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술 안내서 - 초보 드링커를 위한
김성욱 지음 / 성안당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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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김성욱 작가가 말아주는 아주 특별한 술마카세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술에 관한 흥미롭고 친절한 안내서!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종종 식사 중에 마실 만한 가벼운 술을 찾기 위해 편의점 주류 코너를 살펴보곤 한다. 요즘에는 MZ세대 소비자들을 겨냥한 독특한 하이볼 상품이 특히 눈에 띄는데, 어제만 하더라도 요구르트맛 하이볼이 신상으로 나왔기에 관심이 갔다. 확실히 예전에는 전문 주류점 혹은 면세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술을 온라인이나 마트의 주류 코너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 있으니, 술을 맛보고 즐기는 문화가 다채로워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다양한 술의 매력을 소개하고, 초보 드링커들도 쉽고 재미있게 술을 즐길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서가 출간되었다. 자칭 ‘술을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라 밝히는 김성욱 작가는 알고 나면 더 맛있는 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와인,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주와 탁주, 일본 대표 술인 사케, 위스키, 보드카 등 각각의 술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제조 과정, 특징,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술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저에게는 맥주의 시원함이 즐겁고, 막걸리의 걸쭉함이 즐겁고, 사케의 깔끔함이 즐겁고, 청주의 고소함이 즐겁고, 소주의 어울림이 즐겁고, 보드카의 깨끗함이 즐겁고, 위스키의 차분함이 즐겁고, 데킬라의 독특함이 즐겁고, 럼의 자유로움이 즐겁고, 진의 향긋함이 즐겁고, 브랜디의 달콤함이 즐겁고, 와인의 느낌이 즐겁고, 리큐어의 다양함이 즐겁고, 백주의 따뜻함이 즐겁고, 우리 소주의 깊음이 즐겁습니다. / 558p




  술의 기원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 옛날 악마가 술의 재료가 되는 열매를 맺는 나무의 거름으로 양, 사자, 원숭이, 돼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에 술을 마시면 양처럼 순하다가 곧 사자처럼 용맹해지고, 다시 원숭이처럼 춤추다 결국 마지막에는 돼지처럼 더러운 바닥을 뒹굴게 되는 거라고…. 여기에 신에 관한 이야기도 하나 있다. 술의 신이 술을 만들 때 술에만 들어가는 재료를 넣었는데 바로 ‘솔직함, 슬픔, 분노’였다는 것이다. 이후 술의 신은 조금 더 생각하더니 마지막으로 뭔가를 더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망각’과 ‘후회’였다고 한다. 술만 마시면 인간이길 거부하고 내 안의 온갖 동물들을 다 만나다 다음날이면 꼭 후회를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나 보다.




기원전의 기록에도 증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과 같은 증류 기술이 정립된 것은 화학의 기초를 수립한 아랍의 연금술사들 덕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연금술사이자 ‘아랍 화학의 아버지’라 불린 중세 과학자 자비르이븐 하이안이 770년경 화학 성분을 분리하는 실험을 했고, 그 실험을 통해 향수, 화장품, 증류주 등을 만들 수 있는 증류장치를 만들었습니다. / 32p












  적은 양이라도 이왕이면 제대로 즐기는 법을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이를 테면 와인의 경우 스파클링 와인은 5~8℃로 차갑게, 화이트 와인은 8~12℃ 정도로 시원하게, 레드 와인은 15~18℃ 정도의 실내 온도로 맞춰서 마시는 게 좋다고 한다. 맥주의 경우 라거와 필스너는 3~7℃, 휘트비어는 5~7℃, 페일 에일은 7~10℃, 에일은 10~12℃, 포터나 스타우트는 12~13℃ 정도가 일반적으로 적당하다고 하니 기억해두어야겠다. 또 책에서는 맥주를 따를 때도 맥주와 거품의 황금비율을 7:3, 8:2로 맞출 것을 추천한다. 거품이 맥주 안에 탄산을 가둬두기 때문에 탄산을 더욱 오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맛있게 마시기 위해 책에서 알려주는 또 다른 방법들도 도전해봐야겠다.






