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E 9 체인지 나인 - 포노 사피엔스 코드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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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포노 사피엔스 문명에 맞는 새로운 표준을 설정해야 할 때!

애프터 코로나19 시대에 따른 새로운 생존 전략과 기회를 모색하게 하는 책!

 

 

 

   우리는 지금, 훗날 비포 코로나 시대와 애프터 코로나 시대로 문명사를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전환점의 중심에 서있다. 그간에는 기존의 문명과 디지털 문명이 힘겨루기를 하듯 팽팽하게 흘러가는 양상을 보였다면, 코로나19로 인해 비접촉 방식의 이른바 언택트 시대로 강제 돌입하게 되면서 인류는 급격하게 디지털 문명으로의 전환을 가속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포노 사피엔스』의 저자 최재붕은 지구에서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존할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왔기 때문이며, 애프터 코로나 시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 인류는 이제 어느 누구도 포노 사피엔스 문명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중요한 것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온 포노 사피엔스 문명을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슬기롭게 전환하느냐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그는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표준에 맞추어 생각을 바꾸고 애프터 코로나라는 혁명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프터 코로나 시대, 인류의 표준은 이제 포노 사피엔스입니다

 

 

 

   『CHANGE 9』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문명을 읽는 공학자이자 국내 최고의 4차 산업혁명 권위자로 잘 알려진 최재붕 교수의 신간이다. 그는 이미 전작 『포노 사피엔스』를 통해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세대 즉 ‘포노’족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어떤 삶의 패턴을 보이며 세계 경제와 시장을 움직이고 있는지를 이야기한 바 있다. 이때만 하더라도 포노들이 이룩한, 앞으로 더욱 번성시킬 신문명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그들의 양상을 한 발짝 ‘밖’에서 살펴보았다면, 『CHANGE 9』에서는 이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이미 맞이해버린 포노 사피엔스 문명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성을 타진해보려 한다. 단지 ‘스마트폰을 쓰는 인간’이 아니라 완전히 다시 세워지는 생각의 기준, 즉 그들의 새로운 언어인 ‘포노 사피엔스 코드’를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한 생존 전략을 제시한다.

 

 

 

100년 된 백화점의 몰락은 100년 동안 큰 변화가 없던 유통에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의 시간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백화점이 100년 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해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사한 기업들과의 치열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경쟁이 아닙니다. 업종이 사라지는 변화입니다. 100년 만에 찾아온 인류의 소비 표준 변화가 만드는 파괴적 혁명이 유통으로 번지는 중입니다. / 35p

 

 

애프터 코로나라는 위기 상황은 앞면에 ‘위기’ 뒷면에 ‘기회’라고 쓰인 동전과 같습니다. 어떤 기업이 성장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엄청난 속도로 달라질 것이고, 그 문명은 포노 사피엔스가 주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혁명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는 새로운 시장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로 무장한 포노 사피엔스 인재입니다. 애프터 코로나 시대를 기회로 맞고 싶다면 신인류의 소비습관을 꿰뚫고 있는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 36p

 

 

 

 

 

 

   새로운 인류의 표준이자 절대적인 의미를 갖게 될 포노 사피엔스 코드는 크게 아홉 가지 키워드로 정의된다. 첫 번째는 ‘메타인지’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검색할 줄 아는 능력, 검색을 통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알아내는 지적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우리의 메타인지가 어떤 질문이나 잘 모르고 있던 정보 앞에서도 ‘검색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학교나 학원에서 정해진 내용을 배우고 외우는 기존의 학습 방식이 아닌, ‘스스로 찾아 학습하기’, ‘검색해서 알아내기’라는 새로운 영역의 학습 방식 경험하게 함으로써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으로 확대가 가능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저자는 암기와 문제풀이 방식의 기존 교육 시스템에 익숙한 인재와, 검색과 SNS를 통해 자발적 학습을 경험한 인재 사이에서 발생되는 능력의 차이는 바로 상상력의 그라운드인 메타인지의 차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네이버, 카카오 등 지금의 디지털 생태계를 구축해온 핵심 인재들이 자신의 메타인지에 한계를 두지 않는 교육방식을 통해 성장해왔음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 사회가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미래의 핵심 인재들을 가르치고 성장시킬 것인지 그 방향성에 대해 하루빨리 재고해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두 번째 코드는 ‘이매지네이션’이다. 생각은 사람을 바꾸고 또 사회를 바꾸는 힘이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목표 유도 장치인 상상력이라고 말하며,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원하는 인재상은 더 이상 성적이나 학벌이 아닌 다양하고 다층적인 실무 중심의 문제해결력이 높은 인재상임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어서 세 번째 코드는 ‘휴머니티’다. SNS라는 새로운 네트워킹의 세계는 오프라인의 세상보다 훨씬 더 감성에 대한 배려가 중시되는 공간으로, 인간의 보편적 감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늘 주목하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사실 그동안 배달의민족은 4,000억 원 정도의 해외 자금을 유치해 원활한 배달 생태계 구축에 투자해왔고 그것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달의민족을 달랑 앱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튜브도, 인스타도, 페이스북도 언제나 베껴 만들면 되는 까짓 앱 하나로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생각이 이래서는 포노 사피엔스 표준 사회로 가기 어렵습니다. / 32p

 

 

우리는 보편적 감성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늘 주목하고 거기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던 시대에는 잘못된 행동들도 권력의 힘으로 묵살하고 대중에게 감출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명백히 소비자가 권력인 시대가 되었고 그래서 인간의 보편적 도덕성을 인지하고 거기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그것도 아주 습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어느 자리에 있든, 어떤 대화를 하든 항상 그 기준에 맞추어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늘 배려하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 154p

