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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맨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8
백민석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7월
평점 :

현실과 소설이 마치 평행 우주처럼 펼쳐지는, 기묘한 기시감을 경험하게 하는 소설!
전 대통령 탄핵 소추의 기각, 이 가정법에서 출발하는 낯설지만 낯익은 불안 그리고 공포!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2016년, 우리는 아직도 대통령 탄핵을 앞세운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없던 대규모 촛불 시위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정부 출범 이전부터 각종 정책에 비선실세인 최순실이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고, 이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전면에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로 인해 국회에서는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으며, 이듬해 3월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로 대통령 박근혜는 파면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이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또 변화한 것은 무엇일까. 만약, 그날 헌법재판소가 탄핵 결정이 아니라 탄핵을 기각했다면 과연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스물여덟째 작품, 백민석의 『플라스틱맨』은 바로 이러한 가정법 아래에서 출발하는 소설이다. 탄핵 결정과 기각, 실제 우리가 경험했던 현실과 소설의 가정법이 마치 평행 우주처럼 펼쳐지는 듯한 이 놀라운 느낌은 낯설지만 또한 너무도 낯익어서 기묘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어떤 일이 닥쳐도, 어떤 상황을 맞닥뜨려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의 열전도율이 낮아 얼굴까지 전해지지 않는
사람이거나, 마음이 아예 없는 사람이거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다.
그 플라스틱이 어느 날 말을 하기 시작했다. / 12p
우리는 모두 플라스틱맨을 알고 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청와대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 한 명을 토요일에 살해하겠다.”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으면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겠다는 협박이 담긴 USB가 각 언론사에 도착하면서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 USB가 담긴 우편물에는 지문이나 머리카락 같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USB는 어디서나 흔히 살 수 있는 제품이었으며, 무슨 기기로 녹음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단서조차 없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억양이 없는 목소리, 흡사 마네킹 혹은 플라스틱 인간이 떠들고 있는 듯한 협박범의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불쾌감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경찰 내부에서는 협박범의 신원이 밝혀질 때까지 그를 ‘플라스틱맨’이라 부르기로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은 USB에 담긴 진의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대통령더러 물러나라는 협박인데도 청와대로 보내지 않고 언론사로 보낸 것 하며, 누굴 어떻게 해치겠다고 특정하지도 않는 데다 그저 이번 주 금요일, 토요일이라고만 한정할 뿐 날짜도 특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협박범은 날짜가 지나도 협박을 실행에 옮겼는지, 안 옮겼는지의 여부도 알려오지 않는다. 온 언론이 대통령 탄핵 이야기를 하고 있고,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지는 중이며 국회에서는 탄핵소추를 논의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렇게 모호하기만 한 플라스틱맨에 대한 관심은 점점 사그라지고, 단독으로 사건을 전담하게 된 하 경감조차 온 나라가 대통령 퇴진을 두고 소란스러운 가운데 마치 복사해 붙인 똑같은 파일로 한 달 반이나 협박을 반복하고 있는 협박범 태도로 보아서는 어떤 게으른 놈이 그저 농담을 지껄이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마 있는 제보자들의 전화를 받으면 한결같이 “내가 플라스틱맨을 알아요…….” 라고 말하지만 늘 모른다는 사실로 통화는 끝난다. 하 경감은 그저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고, 그들을 얼마나 망쳐놓고 싶어 하는가 하는 사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기자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자기 의견을 가질 만한 놈은 아닌 것 같던데.”
기자는 이 세상에 자기 의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 아냐고 물었다. 협박범도 그저 남들이 대통령 쫓아내자니까 그게 역사의 소명인 줄 아는 어중이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하 경감은 동의할 수 없었지만, 냉소적인 게 어쩐지 기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62p
하 경감은 잠에 빠져들면서도 생각의 한끝을 놓지 않았다. 흉포는 플라스틱맨의 특징이 아니었다. 플라스틱맨은 너무나 흉포해서 누구의 눈에나 띄도록 생겨먹은 놈이 아니었다. 그 정반대였다. 제보자들을 저마다 자기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들 만큼 흔하고 평범하고 레디메이드 같을 게 분명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대량생산 플라스틱 마네킹 같은. / 86p
“촛불집회에 100만 명씩 나오는데 그게 무슨 증거가 돼요?”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어요. 이놈의 사회는 충격이 필요하다.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박근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청와대 앞길에 생피가 뿌려지는 꼴을 보게 될 거다……. 유튜브에 나온 협박하고 똑같죠.”
