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와이프
에이미 로이드 지음, 김지선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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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해서는 안 될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마지막까지 엄청난 몰입감과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본격심리스릴러!

 

 

 

   영국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서맨사(이하 샘)는 경찰이 놓친 실마리들을 포착해 사라진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홀리 마이클스 살인 사건을 접하게 된다. 피해자인 이 어린 소녀는 집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플로리다주 레드 리버 카운티의 강 상류에 버려졌다. 시신의 손끝은 펜치로 잘려 있고, 사망 직후 시신이 이동된 것으로 보이며,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이 용의주도한 사건은 여러모로 많은 의문점을 남겼다. 현장에서 발견된 발자국, 사건 전에 등장한 수상쩍은 남자까지. 하지만 별다른 실마리나 목격담은 들려오지 않았고, 각종 음모론과 온갖 끔찍한 상상들이 확대 재생산되며 점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가운데, 한 소년이 법정에 섰다.

 

 

 

   데니스 댄슨. 열여덟 살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어색한 정장을 차려입고 법정에 선 소년의 겁에 질린 얼굴과 파란 눈을 보며 사람들은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역경에 빠진 열 여덟 살 소년이 감옥의 남자로 변하기까지, 데니스는 오랜 세월 복역 중에 있으면서도 수도승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연상시킬 만큼 성스러운 구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끝끝내 선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죄를 주장했지만 시종일관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열광케 했다. 그의 다큐멘터리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의 무죄 시위를 주도하고 유명인들이 지지 트윗을 올렸으며, 트위터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랐다. 데니스 앞으로 온 편지가 하도 많아서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자친구인 마크를 떠나보낼 정도로 이 사건과 데니스에게 푹 빠진 그녀는 마치 연애편지를 쓰듯이 그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순수하게 자신을 향해 마음을 열어 보이는 샘의 편지를 읽고 데니스 역시 응답했다. 그렇게 여러 편의 편지를 주고받는 동안, 악랄한 살인마라기에는 섬세하고 자상하며 자신을 응원해주는 데니스에게 흠뻑 빠진 샘은 이윽고 그를 만나기 위해 미국 앨투나 교도소로 날아간다.

 

 

 

샘은 차를 세우고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는 입구로 걸어갔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돌아갈까 생각했다. 지난 스물네 시간 동안 마음을 백만 번은 바꾼 것 같다. 공항 문을 나서 열기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 단 한순간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실수한 거야. 끔찍한 실수.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일종의 공유된 광기였다. 그저 뭔가 더 나은 것을 간절히 바란 두 사람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 32p

 

 

 

 

 

  샘은 평소 자존감이 낮고 칭찬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타입이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실현해내고야 하는 집요한 구석이 있다. 오로지 연애 상대에게만 매달려서 나머지 모든 것은 뒤로 제쳐두는 성향을 반복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데니스와의 만남이 광기이자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본 순간, 이 순수한 사랑에 몰입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의 청혼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살인죄를 선고받은 남자를, 어린 시절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어딘지 위험한 장난 같은 것을 서슴지 않은 데다 심지어 아버지조차 옹호하지 않을 정도로 골칫거리 같은 구석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할 수 있을까. 비록 수감되어 있는 사형수지만 이 매력적인 남자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샘 자신이라는 것, 자신이 그의 보호자가 되어 지켜주고 싶다는 욕망이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의혹을 접어두어도 좋을 만큼 그가 누명을 쓴 게 분명해 보이는 증거들, 오랫동안 그의 다큐와 영화를 찍으며 한사코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캐리와 같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 또한 결심에 한몫했을 것이다.

 

 

 

데니스는 비록 인기가 많았지만 다른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그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의 다른 부적응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경찰인 에릭 해리스의 아들 하워드 해리스, 린지 더스트와 함께 보냈다. 같은 팀 선수들과 반 친구들은 데니스가 왜 여전히 ‘루저’ 취급을 받는 아이들에게 애착을 느끼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피고 측 심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학대 아동의 고전적 징후였다. “이런 아이들은 또래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약점을 들키는 걸 두려워합니다. 친구들이 자신의 가정 형편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죠.” 데니스는 자신이 루저라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 46p

 

 

“시각 따윈 없어. 이야기는 없어. 이곳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건 그냥 진실뿐이야. 외부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해. 왜냐하면 여기 없었으니까. 그 사람들은 그 당시의 데니스를 몰라. 당신들이 그 녀석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기 전, 맹수가 아니라 사냥감처럼 보이는 법을 배우기 전의 그 녀석을.” / 112p

 

 

 

 

 

 

   이후 사건은 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자신이 홀리 마이클스를 죽인 진범임을 자백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마을에서 사라진 다른 소녀들의 사건은 한사코 부인했지만 그가 홀리 마이클스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이 입증되면서 마침내 데니스는 극적으로 풀려난다. 그렇게 온갖 스포트라이트와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데니스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한편, 사랑하는 사람의 무죄가 입증되고 이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장벽도 사라졌으니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샘에게 서서히 기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지를 주지 않는 데니스의 태도, 그의 고향 레드리버 카운티로 돌아온 뒤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상쩍은 일들,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의 친구 린지와 어딘지 섬뜩한 구석이 있는 친구 하워드, 종종 사라지곤 하는 데니스와 그를 주시하고 있는 해리스 경찰까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샘은 이 결혼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는커녕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히며 하루 빨리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과연 샘은 데니스가 끝까지 마을의 소녀들을 죽이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을까?