 

 

 

   네 번째 코드는 ‘다양성’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자본의 힘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대중음악의 생태계가 소비자 팬덤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시대로 이동했음을 보여준 BTS, 중고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편리한 지역 기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근마켓, 이 외에도 넷플릭스와 네이버 웹툰 등의 사례를 통해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더 이상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하는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특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다음 다섯 번째 코드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다. 인류의 기본 생활공간이 디지털 플랫폼으로 옮겨간 만큼 생각의 기준과 행동 역시 이에 따라 변화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어서 여섯 번째 코드는 ‘회복탄력성’이다. 실패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현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다음 일곱 번째 코드는 ‘실력’이다. 학벌, 혈연, 지연이 아닌 자신의 진정한 실력으로 평가받는 시대. 모든 권력이 소비자의 손끝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실력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진만큼 우리가 갖추어야 할 진정한 실력이란 무엇인지 모색해본다. 여덟 번째는 ‘팬덤’이다. ARMY가 BTS를 만들어냈듯이 자본이 아니라 팬덤이 권력이 되는 시대, 기술이 아니라 팬덤을 만드는 기술이 새로운 가치가 되는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울러 저자는 ‘진정성’을 마지막 키워드로 하여 이를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손꼽는다. 개인과 직장, 기업과 소비자, 유튜버와 구독자 그 모든 관계에 있어 진정성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강조하며 그만큼 중요하고 오래 지속되어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플랫폼 기업들의 성공 비결을 요약하면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빅데이터 분석,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을 적용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의 지향점은 일관되고 명백하게 고객의 선택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 선택이 거대 기업으로의 성장을 실현시키죠. 소비자 선택이 성공의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는 것은 시장이 진정한 소비자 권력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249p

 

 

우리 사회는 이미 지독하게 보람이를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보람이를 통해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 배울 차례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던 시대, 혈연·학연·지연이 지배하던 시대를 벗어나 나처럼 전 세계 소비자의 선택을 이끌어낼 실력을 키우라고 보람이가 우리 어른들에게 일갈합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벗어나라고 당당하게 데이터로 보여줍니다. / 260p

 

 

포노 사피엔스 사회는 시스템이 정한 스펙이나 자격증으로 성공하는 사회가 아니라 진정한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굳게 믿고 있던 시스템의 권력은 어느새 소비자에게로 많이 넘어가버렸습니다. 소비자의 자발적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진정한 ‘실력’입니다. / 263p

 

 

 

 

 

 

   이처럼 『CHANGE 9』은 포노 사피엔스 문명의 중심이 될 아홉 가지 코드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하다면 당장, 초등학교에서부터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것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과 기준, 생각의 근본을 모두 바꿔야만 이 거대한 혁명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고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학벌이나 부모의 재산이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 시대, 실력과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더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시대. 그런 시대가 포노 사피엔스의 시대라면 내가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고작해야 책상에 앉아 국, 영, 수를 가르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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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탕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7
이승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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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를 떠도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끝, 그곳에서 만난 과거와 죄의식의 집요한 목소리 그리고 마침내 고백으로부터 얻은 구원!

 

 

 

   캉탕.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 캉탕은 이곳 사람들에 의하면 세상의 끝이라고 말한다. 인구가 많지 않고 외지인이 거의 드나들지 않아 1년 내내 한적한 곳이다. 경영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중수는 어느 날, 자신의 친구이자 정신과 상담의사이기도 한 J로부터 이곳 주소를 건네받는다.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 책상을 치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몸을 일으켜라.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가지 않던 곳으로 가라.’ 그에게 내려진 J의 처방은 니체가 만성적인 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루에 여섯 시간씩 혹은 여덟 시간씩 걸었던 것처럼 되도록 멀리, 되도록 낯설게, 되도록 깊이 현실로부터 떠나 그저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생존을 위한 처방이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늘 최전선에서 보초를 서는 초병처럼 잔혹하고 치열하고 치사하고 제정신이 아닌 듯한 자신의 피폐한 삶에 경고를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J의 설명에 따르면, 그곳에는 젊을 때 소설 『모비 딕』에 빠져 고래잡이배를 탔다가 우연히 나야라는 여인을 만나 정착하게 된 외삼촌이 있다고 했다. 실제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핍이라는 인물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나야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선술집을 물려받아 간판을 모비 딕을 잡으러 가는 고래잡이배의 이름인 피쿼드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중수는 피쿼드호에서 내린 고래잡이 청년이 다른 피쿼드호로 갈아타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자유롭고 나이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밝고 천진한 젊은 노인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한중수가 캉탕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어둡고 무뚝뚝하며 폐쇄적인, 활력이나 젊음도 여유도 없이 자신의 어두컴컴한 방으로 침잠해 들어간 늙은 노인만이 있을 뿐이다.