곡물을 발효·증류·숙성한 술을 ‘위스키’라 하면, 과일을 발효·증류·숙성한 술은 ‘브랜디’입니다. 주로 포도로 만들지만 보리 외의 다른 곡물로 만들어도 ‘위스키’라 부르듯,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을 발효·증류·숙성해서 만든 술도 ‘브랜디’라 부릅니다. / 235p




럼을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비슷할 겁니다. 바닷가, 배, 선원 등이 떠오르죠. 럼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바로 그 이미지인 바다, 배, 뱃사람들의 술입니다. (…) 럼의 고향은 서인도 제도라 불린 카리브해 인근 지역입니다. 인도를 찾아 신항로를 찾던 유럽인들은 인도로 생각했던 이곳을 발견한 후 세월이 흐른 뒤에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를 옮겨오고 사탕수수를 가꿀 사람들도 옮겨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노예였죠. 럼은 노예로 불린 이들이 노동이 끝난 뒤, 설탕을 만들고 남은 부산물인 당밀로 만든 증류주입니다. / 353p




다른 여러 나라의 증류주들과 같이 소주도 아랍의 증류 기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탄생했습니다. 정확히는 아랍의 문문을 받아들였던 원나라(몽골)를 통해 전해졌죠. 소주가 전해지고 알려지는 시기 또한 대부분의 증류주들과 비슷합니다. 우리나라 문헌에는 고려 충렬왕 시기에 소주(불사를 소, 술 주)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고 이후 줄곧 기록이 있습니다. 원나라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개성과 제주, 안동처럼 원나라의 영향이 크게 미쳤던 지역의 소주가 유명합니다. / 424p











  김성욱 작가의 손끝에서 탄생한 감각적인 일러스트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각각의 정보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그의 그림 덕분에 지루할 틈 없이 읽힐 뿐만 아니라, 굳이 검색하거나 사진 자료를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브랜드를 바로 파악할 수 있어 유용하다. 페이지 곳곳이 마치 예술 작품 같아서 초보 드링커뿐만 아니라 술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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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Axt 2025.5.6 - no.60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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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이란 키워드를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

문학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격월간 문학잡지!






  격월간 문학잡지 『Axt』가 어느 덧 60호를 맞이했다. 이번 호는 지난 겨울, 우리 사회가 마주한 거대한 ‘변곡점’을 중심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표지의 그것처럼, 차가운 추위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을 은박 담요 하나로 묵묵히 견뎌냈던 집회 참가자의 뒷모습은 우리가 그 변곡점 위에 어떻게 서 있었는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은유다. 이제 우리는 변곡점의 새로운 기로에 서서 각자 어떤 선을 그리며 나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바로 이 순간, 가장 예민한 언어로 우리 삶 속 다양한 변곡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또 들려줄 것인가. 『Axt』 60호를 읽으며 우리 삶과 문학의 변곡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란다.




선은 이동할 때 그려진다. 

/ <issue> 중에서 53p




  최근 『치유의 빛』을 출간한 강화길 작가의 인터뷰나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로 대담을 나눈 <chat>도 재미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issue> 코너에 실린 함윤이 소설가의 글을 상당히 인상 깊게 읽었다. 작가는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 선고 기일을 지정하지 않았을 때 거리로 나갔던 시간들을 이야기한다.