 

 

“이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내가 부인이라면 데니스가 왜 여기로 굳이 다시 왔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데니스는 이제 자유이고 여기에 가족도 없어요.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고요. 심지어 이곳 사람들은 모두 데니스를 미워해요. 그런데도 왜 데니스는 여기를 다시 찾아왔을까요?” / 266p

 

 

냉정을 되찾은 샘은 폭식한 사람의 후회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이런 식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남편의 소지품을 기웃거리는 정신 나간 아내. 새끼 고양이를 익사시켰다는 둥, 옛 여자친구와 바람을 피운다는 둥 하는 편집증적 망상들. 이제 그런 생각은 멈췄다. 왜 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파괴하지 못해서 그렇게 안달일 걸까? / 309p

 

 

 

 

 

 

이곳에는 뭔가 있어 / 325p

 

 

 

   『이노센트 와이프』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살인자가 맞을까, 아닐까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 마지막까지 엄청난 몰입감과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만드는 심리스릴러다. 의심과 믿음을 반복하며 공포와 환각, 현실 같은 망상이 복잡하게 뒤엉킨 관찰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를 마지막까지 꽉 붙들어두는 작가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 최근 읽은 심리스릴러 중에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건드리는 작품으로는 단연 최고인 듯하다. 거기다 <나를 찾아줘> 제작사와 영화화를 확정지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지금처럼 외출이 어려운 때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히는 책 한 권 읽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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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
알렉산더 지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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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이고, 은유적이며,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한 남자의 성장 그리고 사랑!

내가 읽은 것보다 읽지 못한 것이 더 많은, 그래서 거듭 읽어볼 가치가 있는 소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 『한여름 밤의 꿈』에서는 마법에 걸려 커다란 당나귀 머리로 변한 바텀에게 마법의 꽃즙이 묻은 티타니아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셰익스피어가 마법의 꽃즙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사랑이란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것, 두 눈을 멀게 하고 분별력을 앗아간다는 것. 감정의 원인과 대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정서적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여기서 사랑이 우리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현실의 모든 저항이나 장애를 넘어서게 하는 바로 그 힘 때문이다. ‘나르시스의 전설에서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 결코. 그가 사랑한 대상인 물에 비친 그림자는 그를 움직일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중에 자기 자신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의 사랑은 그 힘 때문에 전설이 된다.’던 『에든버러』 속의 구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저항할 틈도 없이 닥쳐오는 폭력 앞에 고통 받던 10대의 소년들이 서로를 사랑했던 것은 어쩌면 그 힘을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레이디 타마모가 영생을 버리고 사랑했던 자신의 남편을 따라 스스로 불에 뛰어들게 한 바로 그 힘을.

 

 

 

 

 

 

차별과 억압, 정체성의 혼란과 폭력으로 얼룩진 10대들의 민낯 

 

 

   『에든버러』는 한국인계 이민자이자 퀴어인 열두 살 소년 ‘피’의 이야기다. 성가대에 들어갈 만큼 훌륭한 목소리를 가진 피는 처음으로 참석한 파인스테이트 성가대에서 피터를 만난다. 아마빛 머리카락에 체구는 작아 보이지만 성량이 풍부한 피터의 입은 피에게 있어 ‘순수한 음들로 이루어진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이다. 널 사랑하고 있어. 그래 맞아, 널 사랑하고 있어. 피는 피터와 함께, 영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높은 곳으로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응시하는 하나의 시선을 불쑥불쑥 느낀다. 합창단의 지휘자, 큰 에릭이다. 그는 나체주의자이자 소아성애자로,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나체주의의 미덕을 늘어놓고 알몸 대화를 나누며, 성가대에서 아이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금지시킨다. 그의 눈은 올빼미를 닮아서, 하늘을 날며 밤하늘 어딘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다. 나중에 큰 에릭이 구속이 된 이후에야 구체적인 숫자를 알게 되지만, 성가대 대원의 절반이나 되는 아이들이 그로부터 씻을 수 없는 성폭력 트라우마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알고 있었어. 바람이 방향을 바꾸자 바닷바람이 지나간다. 이편이 좀 더 괜찮은 기억이다. 나는 큰 에릭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둘 다 소년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큰 에릭이 나에게서 무엇을 보는지 안다. 우리는 같지 않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걸 그는 안다. 나는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안다는 사실이, 내 안에 밝혀진 빛 하나가 희미한 어둠을 뚫고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다. / 66p

 

 

잠시 후 큰 에릭이 내 자리로 다가온다. 《천국의 불꽃》을 좋아하니? 그가 나에게 묻는다. 그는 내가 책에서만 읽었을 뿐 한 번도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양손을 비빈다. 그렇게 손을 비비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가 유일하다.