 

 

 

자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선택의 가능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과 저것이 없거나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없을 때 선택의 가능성은 제거된다. 즉 자유가 없어진다. 벽의 존재가 벽을 넘을 자유를 보장한다. 벽이 없는 곳에서는 벽을 넘을 수 없다. 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벽이 수평의 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버려둠의 상태를 자유와 혼동하지 말 것. / 18p     

 

 

그렇다면, 고래는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자를 유인하는 신화적 동물인 셈이다. 별이 사람을 하늘로 유인하는 것처럼 고래는 바다로 유인한다. 성경이 바다에서 사는 생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고 경이롭다고 지칭하는 리바이어던은 아마 고래일 것이다. 『모비 딕』의 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몸이 큰 향유고래라고 확신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고래를 잡으려는 욕망을 가진 자는 신이 되려고 하는 자이다. 한때 핍도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바다로 나갔고 바다에서 산 것이 아닌가. / 39p

 

 

 

 

  나야가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삶의 모든 의욕을 잃은 듯한 핍의 모습은 한중수가 상상하던 것과는 어쩐지 많이 달라있었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현실로부터 멀리, 현실이 간섭할 수 없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기에 그곳에서 오랜 시간 걷고 또 일종의 자기를 향한 기도이자 일기에 가까운 글을 써내려감으로써 자신을 회복하려 한다. 그러는 동안 피쿼드에서 자신 외에 무엇인가를 쓰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얼마 전 해임된 선교사로, 한중수는 우연히 자신이 도망쳐 온 과거로부터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괴로운 고백을 듣게 된다.

 

 

 

숨(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숨(고 싶어 하)는가.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가. 그가 떠나는 ‘있던 곳’은 어디인가. 두려움이거나 부끄러움이거나 외로움이거나 적개심이거나 죄의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그 모든 것을 키우는 단 한 곳, 나는 그곳을 알고 있다. 과거이다. 가깝거나 먼 과거, 두껍거나 얇은 과거, 치명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과거. / 56p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만을 산다.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선 것만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익어지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낯익은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다. 과거를 없애는 방법은 낯익은 언어가 없는 곳으로 숨는 것이다. 사용되지 않는 모국어는 현재에 대해 아무 발언도 하지 못하는 잊힌 과거를 상징한다. / 67p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이 맹수는 어디에 웅크리고 있는 겁니까? 나를 해치는 이 맹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모르는 이 맹수는 어떻게 내 안에 있었습니까? 자고 있는 이 맹수는 누가 끌어낸 것입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이 맹수를 끌어낼 권리가 나 아닌 누구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맹수가 내 과거라면 나를 물어뜯는 것이 합당합니까? 내 과거는 나의 일부입니까, 아닙니까? 내가 나를 해칠 수 있습니까? / 104p

 

 

 

 

 

 

   이렇게 소설 『캉탕』은 맹수의 날카로운 이빨과도 같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악물린 채 살아가던 세 남자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 도시로 모여들게 된 사연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마치 갑판 위를 떠도는 육신과 영혼이 닻을 내릴 곳을 찾아 캉탕으로 모여든 모양새지만 여전히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지친 육체와 외로운 정신의 선원들처럼 자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떠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한 것은 도망쳐온 과거와 내면에 숨겨둔 자신을 서로에게 ‘고백’하는 일이었다. 사랑하던 여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타나엘로 인해 마침내 한중수는, 그간 자신의 머릿속을 집요하게 울려대는 사이렌의 정체가 빚만 남기고 죽은 노름쟁이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의 죽음을 방치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백들이 저 견고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바다가 저렇게 검푸르고 탕탕하고 깊고 아득한 것은 그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던 한중수의 글에서 알 수 있듯 그렇게 캉탕의 바다는, 절박함에 이른 자들의 수많은 고백들을 품은 속죄와 구원의 공간으로써 우리 안의 저 많은 한중수를, 타나엘을, 스스로 핍이 된 최기남을 이끈다.

 

 

 

그는 신과 양심 앞에 완전하고 충분히 자기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했는데, 그러려면 자기가 매장했다고 표현한 과거의 자기를 무덤에서 파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덤 입구에서 망설이고 얼버무렸다. 한중수는 그의 주저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문장은 완전하고 충분하게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멈추지 않고 삽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와 굳이 삽질을 계속해서 부패해서 냄새날 것이 뻔한 그 안의 자기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 169p

 

 

사연의 주인은 물속에 빠져도 사연은 물속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이 물속으로 뛰어든 뒤에, 그러니까 물 위에 그들의 사연이 남았다. 핍은 사방이 물인 어두운 바다를 소리 죽인 채 떠도는 큰 배와 같다. 그 배에서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는 것이 인생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안에 있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것이 또 인생이다. / 192p

 

 

 

 

  죄와 구원이라는 심연의 깊이를 나로서는 아직 제대로 헤아릴 길이 없다. 그만큼 나는 여전히 얄팍하고 내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두고 있을 리바이어던과 마주할 자신도 없다. 다만 『캉탕』에서 제기하는 ‘걷고 쓰기’를 무던히 해내보일 뿐이다. 그러다 보면 나 역시 캉탕의 바다에 이르러 나의 배를 걷어 올릴 길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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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 - 산책길 들풀의 위로
이재영 지음 / 흐름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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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산책길에서 만난 들풀과 들꽃이 전하는 작지만 단단한 삶의 위로!

아직은 작고 연약하지만 싱싱한 뿌리를 내 안에서 키워내는 법에 대하여!

 

 

  두 달 전부터 매주 주말 아침이면 동네 앞산을 오르고 있다. 평소 산이라 하면 가까운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가볍게 절에 올라가는 정도가 다였지만,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남편의 권유도 있고 해서 산에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1시간 정도면 정상에 올라갈 수 있는 코스라기에 만만하게 봤더니 그만큼 경사가 무척이나 가팔랐다. 올라가는 내내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그저 하염없이 땅만 보고 올라가기에도 벅찰 정도였다. 그렇게 산을 찾은 지 네 번째쯤에 이르고서야 아침 새소리와 산 주변으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 듬성듬성 산 곳곳에 핀 작은 꽃들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징그러워 나도 모르게 소스라쳤던 벌레들도 이제는 덤덤하게 가던 길을 내어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금만 더’ 하고 몰아붙이기를 거듭하다가, 내 안에 고여 있던 숨을 내쉬고 새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오롯이 나만의 호흡과 속도에 집중하다보니 어느 새 내 안에 작지만 단단한 변화가 일어나는 느낌이다.

