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타 전략 - 완벽함에 목매지 말고 ‘페어링’에 집중하라!
임춘성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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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인문학을 접목한 초개인 시대를 위한 비즈니스 전략!

딱딱한 경영서가 아닌 발상의 전환이나 통찰의 기회로 활용하기에 좋은 책!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사회적 변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즈니스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른바 언택트 시대, 초개인의 시대로 명명되며 사회보다는 가족, 집단보다는 개인이 우선시 되는 현상이 한층 강화된 가운데, 이제 기업은 초인간적이며 초개인적인 고객을 상대하고 지속적으로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개인’이 강조되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 앞에서 여전히 ‘관계’야말로 비즈니스 전략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베타 전략』은 의아스러우면서도 자못 흥미롭다. 근시적이고 단시적인 속성을 지닌 초개인들에게 존재 중심의 관점이 아닌, 관계에 기반한 전개, 관계 중심의 관점, 관계에 역점을 둔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 있는 연결을 위해 베타가 추구하는 것

 

 

 

   그리스어 알파벳의 두 번째 문자, β. 이름하여 베타. 알파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알파를 만들어가는 과정 정도로 여겨지는 베타는 제품 개발에 있어서도 완성품 알파로 가는 중간 제품, 중간 버전을 가리킨다. 『배타 전략』의 저자 임춘성은 베타를 이렇게 정의한다. “베타는 움직이는 무엇입니다. 마치 시계추처럼, 진동자처럼, 나와 너, 당신과 당신의 그대, 우리와 너희, 그리고 기업과 고객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엇입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양편을 끊임없이, 끊김 없이 이어주는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끊임없고 끊김 없는 관계’, ‘끊끊한 관계’를 궁극적으로 지향함으로써 끊이지 않게, 끊기지 않게, 양편의 관계를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살아 있는 연결로 만들어주는 무엇이 베타라는 것이다.

 

 

 

   기업과 고객의 살아 있는 연결을 위해 베타가 구체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3가지다. ‘쾌속’, ‘중독’, 그리고 ‘지속’이다. 책은 바로 이 3가지 목표를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1장 ‘베타의 각성 첫 번째-완벽함을 잊자’에서는 완벽함 대신 스피드와 타이밍을 아우르는 쾌속의 가치를 설명한다. 저자는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게 하는 자의 결점을 계산한다’는 주요 명제를 제시하며 나의 최선이 상대에게는 최선이 아닐 확률이 훨씬 더 높을 수 있음으로, 완벽해지기 위해 고군분투 하느라 상대를 ‘기다리지 않게 할 것’을 강조한다. 이때 완벽함을 잊는 대신 기억할 것이 바로 쾌속인데, 그냥 스피드가 아니라 상대가 기꺼워하는 속도, 상대와 고객을 기다리지 않게 할 정도의 적당한 스피드를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품을 개발하고 어떻게 서비스를 설계해야 고객을 기다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베타를 채택하고 활용해야 할까? 책에서는 새로움을 포장하는 법, 꾸준한 새로움을 제공하는 옵션들, 고객이 원하지 않을 때는 주지 마라는 단호한 방법 등을 제시한다.

 

 

 

상대에게, 고객에게 새로움을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뭔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 상태의 변화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홀로 있는 지금 상태에 변화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늘 똑같았던 나, 늘 같았던 상품의 모습에 변화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상대와 고객을 기다리지 않게 하려면 새로움으로 포장해야 합니다.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 효율적인 새로움으로 말이죠. / 88p

 

 

제한적 다양의 베타는 옵션으로 변화 가능성을 주고, 이로써 꾸준한 새로움을 제공합니다. 포장한 새로움으로 혹은 옵션으로 무장한 새로움으로 상대와 고객이 느끼는 체감속도에 맞춰 기다리지 않게 하는 게 관건입니다. 어차피 물리적인 거리, 시간, 속도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니 ‘체속’으로 ‘쾌속’을 실현해야 하니까요. / 96p

 

 

 

 

 

 

   이어 2장 ‘베타의 각성 두 번째-훌륭함도 잊자’ 편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중독’이다. 자칫 어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품는 것, 충족되지 않은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는 것,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 자발적으로 계속적으로 애쓰는 것’을 한마디로 중독이라 말한다.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으로 나와 나의 기업 상품을 갈구하게 하고, 중독으로 하여금 나의 상대가 스스로 노력해서, 나에게 반응하고 나의 기업에 호응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 필요한 태도는 훌륭함을 잊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시간에 따라 변하고, 그들의 특성도 변하며 특성의 기준과 그 기준으로 훌륭하다고 할 만큼의 수준도 변한다. 그러니 그때그때 시시각각 바뀌는 기준에 맞추느라 애쓰지 말고, 상대와 관계하고 고객을 응대하는 현실적인 방편을 찾는 것이 더 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요는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는 다음의 명제에 따라 한꺼번에 다 주지 않을 것, 뭔가를 계속 진행되게 할 것, 잊지 못할 순간을 제공할 것과 같은 베타 전략이 필요하다.

 

 

 

 

 

 

   3장 ‘베타의 각성 세 번째-오직 순간의 진실이다’에서는 ‘순진한 자는 순간의 진실을 영원이라 믿는다’는 명제와 함께 ‘지속’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냉정하게 말해 베타 전략의 가정은 나와 당신 사이, 나의 기업과 고객 사이의 관계는 ‘순간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혈연으로 초월한 관계가 아닌 이상 나에게 내민 손, 열린 마음, 보여준 호의가, 모두 순간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소중한 상대와, 고객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인데, 한 번 주고 한 번 받고, 한 번 팔고 한 번 사고, 그렇게 끝내지 말고 끊임없이 끊김 없이 역동적으로 기꺼운 순간을 지속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무엇일까?

