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김형민 지음 / 믹스커피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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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 골리앗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위대한 다윗들의 역사!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불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류의 탄생한 이래 생존을 건 경쟁과 투쟁, 전쟁은 늘 있어왔고 그 안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역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포로로 끌려가던 고려인 3만 명을 구출하기 위해 적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 고려 장수 양규를, 일제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이끌어낸 유관순 열사를,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고 개선하기 위해 분신했던 전태일을…. 강자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로는 약자가 강자를 이길 때 역사는 새로 쓰인다는 것을 이들이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도덕과 이성이 쇠퇴하고 불평등과 부정으로 어지럽지 않은 시기는 단연코 없었었지만, 변화를 꿈꾸며 조금이라도 균열을 내려는 시도 역시 끊인 적이 없었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뒤를 잇는 이들의 등불로 남아 거대한 잉걸불의 단초가 된 사람들이 존재했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은 이처럼 역사의 변곡점에서 펼쳐진 언더독의 치열한 저항의 순간들을 엮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인류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언더독이 있었음을, 작은 힘으로도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음을 전하는 그 뜨거운 온기와 울림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차마 이것만은 참지 못하고 일어선 사람들, 차마 그들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들, 한없이 작아 보이나 더할 수 없이 위대한 인간들이 몸으로 써 내려간 기록의 합이다. 그 대부분은 보잘것없고 대단한 역량도 없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 138p












  역사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난 저자 김형민은 ‘전략’ ‘용기’ ‘결의’ ‘지혜’ ‘신념’이라는 주제로 나뉘어 역사 속의 다양한 언더독들을 조명한다. 베트남의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리며 거대한 골리앗인 미국을 물리친 보응우옌잡, 대군을 이끌고 온 수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이들의 약점을 파고든 을지문덕, 아우슈비츠에 자발적으로 입소해 인류 최악의 범죄를 최초로 알린 비톨트 필레츠키, 한국전쟁에서 3만 대군을 상대한 600명의 영국 영웅들, 똥물을 뒤집어써가면서까지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사진사 이기복씨, 억압된 자유와 종교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미샬 공주 등 탄압과 부정, 불합리에 저항했던 놀라운 순간들을 마주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투쟁을 ‘게릴라(소규모 전투)’라고 불렀다. 제복을 입은 정식 군대가 아니라 지역의 민간인들이 무장하고 익숙한 지형을 활용해 적에 맞서는 ‘게릴라전’의 이름은 이렇게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작은 전쟁’의 전사들은 희대의 거인이자 유럽의 지배자 나폴레옹에게 뼈아픈 타격을 입힌다.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먼 훗날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나폴레옹이 “나를 쓰러뜨린 건 스페인의 상처였다”라고 고통스럽게 술회할 정도였다. / 50p



최전방의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성을 지키는 임무를 다했고, 주력군이 붕괴된 가운데서도 자신의 변방 수비대만으로 전략적 요충지를 되찾았으며, 철수하는 적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끌고 가려는 동족을 구출하고자 적의 숫자가 얼마든 개의치 않고 적의 파도 속으로 뛰어든 양규와 그의 사람들.

양규의 본관과 출신은 물론 나이조차 모를 만큼 일천한 기록이 아쉬울 뿐이지만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가시지 않는 감동으로 남는다. 그리고 타인을 구속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은 어떤 시각으로는 ‘한국사 속 영웅들’을 넘어 ‘한국인을 만든 사람들’로 격상된다. 그들은 진정으로 용감한 다윗들이었다. / 65p




  지난 해, 황모과 작가의 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참혹함을 처음으로 접한 적 있다. 관동대지진이라는 굵직한 재난에 가려 조선인들이 대학살을 당한 초유의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함에 읽는 내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세계사에 균열을 낸 결정적 사건들』 속에서도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 초유의 재난에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향한 온갖 근거 없는 낭설을 퍼뜨리며 마구 학살했다.