  뜻밖에도 이때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인 ‘피크민 블룸’을 즐겼다고 고백하는데, ‘포켓몬 고’처럼 도심 곳곳에 출몰하는 빅플라워를 수집하는 게임인 것으로 보인다. 안국역을 중심으로 윤석열의 탄핵 찬반을 외치는 집회들이 열리고 경복궁을 사이에 낀 채 차별금지법 제정과 ‘중국발’ 간첩 퇴출에 관한 주창으로 매번 충돌이 발생하는 현장 속에서, 녹지와 꽃으로 가득한 피크민 블룸의 세계로 접속을 시도하는 일은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현실에서는 이쪽과 저쪽을 나눠 끊임없이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그곳에서 동시 접속한 피크민들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돕는 아이러니함이라니. 하지만 그 안에서 연대의 힘을 느끼고 세계를 다시 보는 방법을 배우는 작가의 글은 뜻밖에도 긴 여운을 남긴다.




Q4. (강화길) 작가님 소설에도 다양한 변곡점이 존재하잖아요. 그중에서도 저는 장소의 ‘공기’가 단숨에 뒤바뀌는 전환점을 가장 좋아해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어떤 서늘함이 저를 덮칠 때, 아! 내가 이래서 강화길을 사랑했지! 생각하게 되거든요. 작가님 작품에서 그런 전환점을 맞닥뜨렸을 때 느껴지는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인물이 어떤 공간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순간의 감각을 묘사하는 걸 좋아하긴 합니다. 작가인 저도 함께 느끼는 감각이거든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주인공과 함께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고 생각하며 쓰는 것 같아요. 그러다 확, 뭔가가 나타나죠. / <interview> 중에서 22p



‘세계를 다르게 보는 방식’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불안과 공포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같은 광장에 놓여 있더라도 맞은편 타인이 어떤 식으로 세계를 보는지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광장 맞은편에 선 상대가 무슨 모자를 쓰고 어떤 배지를 찼는지, 누구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었는지 살피도록 만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곳은 경쟁과 실패로 가득하다. 증강되지 않은 현실에서도 너무 많은 세계가 불거져나오고 시시각각 충돌한다. 사실 이 같은 충돌 끝에 남은 상처들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광장에서 가장 격렬하게 얻어낸 변곡점이기도 하다. / <issue> 중에서 52p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각각 호명하는 듯한 사진을 다시 바라보며, 광장 속에서 견디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가 몹시도 춥고 길었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 또한 대의명분이나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희생할 수 없는 개인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광장에 나왔기 때문은 아닐까. 2024년에서 2025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열렸던 광장이 한국 사회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된다면, 그건 국민을 거역한 대통령을 국민의 뜻으로 바꿨다는 사실에서만 비롯되지는 않을 것 같다. / <cover story> 중에서 60p










  포인트 슈즈의 높이가 자신에게는 빌딩과도 같았다던 어느 죽은 무용수의 이야기 <윌리>, 20년 넘게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한 남자의 회환과 슬픔을 읽다 어느 덧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만 이야기 <가를 두고>, 한국 정치사를 유쾌하게 비튼 <또 다른 서울의 봄>도 재미있게 읽었다. 정치 이야기를 하다 끝내 입을 다물어버리기를 택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는데, 왜 자꾸 마음은 씁쓸해지는지….





돌아 보니 나는 어른이고, 무용수가 되어 있다. 나는 뛰어나지만 어딘가 휘어져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를 너무 악물었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사용했나. 그런데 나는 쉴 수 없다. 무용단에 입단해서도 결코 쉴 수 없다. (…) 피로하다. 지나치게 늙어버렸다. 시간의 가속력을 온몸으로 타고 돌며, 피로해졌다. 나는 고개를 든다. 갖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여건을 다 갖추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튕겨져나갔다. / 박연준, <윌리> 중에서 111p



발끝으로 서야 하는 무용수에게 예쁘다는 것은 사지가 계속 자라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 내내 곤두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들린 사람처럼, 머리가 천장 끝까지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길게 곤두서는 느낌. 길어지는 불꽃처럼 빛나야 한다. 잠깐의 풀어짐이 무용수의 인생을 영영 풀어지게 할 수 있다. 곤두선 사람은 무너지지 않는다. / 박연준, <윌리> 중에서 115p