좋아해요. 나는 말한다. 나는 그 책을 좋아했다. 큰 에릭은 나에게 이 소설을 읽도록 권했고, 나는 도서관에서 대출을 받았다. 책을 가지고 집에 왔을 때, 그가 왜 나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했는지 알았다. 소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관한 이야기로, 대왕은 십대 시절에 연상의 남자 교사와 연애를 한다.

큰 에릭은 미소를 짓는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아니니? 다음엔 《페르시아 소년》을 읽어라. 황제와 거세된 남자 노예의 사랑 이야기란다.

네, 그럴게요. 나는 말한다. / 84p

 

 

 

 

  이미 벼랑 끝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에 저항한다. 피터는 자해를 가하다 결국 제 몸에 불을 지른다. 잭은 스스로 제 몸에 방아쇠를 당긴다. 피는 피터를 큰 에릭으로부터 지키지 못한 데에 대한 자책과 잭의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데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마치 자신이 잭의 총알이 되고, 피터의 불길이 된 것처럼 그들의 죽음에 관한 산만한 생각들이 자신 안에 불을 질러 흉측하고 붉은 흉터를 남기고, 번개에 맞은 나무처럼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 같다. 더욱이 그는 그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도 완전함을 얻지 못하고 수시로 죽음에 대한 충동을 느낀다. 그렇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피는 훗날 고등학교 수영 강사 코치로 부임하며 피터와 똑같이 생긴 제자 워든을 만난다. 피터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덤덤하게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 피였지만 끝내 워든을 거부하지 못한다. 하지만 워든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워든은 지난 날 성가대의 지휘자 큰 에릭의 아들, 에드였던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해보지만 모르겠다. 아무것도 이유가 아닌 동시에 모든 게 이유가 된다. 왜 죽고 싶은 거지?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달리 그만 둘 방법이 없잖아? 죽으면 모든 문제가 끝나니까. 타마모의 모습이 보인다. 자기 손으로 남편의 두 눈을 가리고, 공기를 들이마신 후 입김을 불어 불을 내뿜는 타마모와, 그녀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만하면 됐어. 타마모는 생각했을 것이다. 타마모의 입술 위로 뿜어져 나오는 불길, 그것은 이제 나를 끝낼 것이다. / 164p

 

 

 

   이처럼 『에든버러』는 수치심과 폭력으로 얼룩진 10대 시절, 아직 자아가 뚜렷이 정립되지 못한 소년들에게 방치된 성폭력의 그늘이 한 개인은 물론 그들 조직 전체에 얼마나 큰 비극을 몰고 오는지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과감하면서 덤덤하게 그려나간다. 그러면서도 거친 듯 섬세하고, 무기력함과 분노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나아가려는 한 남자의 감정선을 매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얼마간 책을 읽기 힘들다가도 기꺼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껴안게 한다. 여기에 한국계 이민자로 겪게 되는 차별과 한국의 구미호 설화가 어우러진 다층적 구성, 몽환적이면서 시적인 문체는 이 소설이 미학적인 요소까지 갖춘 꽤 괜찮은 소설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나는 데스캔트를 맡고 싶다.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목소리도, 내 음역대도 그만하면 괜찮다. 나는 더 열심히 노래를 익힌다. 하지만 그 순간 큰 에릭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합창석 맨 위에 선 금발 소년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사람들은 자신이 듣고 있는 음악에 감동 받길, 그 음악이 바로 눈앞에서 머무르길 바랄 것이다. / 24p

 

 

나의 옛 목소리에 대한 기억, 그러니까 소년 시절 소프라노 목소리에 대한 기억은 간절한 소망에 대한 기억이다. 목소리에 힘을 빼고 싶은 욕망. 먹이를 잡은 가마우지가 바다를 떠나듯, 성대를 풀어내고 육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존재가 되고, 소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 자체가 되고 싶은 소망. / 118p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기억하는가? 기억할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를 만큼 정말 순진했던가? 그렇지 않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할 뿐이지. 그 시절의 순진함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 시절을 까맣게 잊은 어른일 것이다. 순진함이 악의 능력에 대한 무지라면,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들은 순진함을 운운한다. 그들은 아이를 보고 순진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억에도 없는 그 시절을 막연히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 296p

 

 

 

 

 

 

   『에든버러』는 환상적이고, 은유적이며,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운 소설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내가 실제로 읽어낸 것보다 읽지 못한 부분이 혹은 읽어야 할 부분이 더 많은 소설이다. 오직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해서, 거듭 읽으면 읽을수록 더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내가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은 다른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더욱 많이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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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 - 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취향수집 에세이
신미경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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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위한 것을 알아야 비로소 내 삶에 균형이 찾아온다!

소유하지 않아도 소유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취향 실천법!

 

 

   얼마 전에 히로세 유코의 『가다듬기』를 읽으면서 지금의 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나를 가다듬는 과정’으로 삼아보자고 마음먹었다.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지금, 여기’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하고 주변을 편안한 상태로 만들며, 그렇게 정리하고 가다듬는 것만으로도 답답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거창한 계획과 일상을 뒤바꾸지 않고 필요한 것만 골라서 일상을 꾸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와 관련된 책들에 저절로 눈길이 간다.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가 그렇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일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행복이자 흔들리는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라는 표지글이 단박에 나를 책으로 이끈다.