  이 사건이 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조선인들에게 죽창질을 하고 칼을 휘두른 일본인들은 평소 선량한 얼굴로 조선인들과 곧잘 어울리기도 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1923년 5월 25일의 우리 역사 속에도 이 같은 사례가 있었다.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었던 강상호의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며 의복을 찢고 봉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백정 편을 드는 이들을 ‘신백정’이라 규정하며 표적으로 삼았던 이들 역시 그저 보통 사람들이었다. 대개 ‘공포와 혐오는 한 몸’이라던 저자의 말처럼, 국가 대재난과 시스템의 균열로 인한 위기 앞에서 민중들은 혐오를 통해 그에 대한 공포를 잊으려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학살에 쫓겨 경찰서로 몸을 피한 조선인과 중국인 300여명을 지킨 당시 쓰루미 경찰서장인 오카와 쓰네키치 같은 인물이 있었고, 일제 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고 천석꾼 부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했으나 차별과 계급이라는 인습을 타파해나갔던 강상호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절망의 바닷속에서 희망의 섬을 찾고 야만의 칼바람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찾은 이들과 역사를 들려준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승자들의 역사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역사를 써내려갔던 사람들, 우리가 그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역시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러한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셸이 살았던 모진 세상의 굽이마다, 길목마다 그녀에게 벅찬 골리앗들은 버티고 서 있었다. 귀족의 사생아라는 태생의 한계와 싸워야 했고, 완고한 교육정책을 머리로 들이받아야 했으며, 파리 코뮌조차도 여성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여성 억압적 현실과도 맞서야 했다.

“여자가 무슨 총을” 하며 고개를 흔드는 미덥잖은 동료 혁명가들 옆에서 막강한 프랑스 정부군에 총을 쏘며 맞서야 했고, 식민지의 무장 투쟁을 지지하면서 황망하게도 자신들이 혐오하던 지배자의 편으로 전락해버린 왕년의 코뮌 동료들과도 척을 져야 했다. / 205p



결국 기억이 세상을 움직인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 곁에서 골리앗과 대항해 싸우는 사람들은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자. 그들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쓰러진다 해도, 우리를 기억해주시오.” / 166p












   드라마를 보듯 몰입하여 읽었다. 강자 골리앗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위대한 다윗들의 역사에 다가갈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토록 여운과 울림이 가득한 역사책이라니, 역사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물론 즐겨 읽지 않는 분들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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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재들의 글쓰기 비법 - 한 문장이 다섯 문단이 되는 기적
제이 매튜스 지음, 장민주 옮김 / 유노라이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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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기초 체력을 길러주는 다섯 문단 글쓰기의 힘!

개요부터 퇴고까지, 중등 학생부터 글쓰기에 막막함을 느끼는 성인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핵심 공식을 익히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중학교 자녀를 둔 지인이 연일 쏟아지는 수행평가에 걱정을 토로했다. 중학 성적은 지필고사와 수행평가를 합산하여 산출되는데, 수행평가는 주로 서술형 및 논술형 문제로 평가되기에 평소의 글쓰기 실력이 크게 좌우된다고 했다. “넌 걱정 없겠다. 독서지도사 자격증도 있고, 글도 꾸준히 쓰니까 아이들 따로 글쓰기 학원 같은 데 보내지 않아도 될 테고….” 나는 단번에 손사래를 쳤다. 말처럼 자격증도 따봤고, 평소 글도 꾸준히 써온 편이지만 정작 내 아이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과거와 달리 학교 교육 과정에 있어서도 글쓰기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느낌도 받고 있던 터라,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이들 글쓰기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단지 수행평가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글쓰기는 생각을 논리적으로 배열하고 연결하고, 주장이나 주제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힘을 기르는 기초체력과도 같다. 인공지능이 글쓰기를 대체해줄 수 있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글로 써내려가는 힘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읽게 된 『미국 영재들의 글쓰기 비법』은 미국 중등교육 현장에서 주로 쓰이는 ‘다섯 문단 글쓰기’의 포맷을 통해 단순하지만 가장 강력한 글쓰기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다섯 문단 글쓰기를 통해 개요부터 퇴고까지, 중등 학생부터 글쓰기에 막막함을 느끼는 성인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의 핵심 공식을 익히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에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왜 다섯 문단인가?