 

 

 

   자연이 주는 힘이란 이런 건가 보다. 머지않아 마흔을 앞두고 있고, 두 아이를 낳은 지금 나는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이지만 산을 오르고 있을 때면 내 안의 정직한 힘과 분명 괜찮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들여다본다. 『오늘도 흔들리는 중입니다』의 저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걸으면 조금씩 송두리째 흔들렸던 삶의 중심이 잡힌다. 나를 물들였던 것들이 천천히 빠져나간다. 겹겹이 쌓였던 타인의 시선과 기대와 기준들이 사라진다. 바람이 한 겹, 햇살이 한 겹, 나무가 한 겹, 꽃이 한 겹, 흙이 한 겹. 아름다운 것들이 내 속에 스며들어 불필요한 것들을 밀어내고 순한 내가 남는다’고. 그렇게 산책길에서 만난 들풀과 들꽃에게서 위로를 얻고, 흔들리는 내 삶에 작고 연약하지만 싱싱한 새로운 뿌리가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분명히 모든 게 괜찮아질 거예요

 

  적어도 마흔쯤에 이르면 가정이나 직업, 인간관계와 같은 것들이 안정적이고 여유로워질 줄 알았다. 정작 나의 부모님이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어쩌면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상보다 현실을 더 직시하게 되고, 도전보다 타협에 익숙해져서 해결된 것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 듯한 막막함에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시기인 듯하다. 프리랜서이자 가평에서 책방 ‘북유럽(Book You Love)’을 운영 중인 저자 또한 마흔이라는 나이와 함께 매순간 흔들리고 있는 오늘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누군가가 나를 픽 해야만 하는 프리랜서 인생에 일은 점점 줄어들고, 아이는 자라는데 내가 잘 키우는 건지 불안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아내로 엄마로 딸로 언니로 며느리로 친구로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갈수록 익숙해져야 하는데 왜 계속 서툴고 미숙한지, 마흔에 이르러서도 삶은 여전히 만만치 않다.

 

 

 

   그렇게 별일 없지 않을 텐데 별일 없는 척하는 사람들이 밉고 별일 없는 척조차 안 되는 내가 또 밉고, 내가 예상했던 인생은 이게 아닌데 하고 한탄하며 몇 날 며칠을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산책을 나가기로 한다. 딱 열 걸음만 걸어보자, 하고 했던 것이 열을 세고 또 더 세면서 마을을 벗어나 건넛마을에도 가보고 멀리 사는 이웃집에도 다녀오다 보니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푸른 하늘을 향해 전진하듯 얼굴을 들고 있는 주홍빛 유홍초, 더러운 하수구 주변에서도 잘 핀다던 고마리, 작정하고 캐내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우아한 크림색의 왕고들빼기 꽃, 여러 해 겨울을 나며 한 곳에서 오래 아주 깊숙하게 스며든 메꽃, 가을이 되면 화려하게 물드는 저 단풍에게서는 결핍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우리가 본 적이 있거나 혹은 보았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을 들풀과 들꽃에게서 그녀 자신과 삶을 마주한다.

 

 

 

클로버의 잎이 행복에서 행운으로 변하는 건 짓밟혀서라고 한다. 원래 세 장의 잎이 나야 정상인데 잎이 밟혀 생장점이 손상되어 기형적으로 잎이 하나 더 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시골 산책길에서는 찾기 힘들고 상대적으로 사람 많은 도시에서 행운의 네 잎을 발견하기 더 쉽다. 클로버의 이야기를 알게 된 후로 조금은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깨닫기 힘든 곳에 행운이 나타나고 행운을 찾기 어려운 곳에 행복이 가득하다는 것이. / 31p

 

 

가을에 핀 왕고들빼기 꽃은 봄과 여름 내내 어떤 선택도 받지 못한 것들의 결과다. 봄에 왕고들빼기의 토실한 알뿌리를 캘 때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비주얼. 만약 작정하고 왕고들빼기들을 다 캐내버렸다면 바람에 나부끼는 이 우아한 크림색의 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왕고들빼기 꽃을 볼 때마다 선택되지 않은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 회사가, 그 시험이, 그 아이디어가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기회이고 기쁨이라고 이 꽃이 말해주는 것만 같다. / 49p

 

 

사연을 알고 보니 천덕꾸러기가 된 지금의 신세가 안쓰럽다. 이렇게 질리도록 몰려 피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잡풀 취급을 받지는 않지 않았을까? 좀 적당히 드물게, 어쩌다 만나 반가울 수 있도록 드문드문 피었다면 좀 더 많이 사랑받았을 텐데. 하지만 내 생각이야 어떻든 개망초는 이 순간에도 쑥쑥 자란다. 모든 잡풀이 그렇듯이 개망초 역시 밟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으로 치면 대단한 멘탈을 가진 존재다. / 56p

 

 

 