 

 

 

 

 

 

 

미니멀리스트 생활자의 적게 가지고 바르게 생활하기

 

 

 

   『나의 최소 취향 이야기』는 적지만 바르게, 그리고 단단하게 꾸린 일상을 지향함으로써 삶의 균형을 찾고자하는 신미경 작가의 에세이다. 그녀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른 채 필요 이상으로 물건에 집착하고 남들이 욕망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드러내는데 에너지를 빼앗겼던 지난날을 회고한다. 그러면서 불만족스러웠던 나의 많은 면을 지우고, 최소한의 규모로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 나다운 것에 집중하면서 살기로 한다. 그렇게 물건보다는 경험을, 경험보다는 배움과 깨달음을 얻으며 충만함을 느끼는 일상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하나하나 소개한다. 여기에 마음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차곡차곡 쌓아온 그녀의 취향도 소박하게 담겨 있다. 분명 나와 다른 면이 있긴 하지만, 이럴 땐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아가는 시간을 얻게 되기도 한다.

 

 

 

볕을 쬐며 간단히 식사를 할 때면 지금을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한다. 나를 찾고, 내면의 평화를 찾아 멀리 떠날 필요가 없어진 건 지금 누리는 시간이 흡족해서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유체 이탈한 듯 어딘가에 팔렸었던 공상가는 사라졌다. 이제 현실에서 열심히 밥을 짓고 생선을 굽는다. 가끔 행복이라는 모호한 희망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소박한 찬에 볕이 드는 자리에서 밥 먹는 순간에 느끼는 이 감정이 행복 아닐까 싶다가도 왜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걸까 궁금해진다. 부족한 면만 쫓다 보니 알 수 없었던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의 무게. / 22p

 

 

 

  책에는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 옷에 대한 태도, 운동과 건강, 일과 직업관, 배움에 대한 갈망,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어울리는 방식 등 담백한 미니멀리스트 생활자로서의 모습이 채워져 있다. 채소 찜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오늘도 어떤 채소를 쪄볼지 궁리하고, 그림을 좋아하지만 오리지널 그림이나 판화로 집을 꾸밀 여력은 없어 그림엽서를 잠깐 욕망한다. 실제 물건을 모으지 않으면서도 만족할 수 있는 수집 방식이랄까. 살림 역시 확고한 1인분의 체계를 갖추며 한때 빠져 있던 과감한 스타일 실험은 추억으로 남기고 구속 없이 마음마저 편해지는 옷과 친해지려 한다.

 

 

 

   그 중 현관을 깨끗이 치우는 것으로 의식처럼 마음을 다스리려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른바, ‘현관 효과’. 집 안 곳곳을 먼지 하나 없이 관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집에서 하나의 장소를 마치 성역이라도 된 듯 관리하면 자신만의 마음 다스리기 의식이 된다고. 현관 효과와 비슷한 원리로 수도꼭지를 관리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한다. 물과 돈은 흐른다는 의미에서 막힘이 없어야 하므로 풍수에서는 물 나오는 곳을 깨끗하게 관리하면 금전운이 향상된다고 하니 말이다. 행운은 좋은 습관이 불러들인 결과이고 깨끗한 장소의 정돈된 느낌은 내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기에, 미신적 의미여도 마음을 의욕적으로 만들어주다 보면 결국 사람의 행동은 변한다. 흠, 나는 그럼 무엇을 마음 다스리기의 의식으로 삼아볼까.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는 묵은 책들에 어디 관심을 가져볼까. 혹시 모르지, 책이 내게 감동이라도 하여 지적 능력이라도 조금 향상시켜줄지(?).

 

 

 

내게 맞는 삶의 규모를 여전히 찾아가고 있다. 최소를 지향하는 방향은 있지만, 끝은 없다. 다만 이제야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속박되었다는 기분이 없는 하루를 마주한다. (중략) 내가 전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기 시작한 지 이제 7년. 날 때부터 이런 성향의 사람인 것처럼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이런 흐름이 당연해졌다. 찻잔은 세트로 사지 않아도 되고, 용도별로 모든 물건을 완벽히 갖추고 살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삶. 결국, 무엇에 더 마음이 편안한지에 달렸다. / 50p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나만 아는 약점, 나의 연약한 구석을 인지하고 있기에 가끔 자만심이 솟아나면 약점을 떠올리며 억누른다. 약점을 안고 살아가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무조건 숨기기보다 조금은 미화시켜서 드러내는 편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감추려만 들면 어두운 그늘 하나가 생겨버린 기분이고 내뱉지 않으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이유로, 지나가는 말로 “스카프를 참 좋아하시네요” 하는 사람들에게 “네, 좋아해요(저만의 슈퍼히어로 슈트거든요)”라고 짧게 긍정할 수 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반복할 때면 스카프로 살짝 가린 나의 흉터를 긍정하고, 좋아하게 되는 착각이 든다. / 76p

 

 

 

 

 

 

 