  미국 학생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다섯 문단 글쓰기를 배운다고 한다. 다섯 문단이 논리적인 글쓰기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서론 1 + 본론 3 + 결론 1’의 순서로 작성하는 글쓰기 방법으로, 서론에서 주장을 제시해 독자의 흥미를 끈 뒤 본론에서 근거로 주장을 뒷받침하고, 결론에서 내용을 마무리하는 구조다. 어느 나라에서든 널리 통용되며 글쓴이의 사고를 판단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다섯 문단 글쓰기를 통해 계획하여 글을 쓰는 일이 습관이 되면 글쓰기가 훨씬 쉬워질 뿐만 아니라 시간을 아끼면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에서 핵심은 ‘문단’입니다. 문단은 글을 그저 시각적으로 나누기 위해 들여쓰기로 표시하는 장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글이 하나의 독립적인 주제나 주장을 전달하는 것처럼, 각 문단도 하나의 독립적인 생각을 담습니다. 하나의 글에 포함된 여러 문단은 각각 중심 주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문단과 문단끼리 서로 밀접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처음의 주제나 주장에서 출발해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가, 결국 다시 주제의 중심으로 모여 탄탄하게 마무리됩니다.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긴밀하게 연결된 채 성장하고 발전한 후, 완성된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 6p


무엇이든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천천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글쓰기 교육이 더 소중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기초 체력 훈련과도 같은 다섯 문단 글쓰기로 시작해 보세요. 논리적 사고, 구조화된 표현, 명확한 근거 제시 등 기초가 탄탄해질 때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는 물론 인공지능과의 대화 및 협업도 능숙하게 해내는 힘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 9p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단계별 과정을 통해 다섯 문단으로 쉽게 논리적인 글을 쓰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쓰기를 계획하는 법을 배우는 1장에서는 지시문과 방향어를 찾고 주장을 정한 뒤, 대주제 만들기와 개요를 작성해봄으로써 글쓰기의 기본 뼈대를 만들어본다. 2장에서는 실제로 글을 쓰는 법을 배워본다. 서론, 본론, 결론에 정확히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 직접 문단을 쓰는 법을 훈련할 수 있다. 3장에서는 제목 짓는 법과 참고문헌 및 인용구 목록 표기법, 퇴고 방법을 익혀본다. 마지막 4장에서는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정리해보고, 실전 연습을 통해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점검할 수 있다.



첫째, 지시문을 분석합니다. 주제어와 방향어를 찾아보세요.

둘째, 주제어를 주장으로 바꾸세요.

셋째, 방향어를 파악하여 어떤 종류의 이유가 필요한지 알아내세요. 무슨 이유를 제시할지 조사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이유가 참신할수록 주장의 설득력이 높아지고 독자의 호기심을 끌 거예요.

넷째, 주장과 이유를 합쳐 대주제를 작성하세요. / 35p



흥미로운 첫 문장을 쓰기 위해 추천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아요.

○ 대주제와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답을 아는 질문이 아닌지 확인하자.

○ 흥미로운 사실을 넣는다.

○ 적절한 인용구를 넣는다. 이 인용구는 글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 강렬하거나 예상하기 어려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또한 주장이나 대주제와 관련이 있어야 한다. / 52p



글을 마무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아래의 네 가지 방법을 추천해요. 일단 이 네 가지 방법이 익숙해진 다음에, 새로운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기로 해요.

○ 미래에 대한 생각을 쓰기

○ 행동을 촉구하기

○ 내용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기

○ 개인적인 의견을 더하기 / 89p










  ‘학생이 학교에 화장하고 오는 것을 허용해야 할까?’ ‘악기를 배우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 ‘어린이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가?’와 같이 학생들이 직접 고민해보고 생각해서 글을 써보기 좋은 주제들을 제시하고 있어 유용하다. 혼자서 글쓰기 훈련을 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지루한 설명 대신 도식화로 기억하기 쉽게 정리해놓은 것도 역시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지시문을 주제어와 방향어로 나뉘어 분석하는 법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초등학생인 아이와 글을 쓸 때뿐만 아니라 출제자의 문제 출제 의도를 파악할 때도 이 방법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아 꼭 활용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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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밖으로
바버라 레이드 지음, 나희덕 옮김 / 제이픽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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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두려운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어줄 아름다운 책!