   함께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읽어서일까. 초등학생인 아이를 가평에서 기차를 태워 혼자 청평역까지 보내야 했던 에피소드를 읽는데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정작 아이는 혼자 기차를 탄다는 사실에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처럼 들떠 있는데, 엄마로서는 마냥 아기 같은 아이를 혼자 보내려니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잔소리나 걱정 대신 운동화 끈이 풀어지지 않게 두 번 꽉 묶어 주며 잘할 거라고 엄마 혼자 마음을 다독이는 모습이 어쩐지 내 눈에까지 선하다. 그렇게 아이는 걱정 말라며 가방을 야무지게 매고 건물 안으로 총총히 사라지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누가 키우거나 돌봐주지 않아도 악착같이 잘 자라나는 들풀의 생명력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며 뿌리내리는 그것들에서, 이제는 아이를 세상에 내놓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 역시 언젠가는 품에 안고만 있던 아이의 홀로서기를 응원해줘야 할 때가 다가올 텐데. 지금의 나로서는 그녀처럼 의연하게 마음을 다독일 자신이 없지만, 그때가 되면 이 이야기가 많이 생각날 것 같다.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는 훌륭하게 잘 해낼 것이라고, 엄마인 나도 한번 잘해보겠다고 다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나였을 것이다. 마음대로 이름을 짓고 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한들 그저 나였을 것이다. 미국자리공이 바다를 건너 왔다고 해서 머루로 바뀌지 않았듯이 다르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런가, 동네 뒷길에서 미국자리공과 미국쑥부쟁이와 미국제비꽃과 미국질경이를 만나면 픽 하고 웃음이 난다. 고작 배경을 바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어리석은 시절의 내가 생각 나서. 요즘 나의 열망은 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 73p

 

물건도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그밖의 많은 것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은 자연스레 정리되기 마련이다. 작은 관계, 작은 성취, 작은 성공, 작은 수고, 작은 행복, 작은 즐거움. 음악, 색깔, 향기처럼 아예 손에 쥘 수 없는 것들. 인생에 중요한 건 웅장한 게 아니라 작고 사소해서 긴밀하고 떨어지지 않는 그런 것들이 아닐까. / 208p

 

꽃다지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가볍게 꿈꾸고 가볍게 접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 가벼운 꿈 하나를 채우고, 안 되면 또 금방 뽑았다가 다시 꿈을 넣어두면서 살면 안될까? 그렇게 매일 꿈을 지니되 지니지 않은 채, 가볍지만 놓치지 않으며 산다면 삶이 훨씬 산뜻하지 않을까? 왜 묵직해야 그럴듯하다고 생각할까? 왜 모든 다 원대해야만 할까? 성공도 실패도, 희망도 절망도, 사랑도 실연도 그렇게 기꺼이 뿌리를 내어주지만 금방 다시 자리 잡는다면, 그럴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좀 쉬워지지 않을까?

다시 피어난 꽃다지를 뽑으며 생각한다.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한 번 살아보자고. / 215p

 

 

 

 

 

 

   저자는 산책을 하면서부터 무채색의 세상이 온갖 풀들에 의해 색이 입혀지는 걸 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슬금슬금 작은 연둣빛으로 시작해서는 어느 새 초록 범벅이 되는 흐름, 계절을 넘어서며 아주 작은 것이 눈에 띄지 않게 지속되다가 순식간에 판이 뒤집어지는 걸 목격한다. 씨를 뿌려놓고 언제쯤 근사한 풍경이 될까 너무 아득해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이태 만인가 모래사장을 덮친 파도처럼 외벽을 기세 좋게 자신의 초록으로 뒤덮었던 담쟁이가 그러하듯, 변화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덕분에 다짐한다. 나도 천천히 바꿔보자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당장 달라지길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너무 열심히 말고, 차츰차츰 나아지도록 천천히 말이다.

 

 

 

   사실 마흔이라는 나이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 중에 하나는, 당장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애쓰느라 아등바등하면서 사는 일이 결코 내게 유익할 리 없을 뿐더러 또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변화란, 찬찬히 또한 묵묵히 어느 틈에 색을 바꾸고 불쑥 자라난 자연의 그것처럼 찾아온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그녀처럼 조바심을 가지고 살지 않으려 한다. 마흔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흔들리며 살 거라고. 그런 내 모습을 인정하며 다만 느리더라도 천천히 바꿔보자고 마음먹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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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특별판)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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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매일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후회, 오늘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법에 대하여!

 

 

 

“대가는 오직 뜨거운 피 한 모금이야.

판단은 알아서 하고 결정도 오로지 너희들 몫이야.

예상치 못한 이별 때문에 마음 아프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

사십구일의 시간을 버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다.

나를 만난 것은 행운 중에 행운이야.” / 9p

 

 

 

   이승과 저승이 갈라지는 경계 사이를 흐르는 망각의 강. 불사조를 꿈꾸는 여우, 서호는 곧 망각을 건너기 직전인 두 사람에게 다가간다. 서호는 자신에게 뜨거운 피 한 모금을 주면 그들에게 이승으로 돌아가 사십구일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며 뜻밖의 제안을 한다. 고작 열다섯 살이지만 딱히 삶에 미련이 없는 도영과 달리 이승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저씨 민석은 도영을 꿰어 서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생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지만 이승으로 함께 돌아간다. 단, 나이와 성별과 성격은 그대로 갖고 가지만 생전의 얼굴과 다른 모습으로, 사십구일 동안 머무르는 장소 밖으로 나가면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주의사항을 얻고서 말이다.

 

 

 

서호의 말에 의하면 사망진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강을 넘기 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적은 확률의 끈을 가까스로 잡은 사람들이다. 해외 토픽에서 봤던 죽었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 이야기가 그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살아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서호는 그 가능성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 / 8p

 

 

“이 쪽지에 사십구일 동안 지켜야 할 주의사항이 있어.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고통이 따라올 거야.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고통이지. 그런 일은 없도록 해줘. 사십구일 뒤에 보자. 사십구일이 되는 날, 새벽에 올게.”