   어릴 적부터 가족은 물론 친척과 동네 이웃들의 기대까지 떠안으며 자란 나는 ‘무엇이든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잘 하지 못하는 듯싶으면 도전보다는 포기를 먼저 했고, 못하는 것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디 나뿐일까.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그녀 역시 과대포장 없이, 자기연민 없이 담담하게 살기 위해 얀테 마을의 일원이 될 것을 선언한다. 그녀는 스칸디나비아 문화권의 신념 중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을 소개한다. 덴마크 출신 노르웨이 작가 악셀 산데모세의 소설 『도망자, 그의 지난 발자취를 따라서 건너다』(1933)에 등장하는 이 가상의 마을 얀테에서는 잘난 사람이 대우받지 못한다고 한다. 북유럽에서 보편적이고 일상에 녹아 있다는 이 사회 법칙은 나는 남들보다 좋은 사람이 아니며, 더 똑똑하거나 더 많이 알지 않고, 더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지 말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나 잘난 사람들만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누구도 특별하지 않고 더 낫지도 부족하지도 않다는 개념이 받아들여질리 없겠지만, 이 법칙을 상기하며 나는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특별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임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나를 배우면 그다음 날에는 두 가지를 시도해볼 수 있다. 배우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기 어렵지만 배울 노력조차 안 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무엇이든 배운다.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더욱더 많이 보고 배우고 흡수해야 하고. 그건 지겨운 의무의 일종이라기보다 고도의 지적 생명체인 인간으로 살아가는 재미다. 그러니 오늘도 요리법, 청소법, 컴퓨터 기술 등 무엇이든 하나라고 가볍게 배워둔다. 어느 날 요긴하게 쓰이는 날이 올 게 분명하고 그렇게 내 생활력은 ‘만렙’으로 향한다. / 230p

 

 

 

   저자는 자신이 ‘서적병(Book Disease)’에 걸렸노라 고백한다. 유치원 때부터 조금씩 면역력이 약해지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본격적으로 병을 알았다고 한다. 활자 벌레 감염은 잠복기를 거쳐 아는 단어가 많아지고 용돈이 오르고 돈을 벌수록 증세는 점점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비블리오바이불리’가 되었는데, 그리스어의 책을 뜻하는 비블리오(Biblio)와 라틴어 어원으로 취한다는 의미의 바이불리(Bibuli)의 합성어로 지나치게 많이 읽는 책 중독자를 뜻한다고 한다. 허세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첫째 아이가 세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 책을 병처럼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 목마름보다는 아이와 집안일을 돌보는 데 내 시간을 다 쓰지 않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심 ‘자기계발하지 않는 할 일 없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으리라. 언젠가는 이 열병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그라질 테지만, 지금 내 마음의 방향에 충실하라던 저자의 글처럼 일단은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좋아할 수 있는 이것에 충실하려 한다.

 

 

 

 

 

 

 

   책을 덮으며 소유하지 않아도 소유하는 방식으로 산다던 그녀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내가 가진 대부분의 고민은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쉽게 떨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사느라 아등바등하기보다 나답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대로 소유하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러다보면 나도 최소 취향으로 최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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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니스 - 잠재력을 깨우는 단 하나의 열쇠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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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잡한 세상에서 나를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안과 위기의 오늘을 극복하는 열쇠,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책! 

 

 

 

   1944년 2월 23일 수요일 아침, 안네 프랑크는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숨어 지내던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서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파란 하늘, 그 아래 이파리 없는 밤나무, 공중에서 휙휙 날아다니는 새들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힐 만큼 황홀감을 느꼈다. 바깥은 아주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전쟁 중이 아닌 것 같았다. 히틀러가 이미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자신들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단 하루도 보낼 수 없는 현실이 거짓말 같았다.

 

 

 

   2019년 2월 말 경, 온 거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무지 저녁 일곱 시의 풍경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차도, 사람도 모두 일순간 사라져버린 듯했다. 그렇게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렸던 대구의 풍경은 마치 시간을 모조리 빼앗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 작은 바이러스 하나에 우리의 건강이, 일상이, 생계가 무너져버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봄은 찾아왔다. 언제쯤이면 이 위험이, 불안이 그칠까 두려워하는 동안에 자연은 소리 없이 따스한 기운을 몰고 왔다. 창문을 열면 가까이 보이는 앞산에도 초록빛과 핑크빛이 스며든 것을 보면서 나는 내 안에 쌓여 있던 공포와 두려움이 조금씩 잊혀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안네 프랑크가 다락의 작은 창으로 바라보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의 위협 속에서 기운을 북돋아주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인가를 자연 속에서 찾았듯, 나 역시 아이들과 이 기나긴 시간을 자연을 통해서 위로와 안정을 받고 있다. “불행 속에도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찾아보려는 노력만 한다면 점점 더 많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고 균형을 되찾을 수 있다.”던 일기장 속의 글처럼, 어쩌면 이 시간이야말로 그간 잊고 지냈던 소소한 행복과 바쁜 일상에 뒤틀려있었던 내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아닌지 생각해보려 한다. 스틸니스, 즉 고요를 내 안에 깃들기. 어쩌면 『스틸니스』에서 강조하고 있는 ‘고요’야말로 불안과 두려움에 먹이를 주지 않으면서 안팎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단어가 아닐까.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의 핵심, 고요

 

 

 

