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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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무게를 뒤로 하고 느른하게 펼쳐진 이국의 풍경에 마음을 맡기다!

페이지 곳곳에 새겨진 여행이라는 그 특별한 감각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나는 여행자의 걸음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차례를 쭉 살펴보곤 한다. 거기에는 일상의 무게를 뒤로 하고 떠난 첫 여행지의 설렘이, 늘 꿈꿔왔던 환상이, 낯선 관계로 기억되는 남다른 추억이 발자국처럼 남겨져 있다. 런던, 코펜하겐, 파리, 니스, 로마, 레이캬비크, 포르투, 에든버러, 제주…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그 낯선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감각적으로 여행을 받아들이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이를 테면 도시와 풍경 아래로 차분히 내려앉은 노을 같은 여운을, 걸음걸음에 밟히는 낯설지만 익숙한 소리를.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 기억에, 마음에 오래 남는 것 역시 어떤 거창한 여행자의 경험이나 풍경이 아니라 그날 내 눈에 들어온 다정한 색감들, 한적한 골목길의 정취와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은근한 미소 따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속에는 우아, 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멋은 없어도 잔잔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내내 머물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 여행이란, 꼭 무언가를 얻고 대단한 깨달음을 배우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낯선 일상을 보내는 그 순간이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그 정도의 마음만 얻어도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걷고, 쓰고, 찍고, 머물렀던 여행의 모든 순간

 

   그녀는 여행이 주는 기쁨을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독립해 혼자 살아오면서 학교에 다니며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학교 행사를 맡아 진행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이나 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잠시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은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달콤한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해방되는 것, 비록 돌아왔을 때의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을지라도 잠시나마 그 모든 것을 잊고 숨 쉴 곳을 기대어 찾아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가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세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평소에 먹지 않았던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서면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매 순간 사소한 모험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실수가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그렇게 낯선 일상이 반복되는 곳, 여행지. / 71p  

 

 

 

   유럽 여행을 결심하자마자 그녀는 친구와 함께 휴학계를 내고 아등바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여행을 일주일 남겼을 무렵, 1년 치 월세만큼의 돈을 모았지만 과연 이 돈이 유럽에서의 한 달과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 출국을 앞두면서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러는 동안에 날짜는 다가오고야 만다. 앞으로 한 달을 어떻게 버티나,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까. 환상적인 풍경만 펼쳐질 것 같았던 유럽 여행의 시작은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을 뿐, 용기를 내어 숙소 앞 러셀 스퀘어의 잔디밭으로 나간 그녀는 단숨에 런던 공원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트에 들러 와인과 맥주,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공원으로 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나른하게 몸을 뉘어 마음 맞는 친구와 마음 통하는 이야기하기. 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데,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행은 내내 그렇게 흘러간다. 정류장을 잘못 내려 30분 동안이나 숲길을 걸어가야 했던 브라이튼의 세븐 시스터스, 파리 센강 가운데 위치한 작은 삼각형 모양의 시테섬에 걸터앉아 마신 와인,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들까지. ‘니스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지만 그 기억은 모두 니스로 남았다’는 글처럼, 모두 거창할 것 하나 없지만 오롯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여행이 되었다.

 

 

닷새 정도를 조셉의 집에서 머물며 숱하게 로마 시내를 왔다갔다 했지만, 그 험난한 시골길은 끝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의 여행은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숙소가 그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로마의 시골길을 낡은 버스로 달릴 일도 없었을 테고, 친절하고 유쾌한 조셉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그가 해주는 파스타를 먹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 77p

 

 

일순간 그들이 사는 그림 액자 속에 갑자기 빨려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좀 전에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광경.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돌아 서서 다시 걷는 나는 어느새 싱글벙글이었다. 이때부터 여행 하다 길을 잃는 것에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버스 번호라던가,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어느 교통편이 가장 빠른지 등은 뒷전이 되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아무 버스에 몸을 싣기도 하고, 시선을 끄는 풍경이 있다면 내려서 다시 걷는다. / 85p

 

 

 

 

 

 