성장 과정에서 겪는 복잡한 감정들이 잘 녹아 있어 가슴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닙은 지하철에서 살고 있는 생쥐입니다. 시끌벅적한 지하철역 플랫폼 아래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죠. 나이가 많은 생쥐들은 종종 터널 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요. 닙은 그 이야기를 듣고 종종 터널 끝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곤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깃털 하나가 터널 아래로 내려오다 터널 끝을 향해 날아가 사라져버렸어요. 그걸 본 닙은 문득, 터널 끝으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촌들은 안전한 보금자리를 떠나려는 닙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닙은 결심했어요. 터널 끝으로 가보기로요! 그렇게 닙은 아주 위험하지만, 공기가 맑고 아름다운 터널 밖 세상으로 모험을 시도했어요. 과연, 닙은 터널 밖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어떤 세상이 닙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잘 있어!”

닙이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며 사촌들에게 말했어.

(…)

“열차가 다섯 번 지나가고 나서야 닙은 뒤를 돌아보았어.

집에서 이렇게 멀리 나오기는 처음이었어. 

/ 내용 중에서









  처음 혼자 버스를 탔던 날을 기억한다. 박물관에 가보고 싶은 마음에 버스 노선을 알아두고 호기롭게 버스에 올라탔는데, 아뿔싸! 3번 버스를 타야 할 것을 3-1번에 타고 말았다. 이쯤이면 박물관에 도착해야 하는데… 하고 슬슬 걱정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내가 모르는 곳을 향해 버스는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디서 내려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나는 종점까지 다다르고야 말았다. 버스 기사님도 그제야 나를 인지하셨는지, 뒷자리에 단단히 앉아 있으라는 당부와 함께 집까지 태워주마 약속하셨다.



  그날, 평소의 나라면 울음을 터뜨렸을 텐데 이상하게 울음이 나지 않았다. 기사님의 약속 덕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두려움을 내려놓고 내가 모르는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그렇게 잘못된 번호의 버스를 타본 뒤로 나는 더 이상 버스를 타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은 이 날의 경험 덕분에, 실수는 어떤 식으로든 회복될 수 있으며 도전은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얻게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터널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내가 직접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두려워도 닙은 용기를 낸 덕분에 다른 생쥐들은 보지 못한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잖아. 누구나 ‘처음’은 두려워. 그러니까 우리 두렵다고 ‘난 못해’ ‘안 할 거야’ 하고 미리 겁먹지 말자. 알겠지?”

  『터널 밖으로』를 함께 읽으며 여섯 살인 아이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닙이 다다른 터널 끝 세상은 비록 닙이 상상한 것보다 더 위험한 곳이긴 했지만, 닙이 꿈꾸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도전이 늘 아름다울 수만은 없지만 도전했기에 나만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이 두려운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이 되어줄 이 아름다운 책을 우리 아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이유다.




  캐나다의 대표 그림책 작가인 바버라 레이드의 독특한 점토 공예 기법과 나희덕 시인의 번역으로 완성된 한 편의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듯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닙의 여정에는 성장 과정에서 겪는 복잡한 감정들이 잘 녹아 있어 가슴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고등학교 토론 수업에도 활용되는 만큼, ‘가족’ ‘외로움’ ‘꿈과 행복’ 등의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이끌어내기에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다. 유치원 연령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어보기 좋은 그림책을 찾으시는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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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치카·스페이드의 여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박종소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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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에 이토록 밀도 있고 강렬한 여성 서사를 녹여낼 수 있다니!

부단히 밀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사를 쌓아가는 개개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작품!