 

 

 

   저자는 여기에 베타 전략의 핵심 개념인 ‘페어링’을 강조한다. 다른 기기, 다른 핫스팟과 끊임없이, 끊김 없이 페어링하듯 연속적으로 기업과 고객은 바람직한 관계와 순간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이 기업의 제품을 사용할 때마다,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계속 페어링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업의 브랜드든, 제품의 추가 기능이든, 서비스의 후속 버전이든, 제품과 서비스의 또 다른 세부 옵션이든,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온오프믹스든 계속 고객과 페어링함으로써 순간의 진실을 지속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고객과 꾸준히 의논하고,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의 제3자를 끌어들이는 방식들이 필요하다.

 

 

 

‘순간 되지 않게 함’은 당연히 ‘지속’입니다. 어려웠던 만남을, 어려운 접점을, 어렵게 이루어진 ‘순간의 진실’을, 어렵지만 이어가고 싶은 완벽하고 훌륭한 순간을, 순간으로 끝내지 않으려면 지속하는 방법을 찾아야겠지요. 관계의 가치와 순간의 진실을 지속해야 합니다. 나와 너, 당신과 그대, 당신의 기업과 고객, 서로에게, ‘지속’입니다. / 198p

 

 

 

 

 

  이렇듯 『베타 전략』은 개인과 기업 사이에 존재하며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베타를 통해 ‘관계와 연결’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 비즈니스 전략으로 삼은 경영서다. 흥미롭게도 이 책은 비즈니스나 기업이라는 단어를 빼놓으면 인간관계 혹은 인생전략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을 만큼 다소 인문학적이다. 때문에 반드시 기업 경영에 관심이 없더라도 나와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서 읽어보기에 무리가 없다. 또 바로 눈앞에서 강의를 하듯 편안하게 읽히니 누구든 한 번쯤은 베타 전략에 귀를 기울여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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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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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에 소소하게나마 실행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

버림과 비움만이 목적이 아닌, 삶의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책!

 

 

   자주 쓰는 에코백을 세탁하기 위해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비우려니 영수증이 한가득이다. 아이들 챙기느라 영수증은 대충 가방에 쑤셔 넣고 나중에 정리해야지 했던 것이 어느새 산더미가 되어 있었던 거다. 가위로 하나씩 잘라가며 한참 동안 정리를 한 후, 그 사이에 쓸 가방을 꺼내 물건을 담으려니…… 아뿔싸. 거기에도 영수증이 또 잔뜩 있다. 이쯤 되면 영수증이 가방 안에서 자가 증식하는 게 틀림없다. 어디 이뿐일까. 겨울 이불을 정리할 데가 없어 큰 정리함 하나를 비우고 그 안에 넣으려고 했더니 정리함 안에 웬 물병이 가득 들어 있다. 예전에 큰 아이 돌잔치 할 때 답례품으로 준비했던 것에서부터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거나 책을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굿즈, 각종 행사 기념품까지. 디자인이 예쁘다고 모으고, 아이들 크면 물통 자주 바꿔줘야지 하고 보관해두고, 저마다 기능도 다르니 유용하게 쓰이겠다 싶어 챙긴다는 게 이 정도로 쌓여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주 쓰는 물병 두 개만 줄곧 쓰고 있으면서 말이다.

 

 

 

   사실 『단순함의 즐거움』,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와 같이 미니멀리스트 생활자의 책을 읽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몇 번 실천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 때뿐이라 살림은 갈수록 더 늘어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하나일 때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면, 이제 돌 지난 아이까지 키우고 있으려니 부피가 큰 육아용품이 만만치 않게 집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슬슬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거나 중고장터에 내놓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자기가 터뜨린 풍선 조각까지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첫째 아들 때문에 문밖으로 가지고 나가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미니멀리스트는 고사하고 맥시멀리스트에 다다를 지경이니, 정말 제대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점점 더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물건은 나를 절대 대변해주지 않는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는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는 초보 미니멀리스트의 도전기다. 책은 미니멀리스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저자가 무작정 비우기에 도전하다가 몇 번을 망설이고, 그러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차근차근 비움을 실천하는 과정들이 솔직하게 담겨있다. 남들처럼 완벽하진 않지만,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 소비에 대한 가치관과 삶의 자세까지 바뀌기 시작한 그녀의 담백한 고백들을 읽다 보면 확실히 따라해 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집안일하는 게 귀찮아서, 하지 않기 위해 아예 미니멀리스트가 되어보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이라니. 주부들이라면 이런 동기부여에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물건 비우는 일이 생각 이상으로 험난한 여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물병만 한가득 쌓아두고 있었던 나처럼 그녀 역시 좋아하지 않는 향의 향초, 발이 불편한 슬리퍼, 우중충한 그림이 그려진 컵 받침 같은 사소한 물건들에서부터 자신의 쓰임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얻어온 물건들, 수납장, 입지도 않는 옷들로 혼란스러운 집안을 하나씩 둘러보며 비우는 데 애를 먹는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그놈의 ‘언젠가’일지도 모른다던 그녀의 말에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살 빼면 입어야지, 유행은 다시 돌고 도는 거야, 나중에… 그래 나중에, 이 말을 반복하며 고이고이 모셔두다 고대 유물이 될 지경인 것들이 어디 한 둘인가. 그 중에서도 물건 비우기 중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것이 바로 어린 시절 ‘추억의 물건’이라던 그녀의 말처럼, 지금은 듣지도 못할 카세트테이프나 CD에는 왜 그리 미련이 남는 것이며 고장이 난 휴대폰과 연애시절에 맞춰 입은 커플티(이젠 입을 수도 없는 사이즈에 남편 것은 또 어디에 있는지도 모름)는 또 왜 버리지 못하는 것인지.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 화장대 서랍을 정리했는데, 결혼식 부조금 봉투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후문이…….

