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나이듦‘의 문제가 아니라 혹시 나의 문제가 아닐까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멋지게 나이 든다‘라는 이야기는 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멋진 사람이 나이가든 것‘입니다.
- P261

문제는 ‘나이‘가 아닙니다. 지금의 ‘나‘는 늙었기 때문에무언가 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젊을 때부터 시도하지않았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돌봄을 받는 행위는 다음 세대를 이어가는 인간의 도리로 정착됐지만 사회적 설계로 그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각자 잘 사는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며 교류할 때 의무는 경감되고 우리의 삶은 더 다채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현명해지고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자 ‘나‘를 지킬 수 있는핵개인들의 사회를 꿈꿔봅니다.
- P263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 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러하듯 서사는결코 급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진정성으로 만들어집니다.
- P286

앞으로는 선배라는 말조차 사라질지 모릅니다.
‘앞서 경험한 사람‘이라는 말이무색할 만큼우리는 모두 변화 앞에서동등한 신인이 될 테니까요.
- P288

‘근근이 먹고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일을좋아한다면 말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작지만 꾸준하게 먹고사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조차도 계속되려면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 P293

이 시점에 이르면 밖으로부터의 인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결국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최고‘라는 상댓값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선 자가 맛보는 ‘최선‘이라는 절댓값입니다.
- P297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 수 있습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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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디지몬과 영원히 이별하는 이야기다
- P7

컴퓨터, 디지털, 세기말, 지구 종말, 가상 세계미래 세계... 이런 단어로 가득했던 20세기 말의 지구, 차원 너머 다른 세계를 그리는 비슷한 설정의 작품이 각기 다른 문화권에서 동시에 쏟아져 나온 것은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시 인류는 1999년 12월 31일이 지나도 이 세상이 계속 이어지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염원함과 동시에 세계 멸망에 대한 짜릿함도 느꼈을 것이다. 
- P10

당시 나는 어떤 단어로 이 감정들을 말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더 선명하게 마주 보고 인식하고 고민했겠지만(그러는 한편 조금 즐기기도 했겠지만), 그러기에 열한 살은 무지했고 어렸다.
이 다채로운 감정들을 나는 ‘슬프다‘라고밖에 표현할수 없었다. 그게 내 언어의 한계였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슬펐다. 내가 슬픈 건지 세상이 슬픈 건지 모르고 그저 온통 슬프기만 했다.  - P12

‘유치하다‘. 사람들이 대체 어떤 대상에 이 말을쓰는지 한참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유치하다‘는 단어는 감상을 너무나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작품을 납작하게 눌러버린다. 열띤 토론을 준비 중이었던 나의 전의를 깡그리 소멸시키는 마법의 단어. 요즘은 많이들 쓰기 경계하는 ‘오글거린다‘만큼 막강한 단어인데 인식하지 않아 문제 삼지도 않는, 더 무서운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P16

언뜻 보면 비슷한 듯 보이지만, 무언가를 무찌르고 싶다는 마음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어느것이 선행되느냐에 따라 그 색이 완전히 달라지고 디지몬은 후자였다. 디지몬은 아이들을 지키고 싶어했다. 나는 거기서 비밀의 열쇠를 돌려 다른 차원으로가는 문을 열어버렸다.
- P22

그렇다. 이것이 바로 신비한 세계로 끌려들어온 일곱 명의 아이들이 앞으로 겪게 될,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 P22

세계를 넘기 위해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시도한 데에는다 이유가 있었다. 혼자 그곳에 가고 싶었다. 아주 훌쩍, 창호지에 구멍을 뚫듯 폭, 세상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흔적도 없이.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외로움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 P25

하모니카는 모나고 날카로워 보이는 매튜가 사실은 외로운 아이라 말해준다.
하모니카의 쓸쓸한 소리가 디지털 세계에 잔잔히 흐른다. 파피몬은 가만히, 그리고 나란히 앉아 듣는다.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말해준다. 매튜 네가 연주하는하모니카 소리가 참 좋다고.
- P34

혼자 있는 순간마다 파피몬이, 혹은 내 디지몬이 옆에 있다고 상상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순수한 상상과 정신병적 망상의 경계에 머물렀던 것 같다. 그래도 디지털 세계는, 이 세계와또 다른 차원의 세계는 외로운 나에게 큰 위로였다.
- P34

나는 디지몬의 진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것도, 그 진화가 완전한 성장이 아니라는 점도 좋다.
디지몬은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진화할 수 있고 다시 돌아온다. 잘못 진화하면 다시 진화하면 된다.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무언가 그릇된 것처럼 느껴지면 나는 이 문장을 자주 상기한다. ‘괜찮아, 다시진화하면 돼‘