 지난하고 비애를 느끼는 삶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때, 책은 아주 훌륭한 도피처가 되기도 한다. 혁명과 전쟁, 정치적 억압과 숙청으로 혼란이 가중될수록, 소네치카는 현실을 피해 도스도옙스키, 이반 투르게네프와 니콜라이 레스코프와 같은 러시아 문학 작가들이 제공하는 환상의 영역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암담하고 끔찍했던 피란 생활에서 그녀를 구원한 것도 도서관 지하실이었다. 남편이 될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를 만난 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1930년대 초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다 고국으로 돌아온 예술가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는 이미 마흔일곱이 넘은 나이였지만 소네치카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후 소네치카의 삶은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기 어려울 만큼 가족을 건사하는 억척스러운 가장의 역할로 전환된다. 게다가 극 초반, ‘(빅토로비치)는 언제나 자신의 자유에 대한 족쇄를 느끼는 즉시, 선조들의 신앙도, 부모의 바람도, 스승의 사랑도 모두 강하고 단호하게 배신했고 학문을 배신했으며 친구 관계를 끊어버렸다.’라던 문장이 예고하듯, 빅토로비치는 딸 타냐의 친구인 폴란드 소녀 야샤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뮤즈로 삼기까지 한다.

 



  소네치카는 행복했던 십칠 년간의 결혼생활이 모두 끝났고,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슬픔에 잠겨 솔기가 다 풀어져 못 쓰게 된 옷처럼 허물어진 자신의 인생과 갑자기 찾아온 고독에 대해 생각하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 발렌슈타인을 손에 집는다. 꽤 오랜만에 그녀는 문학으로 되돌아가 또 한번 순순히 자신을 내맡긴다.

 










  이 무렵에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문학이 소네치카의 현실감각을 앗아간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있어 문학은 그저 도피처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문학이 자아를 잊을 정도로 환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못해 그 경계 바깥의 모든 것들의 의미와 내용을 지워버린다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어쩌면 유년시절의 문학이 현실 감각을 잊게 해주는 데만 머물렀다면, 이 무렵의 문학은 소네치카로 하여금 현실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게 아닐까. ‘나는 문학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을 지탱해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조상들은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 문학으로 눈을 돌렸다던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말처럼, 훗날 소네치카가 비난 대신 야샤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 것도(이 역시 소네치카는 야샤의 굴곡진 삶을 문학처럼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다),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덤덤하게 삶을 연속시킬 수 있었던 것도, 종종 우리가 현실에 매달려있느라 보지 못하곤 하는 인내와 용서의 위대함 그리고 삶 그 자체의 숭고함을 문학에서 이미 보았던 게 아닐까 감히 짐작해본다.

 



노쇠한 로베르트 빅토르비치와 태생적으로 허약한 소네치카가 피란 생활의 곤궁한 벌판, 가난, 억압, 전쟁 첫해 겨울의 숨겨진 공포를 겨우 덮어주는 격렬한 구호 속에서 그루지야 스반족의 첨탑처럼 폐쇄적이고 고립된, 그러나 조각난 과거를 빠짐없이 이어주는 새로운 삶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눈이 먼 나방의 움직임처럼 종잡을 수 없고 번개 같은 속도의 유쾌한 전환이 일어나는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의 삶은 유대 문헌에서 수학으로,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정의한 바에 따르면 결국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자 무의미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직업인 물감 칠하기로 옮겨갔고, 소네치카의 삶은 책 속에서 낯선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의 매혹적인 공상에서 양분을 얻었다. / 소네치카중에서 22p

 


우리가 이기고 전쟁이 끝나면 즐거운 삶이 시작되겠지?”

그러자 남편은 건조하고 따끔하게 말했다.