서호가 내 손에 쪽지를 쥐어주고 달빛을 따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살아생전에는 얼굴도 모르던 아저씨와 죽어서 사십구일 동안 함께 살게 되었다. / 17p

 

 

 

   구미호 식당. 이제 이승에서 사십구일의 시간을 얻게 된 두 사람이 지낼 곳의 이름이다. 신형 냉장고 두 대에는 음식을 만들 재료가 꽉꽉 차 있고, 창고에도 먹을 것이 넘쳐나서 사십구일 동안 밖에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을 듯하다. 게다가 깨끗한 욕실도 있고 온수도 콸콸 나온다. 죽기 전의 사정에 비하면 이곳 환경이 전혀 나쁠 게 없던 도영으로서는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도영의 엄마는 아빠로부터 수시로 폭력을 당해 일찍 가출을 했고, 아빠는 늘 술을 달고 살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있었지만 걸핏하면 때리고 욕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차라리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복형제인 형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때문에 도영은 할머니와 형이 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찬이네 가게 스쿠터를 훔쳐 타다 사고가 났으니 스쿠터 값을 변상해야 했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오히려 만나지 않는 게 다행이다 싶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이들을 자신의 스트레스 대상으로 삼는다. 교육이라는 멋진 말을 가면으로 쓰고 말이다. / 23p

 

 

 

 

 

 

   반면 아저씨는 식당 밖을 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화가 잔뜩 난 모습이었지만, 이내 식당에서 음식을 팔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밖에 나갈 수 없다면 사람들을 식당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호텔 셰프 출신인 아저씨는 자신만만한 모습이다. 맛집이 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테고, 그러다 보면 만나야 하는 그 사람도 올 거라고 믿는 눈치다. 이렇게 두 사람은 장사를 하기 시작하고, 아저씨가 만든 크림말랑은 금세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사십구일이라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나보다. 이십 일이 지나도록 아저씨가 찾는 사람은 감감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결국 SNS 홍보를 통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크림말랑을 알릴 필요성을 느끼게 된 이들은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게 되는데, 바로 그때 뜻밖의 한 사람이 나타난다. 바로 도영의 이복형제인 형 이도수다.

 

 

 

   다행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도수는 도영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형이 탐탁지 않았던 도영과 달리 도수는 구미호 식당의 말랑크림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는 사이 도영은 어째서 형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인지, 우연히 손님으로 찾아온 수찬을 통해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수찬이 느꼈을 감정까지 알게 된다. 늘 남보다도 못한 가족이라 믿었던 형과 할머니의 진심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이 죽게 된 것은 수찬 때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왕도영으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사랑해본 적이 없던 도영은 살아 있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과 가져보지 못한 감정들로 인해 점점 후회를 하기 시작한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듣기 좋았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저씨는 겪으면 겪을수록 따뜻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저씨가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저씨가 사랑을 더 주고 떠나고 싶은 사람. 애틋하게 아끼고 아끼는 사람. 그런 사람일 거다. / 73p

 

 

수찬이랑 친하게 지내볼걸. 같이 학교에도 가고 같이 놀고, 수찬이가 배달할 때 따라다니기도 하고, 수찬이가 맞을 때 말려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친하게 지내볼걸. 그랬다면 수찬이와 나는 진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거다. 그러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해봤자 소용없는 일들을 한참 동안 생각했다. / 135p

 

 

오늘 할머니에 대해 알았던 것을 예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내 생활은 많이 달라졌을 거다. 그날 밤, 할머니가 나를 찾아다녔다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할머니에 대한 미움은 조금 가벼웠을 거다. 내 체중보다 더 무거운 덩어리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 무거운 덩어리를 가슴에 넣고 다니느라 버거워하며 에너지를 다 쓰지도 않았을 거다. / 187p

 

 

 

 

 

 

   아저씨는 사십구일이 이르기 전에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과 재회할 수 있을까? 도영은 형과 할머니 그리고 딱히 미련이 없던 자신의 삶과 세상으로부터 화해할 수 있을까? 이렇듯 『구미호 식당』은 죽음에 이르기 직전, 사십구일이라는 시간의 기회를 얻은 두 사람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을 후회하고 오늘이라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법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내용의 청소년 소설이다. 특히 소설은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진심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만약 말이에요. 아저씨와 내가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고 쳐요. 누군가 ‘일주일 후에 당신이 죽습니다’ 이러고 알려준다면 아저씨는 일주일 동안 뭘 하겠어요?” 소설 속에서 도영이 아저씨에게 건네고 있는 이 질문은 곧 독자인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질문이기도 하다.

 

 

 

아저씨는 음식을 하면서도 여전히 식당을 내다봤다. 아저씨의 기다림이 계속되어도 서지영이라는 사람은 절대 오지 않을 거다. 나나의 행동이나 아저씨를 찾아왔던 남자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제삼자인 내가 봐도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어쩌면 아저씨도 그걸 알고 있을지 모른다. 시원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면 좋을 텐데. (…) 내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 146p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붙잡아 매어 내 옆에 두려고 하는 사랑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존재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 209p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을 얻는 출발점에 섰을 때 죽음이라는 것도 함께 얻어. 더불어 행복과 불행이라는 것도 같이 얻지. 살아가며 행복과 불행, 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오로지 자신들의 몫이야. 제대로 살면 행복하지. 제대로 산다는 것은 후회하지 않는 삶이지.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마음을 열고 살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어.” / 228p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판타지 소재를 활용해 상상력을 자극하고, 따뜻한 동화로 완성시킨 작가의 내공이 그럴 듯하다.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늘의 시간과 사랑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권하기 좋은 소설이다. 아울러 독후 활동의 소재로 삼기에 좋은 요소도 많으니 이를 적극 활용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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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 삶에 깊은 영감을 주는 창조자들과의 대화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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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것들!