뭔가를 먹는다는 것은 생에 생을 더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내 몸에 매일 생에 생들이 쌓이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생이 버거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 백가흠, <가를 두고> 중에서 137p











  ‘변곡점’이란 키워드를 따라가다 보니 문학 속에서 변곡점이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 각각의 전환점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짚어보며 읽는 것도 좋은 독서법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다음 호에서도 또 어떠한 키워드가 새로운 영감을 줄지 기대된다. 격월간 문학잡지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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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 뷔페
류즈위 지음, 김이삭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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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억압과 상처의 족쇄를 예민하게 포착해낸 작품!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






  다행이었다. 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류즈위의 단편소설 「동창회」에서 주인공 자스민은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온몸이 격렬히 떨리는 충격으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정신 차려. 네게는 딸이 없어! 이미 남편과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자신을 성폭행한 선배가 꿈에 나타나 휴대전화 속의 딸 사진을 들여다보려하자, 딸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절박함에 강렬히 사로잡혔다. 내. 딸. 을. 만. 지. 지. 마. 실제로 그 소리를 내 뱉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폭발하듯 터뜨렸는지 깨닫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나지만, 여운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껴안든 실천하든, 

심지어는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120p




  『여신 뷔페』는 타이완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류즈위의 단편소설집이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이 눈길을 끄는데, 여성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먹는다는 뜻의 페미니즘 백래시 표현인 ‘여권 뷔페’의 변형어라고 한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향한 대립이 보다 극렬해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듯, 작가 류즈위는 여덟 편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투명하게 직시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언어로 여성을 묘사하는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제한하는지, 때로는 여성 스스로가 가해자이자 공모자가 되기도 하는 현실까지 다소 발칙하고 도발적인 언어로 재현한다.




여자의 울음은 어떤 울음이든 참된 감정이 아니라 히스테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울 수 없었다. / 「남의 아이」 중에서 89p



“남성이 바라는 이상형의 역할을 여성이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속박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전형적인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 수반되는 결과를, 그 책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98p











  「강가 모래섬에서」의 주인공 샤오뤄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강의하며 남녀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젊은 연인 앞에서는 넓어진 모공과 잔주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기검열에 매달린다. 학식과 경력을 얼마나 쌓았건 간에 마흔 둘과 스물 다섯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 차는 계급으로 작동할 뿐이다. 데이트 상대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느끼며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리즈(「리치 사용 설명서」), 늦은 밤 택시 기사가 자신의 몸매를 칭찬하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는 항아(「항아는 응당 후회하리라」), 업무 결과가 안정적이며 팀원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사내 진급 경쟁에서 남성 직원에게 밀려나고 마는 메두사(「여신 뷔페」), 이 여성 화자들은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이다.



선생님은 자기 몸을 느끼면서 자기 내면을 바라보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껏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언하오에게 줄 정교한 선물을 다듬고 있는 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었으니까.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57p


가정 수호와 아이 사랑의 깃발을 내세우면서 성평등 교육에 반대하는 단체들을 이제껏 혐오해 온 리즈였지만, 성교육은 반드시 일찍 시작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온 리즈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아이와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성교육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심지어는 자기 아이가 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영원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64p



“내가 쟤를 도와주는 게 이번이 세 번째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양해해 준 거 아냐? 내 사정은 누가 알아주는데?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줄까 봐 걱정했다지만 결국 피해 준 건 사실이잖아. 나는 나중에 결혼해도 아이는 절대 안 낳을 거야. 이거야말로 남한테 피, 해, 를, 안, 주, 는, 거, 라, 고. 알겠어?” / 「여신 뷔페」 중에서 175p