   그렇다고 낯선 여행에서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리 없고, 또 아찔한 추억 하나 없을 리 없다. 첫 여행 후, 1년이 지나 다시 찾아간 세븐 시스터스로 가는 버스에서 두 정거장이나 일찍 내렸다가 무려 3시간 동안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던 웃지 못 할 추억과 스페인 시체스에서 귀중품이 든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가 가까스로 찾은 사연 같은 것 말이다.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는 잠시 숙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숙소 안에서 자동으로 문이 잠겨 하마터면 동사 할 뻔한 기가 막힌 에피소드도 있다. 반면, 1년 전 가고시마의 한 가게에서 만난 사람과 또 한 번 그곳에서 만난 특별한 우연과 한국에서 미리 예매한 줄 알았던 기차표가 사실은 버스표여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친절한 역무원이 도와줘 그것도 공짜로 일등석 기차표를 얻게 된 사연에서는 ‘여행의 완성이야말로 곧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마음이 맞는 이야기들의 끝에,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으러 브라이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아까 그 풍경들을 반대로 마주하며 가는 길. 세븐 시스터스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려는 나에게 그 사람이 말했다.

“급하게 안 보내줘도 되니까 지금은 밖을 봐요.” / 98p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를 읽다보면 무엇보다 ‘어디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Best 10’, ‘어느 지역 맛집 리스트’ 같은 것들은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던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남들은 모두 궁전이며 박물관, 유적 등을 보러 간다고 할지라도 내가 별로 내키지 않으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나라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제대로 된 여행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그녀의 말은 우리가 여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핫 스폿이라고 추천하는 장소에서 사진만 찍고 서둘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 바빴던 그간의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남겼던 것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여행을 떠나면 나는 여유를 배운다.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다음 사람을 위해 기꺼이 문을 잡고 기다려주며, 바쁜 발걸음으로 걷다가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멈춰서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들.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는 것도 조금 쉬게 된다. 24시가나 어디로든 배달되는 음식이 없으니 장을 봐서 직접 음식을 하고, 신선하고 값싼 과일과 유제품도 잔뜩 먹는다. 사람도, 환경도 여유로우니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도 여유를 가지게 된다. / 314p

 

 

 

 

 

 

   책의 말미에 이르면 QR코드와 함께 트래블로그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프리랜서이자 크리에이터로, 구독자 45만의 일상 브이로그 채널 ‘슛뚜(sueddu)'를 운영 중인 저자의 여행 브이로그 영상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영상 속에는 먹고, 걷고, 마주한 여행의 순간들이 일상처럼 연속된다. 사진으로는 미처 전해지지 않았던 혹은 글에서 다 마주할 수 없었던 그녀 특유의 감성이 영상 속에 녹아들어있다.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이 일상 같은 여행이 온 마음으로 충족되는 이유를 영상 속에서 한 번 더 확인해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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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즐거움 - 청소년에서 성인 독자까지 고전 독서를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가장 완벽한 지침서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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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적인 독서 훈련법에서부터 고전 필독서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꾸준히 고전을 읽어 나갈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독서 길잡이!

 

  어느 뇌과학 독서법에 관한 책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유전적으로 독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 글자를 익히고 노력과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만이 독서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타고난 독서 능력이란 없으며 이는 얼마든지 훈련을 통해서 독서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뜻이다. 『독서의 즐거움』의 저자 수잔 와이즈 바우어 역시 사실 ‘독서는 훈련이다’고 강조한다. 특히 고전 독서는 다른 어떤 학습보다 스스로의 훈련과 숙련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전이라 하면 ‘정신은 굶주려 있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고 자신이 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책들 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채’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데 혼자서 양서 목록 전체를 읽어 나갈 수 없으며 이런 일에 파고들 수 없다고 해서 부적합한 정신을 지닌 것도 아니라고 독려한다. 우리는 그저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고전 독서는 훈련으로부터 비롯된다

 

 

   『독서의 즐거움』은 국내에서는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 시리즈로 알려진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독서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체계적인 고전 독서 교육법에 따라 독자들이 고전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해봄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소설, 자서전, 역사서, 희곡, 시, 과학 여섯 분야로 분류하여 각각의 역사적 계보와 특징에 따른 독서법 그리고 우리 시대에 꼭 읽어야 할 고전의 목록을 선별하여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책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그간 여러 독서법 관련 책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이해(문법)와 평가(논리), 의견 표현(수사) 단계에 따라 한 번에 하나의 탐구 분야(소설, 자서전, 역사…)에 깊이 몰두하게 함으로써 기초에서 심층단계까지 균형 있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한 독서법 책은 없었던 듯하다.