19인의 예술가들의 말과 사유, 그 독창적인 세계관을 들여다보는 특별한 독서를 경험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칙을 세운 것은 아니지만, 혼자 여행을 할 때면 나는 꼭 그 지역의 대표 미술관을 찾아가곤 했다. 특별히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다. 온전히 나만의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볼 능력이 있다거나, 새롭게 혹은 다르게 보는 눈을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거기엔 끊임없이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 매체와 복잡하고 지친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어떤 이면의 세계 즉,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심연의 공간으로 불쑥 들어가게 하는 듯한 묘한 힘이 있다. 그렇게 예술가들이 자신의 내면과 오늘의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내가 느끼는 모든 갈증과 괴로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조금씩 다가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의 저자 윤혜정 역시 ‘길바닥(세상)에 널브러진 책가방(대상) 하나도 온전한 시선으로 보고 전할 수 있는 힘, 다르게 보기뿐 아니라 다르게 반응하기, 다르게 생각하기, 다르게 제시하기, 다르게 쓰기가 절실’했던 자신에게 예술가들은 ‘근본적인 갈증을 해소해 준 대상’이었으며 이들 특유의 통찰력은 ‘어디서도 배우지 못했고, 누구도 일러주지 않은 영감 그 자체’였다고 말한다. 그렇게 예술과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것들은 저마다에게 다른 이유로 의미가 된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의 ‘나의 예술가들’이,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술이 침범할 수 없는 곳은 없어야 하고,

예술은 최대한 모든 각도를 반영해야 합니다. / 아이작 줄리언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수백 명의 예술가들을 만나 온 베테랑 인터뷰어이자 『하퍼스 바자』와 『보그』에서 피처 디렉터로 오랜 세월 활동한 저자가 자신의 특별한 예술가 19인과의 인터뷰를 엄선한 책이다. 그녀는 이 19인의 아티스트들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실로 유의미한 세계를 구축해 온 예술가, 강력한 유명세 덕에 실체보다 거대한 이미지에 둘러싸인 예술가, 아끼는 친구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예술가, 누가 뭐라 해도 그냥 좋은 예술가를 선별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대체로 예술에 대한 편견을 넘어 현시대에 필요한 개념과 이상적인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하는 예술가들로 엄선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책은 이 19인의 예술가들과 나눈 인터뷰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과정 그리고 그들이 품고 있는 세계관, 실제 작품 도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예술가와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들을 제공한다. 덕분에 우리는 예술가들로부터 예술 이상의 것을 듣고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모든 고정관념에 저항하면서 우리가 엄혹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놓친 세계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생각의 끈을 흔드는 인터뷰에도 삶을 살듯 예술을 하듯 답을 써 보려 합니다. 이렇게 길을 찾는 해방의 순간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으며, 예술을 지속할 수 있을까요. 내가 추구하는 건 명성이 아니라 진실되고 정직한 가치입니다.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거짓된 예술계의 행태는 개인과 사회를 기만하는 행위이며, 나는 이를 예의주시할 겁니다. 예술 하는 행위 자체로 영혼의, 사회의 등대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 김수자 편 중에서 70p

 

 

그에게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철학적인 일이며, 그런 면에서 그의 말은 언제나 유효하다. “내가 하는 예술이라는 건 생산적이거나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내 작업의 논리는 수동성, 즉 이행할 필요가 없는 무언가에 대한 거예요. 고립, 평온과 관련된 동시에 꿈같은 겁니다. 만약 작가가 작업에 어떤 가치를 설정해 버리면 그 작업은 활력을 잃은 채 성장을 멈춰 버릴 것입니다.” / 우고 론디노네 편 중에서 131p

 

 

 

   책은 출판, 디자인, 만화, 그림, 사진, 문학,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두루 만나본다. 이 중 첫 장에서 소개된 출판 장인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편은 단연 인상적이다. 명실상부 출판계의 전설이자 아트북의 거장인 그는 “책이야말로 가장 민주적인 예술 작품”이며 “아티스트, 디자이너, 인쇄업자, 출판업자가 함께 만드는 크리에이티브한 과정의 공생”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콘셉트 회의부터 바인딩, 생산 공정, 마지막 인쇄에 이르기까지 모든 출판의 과정을 한 지붕 아래서 진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이 외골수 장인은 화약약품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적인 제작 환경을 구축하고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더라도 이상적인 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아끼지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건 당신과 책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단한 사건이에요’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책이 대량생산의 아이템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이렇듯 우리에게 남다른 가치를 전한다.