전동 유축기 전선으로도 자살을 할 수 있나? 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그렇게 죽지? / 「여신 뷔페」 중에서 225p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라서 상당히 몰입해서 읽었다. 한편, 이미 나는 이들의 언어를 써왔고, 또 쓰고 있으며,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읽는 내내 힘겹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써나가기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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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 - 최강 형제가 들려주는 최소한의 정치 교양
최강욱.최강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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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당이 무엇이냐던 첫째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 당시 아이가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정당과 정치의 현실이 이러했기에 대답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실 정당 정치의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수차례 겪고 보니, 가치판단은커녕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 최강욱 전 국회의원과 그의 형제가 썼다던 이 책의 소개글이 눈에 딱 들어왔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욕할 때 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보수와 진보의 편가르기와 혐오, 경쟁으로 과열된 바로 지금이야말로, 무엇이 진짜 보수이고 진짜 진보인지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알고 판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는 세상과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보다 균형감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 민주 시민으로서 그에 대한 이해와 해답을 얻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에 꼭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보수는 왜? 진보는 왜?



  책에 따르면 한 시대의 보수와 진보는 세상과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 변화를 꾀하는 ‘속도’ 등을 기준으로 나뉜다고 한다. 필요한 사회 변화에 대해 ‘천천히 신중하게 최소한으로’ 라고 생각하는 쪽이 보수, ‘빠르고 과감하게 전면적으로’ 라고 말하는 쪽이 진보다. 다시 말해 보수는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핵심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반면, 진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따라 상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는 가족·질서·법·역사·전통·권위·안보·애국심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진보는 인권·정의·해방·관용·미래·참여·연대·변화·혁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입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느냐 아니냐를 놓고, 민주주의와 독재가 갈립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입니다.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체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반대말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같은 민주주의이면서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가 어디인가를 놓고 생각해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 이런 장단점이 있고 스웨덴과 핀란드에 이런 장단점이 있겠지, 그렇다면 좀 더 미국 쪽으로? 아니, 좀 더 스웨덴 쪽으로? 늘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게 좋습니다. / 81p










  ‘보수와 진보’를 논할 때면 꼭 ‘우파와 좌파’라는 단어가 잇달아 등장하곤 한다. 나는 이제껏 좀 더 극단적인 성향의 보수를 우파, 또는 극단적인 성향의 진보를 좌파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그간 상당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서는 우파와 좌파에 대해 ‘자본주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에 따라 나뉘는 개념이라 정의한다. 시장에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 우파,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이 좀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좌파다. 즉 자본주의의 ‘장점’과 사회주의의 ‘단점’ 쪽에 조금 더 내 관심이 가면 우파이고, 자본주의의 ‘단점’과 사회주의의 ‘장점’ 쪽에 조금 더 내 관심이 가면 좌파인 것이다. 만약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진보를 지향하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우파를 지향한다면 나는 진보우파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보수=우파 또는 우익’ ‘진보=좌파 또는 좌익’이라는 도식적 구분을 벗어나 각각이 지향하는 바를 좀 더 사려 깊게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권력과 법의 힘을 빌려서 알아들을 만큼 응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두 이기적인 존재인 만큼 내가 이익을 볼 때 누군가 손해 보는 일이 생기겠지만, 인간이 서로 다른 존재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하다’라는 건 받아들여야 해요. 나는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보수의 역사적 성취를 믿습니다. 헌법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고 여기고, 시장경제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번영을 이끌어 낸 자랑스러운 역사, 이것이 보수의 성취입니다. / 118p



인간은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인간의 삶 전반을 함께 나아지게 할 수 있어요. 자기 개성과 정체성을 마음껏 표현할 권리도 있지요. 성별, 성적 지향, 인종, 종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불평등과 편견, 약자를 위해 싸운 이타와 투쟁의 역사, 그래서 생긴 세상의 모든 변화.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진보의 모습입니다. / 119p