 

 

 

긴 시간 옷을 비우며, 지금껏 옷장을 채우고 있던 게 단순히 옷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공간은 욕심, 허영심,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물론 추억이라는 아련한 감정도 꽤 있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감정을 옷과 함께 비워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안 그랬다면 나는 새로운 옷과 함께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더하기만 했을 것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옷장을 둘러봤다. 한결 깔끔해진 모습을 기대했는데… 웬걸, 놀랍게도 옷장은 여전히 옷으로 빽빽했다. / 52p

 

 

물건 비우기 중 가장 난이도가 높았던 것은 바로 어린 시절 ‘추억의 물건’이었다. 다른 물건은 비워낸다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새롭거나 더 좋은 것으로 구입할 수 있지만 추억의 물건은 한번 사라지면 영영 이별이었다. 다시 구한다 해도, 새로 산 물건에는 과거의 내 손길이 닿아 있지 않으므로 가지는 것에 의미조차 없었다. 그래서 추억의 물건을 비울 때만큼은 오래도록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 64p

 

 

 

 

 

 

이거, 비워도 될까? 이거, 나에게 필요한 걸까?

 

 

  처음에야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보겠다고 호기롭게 나서 보지만,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럴 때 저자는 ‘물건을 비울 때 스스로 해보면 좋은 질문들’이라는 제목으로 좋은 팁을 남겨놓았다. 첫째는 ‘나에게 필요한 물건이 아직도 많다고 느끼는가?’다. 집에서 여백을 발견하면 자꾸만 채우고 싶어지는 마음, 우리 집에 두면 포인트가 될 것 같아 필요치도 않았던 것을 사게 되는 충동 구매, 이렇게 자꾸만 무언가를 더 사고 싶고 필요로 할 때면 그 전에 한 번 더 고민해보자. 나에게 필요한 물건은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두 번째는 ‘단지 미련이 남아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자. 한때 순정만화책을 모으는 걸 좋아했던 나는 신혼집에 들고 올 수 없어서 친정집에 두었다가 엄마가 대학 교재와 함께 더 이상 필요 없는 책인 줄 알고 고스란히 버렸다던 눈물의 비화가 있다. 그때는 속이 많이 상했는데, 막상 그 많은 책을 놔둘 곳도 없는데 꾸역꾸역 들고 올 바에야 종이 수집하는 어르신들 용돈 벌이에 보태는 선행이라도 베풀었다면 오히려 다행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외에도 같은 아이템을 다시 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지, 나를 위한 물건인지 남을 위한 물건인지, 이 물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한지를 질문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기에 물건을 집으로 들일 때 내가 물건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인가, 충동적으로 가지고 싶은 물건이든 첫눈에 마음이 뺏겨버린 물건이든 간에 이 물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예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용하고 기쁘게,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다 헤어질 수 있을지, 아니면 버리지도, 가지기도 싫은 애물단지가 되어서 골치만 썩힐지, 그것도 아니면 적당히 잘 쓰다가 중고로 되팔거나 누군가에게 기쁜 마음으로 물려줄 수 있는지를 고민해본다면 물건을 사는 일에 보다 더 신중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물건이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려면 내 생활 패턴을 잘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평소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식생활은 어떤지, 집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해서. 내 생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자 나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도 잘 알게 됐다. 물건이 전보다 줄었는데도 생활은 불편함 없이 유지됐다. 나는 이미 필요한 만큼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 72p

 

 

헤어짐이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 물건을 중고로 판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좋아하는 물건이지만 내가 잘 관리해주지 못해서였다. 아크릴 장식장에 만들어서 전시해 두었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레고는 실제로 가지고 놀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용주의자다. 그런데 제 기능은커녕 생활공간에서 관심받지 못하고 다른 물건들에 둘러싸여가는 것이 마음 아팠다. 무엇이든 소유하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돌봐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방치만 해두었다. 나는 게으르고 나쁜 소유자였다. / 89p

 

 

 

 

 

 

   저자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가면서, 비움과 소비 절약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에서부터 물건을 대하는 태도 또는 삶의 태도까지 변화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는 것,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과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하면 갖되 열심히 사용하고 충분히 썼다면 비우리라 다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생활이나 주변 환경보다 나 자체가 달라져야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쓰레기를 줄이는 방법’을 검색해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알게 됐다. 제로 웨이스트는 쓰레기의 사용과 배출을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으로, 실생활에서 발생되는 쓰레기, 특히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용기 같이 썩지 않는 소재의 사용을 줄이려는 실천을 말한다. 말만 들었을 때는 크게 어렵지 않았게 느껴지지만 내 생활반경을 조금만 둘러봐도 제로 웨이스트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 수많은 일회용품에 둘러싸여 살아가던 내가 과연 플라스틱 없이 지낼 수 있을까. / 96p