 

 

 

수많은 초등학교 교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뭔가를 제대로 배우는 기회를 가지기 훨씬 이전부터 여섯 살배기 아이들에게 내용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끈질기게 물어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질러가는 사고가 습관이 되어 학습 중인 주제를 이해하기도 전에 의견부터 내세울 태세인 사람들도 허다하다. 성숙한 정신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수사 단계로 곧장 건너뛰는 버릇을 갖게 되면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 결론을 이끌어 낼 태세로 플라톤이나 셰익스피어, 토머스 하디에게 다가간 정신의 소유자는 그들의 밀도 높은 관념에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독서 과정에 성공적으로 돌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관념을 이해하고 난 다음 평가하고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의견을 정립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 24p

 

 

 

   일단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고전을 혼자 공부할 때 꼭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독서 기술부터 알아두자. 저자가 손꼽는 독서의 첫 단계는 바로 ‘스스로 꾸준히 독서에 전념할 30분을 만드는 것’이다. 이때 저녁보다는 아침이 좋고, 일어나는 대로 30분 독서를 시작으로 하여 짧은 시간 동안 집중과 생각에 충실하게 매달리는 습관들이기를 추천한다. 또 한 주 내내 독서하겠다는 계획은 세우지 말아야 할 것이며 독서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고전 독서는 당장에 눈에 보이는 성취를 얻는 일이 아님으로 꾸준히 독서 시간을 지키고, 달력이나 하루 일과표 위에 지금 당장 30분의 독서 스케줄을 표시할 것을 권한다. 독서의 두 번째 단계는 ‘속독 연습과 어휘 공부’다. 여기에서는 독서 시간의 매일 첫 15분은 음철법 보충 기술이나 단어를 익히는 등 독서 속도를 향상시키는 방법과 풍부한 어휘력 향상을 위한 조언을 해두었다.

 

 

 

독서 일기는 외적인 정보를 취하고 기록하며, 비망록과 마찬가지로 인용하고, 이윽고 성찰과 개인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 일기를 쓸 때는 세 단계의 과정을 따라야 한다. 마음에 와 닿는 특정 어구와 문장, 문단들을 적는다. 그리고 독서를 마쳤을 때 다시 돌아가서 무엇을 얻었는지 간략하게 요약한다. 마지막으로 자신만의 반발 지점과 질문, 생각을 적는다. / 54p

 

 

   세 번째와 네 번째 단계는 ‘독서 노트에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는 연습’을 통해 ‘책을 요약하고 내 것으로 소화하는 것’이다. 독서 일기용으로 노트 한권을 마련하고 일주일에 네 차례 독서 계획을 세운 후 꾸준히 지키고, 주요 내용이나 의문점들을 메모함으로써 간략한 요약문을 작성하는 방법이다. 확실히 여러 해 동안 책을 읽고 꼭 감상을 써왔던 나로서는 책을 요약하다보면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더 깊이 있게 분석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독서 일기는 가장 훌륭한 독서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네 단계로 요약되는 독서 기술을 비롯해 각 분야에서 소개하는 ‘이해, 분석, 평가’의 3단계를 걸쳐 꾸준히 고전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렵게 느껴졌던 고전도 쭉 읽어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일단 잠정적으로나마 등장인물의 욕구와 충족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나면 세 번째 질문에 대답할 준비가 된 것이다.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인물이 따르고 있는 전략을 무엇인가? 난점을 극복하려고 권력이나 부를 이용하면서 반대에 저항하여 자신의 방식을 강행하는가? 조종하거나 설계하거나 계획하는가? 지적인 능력을 활용하는가? 이를 악물로 묵묵히 나아가는가? 압박에 저항하지 못한 채 말라죽는가? 이 전략이 소설의 플롯을 만들어 낸다. / 소설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117p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서전이 꽃을 피우는 데 한몫했다. 대개 하나의 관점이 다른 관점보다 더 ‘가치 있다’고 꼬리표를 다는 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교외의 자동차 수리공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을 이야기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각각의 개인적인 관점이 가치 있다고 칭찬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이에게 진리가 되는 ‘규범적인’ 관점에 대한 집착에서 점차 자유로워지도록 도움을 주었다. 독자는 과거 사건에 대한 진리를 찾기 위해 자서전을 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의 피부 안에서 세상을 보기 위해 자서전을 읽는다. / 자서전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207p

 

 

 

 

 