그런 꿈을 왜 꿔? 우리는 이미 행복하게 살고 있잖아. 그리고 이기고 지는 문제에 관해서라면 말이지…… 사람 잡아먹는 놈들 중 어떤 놈이 이기든 우리는 그냥 항상 지기로 하자.” 그는 이상한 표현으로 어둡게 말을 끝냈다. “내가 스승님한테서 배운 건 말이야, 녹색이건 파란색이건, 파르물라리우스건 스쿠타리우스건 그 어느 편도 들지 말라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걱정스레 소냐가 물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야기야. 녹색, 파란색은 로마시대 경마장 파벌의 상징색이고. 난 어떤 말이 제일 먼저 들어오느냐에는 관심 없어. 그건 우리한테 중요한 게 아니야. 어찌됐건 사람은, 그 개인의 생은 끝나기 마련이거든. 소냐, 이제 자.” / 소네치카중에서 24p

 



  이처럼 소네치카가 전쟁과 혁명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작은 개개인들이 처한 운명과 고난, 압제, 부조리, 삶의 배신 등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작품으로 수용이해의 그림을 그려냈다면, 스페이드의 여왕인식변화를 담아낸 것으로 보인다. 가족 내에서 독재자처럼 군림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만 급급한 90세 노파 무르와 그녀의 괴팍함을 감내해야했던 가족이 마침내 무르에게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방향성을 찾아나가려고 하는 모습에서 러시아의 현재와 오늘, 미래를 엿본다. 거대한 역사의 파고 앞에서 한 사람인 나는 비록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밀고 나아가 자신만의 서사를 쌓아가는 개개인이야말로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준다.

 



사십여 년 전 안나 표도르브나는 어머니를 의자로 내리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삼십여 년 전에는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혐오와 구역질을 느끼며 자화자찬의 모놀로그를 흘려들었고, 기대했던 아침시간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우울해했다. / 스페이드의 여왕중에서 110p

 


그게 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이에요…….” 카탸가 너그러운 투로 속삭이며 어머니의 관자놀이께를 쓰다듬었다.

아니, 이게 삶이란다.” 안나 표도르브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대화 이후에 불쾌한 앙금이 남았는데, 카탸가 자신에게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스페이드의 여왕중에서 118p

 


아니요, 사랑하는 엄마, 이번에는 아니에요.’ 안나 표도르브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일생 동안 처음으로 아니요라는 단어를 소리내어 발음하진 않았지만,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연약한 싹처럼 껍질을 뚫고 나왔다. 그녀는 단지 이 일에 관해 사전에 아무 이야기도 없이 어머니를 가족의 반항이라는 진실 앞에 세우고자 했다. 아이들이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 투명한 벌레가 어떤 소란을 일으킬지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스페이드의 여왕중에서 141p

 









  노벨문학상 후보에 꾸준히 거론되는 작가라서 호기심에 읽었는데 의외로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다. ·단편에 이토록 밀도 있고 강렬한 여성 서사를 녹여낼 수 있다니, 작지만 참 단단한 작품을 만난 것 같다. 가독성이 높아 쉽게 읽을 수 있는 데다 분량도 짧으니 러시아 문학이 어렵다고 느끼거나 오랜만에 세계문학에 관심이 가는 분들에게 특히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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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 전하는 ‘안다는 것’의 세계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신동숙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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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인류의 역사!

지식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방대하고도 흥미로운 여정!






  1932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언젠가는 인류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도록 돕는 장치와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의 상상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컴퓨터를 비롯한 기계가 모든 정보를 습득하고 생각까지 대신해주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이 시대에 지식은 인간에겐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 걸까. ‘앎’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호기심에서 인류의 역사가 비롯된 것이라면, 인류의 존속 역시 지성의 종말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지식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식의 탄생』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지식의 역사를 탐구하고, 이정표를 제시하는 아주 흥미로운 저작이다.





배움의 발견부터 지성의 종말까지,

세상의 모든 지식은 어디에서 왔는가





모든 인생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 10p





  19세기 후반, 메소포타미아 니푸르(이라크에 위치)에서 세계 최초의 학교로 추정되는 건물과 설형문자가 적힌 학생들의 점토판이 발굴되었다. 점토판의 왼쪽에는 선생님이 적은 그날의 학습 내용이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학생들이 서툰 솜씨로 따라 쓰고, 고치고, 지워져서 지저분해진 흔적이 가득하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16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중국의 상 왕조 시대의 문헌에도 이와 같은 학교가 존재했다는 단서가 있다.