 

 

확실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니멀리스트로서뿐 아니라, 가벼우면서도 단단한 삶을 살려면. 어쩌면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생활이나 주변 환경보다 나 자체가 달라져야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스스로에게 관심을 더 가지면 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으려나. / 120p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지만 분명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내 삶이다. 불편함은 어느새 익숙함이 됐고, 과거보다는 쓰레기를 적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조금 번거로워졌지만 전보다 편리하지 않을 뿐,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없다. 가벼워진 삶 덕분에 번거로움도, 불편함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 228p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나의 주변을 흘끔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게으르고 나쁜 소유자인 게 틀림없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지만 가짐으로써 만족하는 습관을 이번에야말로 비워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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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탄생 - 뇌과학으로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토리의 원칙
윌 스토 지음, 문희경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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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뇌는 이야기를 원하고 있다!

뇌과학을 통해 스토리텔링의 방법론을 제시한 참신한 책!

 

 

   어느 날 문득, 우리 아이가 “엄마, OO이랑 OO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섬에 도착했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섬을 탐험하고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방법을 겨우 구했는데, 그곳에서 살고 있던 괴물이 깨어나 잡아 먹혔다는 뭐 그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이 어린 아이의 머릿속에 벌써 이야기라는 구조가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뛰어나거나 완벽한 것과는 별개로 저마다 이야기를 짓는 능력을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자이자 소설가인 윌 스토 역시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도록 태어났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 이야기와 감정을 즐기도록 타고난 존재라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는 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뇌에는 잠재적인 드라마가 장전되어 있으며 삶을 구축하는 다양한 방식을 본떠서 이야기를 창작하려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야기 창작 이론가들이 서사에 관해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이 심리학자와 신경과학자들이 우리의 뇌와 마음에 관해 연구한 내용과 놀랍도록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해 낸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뇌과학 기반의 스토리텔링에 관해 연구해 온 그는 자신의 책 『이야기의 탄생』을 통해 ‘뇌가 우리의 생각과 현실을 구축하고 왜곡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때, 좀 더 생생한 인물과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한다. 특히 『안나 카레니나』, 『남아 있는 나날』, 『대부』, 『라라랜드』 등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 문학과 영화, TV 드라마 작품들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를 뇌과학을 통해 분석함으로써 과학적 스토리텔링이라는 상당히 참신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 저마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야기의 탄생』은 우리의 뇌가 이야기에 반응하고 스토리텔링에 미치는 영향을 각기 다른 층위로 탐색한다. 1장에서는 작가와 우리의 뇌가 저마다의 생생한 세계를 어떻게 창조하는지 알아본다. 저자는 우리의 뇌는 인간의 환경을 통제하도록 진화되어 왔는데, 많은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변화’의 순간에 시작된다고 말한다. 작가는 이야기 흐름에 예기치 못한 순간을 불어넣어서 주인공의 주의를 끌고, 나아가 독자나 관객의 관심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야기의 비밀을 밝히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변화의 의미를 알았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반전’, 곧 극적 전환점이 극에서 가장 강력한 순간이라고 주장했고, 스토리 창작 이론가이자 드라마 협회 회장인 존 요크는 “모든 TV감독이 현실이나 허구에서 항상 찾는 이미지는 클로즈업한 인간의 얼굴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정보’를 통해 정보에 대한 갈증을 자극하는 데에서도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시 말해, 주인공에게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거나 정보의 격차가 벌어지는 사이 우리도 같은 상황에 처하고 우리의 집중력에 불이 켜진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뇌에서 모형을 생성하게 하여 책 속의 상황이 현실인 것처럼 경험하게 하는 방법이나 인과관계의 논리가 모호한 지점을 통해서 호기심을 유발하는 법도 소개한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C. S. 루이스는 1956년에 젊은 작가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어떤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지 말고 독자가 끔찍하게 느끼도록 묘사하라. ‘기쁘다’고 말하지 말고 독자가 읽고 ‘기쁘다’고 말하게 만들어라.” ‘끔찍하다’나 ‘기쁘다’와 같은 형용사에 담긴 추상적 정보는 모형을 구축하는 뇌에는 묽은 귀리죽과 다르지 않다. 인물의 공포나 기쁨, 분노, 불안, 슬픔을 경험하려면 뇌에서 이런 감정 모형을 생성해야 한다. 뇌는 어떤 장면의 모형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책 속의 상황이 현실인 것처럼 경험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이야기의 장면이 독자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51p

 

 

우리가 사는 세계를 구축하는 신경계의 환각 모형은 작고 개별적인 모형으로 구성되고(공원 벤치, 공룡, 이스라엘, 아이스크림, 그리고 모든 것의 모형), 모형마다 저마다의 과거가 얽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함께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느낀다. 우리가 주목하는 모든 대상이 감각을 깨우고 대개의 감각은 의식 바로 밑에서 미묘하게 경험된다. / 65p

 

 

모든 작가는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정하든 간에 서사를 지나치게 통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고 방치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나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는 말로 표현하기 보다는 보여줘야 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암시해야 한다. 아니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식어버리고 독자나 관객을 지루해진다. 나아가 이들이 이야기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 독자나 관객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유롭게 예상하고 방금 그 일이 왜 일어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자기만의 감정과 해석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 81p

 

 

 

 

 

 

   조지프 캠벨은 “한 인간을 진실로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의 결함을 기술하는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야기와 현실에서 만나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현실의 삶과 달리 이야기에서는 그 인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처럼 고도로 사회화되고 가축화된 존재에게는 타인의 인과관계, 곧 남들이 하는 행동의 이유를 아는 것만큼 매력적인 경험도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2장과 3장에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과 같이 결함이 있는 주인공들을 만나보고, 인물의 성격이 플롯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다. 이어 ‘이 사람은 누구인가?’ 혹은 인물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극적 질문이 극에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주인공의 잠재의식으로 들어가 인간의 삶을 기괴하고 복잡하게 뒤틀고, 우리의 이야기를 강렬하고 예상할 수 없고 감상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기도 한다.