제보자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양 소곤소곤 목소리를 낮췄다. 하 경감은 한숨을 쉬었다. 이 나라는 ‘죽고 싶다’란 말과 ‘죽여버린다’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나라다. / 92p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보된 인적 사항들을 통해 플라스틱맨 용의자들을 추적하던 도중, PC방 살인사건의 용의자이자 플라스틱맨으로 추정되는 이를 쫓다가 동료가 상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연이어 처음 USB 파일을 제보하고 유튜브로 공개하면서 용의자 찾기에 도움을 주었던 시사주간지 기자마저 실종된다. 그러는 사이에 마침내 탄핵 최종 선고일이 다가오고, 탄핵이 거의 확실시 되는 가운데 이야기는 뜻밖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대통령 탄핵이 기각된 것이다. 하 경감으로서는 이 판결의 여파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는 가운데, 601번 버스가 폭발하고 헌법재판관이 살해되며, 성당 예배당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이 모두가 플라스틱맨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하 경감은 플라스틱맨 사건이 의미나 가치 없는 사건으로 치부되던 신세에서 벗어나 드디어 실체를 가지게 된 것에 내심 설레는 것을 느낀다.
하이디는 요들송의 화창한 음표들 너머로, 검은 해일이 일본 열도를 휩쓰는 장관을 바라봤다. 가고시마를 덮치고 후쿠오카를 지나 쓰시마섬을 삼키는 모습을 봤다. 해일은 계속 밀려들었다. 거제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덕유산 국립공원이 잠기고 곧바로 대전이 사라졌다. 해일이 그 모든 것을 덮친 시간은, 하이디가 요들송 한 소절을 부르는 시간보다 짧았다. 검은 해일은 평택을 집어삼켰고 과천이 사라졌다. / 57p
이쯤 되면 『플라스틱맨』은 마치 추리소설처럼 용의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마침내 사건이 종결되는 수순으로 나아갈 듯하지만, 소설은 예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청와대에서 지시가 내려와 테러사건이 경찰청 최우선 선결과제가 되고, 경찰청 내에서 유능하다고 소문난 수사관들이 차출되어 위기대응팀이 꾸려지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지만 하 경감은 그곳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테러가 일어나던 순간까지도 플라스틱맨을 쫓고 있었고 그에 대한 가장 많은 자료를 갖고 있던 그녀지만, 고작 떨어지는 명령이라고는 ‘우악스런 촛불집회 시위대로부터 평화염원집회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광화문에 나가라는 지시만 내려올 뿐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이 기각된 이후, 태극기 부대니 친박집회니 탄핵반대집회니 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집회들이 이제는 평화염원집회라 불리게 되고, 특정 세력이 오랜 기간 독점하는 상황은 불합리하다는 서울행정법원의 판단에 의해 광화문 광장은 더 이상 촛불 집회가 아닌 평화염원집회들을 위한 자리로 뒤바뀌게 된다. 더욱이 서울행정법원은 연이은 테러의 책임 역시 촛불 세력에 있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하는 바, 촛불집회 자체가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직시한다. 전에는 시민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던 행정부와 사법부가 권력의 논리에 따라 편을 바꾸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플라스틱맨의 협박은 계속된다. 한두 주에 한 번씩 우편물이 방송국에 보내지고, 과연 그가 했는지 증명할 수 없는 테러사건들이 일어나 희생자들을 낳는다.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고, 경찰의 진압은 갈수록 강경해지고, 개헌 논의는 불이 붙는다. 광장마다 꾸역꾸역 흥분한 시민들이 몰려나오고, 다시 협박이 방송을 타고 테러가 일어난다. 하 경감은 마치 양면이 뒤바뀐 필름지를 겹쳐놓은 듯 어제는 저쪽이었던 이들이 오늘은 이쪽이 되어버린 광경의 중심에 서서 결코 끝나지 않을 끝과 마주한 기분을 느낀다. 이로써 소설을 읽고 있던 독자들은 더 이상 플라스틱맨이 누구인지, 탄핵이 선고되었든지 기각이 되었든지의 여부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진영의 논리와 이익을 지키려는 집단의 폭력성은 여전하고, 권력의 실세에 따라 움직이는 기득권은 기생충 같은 습성을 버리지 못하며, 공감을 상실한 우리들은 마음의 온도를 잃어버린 채 틀에 넣어 만들어진 것처럼 양산되고 복제되고 반복되는 저 수많은 플래스틱맨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그만 허무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직접 목격했고, 경험했던 우리 시대의 역사여서 더 비참하고 서글픈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읽었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목화밭 엽기전』, 『죽은 올빼미 농장』, 『아바나의 시민들』, 『멜랑콜리 해피엔딩』의 단편수록작 <냉장고 멜랑콜리> 그리고 이번 작품에 이르기까지. 어쩌다보니 작가 백민석은 내가 한국 문학이라는 걸 처음 접하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듬성듬성이지만 변함없이 찾게 되는 몇 안 되는 작가인 듯하다. 다소 냉소적이지만 시대의 절망과 폐허 같은 현대인들의 삶의 허기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직조해낼 줄 아는 그의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서도 늘 생각난다. 다음에는 또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플라스틱맨』을 읽고 나니 나는 이전보다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