- P46

타투를 하고 싶어서 고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고래를 남기고 싶어 그 수단으로 타투를 결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를 몸에 새기면 세상이 작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았다.
- P49

우선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는 재능이란 단어를 덜 비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회에서는 재능에 천재성을 부여하지만 화려한 껍질을 벗긴 재능이란 어느 날 갑자기,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불현듯 그것을 ‘계속하게 되는 힘‘에 다름아니다. 시킨 이가 없는데 내가 그 행위를 계속하고있다? 그렇다면 그것에 재능이 있다고 봐도 좋다. 내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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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格)이 수필인가 한다. 
- P52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마지막 십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버리는 것이다.
- P53

엄마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장롱에서 옷들을 꺼내더니 돌아가신 아빠 옷 한 벌에엄마 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채곡채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닫이에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후 얼마 안 가서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고 말았다.
- P66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엄마와 나는 숨기내기를 잘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엄마를 금방 찾아냈다. 그런데 엄마는 오래오래 있어야 나를 찾아냈다. 나는 다락 속에 있는데, 엄마는 이방 저방 찾아다녔다. 다락을 열고 들여다보고서도
"여기도 없네" 하고 그냥 가버린다. 광에도 가보고 장독 뒤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하도 답답해서 소리를 내면 그제서야 겨우 찾아냈다. 엄마가 왜 나를 금방 찾아내지 못하는지 나는 몰랐다.
- P67

나는 오만 원, 아니 십만 원쯤 마음대로 쓸수 있는 돈이 생기는 생활을 가장 사랑한다. 나는 나의 시간과 기운을 다 팔아버리지 않고, 나의 마지막 십분지 일이라도 남겨서 자유와 한가를 즐길 수 있는생활을 하고 싶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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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뒤처지는 듯하고 나만 나의 목표를 잡지 못하고, 나 혼자 만족한 게 없는것 같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아등바등 사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힘듦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지않았다.
- P39

저녁은 어둡고피곤한 시간이기에 산행을 하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다. 생각과 달리 줄지어 산행을 했다. 이른 아침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밖을 나오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를 모르고, 내 안에 갇혀 있으면 발전을 할 수없다는 생각을 했다. 평소 게으르게 행동했던 나 자신의 성찰을 할 수 있었던 등산 모임이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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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최초의 원인이 무언지 저는 모르지만, 당신은 분명아시겠지요. 현명한 분이니 당연히 진작부터 스스로를 관찰해오셨을겁니다. 제가 보기에 병의 시작이 당신이 대학을 그만둔 시점과 부분적으로 일치하더군요. 일 없이 지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엔 일과 명확하게 설정된 목표가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조시모프가 라스꼬니코프에게 한 조언)
- P345

어느 선까지 가서 그걸 뛰어넘지 않으면 불행해지겠지만, 선을 넘으면 어쩌면 훨씬 더 불행해질지도 모르지......
- P351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는 화가 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자존심이 강해서 그래! 은혜를 베풀고 싶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야! 오, 비열한 사람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증오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오, 정말 난...... 저들 모두가 증오스럽다!‘
- P359

만일 오빠가 옳고, 만일 내가 정말 비열한짓을 하기로 결심한 거라 해도, 오빠란 사람이 정말로 내게 이렇게 무자비하게 말해도 되는 거야? 어째서 오빠는 오빠에게도 없을 그런 영웅적인 면을 내게 요구해? 이건 독재고, 이건 폭력이야! 
- P360

"그렇지요, 그리고 범죄 행위가 늘 병을 동반한다고도 주장하셨고요.
아주 아주 독창적이에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당신 논문에서 흥미로웠던 건 그 부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논문 말미에 생략된 채 어렴풋이 암시만 된 어떤 생각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세상에는 어떤 폭력이나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아니 저지룰 수 있다기보다 그럴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지며, 법조차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암시였지요."
- P401

하지만 그 모든 것 중에서 정말로 독창적인 건, 게다가 끔찍하게도 정말로 오로지 네게만 속한 생각은, 그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양심에 따라 허용한다는 거야. 게다가 이런 말을 하긴 미안하지만, 심지어 그렇게 광신적일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까 네 논문의 주된 사상도 거기에 있는 거지. 양심에 따라 피를 허용하는 건, 그건...... 내 생각에 그건 피를 흘리는 걸 공식적으로,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 더끔찍해.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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