 

 

 

서양인들은 개인의 투쟁과 승리에 관한 이야기를 즐기는 데 반해 동양인들은 화합을 추구하는 서사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동양과 서양의 서사 양식에는 두 문화에서 변화를 보는 각기 다른 관점이 반영된다. 서양인에게는 현실이 개체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위협적이고 예기치 못한 변화가 발생할 때 서양인은 이런 개체와 부분을 싸워서 길들이려고 애쓰면서 통제력을 되찾으려고 한다. 반면, 동양인들에게 현실은 서로 연결된 힘의 장이므로 위협적이고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날 때 동양인은 요동치는 힘을 다시 조화롭게 다스려서 모든 힘이 공존할 방법을 찾아내는 식으로 통제력을 되찾으려고 한다. / 114p

 

 

우리가 인간 환경에서 보는 현실은 과거의 산물이자 자기만의 고유한 상처의 산물일 때가 많다. 우리는 뇌에서 무시하는 대상은 보지 못한다. 뇌가 우리 주위의 고통스러운 장면만 보도록 눈에 명령한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것만 보일 것이다. 또 뇌에서 실제로는 무해한 사건에 대해 폭력과 위협과 편견의 인과관계를 지어내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만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하는 환각의 현실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현실과 전혀 다를 수 있다. 누구나 각기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며 그 세계가 친근한지 적대적인지는 주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 달려 있다. / 226p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야기의 힘과 의미를 들여다보고 강렬한 플롯과 결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살펴본다. 흥미롭게도 책을 읽다보면 나의 신경 모형이 어떤데 취약한지, 그리하여 어떤 이야기와 인물에 끌리는지 이해하게 된다. 또 뇌가 어떤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떤 플롯에 안정감을 느끼고, 작가라면 어떻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에 빠져든 순간에 뇌를 스캔하면 자아 감각과 연관된 영역이 억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야기가 우리를 아찔한 통제력의 롤러코스터에 태우면 우리 몸도 그에 따라 반응하면서 이야기 속 사건을 체험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관이 팽창하고 코르티솔과 옥시토신 같은 신경 화학물질의 활성화 수준이 변하면서 감정에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빠져들어 내릴 역을 놓치거나 잠도 못 이룰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도취’라고 말한다. / 259p

 

 

잘못된 신념이 그 인물의 현실에 대한 신경 모형을 형성한다. 인물은 그 너머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이런 잘못된 신념은 인물이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데 일조한다. 플롯의 핵심은 인물의 신념을 검증하고 깨뜨리는 데 있다. 이것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 276p

 

 

 

 

 

 

   이처럼 『이야기의 탄생』은 뇌과학과 스토리텔링을 결합한 독특한 시도로, 창작가들에게는 좋은 자극제이자 지침서가 될 만하다. 아울러 책이나 영화 등 각종 창작물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인물과 플롯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혹 뇌과학이라는 소재만 보고 이 책의 내용이 어려울 것이라 짐작하는 이들에게는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으니 일독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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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 법정 스님 법문집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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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10주기, 여전히 우리 시대에 깊은 울림을 전하는 법정 스님의 말씀!

끊임없이 밀려드는 번민에 중심 잡기 힘든 요즘, 따뜻하고 진실한 메시지에 귀 기울여보다!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 남편이 상갓집에 다녀와야 한다고 부랴부랴 집으로 들어왔다. 예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인데 나 역시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 부고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인지 부러 캐묻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심 짐작되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보내온 메시지에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안타까운 사인이 적혀 있었다. 모진 사람,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었으면 더 잘 살아볼 용기를 내어보라 할 것을 타박하고 싶기도 하나 이번 생에 미련이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 있었다면 그 선택에 뭐라 더 할 말이 있을 수 있을까. 그저 다독여주고 붙잡아줄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쉬울 따름이라.

 

 

 

   세상은 이토록 시끄러운데 우리는 왜 자기 마음 하나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하고 끊임없이 외로워하는 것일까. 너도 나도 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앞다투는 세상인데 정작 내면은 나약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일까. 차고 넘치는 이 세상에서 만족하지 못하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 같이 힘든 세상일 텐데 남이 사는 이야기는 다 재미있어 보이고 내가 사는 이야기는 참 재미없어 보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이 수많은 질문 앞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삶을 올바르게 이끌고 세상을 치유할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임을 또한 안다.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법당입니다

 

 

