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당연히 혹평을 받았다. 선악의 경계가 너무 분명하고 메타포가 강해서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짜리평도 내리지 않고 그저 내게 묻기만 했다. 그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은 건지, 정말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지, 심지어 사람이 정말 그렇게 쥐로 변할 수 있는 건지, 그 소녀를 잡아낸 카메라는 누구의 시선인지 묻기도 했다. 그 불편하고 듣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나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애썼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 P62

그때 쇼코는 그 예의바른웃음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음이, 어린 시절 쇼코의 미소를 보았을 때처럼 서늘해졌다.
- P64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껴진다.
- P69

나는 그에를 조금도 알지못했었어. 유년을 다 지나고 나서야 니는 그애를 다르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 P73

어차피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라는 마음이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 P82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 P86

바람이 내 말을 쓸어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 말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 P87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P89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는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 P90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 P92

곰의 이야기를 들을 때 엄마는 곰이 되어서 곰에게 이야기하는 이모의 모습을 봤다. 곰아, 밥 먹어. 그 말을 하고 엉엉 우는 이모의 모습을 바라봤다. 곰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면 이모는 세상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그후로도 죽은 개의 마음으로 이모를 바라보곤 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를 잃고 나서도 더 잃을 것이 남아 있던 이모의 모습을.
- P100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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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가 바라본 지옥의 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괜히 겁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지옥이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의 말이었다. 헛된 희망은 더 큰 상처가 될 뿐인 곳이 지옥이다.  - P129

지옥을 알아야 지옥을 피할수 있기 때문이다. 설명하는 입장에서도 천국보다 지옥이 설명하기더 쉽다. 천국을 의미하는 ‘Paradiso‘는 ‘지옥(Dis)에 대항하는(Para)‘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지옥이 아닌 곳이 곧 천국이란 말이다. 또 살면서 천국 같은 체험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지옥 같은일을 당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니 지옥에 대한 설명이 더 쉬울 터.
- P130

고로 시간이 흐르는 이곳은 분명 지옥보다 나은 곳이다. 시간을견디고 헤쳐 나가야 한다. 누구든지 희망을 잃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젊다면, 여전히 긴 시간이남았다면 자살은 탈출구가 아니다.  - P133

이 지리멸렬한삶을 견디는 것은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 P135

사랑이 영원하길 열망하지만 지상에서의 사랑은 언젠가 끝이 나는 법. 그렇다고 사랑을 안 할 수도 없다. 이제는 그렇게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 아름답다.
고 말해 주는 시대가 되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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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 P9

할아버지는 쇼코에게 자신을
‘미스터 김‘이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쇼코와는 친구가 되고 싶다고, 다 늙은 교장선생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면서.
- P12

쇼코는 나를 보고 조용히 웃었다. 친절하지만 차가운 미소였다. 다커버린 어른이 유치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 P14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했다.
- P24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P24

 직장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들은 주말이면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고, 틈틈이 책을 읽었지만 나의 독서량은 그애들보다도 빈약했다.
- P33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 P34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P40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 P47

"뭐라 하셨어?
"내가 이러고 사는 게 멋지다고,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거니까멋지다고 하셨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영화 일이 마음으로 정리가 되더라."
"정리가 되다니?"
"이제는 끝내려고, 엄마."
- P53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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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두 가지를 볼 수 없다. 하나는 자신의 얼굴이다. 그래서거울이 필요했다. 또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볼 수 없다. 자신의 죽음을 보여 주는 마법 거울은 발명되지 않았다. 볼 수 있는 것은 타인의죽음뿐이다. 타인의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자신의 죽음에 관여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죽음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배우고 스스로의 죽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지구상에 태어난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오래된 문제, 죽음, 4800여 년 전 쓰인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의 핵심 내용도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 죽음으로부터 예술과 종교가 자라나왔다.
- P93

타인의 죽음에 대해 냉정한 사회는 철학적으로빈곤한 사회이며,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돈을 그러모으고, 영원히 살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한 자에게 보내는 삶의 경고가 타인의 죽음이다.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거울이다.
- P104

이제 나에게는 엄마의 젊고 건강하던 시절의 사진이 더 낮설다. 매일매일 작아지는 몸을 가진 엄마. 그렇게 호리병에 들어가 요정이 될 것처럼 작아지는 몸을 가진 엄마라도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나는 좋다.
- P115

나는 늘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도 해서는 안 되지만,
자신의 죽음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할수록 좋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소설속 라모스의 말처럼 세상 모든 것을 제대로 맛보고 감별하고 누리기위해, 지상에서의 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영원히 시한부 상태로살아야 한다. 지금 내게 주어진 순간의 절대적인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할 때이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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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에이미와 로리 커플 때문에 받은 분노는 베스의 죽음 만큼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내 어릴적 최애 빨강머리 앤은 지금 보니 내 베프는 앤이 아니었고 마릴라였으며, 항상 따뜻한 그 애는 다이애나가 아니라 메튜였다. 그리고 빨강머리 앤 보다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 좋아했던 작은아씨들은.. 지금 시대와는 좀 떨어진..그러나 이해는 되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구나. 그리고 빨강머리 앤 만큼 지금의 의미는 더 이상 되지못하는구나. 씁쓸하지만 그저 어릴적 읽은 책이 되어버렸네.

역시 나는 조,베스 조합이.

이렇게 써놓고도 함께한 시간들 때문인가.,
조금은 못마땅하지만 사랑하는 내 친구들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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