   1세기 말, 로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정치가이자 철학가인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외부의 소음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명료한 사고와 예리한 글 솜씨를 빛냈다고 한다. 그는 소음에 불평을 털어놓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한 다음, 무엇에도 정신이 팔리지 않도록 그 상태를 유지하는 거지. 내면이 어지럽지만 않다면 바깥이 아수라장이어도 상관없거든.” 주변 환경을 무시할 수 있고 어떤 곤경에 처하든 언제 어디에서나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다니! 세네카를 비롯해 스토아 철학을 신봉하는 그의 동료들은 인간이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면, 즉 그들이 일컫는 아파테이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가 전쟁 통에 빠지더라도 우리는 문제없이 사고하고 능숙하게 일하면서 여전히 잘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도 흔들리지 않는 것, 흥분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 반드시 들어야 할 소리만 듣는 것, 안팎으로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스틸니스』의 저자 라이언 홀리데이는 이를 가능케 하는 힘을 ‘고요’에서 찾는다.

 

 

 

고요란 침착함은 물론이고 깨달음과 탁월함, 고귀함, 행복, 성취로 향하는 경로이며 누구라도 갈 수 있는 길이다. / 21p

 

 

 

   라이언 홀리데이는 공자, 석가모니, 존 스튜어트 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존 F. 케네디, 윈스턴 처칠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던 사람들에게는 주변의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집중력을 발휘해 눈앞에 닥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힘, 즉 고요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러시아가 쿠바섬에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건설했을 때,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인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침착하고 허심탄회하면서 명료한 판단력으로 흐루쇼프의 결심을 철회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야구선수 숀 그린은 엄청난 계약과 시즌에 대한 기대감, 언론의 비평 등으로 인해 조급해지는 머릿속을 비우고 그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기로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윈스턴 처칠은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창의적이고 회복성 있는 여가 시간을 보내며 삶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렇듯 저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의 고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고요를 어떻게 발견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을까? 저자는 고요를 찾기 위해 집중해야 할 세 가지로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정신의 영역, 마음을 움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영혼의 영역, 정신과 영혼의 실행자인 몸의 영역으로 나눠서 소개한다. 정신적인 고요를 기르는 방법은 이렇게 요약된다.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 것, 지나치게 분석하지 말고 그저 할 일을 할 것, 여유와 충분히 시간을 가질 것,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할 것, 모든 경험을 성스럽게 바라볼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익숙해질 것, 주위의 조언이 우리의 신념에 반하는지 판단할 것, 내려놓을 것 등이다. 안네 프랑크가 일기를 씀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것처럼, 침묵을 통해 진짜 들어야 할 소리를 찾았던 작곡가 존 케이지처럼, 궁도의 명인인 아와 겐조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명중보다 무심에 더 집중했던 것처럼, 소음을 무시하고 정말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현재에 집중해볼 것을 강조한다.

 

 

 

기억해야 한다. 굉장한 일이 미래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없다. 명료함도 통찰력도 행복도 평화도 마찬가지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문자 그대로 1, 2초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지금’이란 과거에 잡착하거나 미래를 염려하지 않고 우리가 존재하기로 선택한 순간을 뜻한다. 우리는 과거에 일어난 일 또는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한 희망이나 걱정을 우리가 원하는 만큼 멀리 밀어낼 수 있다. (중략) 지금 이 순간을 붙잡아라! / 51p

 

 

 

 

 

  고대부터 사람들은 평온함을 찾기 위해서, 자신의 업적을 잃지 않고 보호하기 위해서 내면 깊은 곳에 존재하는 힘을 길들이고 통제하려고 힘써왔다. 행복 또는 불행, 만족 또는 불만족, 절제 또는 과욕, 고요 또는 동요를 결정하는 열쇠는 바로 우리의 영혼이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엄격한 도덕적 잣대, 질투와 시기를 비롯한 해로운 욕구를 가까이 하지 않을 것,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울 것, 세상에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할 것, 삶 속에서 관계와 사랑을 키워나갈 것, 결코 ‘충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과 끝없이 더 많은 것을 바라다가는 결국 파산에 이른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 등이다.

 

 

 

   그 중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내면아이를 안아주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에 남는다. 하나의 예로 타이거 우즈는 아버지의 지속적이고 거친 훈련 때문에 정신적인 문제를 낳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정욕구를 채우지 못해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지지해줄 후원자를 찾은 것처럼, 우리는 유년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가 성인이 되어서도 해소되지 못했을 때 발생되는 여러 정신적인 문제들을 종종 마주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릴 때 받은 상처가 있는지 차분히 생각해보자. 상처를 받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예기치 못한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이 ‘몇 살’짜리의 감정 반응을 보이는지 생각해보자. 저자는 그게 바로 당신의 내면아이라고 지적하며 당신이 그 아이를 안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 아이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봐, 친구. 괜찮아. 네가 상처받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널 돌봐줄게.”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내면의 아이가 알아듣고 안심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고 도와야 한다고 말이다.