   『좋은 말씀』은 법정 스님의 열반 10주기를 맞아 각종 법회와 대중 강연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메시지들을 담은 법문집이다. 법정 스님이 타계하신 당시, 서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나는 생전에 ‘법정 스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는 고인의 유언으로 인해 이제 몇 안남은 『무소유』를 구했노라며 자랑스레 부모님께 갖다드린 기억이 있다. 정작 그 책에 무슨 말씀이 쓰여 있는지는 모르고, 그저 ‘법정’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새겨진 마지막 책을 소장해야 한다는 데에만 달아올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이토록 진득하게 스님의 책을 마주하게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쩌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야만 마음이 충만해지던 혈기왕성한 시절이 아니라, 삶에 관한 갖가지 질문들로 번민이 차오르는 바로 지금에서 스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스님의 말씀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고, 오히려 혼탁한 위기의 시대일수록 우리가 반드시 구하고 찾아야만 하는 가르침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밝음의 배후는 어둠입니다. 어둠은 밝음의 뒷모습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과 밝음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하고 서로 받쳐 주는 작용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둠만을 보려 하거나 밝음만을 보려고 합니다. 생과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체와 전체의 상관관계 역시 같은 이치입니다. 삶은 죽음의 표면이고, 죽음은 삶의 이면입니다. 중생이 있기에 부처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은 바다 저 멀리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섬과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나무의 가지들처럼 서로 떨어져 있지만 뿌리에서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광대한 대지의 한 부분들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균형적인 리듬이고, 음양의 조화입니다. / 13p

 

 

우리가 입은 은혜는 반드시 되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손들이 다시 그 은혜를 입으며 삶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대대로 자기들이 입은 은혜들을 되돌렸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현상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회향’이라고 합니다. 내가 받을 공덕이 혹시 있다면 그것을 모두 이웃에게 되돌린다는 의미입니다. / 19p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과 집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매일 휴대폰을 손에 쥐고 SNS를 반복해서 들어가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들, 타인이 누리고 있는 시간들에 유독 마음이 허해질 때가 많다. 하지 않으려 해도 습관처럼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게 된다. 때문에 ‘각자는 자기 분수와 자기 틀, 자기 자리에 맞게끔 행동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정곡을 찌른다. 우리 삶에 어떤 표준이 있는 게 아니듯 저마다 자기 얼굴을 지닐 수 있으면 된 거라고. 자기다운 삶, 자기다운 생활 규범을 지니고 마음의 안정을 이루어 즐겁게 산다면, 스스로 자기의 얼굴, 얼의 꼴을 이루게 마련이라고. 자기답게 살지 못해서, 생활 규범이 없어서, 마음의 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 늘 흐트러지기 때문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과 지혜를 일깨우지 못하고 늘 허둥지둥 사는 거라는 말씀은 지금의 내가 새겨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일 듯하다. 덕분에 오늘의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내 얼굴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고 있는지, 또 나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도 되돌아본다. 이래야 하는데, 저래야 하는데……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조급함에 오늘도 허둥대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 혹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도.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려면 첫째, 맑은 생활 습관을 익혀야 됩니다. 불자들에게는 공통적인 생활 규범이 있어요. 그것이 다서 가지 계, 오계예요. 산목숨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 주지 않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겠다는 것, 자기 가정을 이탈해서 한눈 팔지 않겠다는 것, 진실한 말만 하겠다는 것,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을 가지겠다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한 다섯 가지 생활 규범입니다. 살도음망주, 다섯 가지 계율이에요. 원래 계라는 것은 무엇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무엇 하겠다는 다짐이에요. 내가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다만 율은 규정입니다. 그래서 계와 율을 합해서 계율이라고 해요. 하나의 생활 습관이에요. / 35p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세 가지를 평소에 몸에 갖추어야 돼요. 이 막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의 청정한 생활 규범과 질서를 가져야 돼요. 이게 계행의 옷이에요. 또 시끄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제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제정신 똑바로 차리는 선정의 옷과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지혜의 옷을 입어야 됩니다. 계행과 선정과 지혜를 평소에 몸에 익힌다면, 어떤 옷을 입더라도 거리낌이 없어요. / 95p

 

노년에 이르면 삶의 종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죽음에 대비해야 합니다. 대비한다는 것은 곧 배우는 일입니다. 젊어서 삶을 배우듯 우리는 죽음도 배워야 돼요. 친지나 이웃의 죽음을 보면서 내게도 다가올 그날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에는 노소가 없습니다. 왜 그 많은 젊은이들이 죽을까요? 죽음에는 노소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내 차례가 올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젊건 늙었건 죽음에 대비해야 됩니다. / 101p

 

 

 

 

 

 

   법정 스님 하면 ‘무소유’의 정신이 떠오르듯 법문집에도 역시 ‘청빈’ 즉 ‘맑은 가난’을 거듭 강조한 대목이 눈에 띤다.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님은 인도의 위대한 시인 까르비가 노래한 대목을 하나 실어 놓았다. “너는 왔다가 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 재산을 모으고 부를 사랑하지만 떠날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너는 주먹을 쥐고 이 세상에 왔다가 갈 때는 손바닥을 펴고 간다.” 태어날 때는 주먹을 쥐고 이 세상에 올지 몰라도 갈 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몸을 버리고 나왔듯, 또 죽을 때는 이 몸을 버리고 간다. 버리는 데서 시작해서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인생이란 뜻이다. 그러니 아등바등 움켜쥐려고, 타인이 가진 것을 가져보겠다고 애쓰지 말자. 결국엔 다 내 것이 아닌 법인데, 미련을 가져서 무얼 하나.