  이 외에도 책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고 한국 정치사에 뿌리를 내렸는지 역사적 배경은 물론, 이들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입장 차이를 구체적인 사례와 영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준다. 빈자는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나오는 어르신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극우가 준동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그간 납득할 수 없었던 현실 정치의 면면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보수와 사람과 세상을 의롭게 하는 진보가 어떻게 하면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균형 있게 나아갈 수 있느냐다. 이 책으로 하여금 나의 정치적 성향은 무엇인지,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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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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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에겐 위기, 도전,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었던 내 일상과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






  “힘들게 뭐 하러 계단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 타자.” 한때는 계단이 경이로운 효율성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하고 마찬가지로 보다 편리한 이동수단인 엘리베이터가 나타나자 굳이 계단을 오르내릴 이유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겼던 불편함이 새롭게 등장한 편안함에 의해 선택지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편안함의 습격의 저자인 마이클 이스터는 이를 편안함에 의한 잠식이라 표현한다. 새로 등장한 편안함에 적응하면 이전의 편안함은 더는 수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편안함의 기준을 옮겨가는 것. 이에 잠식되고만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뜻밖에도 현재 인류가 직면한 신체적, 정신적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 이 책은 지적한다.




 

편안함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진정한 삶은 불편한 곳에 있다

 


  편리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현대인의 문명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날, 이에 과감하게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내가 해야만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위해 최대한 낭비되는 시간들을 줄여줄 도구처럼 사용했던 편리함이 실은 나의 신체 기능을 저하시키고 따분함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있었던 것에 대해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 중에서도 알래스카에서 보낸 33일간의 야생 경험은 독자들로 하여금 낯설지만 매우 특별한 감각을 선사한다. 냉난방 걱정이 없는 집에서 차로, 사무실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22도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있던 신체와 정신이 위기와 도전, 불편함으로 가득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간의 편리함이 나로부터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저절로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은 동그라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잠재력이다하면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울타리를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정말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거죠.” / 65p


 

그러니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진화적 메커니즘은 이제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삶에서 정말로 위대한 것은 결코 완전한 성공이 보장되어 있을 때 오지 않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실행하더라도 실패 확률이 높은 도전에 참여하는 것, 그런 상황에 과감히 뛰어드는 행동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주고, 내 안의 잠재력을 알게 해주죠.” / 76p


 

현대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따분함의 결핍이야말로 인류의 정신적 피로를 거의 위기 수준까지 몰아가고 있는 원인일지 모른다. 한 미디어 분석가의 연구에 따르면, 스크린 기반 미디어의 맹습이 미국인들을 갈수록 별스럽고 조급하고 산만하고 까탈스러운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줄이면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과로 속에서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음들은 우울증, 삶에 대한 불만족, 인생이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이 느긋하게 방랑하면서 화면 밖의 것들을 인식할 때에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놓친다. / 158p

 


지금 여기를 자각한다는 이 개념은 요가 수행자가 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뇌 스캔 결과 부드러운 매혹상태는 명상의 마음챙김 상태와 동일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생각, 창조, 정보 처리, 임무 수행 등에 필요한 자원들을 회복하고 구축한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한마디로 명상 없는 마음챙김이다. 매일 잠깐이라도 자연 속에서 산책하는 것은 명상의 훌륭한 대안이다. 물론 숲속 걷기가 마음의 치료제가 되려면 휴대폰을 멀리하고, 어떠한 정보도 귀에 흘러 들어오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 190p

 










  저자는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목적 있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즉 편안함이 점점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수록 더 약하고 병든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완전한 편안함보다는 적절한 스트레스와 도전이 오히려 우리를 더 강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그간 얼마나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인가를 내내 생각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마감하는 일상, 냉동 제품과 에어프라이기의 편리함으로 채우는 식탁, 걸어갈까 운전해서 갈까 망설이다 이끌리듯 주차장으로 향하고야마는 연속된 하루들에 대하여. 그래서 적어도 하루에 두세 번은 내가 불편해할 만한 것들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수고로운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작정 빠른 길만을 선택하지 않는 여유로움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너그러움까지도 끌어안자고 다짐해보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가제본)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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