  확실히 『독서의 즐거움』은 독서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을 떠나 소설, 자서전, 역사서, 희곡, 시, 과학 여섯 분야의 역사적 계보를 살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이를 테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 19세기 대니얼 디포와 새뮤얼 리처드슨, 헨리 필딩의 손을 거쳐 등장하게 된 것에서 출발하여, 고딕 소설의 형식을 거쳐 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역사서의 경우, 고대사에서 중세사과 르네상스사를 거쳐 계몽주의적 접근 혹은 합리주의적 접근에 따라 실증주의와 회의주의를 거쳐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내용에서는, 그간 막연하게 정리되지 않았던 사상에 대한 정의가 뚜렷이 정립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역사가의 전반적인 임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사실을 가지고 꾸밈없는 윤곽을 구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증거 자체에 대한 사색만이 아니라 대개 다른 역사가들과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역사가는 ‘참신한 정신’을 지니고 자료나 공예품 더미 앞에 앉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역사가의 정신은 왜 로마가 몰락했는지 혹은 어떻게 미국 흑인 노예들이 활기 넘치는 고유문화를 계발시켰는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 증거를 검토할 때 역사가는 이미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론들이 이것을 설명해 주는가? 아니면 내가 더 나은 해석을 떠올릴 수 있는가? / 역사서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278p

 

 

‘1단계 탐구’ 독서로 들어가기 전에, 한 작품을 읽으며 중간에 쉬거나 앞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서 한달음에 통독할 시간을 비워 두기 바란다. 결국 하나의 극은 한 날 저녁에 연기하도록 구성되고 연기는 시간에 맞추어 진행되며 연출은 언제나 앞으로 전진할 뿐 뒤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소설과 자서전, 역사책은 숙고할 시간을 두고 여유 있게 읽고, 자유롭게 앞으로 돌아가서 글쓴이의 결론과 전제를 비교하도록 의도된 읽을거리다. 하지만 극작가는 관객이 보는 것에 사치를 부리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첫 번째 독서에서 이런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 희곡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432p

 

 

2) 서사가 없는 시라면 시의 착상과 분위기, 읽을 때의 경험만 적어도 좋다. 시가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가? 정서를 표현하는가? 아니면 사상을 연구하고 있는가? 글쓰기 과정을 그 시의 내용을 곱씹는 방법으로 삼는다. 이때 메모를 완벽한 문장으로 작성하는 데 관심을 쏟지 않는다. 시가 독자의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있게 언제나 완벽하고 균형 잡힌 생각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시는 호소력 있는 어휘를 서로 근접시켜 놓아서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공포감이나 흥분, 예감이나 평화로운 차분함 등의 감각을 쌓아 나갈 수도 있다. 어떤 단어든 구절이든 그 시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포착한 말을 적어 둔다. / 시 읽기의 즐거움 중에서 563p

 

 

 

 

 

 

   이렇듯 『독서의 즐거움』은 매우 체계적이고 밀도 있는 독서 기술을 제안하여 고전 교육의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다방면의 장서를 넓고 깊게 읽는 다독가이자 자신의 지식을 쉽고 직설적인 문체로 풀어쓴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 『서양 과학 이야기』, 『세계 역사 이야기』 시리즈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저술가답게 균형감 있는 지식과 네 자녀를 홈스쿨링으로 키운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입체적인 독서 지식을 제공한다. 무려 800페이지에 달하는 장서인만큼, 한 번에 다 통달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느리더라도 그때그때 필요한 부분만 따로 발췌해서 읽어보는 것도 이 책을 즐겁게 읽는 방법이 될 듯하다. 독서를 취미로 삼거나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으로 하여금 좀 더 깊이 있는 독서 경험을 체득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여러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소장 가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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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
미야가와 사토시 지음, 장민주 옮김 / 흐름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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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그 커다란 의미에 대하여!

눈물주의! 읽는 내내 먹먹해져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나는 미리 연명치료거부를 신청하고 왔어.”