 

 

 

당신을 삶의 아름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허락하지 마라. 세상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모든 경험을 성스럽게 해보라. 무엇이든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탄하라. 무의미한 싸움에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할지라도, 무의미한 일로 우리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이 모든 일을 멈추고 주변에 수없이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몸을 담글 수 있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아름다움 속에서 깨끗해져보라. / 172p

 

 

  끝으로 고요의 마지막 영역인 몸은 물질세계의 변덕에 취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담는 육체적 그릇을 반드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몸을 올바른 위치에 두려면 마음과 정신을 바르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올바른 위치에 놓기 위해서는 습관, 행동, 의식, 자기관리를 통해 우리의 몸을 바르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서는 확실하고 절제된 일상의 원칙 만들기, 야외에서 활동적으로 시간 보내기, 고독과 자기만의 관점 기르기, 사람들이 나를 찾을 때 나서지 않는 법을 배우기, 충분히 수면을 취하고 일중독에서 벗어나기, 나 자신보다 더 큰 대의에 헌신하기 등을 제안한다.

 

 

 

산책은 칼로리를 소모한다거나 심장박동수를 올리기 위한 일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산책은 존재, 초월, 마음을 비우는 것, 당신을 둘러싼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감상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표현하고 구체화하는 행동이다. 이제는 떨쳐내야 할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떠오르는 생각을 향해 다가가야 할 때다. / 242p

 

 

인생에서 당신이 도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중략) 당신이 추구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 집중해야만, 진정한 자기 인식과 인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면밀히 들여다봐야만 얻을 수 있다. 아주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볼 수 있으므로 흙탕물이 가라앉도록 기다려야 한다. (중략)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저 안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된다. “자기 자신의 영혼보다 더 평화롭고 더 방해가 없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297p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책 속에서 예시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아이러니하게도 모순된 행동과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 안에서 고요를 찾고 계속해서 정신과 영혼,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쩌면 불안과 두려움으로 어수선한 바로 지금이야말로 내 안의 고요를 찾을 절호의 기회인지 모른다. 그렇게 책 속에서 제시하는 방법들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다 보면 이 힘든 시기도 다 지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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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스 라이크 어스
크리스티나 앨저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시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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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범인일지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 그 의심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

악질적인 여성 범죄와 정경 유착의 고리를 날카롭고 사실적으로 파헤친 범죄 소설!

 

 

 

  FBI 요원 넬 플린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10년 만에 고향인 롱아일랜드로 돌아온다. 그녀는 강력계 형사였던 아버지의 동료들과 함께 유해를 뿌리며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아버지의 느닷없는 죽음이 슬프다기보다는 그저 얼떨떨해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롱아일랜드를 떠난 뒤로 아버지와는 줄곧 왕래가 없었던 까닭이다. 롱아일랜드의 서퍽 카운티는 꽤 잘 사는 동네지만 3번 관찰구 주민의 절반가량은 빈곤해서 강력 범죄 비율이 높고 마약이 횡행한 곳이었다. 그런 가운데서 넬의 아버지는 제일 거칠고 젊은 순찰 경관에게는 최고의 선생이라고 불릴 만큼 정의롭고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진 경찰이었다. 하지만 마약을 혐오하면서 본인은 폭음을 했고, 노름꾼들을 소탕하면서도 한 달에 한 번씩 롱아일랜드 지방 검사들과 몇몇 유명 판사를 초대해 포커 게임을 벌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학대하는 자들을 경멸하면서도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넬의 눈에는 모순된 구석도 많았다. 때문에 새벽 2시경, 행크의 술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면서 사고가 났다는 말에도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의 집과 행정적인 절차만 마무리하고 나면 돌아가리라. 다시는 서퍽 카운티로, 집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잔혹하게 살인된 여성들, 범인을 쫓는 여성 수사관

 

  『걸스 라이크 어스』는 강력계 형사 출신인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FBI 요원 넬 플린이 이 지역에서 벌어진 한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아버지의 파트너이자 친구이기도 한 형사 리의 요청에 의해 시네콕 카운티 공원 동쪽에서 일어난 사건 현장으로 향한 넬은 해안의 수백만 달러짜리 호화 저택들 한가운데서 팔다리가 잘리고 포대에 싸인 한 소녀의 시신을 마주한다. 넬은 단번에 연쇄 살인 사건임을 직감한다. 1년 전, 이와 유사한 사건이 파인 밸런스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으며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를 조사 중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년을 간격으로 두고 한여름의 금요일에 실종된 그녀들, 노끈으로 묶이고 포대로 둘러싸인 채 수렵 금지 구역에 유기된 범행 방법이 매우 유사하며 둘 다 나이와 키, 체중, 긴 흑발이라는 외형 역시 흡사하다. 거기다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을 만큼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는 점도 동일하다.