  어떻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메소포타미아에서 학교들이 설립되었는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이 무렵의 지식은 ‘공동체의 건강과 생존 보장’은 물론, 배움을 통해 선조들의 영혼과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얻음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문자는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소통 수단이 되어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인류는 전적으로 경험에만 의존했던 선사시대를 지나 타인에게 배우며 확인의 과정을 거쳐 체화하는 ‘배움’을 통해 지식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세계적인 저널리스트이자 이 책의 저자인 사이먼 윈체스터는 이처럼 지식의 출발은 ‘배움’에서 시작되었다고 기술한다. 이후 지금껏 알려진 것과 학습된 것들을 기록하고, 가르치고,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온 인류가 어떻게 책을 만들고 최초의 도서관을 탄생시켰는지 그 과정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거의 모든 사람에게, 거의 모든 곳에서 전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이끈 종이의 발명, 지식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 구텐베르크의 성경, 보편적 지식의 저장소가 되어준 백과사전, 원시적 형태의 검색엔진으로 구글의 시초가 된 문다네움, 신문과 미디어의 탄생, 현대의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지식의 역사를 총망라한다. 덕분에 독자들은 문명의 핵심이 결국 앎을 향한 인간의 호기심과 욕망이었음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SAT의 기원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확실히 문제가 될 만한 측면이 많다. 이 시험을 만든 사람은 프리스턴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칼 브리검이다. (…) 의무대에 있는 동안 선택적 번식과 결함이 있다고 판단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집단 전체를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브리검과 그의 동료 우생학자인 로버트 여키스는 미군 병사들의 상대적 지능을 측정하기 위해 일련의 테스트를 고안했다. / 134p



문자가 탄생한 이래로 우리는 지금껏 알려진 것과 학습된 것, 가르치고 토론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논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수많은 것을 수집하고 보관하고 보호할 방법을 모색해왔다. 가장 널리 알려지고 가장 오래된 보관 수단은, 최초의 문자를 적을 때 사용했던 나무의 속껍질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불리는 기관이다. 나무 속껍질을 뜻하는 라틴어는 ‘liber’이며, 여기서 유래한 영어 단어는 ‘도서관library’으로 수 세기에 변천을 거쳐서 영국 시인 제프리 초서가 활동하는 시대인 14세기 무렵부터 사용되었다. / 151p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위키피디아 모두 변덕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군중의 지혜에 의존하며, 그 지혜의 총합은 군중의 규모에 비례한다. 그런데 바로 그 대목이 우리에게 염려를 자아낸다. 군중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지식이 모인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렇게 모인 지식의 진정한 가치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우리가 찾고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될 지식에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가치가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 259p










  또한 이 책은 어떤 종류의 지식이든 ‘완전한’ 중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저작이기도 하다. 저널리스트답게 저자는 언론과 소위 지배층들이 가짜 뉴스와 프로파간다(선동)를 이용해 대중에 제공되는 정보를 통제하고, 더 나아가 대중의 마음이나 추향,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에 대한 대중의 태도, 집권할 정부의 성향까지 통제하고 남용해왔던 역사들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안다는 것’이란 무엇이며,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해보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생각과 행동의 끝없는 순환,

끝없는 발명, 끝없는 실험에서

움직임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고요함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하고,

발언에 대한 지식을 얻지만 침묵에 대한 지식은 얻지 못한다.

말에 대한 지식을 주지만, 그 말에 무지하게 된다.

모든 지식은 우리를 무지로 이끌고,

모든 무지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지만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다고 신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건 아니다. - T. S. 엘리엇 - / 34p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지식의 가치가 사라지고 인간의 사고능력까지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비관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지식의 본질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그것으로 하여금 보다 사려 깊고, 지혜롭고, 현명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데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얼마나 ‘많이’ 아는 것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지식의 진정한 가치라고 말하는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다.




  놀랍도록 지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은 그 자체로 다양한 정보를 즐길 수 있어 재미있다. 이런 부류의 책 중에서는 가독성이 높은 것도 큰 장점이다. 다만, 종종 눈에 띄는 오타나 문장의 오류는 편집상 좀 더 섬세한 교정이 더해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앎을 향한 즐거운 지적 탐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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