 호감을 느끼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않았다. - P126
그날의 설렘은 금세 빛이 바랬지만 첫 취업에 성공하고 다섯 곳의 직장을 전전하는 동안 그녀는 웅이 의지하고 기댈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웅은 틈만 나면 자신이 감내하고있는 것과 견딜 수 없는 것에 대해, 잃어버린 것에 대해, 그럼에도 끝내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 토로했다. 비록 다정한 어투는 아니었더라도 처음에는 일일이 맞장구를 치며 때로 함께 눈물까지 흘려 주던 그녀의 반응이 점점 흐릿해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 P134
10대 시절에 본 영화라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잊었지만 남자 배우가 금성무였다는 사실은 또렷했다. 앳된 티가 남아 있던 금성무를 귀찮아하던 임청하의 얼굴을 가리던 큼지막한선글라스와 금발 가발도 기억에 선했다. 삽입곡이었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사자성어처럼 네글자로 떨어지는 영화 제목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 P141
"너 옛날에도 이렇게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 줬던가?" "아니야. 잔이나 채워 경진이 술잔을 내밀었다. "요새 내가뭐에 좀 씌어서 그래." - P147
"근데 네가 놓친 게 있어, 생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있지. 그게 약육강식하고 경쟁으로만 꽉 차 있는건 아니야." "정말? 잘 들어 놔야겠다. 다른 방식에는 뭐가 있는지." 웅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생, 우리 집에만 하더라도 있었는데, 몇십 년을 그리고사셨던 분이 경진은 허탈함에 어깨를 늘어뜨리는 웅의 팔을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야. 그리고 공생이 있잖아 예가 얼마나 많은데, 이 황태 다 먹을 때까지 공생하는 생물들, 호혜적으로 서로 돕는 관계만 읊어도 끝이 안 날걸." - P150
귀찮을 법도 하건만 천성이 밝고 따듯한 딸은 항상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그리고 꼬마 때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도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한번도 짜증을 내거나 단답형으로 툭, 대답한 일이 없었던 딸.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녀는 딸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알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 P167
찜질방 밖으로 빠져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따듯하게 데워진 몸으로 집으로 향하면서 경진은 세신사의 이야기를 좀 더 차근히 들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녀에게 눈물을 흘려보낼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마음속을 헤집었다. - P167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한테 한번 말해봐. 천천히 다들어 줄게. 오늘 시간도 한 시간 더 있잖아." 해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경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라졌던 사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에 앞서 무엇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 이 아이를 괴롭히고 있을까. 경진은 섣불리 짐작하는 것을 멈추고 눈물이 맺힌 해미의 눈을 가만히들여다보았다. - P170
작가의 말
햇살이 드리운 거리를 느긋하게 걷고얼굴을 마주하고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2020년 5월 은모든 - P171
이 책의 끝에서 ‘경진‘이 그리하듯 누군가가사라지지 않게 붙들어 놓고자 최선을 다해 보는 그런 마음이있다. 그런 마음들이 모인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그저 하염없이 걸었을 뿐인데 몸이 충분한 볕을 머금고 어느새 스르륵풀려, 산책에서 막 돌아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 P1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