 

 

 

“당신이 책을 만든다면 모든 창의성, 에너지, 돈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입할 수 있는 책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싸구려 종이에 최소의 돈만 투자하고 제대로 된 이미지 작업을 하지 않으며, 페이지 수를 줄이고 저렴한 재질의 커버를 쓴다면, 아무도 당신이 만든 책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100년 혹은 200년 후 더욱 가치 있을 좋은 책을 만드는 슈타이들의 완벽주의는 초심으로 돌아가 “좋은 책을 만든다”는, 기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다. /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편 중에서 26p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60퍼센트는 열정, 20퍼센트는 필요성 그리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최소한의 이익입니다. 그중 60퍼센트의 열정은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죠.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책으로 만들고 싶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아티스트도 있지만, 유명하지 않더라도 우수한 품질의 책은 팔립니다. 책은 대량생산의 아이템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소 로맨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시장에서 살아남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편 중에서 38p

 

 

 

 

 

  유독 ‘언어의 힘’을 믿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예술을 선보이는 아티스트들이 눈에 띤다. 대표적으로 제니 홀저가 그러하다. 사회와 개인, 거대 담론과 일상을 관통하는 그녀만의 시대의 명상록은 전쟁, 권력, 학대, 섹스, 테러, 불평등, 공포, 탐욕 등 인류가 창조한 뿌리 깊은 비극을 정면으로 향한다. 이는 강력한 공공성을 담보로 하며 시각적으로 정치화된 제니 홀저의 문장은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전제를 재고하게 한다. 이데올로기, 욕망, 두려움, 유머, 분노, 증오 등 사회적 잠재의식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며 창백한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삶의 관성을 거슬러 끊임없이 각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둘러싼 진실과 그 이면을 질문하는 예술가들의 용감한 방식은 우리들의 삶에 유의미한 질문을 던지며 이것이 얼마나 유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삶과 미술이 결코 분리된 대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김수자, 직업이나 젠더, 예술, 영화 등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깨뜨리며 가히 모방불가, 예측불가의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틸다 스윈턴, 영상으로 정치보다 더 역동적인 시를 쓰며 정치적 예술의 표본을 보여주는 영상설치작가 아이작 줄리언도 마찬가지다.

 

 

 

“디자이너의 책임은 가랑비처럼 삶에 조금씩 스며들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디터 람스야말로 20세기가 낳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순수한 이상주의자다. / 디터 람스 편 중에서 108p

 

예컨대 조각의 형태에 능동성을 부여한다는 건 작가인 나의 가치를 주입시킨다는 뜻입니다. 반면 내 작품이 수동적인 이유는 작품 앞에 선 관객들이 각자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도록 결말을 열어 두기 때문이죠.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행위는 열린 해석을 가져올 수 없게 만들어요.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현재 쓰는 언어를 반영하는 거예요. 동시에 예술은 시간을 초월하는 언어를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예술이 50년 후에는 또 다른 언어로 이해되겠지요. 그렇게 언어의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 우고 론디노네 편 중에서 138p

 

 

유크로니아란 말 그대로 ‘없는 시간’인 동시에 ‘궁극적으로 좋은 시간’을 의미한다. 유토피아가 공간 개념의 이상향이라면, 유크로니아는 시간 개념의 이상향이다. 즉 유토피아가 끝내 발견할 수 없을 거짓말 같은 곳인 반면 유크로니아는 집중과 몰입으로 닿을 수 있는 시간 혹은 물리적 시간 이면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내 안에, 우리 사이에 존재할 법도 하다. 유크로니아의 상대적인 시간 개념을 빌려 건네는 공동체와 이상향, 자기성찰의 화두는 언젠가부터 그녀의 디자인을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로 뿌리내리고 있다. / 마탈리 크라세 편 중에서 415p

 

 

 

   이 외에도 열린 실험을 통해 매번 전에 보지 못한 형태의 독보적인 건축을 선보이는 프랭크 게리, 독창적 미학으로 세상의 낯선 구석과 삶의 고약한 지점, 인간의 숨은 욕망을 직시하는 박찬욱, ‘나’를 화자로 하되 보편적, 객관적인 인간 삶의 드라마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프랑스 문학의 대가 아니 에르노, 공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재하는 사진작가 칸디다 회퍼, 더 나은 미래와 성숙한 공동체를 향한 확고한 의지와 실천으로 혁신적인 작업들을 선보이는 마탈리 크라세, 대담한 조형 언어와 다감각적 설치작품을 통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현대미술가 양혜규, 솔직담백한 그림을 통해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도시풍경 화가 장-필립 델롬에 이르기까지.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은 조금은 우리가 알고 있었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나봄으로써 매우 지적인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나는 말하자면 곧 멀티스크린 조각가가 되어 여러 개의 스크린으로 시선을 분산시키고, 한곳에서 모든 이미지를 보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듦으로써 무언가를 다르게 보는 방식 혹은 언어를 개발했어요. 미술관에서 우리는 휴대폰을 보고, 메시지를 읽고, 사진 찍는 다른 관객들로 인해 방해를 받죠. 멀티스크린 작품은 내가 “방해받는 관객”이라 부르는 이들의 거울이며,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른 채 이곳저곳 이동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이 상황은 우리 사회의 거울입니다. / 아이작 줄리언 편 중에서 189p

 

현대의 건축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음… 인간성을 존중하고, 존엄성을 키워 가고, 부정적이지 않은 거요. 프로젝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에 상관없이, 얼마나 좋은지를 먼저 살펴야 해요. 그건 사람들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해요. / 프랭크 게리 편 중에서 243p

 

칸디다 회퍼는 건축과 인간, 공간과 문화 같은 상관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회퍼만의 순수하고도 고요한 시선은 공간의 생김새는 물론 보이지 않는 진리, 즉 인간이 만들어 낸 공간의 질서, 순리, 체계, 신념까지 포착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사진은 단순한 건축 사진이 아니라 공간의 초상이다. / 칸디다 회퍼 중에서 362p

 

 

 

 

  프랑스 예술가 로베르 필리우는 “예술은 인생이 예술보다 더 흥미롭다고 생각하게 만든다”고 했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19인의 거장들이 예술로 하여금 우리에게 무엇을 열어 보이는지를 경험케 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예술서이자 훌륭한 인문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저마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을 하나씩 채워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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