 

 

 

해안의 수백만 달러짜리 호화 저택들 한가운데서 팔다리가 잘리고 포대에 싸인 채 발견된 소녀. 이보다 더 화려한 매장지가 있을까. 언론이 이 사건을 지난여름 파인 배런스에서 발견된 시신과 연결 짓기 시작하는 순간 수문이 열리듯 난리가 날 것이다. 단독 살인 사건이 아니라 연쇄 살인 사건이라면 전국 뉴스거리다. 웹 포럼 사이트에도 불이 붙겠지. 음모론자들과 범죄 마니아들도 이 사건을 주목하게 된다. 왁자지껄한 혼란 속에서 살인자는 유유히 빠져나가고, 언론은 살인자에 관한 흥미 위주의 보도를 쏟아낼 것이다. 그런 보도들은 살인자를 자극해 또 다른 살인을 부른다. / 49p

 

 

일반적으로 범인이 시간을 들여가며 시신을 자르는 이유는 시신 조각들을 여러 곳에 나눠 처리해 시신의 신원이 밝혀질 위험을 낮추기 위해서다. 자른 부분을 모두 모아 깔끔하게 포장하고, 오가는 차량들도 많은 공원에 얕게 묻어놓을 것 같으면 왜 굳이 시간을 들여 시신을 잘랐을까? / 179p

 

 

 

 

 

 

   한편, 넬은 두 소녀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변호사와 이야기를 하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에 상당한 금액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 시내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파트 하나가 임대되어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파트에는 마리아라는 여자가 얼마 전까지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즈음에 그곳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넬은 이내 더욱 큰 의문에 사로잡힌다. 아파트에서 발견된 사진 속의 두 여성 중 하나가 놀랍게도 바로 이번 살인 사건의 피해자, 아드리아나 마르케스였던 것이다.

 

 

 

이정표.

온몸이 덜덜 떨린다. 양 무릎을 모아 두 팔로 감싼 채 몸을 떤다. 아드리아나의 무덤 옆에서 본 이정표가 어째서 낯설지 않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이정표는 내 머릿속 깊고 어두운 곳에 묻혀 있던 옛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리아 샌도벌의 무덤 옆에도 이정표가 있었다. 순전히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 의심이 사실임을 드러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두 여자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어머니까지 죽였을 수도 있었다. / 225p

 

 

 

   넬은 점점 두 소녀의 살인 사건에 아버지가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이른다. 수년 동안 서퍽 카운티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잔혹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관할 경찰이 외부 지원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는 점, 단서가 미흡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용의자를 염두에 두고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는 점, 무엇보다 아버지의 픽업 트럭으로 추측되는 차가 죽은 소녀의 집 앞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점, 범인은 정기적으로 야영과 도보 여행을 하는 사람 혹은 어린 시절에 야영과 도보 여행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 게다가 실력 있는 명사수라는 점까지. 아버지가 이 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절묘하게도 맞아 들어간다. 더욱이 어머니의 죽음에도 아버지가 관련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녀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용의자가 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사건의 진실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것은 수년 동안 불처럼 꾸준히 내 속을 태워왔다. 고향에 돌아오니 그 불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른다. 어쩌면 이번이 서퍽 카운티를 찾는 내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다. 아버지의 집을 정리하고 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이유는 없다. 숀 길로이에 대해, 내가 시어스 벨로스 카운티 공원의 천막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그 어두운 시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아야겠다. / 66p

 

부검을 몇 번 봤든 시신 앞에서 전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특히 이번 사건의 시신은 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있다. 죽은 여자가 내 어머니를 많이 닮았고, 아버지가 관여했던 사건임을 내가 알고 있으며, 나를 제외하고 누구든 용의자가 될 수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 175p

 

 

 

 

 

 

   『걸스 라이크 어스』는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여성 수사관의 활약과 실제 있었던 잔혹한 여성 연쇄 살인 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범죄 소설이자 심리 스릴러다. 특히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남성 조직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 속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섬세한 감각을 발휘해낼 줄 아는 여성 수사관과 여성 기자, 여성 검시관의 활약은 소설의 흥미를 더한다. 그러는 가운데 넬의 목소리를 통해 일상처럼 퍼져있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성 상품화의 대상으로 삼는 범죄에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메시지는 이 소설의 돋보이는 지점 중에 하나다. 군더더기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섬세한 심리 묘사로 극의 몰입을 더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단연 부족함이 없는 범죄 소설이라 할 만하다.

 

 

 

“모르겠어. 아직 거기 살겠지. 요즘은 정박지 쪽에 있는 술집에서 일해. 행크 오고먼의 술집. 행크 기억나지? 루즈를 그 술집에서 몇 번 봤어. 리아한테 일어난 일 때문에 겁먹고 그짓을 그만두길 바라야지.”

“뭘 그만둬?”

“몸 파는 거.”

나는 잠시 생각 끝에 말한다. “그 일 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닌 건 알지?”

“인생을 어떻게 살지는 다들 선택하는 거잖아.” / 56p

 

 

“이번 사건은 미첨이 전부가 아니에요. 아드리아나와 리아에 관한 사건이기도 해요. 그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여자들이에요. 저는 사람들이 그 여자들의 이름을 알길 바라요. 그래서 더 누가 그 여자들을 죽였는지 밝히고 싶은 거고요. 그 여자들도 그만한 대우는 받을 자격이 있잖아요.” / 235p

 

 

 

 

 

 

   참 오랜만에 이거다, 싶은 범죄 소설을 만났다. 여기저기 시선을 돌리지 않고 독자들을 사건에만 집중하게 하는 명쾌함을 갖춘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혹시 넬 플린 요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리즈가 다음에 또 나온다면 기꺼이 찾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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