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과거를 모두 뒤져서 지금 필요한 단 하나의 조각을 찾아야만 하는 원도가 생각의 터널에 멈춰 중얼거린다. 장민석이다. 장민석이 말했다. 
- P65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내버린 것. 상처는, 징그럽게 곪다가도 자연과 약속한 시간을 정직하게 지키면, 새로운 살로 그 구멍을 메운다. 메워진 구멍은 고통을 견딘 대가다.
메워지지 않고 계속 썩어 들어가 더 깊은 구멍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상처라기보다 통로다. 상처는 몸의 일부지만 통로는 몸을 뚫고 지나가는, 몸의 바깥이다. 
- P66

죽음은 자기 자신처럼, 아무리 생각하고 탐구하고 친해지려 노력해도 절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죽으면 끝이어서가 아니라, 소중하고 아까운 모든 것을 잃어서가 아니라,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에. 알 수 없는 그것을 철저히 홀로 겪어야 하므로.
- P81

뭐가 여백이고 뭐가 결핍인지, 원근감이 생겨버렸다. 빈틈없이 가득 차 충분한 줄 알았는데 텅 비었다.
무섭다.
외로움도 고독도 쓸쓸함도 슬픔도 아니다. 두려움도 아니지만 그것에 가장 가깝다.
원도가 운다.
목놓아 운다.
- P85

피할 수 없는 악취와 독기 속에서, 원도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차차 괴물이되어갔다.
- P102

원도는 용서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으려고, 장민석과 정반대되는 말과 행동을 하려고 애썼지만, 어려웠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용서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장민석과 정반대의 사람이 되는 것 역시 장민석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 까다로웠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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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이라 믿었다. 믿음에 이성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단숨에 무너졌다.
- P39

원도의 머릿속에는 버튼 하나로 원도를 박살내버릴 시소가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 있고,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그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 P42

산 아버지는 절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원도는 한 번도 산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으며, 산 아버지의 말처럼 살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원도에게는 산 아버지의 모든 말이 틀린말이거나 혹은 그 말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이 바로 틀린 존재였다. 
- P56

네 엄마가 가르쳐줬어.
장민석의 말이다.
상대를 죽이고 싶을 만큼 화가 나면 바로 그 앞에서 웃으라고 했어. 웃어야 한다고 했어.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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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주인이 작은 창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원도를 부른다.
여기서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장사하는 데야, 여기.
- P13

공기를 훔치듯 조심스럽게 숨을 쉬며 원도가 묻는다. 사는 동안,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원도를 궁지로 몰아넣던 질문. 때론 가소롭고,
때론 무섭고, 때론 고통스럽던 질문. 글자나 소리로 이루어진 대답이 아닌, 원도 자체를 요구하던 그것.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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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잘 자거라. 아침에 깨우러 갈게."
"할아버진 제 자명종 시계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세월이 흐르면 나이가 자명종 시계가 된단다."
노인이 대답했다.
- P26

바다는 아름답고 다정하기도 하지만 갑자기 돌변하여 잔인해질 수도 있는데. 그런데도 저 새들은 작고 구슬픈 소리로 울면서 날다가 거친 파도의 수면에 주둥이를 처박고 먹이를 찾지. 저 새들이 이 험한 바다에서 살기에는 너무 연약하게 만들어진 게 아니냔 말이야.
- P32

노인은 바다를 생각할 때마다 ‘라 마르(la mar)‘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때 쓰는 스페인 말이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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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나의 모든 결핍, 이루지 못한 꿈,부서진 사랑과 상처, 거부와 거절의 경험이 모두 내 자산이다. 
- P178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인연을 나눈 사람들-표정과 몸짓이 크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이탈리아인들-이 나에게 베푼 친절한 호의 덕분이다. 그런 감각은 체험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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