 

 

 

업이란 그런 겁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장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 쌓여서 나의 삶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어떤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 146p

 

 

흙과 나무와 풀과 새와 짐승을 가까이하십시오. 또 구름과 별과 달과 바람과 이슬을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자연스러움을 함께 일깨울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 가끔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173p

 

 

 

 

 

 

   끝으로 “법당은 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집에도 법당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법당입니다.” 라고 하신 스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려 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부처를 모시고 있다. 내 마음을 법당삼아 항상 청결하고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려 할 때 부처는 그 안에 들어와 머무를 것이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그 안에 깃드는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 또한 내 안에 있는 법이다. 그 말씀을, 그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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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특별 합본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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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왜 신화를 알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준 책!

신화를 지식의 수단이 아니라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알게 해 준 아름다운 책!

 

 

 

   책을 읽다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내용을 자주 만나곤 한다. 그래서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보자 마음을 먹어보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제우스, 헤라, 에로스, 아르테미스… 대신과 버금 신 그리고 딸림 신에 이르기까지, 이 수많은 신들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거기에 얽힌 신화 속 이야기는 또 어찌나 복잡한지. 언젠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부터 제우스의 아이들까지 쭉 관계도를 그리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팽개친 적도 있었으니, 역시 신화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내 마음속으로는 얄팍하게 압축한 내용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공들여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제대로 정독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았나보다. 출간 20주년이자 저자의 타계 10주기를 기리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특별 합본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건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표지에 220여 점에 이르는 도판 자료, 무려 1200쪽에 이르며 소장가치까지 있어 보이는 양장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일단 흠뻑 빠져버렸다.

 

 

 

신화라는 미궁 속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들어갈 수는 있어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는 없는 ‘미궁(미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그리스의 섬나라 크레타 왕 미노스가 미궁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서였다. 아테나이의 왕자 영웅 테세우스는 자기 나라 선남선녀들이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희생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로 미궁에 들어가기를 자처했다. 하지만 테세우스에게 첫눈에 반한 크레타의 공주 아리아드네가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없어 실타래 하나를 건네주었다. 과연 테세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 입구에서부터 풀어두었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길잡이삼아 결국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저자 이윤기는 왜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았을까? 그는 ‘미궁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도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신화는 미궁과 같다’고 말한다. 즉, 놀랍도록 방대한, 미궁과 다름없는 신화라는 이 복잡하고 넓디넓은 세계관에 다가가보고자 애쓰는 사람에겐 분명 그 전과는 다른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이 신화를 읽는 동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즉 저마다의 ‘상상력’과 ‘지혜’를 길잡이삼아 볼 것을 독려한다. 그렇게 나름대로 신화라는 미궁을 진입하고 탈출하는 시도를 해보면서 신화 너머의,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움켜쥘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1권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에서는 ‘자아’를 상징하는 신발 이야기에 얽힌 신화를 비롯해서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 사이에 태어난 티탄 신으로부터 제우스와 헤라로 상징되는 올륌프스 신들로 세대교체가 되는 과정을 쭉 살펴본다. 이어 사랑이라는 감정의 두 얼굴을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보고, 제 젊음과 힘만 믿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파에톤의 이야기도 살펴본다. 나무로 몸을 바꾼 다프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 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죽음과 예언 그리고 저승과 의술을 상징하는 뱀과 관련된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또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저승의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천하제일의 명가수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망각의 강 레테를 통해서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엿보기도 한다.

 

 

 

   그러는 가운데 ‘먼저 아는 자’를 뜻하는 프로메테우스가 오늘날 ‘프롤로그’로 남겨진 것이나, ‘나중에 아는 자’라는 뜻을 지닌 에피메테우스가 ‘에필로그’로 쓰이는 등 신화 속 요소들이 오늘날까지 갖가지 언어적 유산을 남기고 점이 흥미롭다. 또한 자식을 놓는 족족 삼켜버리는 크로노스를 통해 ‘세월은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잔혹한 자연의 진리’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상징점들은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의미를 양산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왜 신화를 읽어야만 하는지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되기도 한다.

 

 

 

육체적인 사랑의 접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아프로디테가 있다. 더러 ‘음란한 아프로디테’라고도 불리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프로디테가 고무하고 격려하는 사랑이 반드시 도덕적인 사랑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로디테의 ‘음란함’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음란함은 아니다. 태초의 인류를 생각해보라. 근친상간, 즉 가까운 친척 간의 비윤리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짐승과 수적인 경쟁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음란한 아프로디테가 허리에 매고 있는, 어떤 남성이든 유혹할 수 있는 마법의 띠 ‘케스토스 히마스’는 음란함의 상징이 아니라 자식의 생산을 촉발하는 번식력의 상징일 수도 있는 것이다. / 96p

 

 

 

 

 

 

 

   이어 2권 ‘사랑을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다니던 신 헤르메스가 ‘잃어버린 반쪽이’를 찾아다니다 그만 엉뚱한 반쪽이(암염소)와 사랑을 나누어 인간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존재인 판(패닉)을 세상에 내놓은 이야기, 부적절한 욕정의 노예가 된 파시파에가 불러일으킨 희비극으로 하여금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랑의 원형을 보여준다. 또한 처제에게 음욕을 품다가 자식의 무덤을 파게 된 테레우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의 답은 풀었을지언정 정작 그 수수께끼가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라는 뜻인 줄은 몰랐던 오만하고 어리석은 오이디푸스를 통해 신화가 전하는 경계의 메시지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퓌라모스와 티스베의 이야기에서는 비극으로 승화한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는 반면, 포모나(과실)와 그녀에 끊임없이 구애했던 베르툼누스(계절의 변화)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모든 결실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 그 때를 만나거든 아낌없이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선사하기도 한다.