   명절 날, 한창 전을 부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넌지시 말씀하셨다. ‘연명치료거부’란 회복하기 불가능하거나 장기간의 치료가 불가피해보이는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 중단을 결정하는 것인데, 어머니는 자신의 ‘질병’ 혹은 ‘죽음’이 남은 가족을 힘들게 할까 염려되어 스스로 사전의향서를 작성하셨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지속될 삶보다 마감될 삶을 더 가까이 느끼고 있을 어머니와 나의 부모님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아픈 적이라고는 없었던 아빠가 벌써 한 달 째 폐렴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을 드나들고 있다. 그런 아버지를 두 번의 암 투병 생활에 워낙 체력이 약한 엄마가 돌보느라 기력이 쇠약해지셨다. 오늘 아침 통화에서도 거칠게 갈라진 엄마의 목소리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늘 모호하기만 했던 죽음이 조금씩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자주 실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병환이 깊어지고, 기력이 쉽게 회복되지 않아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오래 살아서 뭐하겠어” 하는 한탄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멀게만 느껴졌던 혹은 당면하지 않을 것 같았던 죽음이란 것이 엄마와 아빠에게 찾아올 순간을 나도 모르게 자주 상상하게 되니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부모님의 죽음을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리 상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다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그것도 부모의 부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유골이라도 먹고 싶었다던 작가의 고백이, 차라리 당신의 흔적을 내 몸에 어떤 방식으로든 새겨서 지워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그 절박하고 슬픈 마음이 더욱 저릿하게 파고든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토록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을 나도 누군가를 향해 품는 것이 가능했구나’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바로 ‘엄마’라는 것을, 우리 모두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죽음 그리고 남겨진 이들을 살게 하는 힘에 대하여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독특한 제목의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유골을 먹고 싶었다』는 작가가 실제로 겪은 엄마의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만화다. 책에는 엄마의 위암 말기 선고와 함께 찾아온 투병 생활 그리고 임종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엄마와 함께 했던 따뜻한 시간을 추억하고 때로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분노를 쏟아내기도 하면서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 찬찬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아무리 죽음이 예고되었다한들 이별은 믿고 싶지 않고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 되어 찾아온다. ‘엄마… 내가 이렇게 슬프고 외롭다는 거… 엄마한테도 전해지고 있어?’ 가슴 저편에서 끓어오르는 감정과 함께 끝없이 눈물이 쏟아지지만 이런 심정이 더 이상 엄마한테 전달되지 않으리라는 현실은 비통하기만 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화장터에서 재가 되어버린 엄마의 유골을 보고, 행여 함부로 버려질까 남은 조각이라도 갖고 싶다고 아니 먹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엄마를 내 몸의 일부로라도 만들고 싶은 그 간절함 때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유골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의 가장 강렬한 감정이었다고 느꼈고, 제목으로는 이 이상의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이토록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사랑을 나도 누군가를 향해 품는 것이 가능했구나’라는, 그런 용기도 생겨나는 제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 175p

 

 

 

 

 

 

   그렇게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낸 뒤, 사라지지 않는 쓸쓸함과 외로움 속에서 사소하지만 너무나 그리운 엄마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이제는 다시 맛볼 수 없는 엄마의 카레, 엄마의 회복을 기원하며 100일 기도를 드렸던 쪽지 그리고 그 쪽지를 고이고이 간직해두었던 엄마의 지갑, 엄마가 곱게 가꾸었던 작은 마당, 엄마의 손때가 묻어나있는 집안 곳곳까지. 하지만 집안에 엄마가 사라진 순간부터 아버지도, 집도 볼 때마다 시들어가고 약해져가는 듯했다던 대목에서는 어쩐지 평생의 반려자를 떠나보낸 아버지의 상심과 외로움까지 어루만져져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비록 엄마는 곁을 떠났지만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서 작가는 엄마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애정과 엄마로부터 받았던 사랑을 원동력으로 삼아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다. 고향을 떠나 도쿄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꿈꾸었던 만화가가 되고,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해준 아내와 아이를 낳을 결심까지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간다. 그러는 가운데에서 한 사람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또 새로운 생명으로 연속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지 우리를 숙고하게 만든다.

 

 

 

네가 몹시 슬픈 이유는 틀림없이 아직 네 안에 ‘죽음’와 ‘외로움’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1년쯤 지나면 ‘죽음’을 외로움과 떨어뜨려 놓고 조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 외로움도 조금씩 치유되어 갈 거야. ‘기간이 약’이지. 나는 네가 ‘죽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의식을 가지기 바란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죽음’에는 의미가 더해져 간다. 나도 요새 어쩐지 죽음에는 에너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155p

 

 

 

 

 

 

   며칠 전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편지 한 장을 써왔다. ‘가장 좋아하는 엄마. 나는 엄마랑 시장갈 때 기분이 좋아요. 사랑해요’ 라고. 엄마와 함께 걷던 거리, 그 거리에서 마주하곤 하는 익숙한 사람들, 달콤한 사탕, 찬바람이 불 때 서로 꼭 쥐던 두 손을, 우리 아이도 추억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편지에서처럼 그 기억이 원동력이 되어 삶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림 속의 ‘엄마’와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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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 국내 최고 필적 전문가 구본진 박사가 들려주는 글씨와 운명
구본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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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필적 전문가가 들려주는 글씨체에 관한 모든 것!