 

 

 

삶의 참모습을 두고 그것을 ‘삶의 진실’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 ‘내가 그리는 삶의 참모습’은 바로 ‘내 삶의 진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아름답다는데, 삶의 진실은 어떤가? 아름다운가?

그것은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진실은 우리 손가락을 씀벅 베어버리는 칼날 같다. 진실이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육안으로는 진실을 보아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고대 신화는 꾸준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 349p

 

 

 

   신을 향한 퓌그말리온의 믿음이 돌을 사람으로 변하게 사랑을 이루었다면, 바토스는 사례금 때문에 거짓말을 하다가 헤르메스에 의해 돌이 된다. 마찬가지로 신들을 가볍게 여긴 죄로 니오베는 14명의 자식을 모두 잃고 자신도 돌이 된다. 신의 은총을 입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창’을 선물로 받은 케팔로스는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아 미움을 산 끝에, 그 창으로 그만 사랑하는 아내를 찌르고 만다. 디오뉘소스로부터 ‘자기 손으로 만지는 것은 모조리 황금으로 변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성취하게 된 미다스는 애석하게도 먹을 것조차 모조리 황금으로 변하게 되니, 이내 이 소원을 거두고 파멸에서 구해 주십사 애원하게 된다.

 

 

 

   이렇듯 3권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편에 이르면 신화란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결국엔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 뚜렷해진다. 신들에 대한 믿음은 곧 그 신들을 창조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신들에 대한 경건함은 곧 그 신들을 창조했을 인간에 대한 경건함이다. 이렇듯 신화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은 우리가 제우스와 아프로디테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퓌그말리온이 진실과 그가 기울인 정성을, 희망과 기대를 버리지 않았을 때 나타난 효과를 믿기 때문일 것이라는 책의 가르침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신화를 꼼꼼히 읽는 일은 내 마음속에 자리한 그 신전을 찾는 일이다. 나는 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경건을 다하는 일, 마음을 여는 일이 바로 신들의 마음을 여는 일,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502p

 

 

 

 

 

 

 

   4권에 이르면 헤라클레스를 둘러싼 각종 비극과 영광의 순간들이 등장한다. 헤라클레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책 한 권 분량에 이를 정도로 많은 페이지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있어서 이 인물이 지닌 남다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 앞에서 울음을 터뜨릴 줄 알고 그러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들여 숱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였기에, 어쩌면 그야말로 ‘신화는 신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엔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영웅이 등장하는 대부분의 스토리가 그러하듯, 확실히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재미있다. 도저히 꺾을 수 없을 것 같은 괴수들을 물리치는 영웅담은 당연하고, 죽은 괴수들을 제우스가 하늘로 불러 올려 별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나 아기 헤라클레스에게 물리기 위해 헤라 여신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젖 줄기가 멀리 퍼져나가 ‘젖의 길(milky way)' 즉 은하수가 된 기원도 흥미롭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헤라클레스의 방’이 있다고 한다. 저자는 이 거대한 방의 천장화 <헤라클레스 예찬>에는 헤라클레스가 겪은 시련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에는 ‘힘’, ‘인내’, ‘가치’, ‘정의’를 상징하는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신화의 내용을,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고 이 천장화를 바라본다면 무엇을 얼마나 볼 수 있을까. 하물며 신화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명화와 문학 작품 속에서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이 책을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장대한 이야기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으로 마무리 된다. 죽음의 바다라 불리던 흑해의 쉼플레가데스를 통과해 북방의 나라 콜키스로 가 금양모피를 수습하고, 숙부에게 잃어버렸던 왕권을 되찾은 영웅 이아손의 이야기다. 이때 수금과 노래에 능한 오르페우스, 제우스 신의 아들인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 영웅 중의 영웅 헤라클레스, 여걸 아탈란테 등 그리스 땅 곳곳에 당시 한다하는 영웅들이 함께 모여 금양모피를 수습하기 위해 떠난 모험담은 그리스 최고의 신화 중 하나로 손꼽힐 만하다. 마치 <반지의 제왕>의 반지 원정대처럼 말이다.

 

 

 

   하지만 일찍이 오비디우스가 “금양모피 역시, 손에 넣는 수고에 비기면 하찮은 것…….”이라고 꿰뚫어 말했듯이 이 화려한 모험담 뒤로 맞는 누추한 비극은, 비록 허무하지만 그 과정이 의미하는 바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저자 이윤기는 말한다. ‘먼 길을 가자면 높은 산도 넘고 깊은 물도 건너야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이 바로 개인의 흑해, 개인의 쉼플레가데스다. 이것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못한다면, 난바다로 배를 띄우지 못한다면 우리 개개인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고.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신들의 마음을 여는 12가지 열쇠,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까지. 긴 시간 동안 신화 읽기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신화란 세상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에 대해 알아가고, 곧 나에 대해 알아가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화를 지식이 아니라 나와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수단으로 삼을 때 그 삶이 얼마나 따뜻할 것인지를 보여준 저자의 메시지가 오롯이 잘 느껴지는 귀한 책이란 생각이 든다. 더 이상 그가 쓴 신화를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다만 이 책이 내내 나에게 남아 내 아이들이 이 귀중한 메시지를 함께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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