필체를 성공과 직결시켜 내 삶의 무기로 삼는 법을 일러주는 흥미로운 책!

 

 

 

   누군가의 글씨를 보고 나도 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적이 있다. 바로 중학교 2학년 때, 내 짝의 글씨를 보고난 뒤부터였다. 그녀는 필통이 꽤나 묵직할 정도로 알록달록한 볼펜을 종류별로 가지고 다니는 친구였는데, 수업이 끝나면 꼭 노트에 그날 배운 것을 예쁘게 정리해서 필기를 해두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 나는 깔끔하고 예쁘게 정돈된 그녀의 노트를 볼 때마다 감탄을 했고, 친구에게 이런 글씨체를 가지고 싶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따라 써보기까지 했다. 이미 절반이나 쓴 노트를 아예 새로운 노트에 다시 정리해 쓰는 수고로움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때 그 친구의 글씨체를 따라 연습하면서 굳어진 게 지금의 글씨체가 되었다.

 

 

 

   한 때는 세 번째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생길 정도로 손글씨 쓰기를 좋아한 적도 있었는데, 최근 들어 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가르쳐주면서 글씨를 쓴다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워낙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익숙해져서 손으로 긴 문장을 공들여서 써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글씨체에 관한 책이 출간되어 눈길을 끌었다.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다소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다. 글씨체가 인생을 바꿀 만큼 대단한 것이었던가, 의아하다가도 내가 아이에게 거듭 강조하던 게 바른 자세로 바른 글씨를 쓰는 것의 중요성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과연 틀린 말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글씨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의 저자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필적학자다. 21년간 검사로 근무하면서 살인범, 조직폭력배의 글씨에서 일반인과는 다른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필적학의 세계에 입문하면서 ‘필체와 사람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글씨는 손이나 팔이 아닌 뇌로 쓰는 것으로, ‘뇌의 흔적’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글씨체는 곧 그 사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특히 필체를 분석하면 그 사람의 내면을 알 수 있을뿐더러, 글씨체를 바꾸면 성공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사실 글씨와 사람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을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은 아니다. 서예의 종주국인 중국은 전통적으로 ‘글씨가 곧 사람’이라 글씨에서 그 사람의 성품과 학식을 짐작할 수 있다고 믿었고, 공자는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인지 천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는 “글씨를 쓰기 전에 제일 먼저 뜻을 바르게 세우라.”고 말해서 글씨에 고결한 정신이 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 역시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고 했고, 셰익스피어는 “내게 손글씨를 보여주면 그 사람의 성격을 말해주겠다” 하기도 했다. 이에 서양에서는 수천 년에 걸쳐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글씨를 크기, 모양, 간격, 기울기 등으로 분석하는 필적학을 발달시켰다. 이는 글씨를 쓸 때 뇌에서 손과 팔 근육에 메시지를 전달해서 선, 굴곡, 점 등을 만들기 때문에 필적이 내적 세계를 반영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필적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필적학에서는 글자 크기, 형태, 압력, 속도, 기울기, 정돈성, 전체적인 인상, 자연스러움, 조화, 리듬 등을 살핀다. 자음과 모음의 세부적인 형태, 글자의 시작 부분 및 끝부분의 형태, 필순, 자획을 이어 쓰는 방법, 운필 방향, 획 사이의 공간, 자획의 굴곡 상태와 꺾인 각도 등 세부적인 운필 특징 등을 종합적으로 관찰한다. / 21p

 

 

 

   다시 말해 필적은 ‘뇌의 흔적’이자 ‘몸짓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근원을 알게 되면, 행동 습관인 필체를 바꾸어 성격을 바꿀 수도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의식적으로 글씨체를 바꾸면 성격이 변하고, 성격이 바뀌면 행동 패턴이 변하며, 행동 패턴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 따라 저자는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를 통해 다양한 글씨의 유형에 따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분석하고, 어떻게 꾸준히 쓰고 연습하면 성격과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또 김구, 안중근, 한용운, 역대 대통령, 백남준, 김연아와 같은 유명인의 필체를 수록하여 그들이 어떤 성향을 지녔으며 그것을 어떻게 삶의 무기로 삼았는지를 살펴본다.

 

 

 

필체를 바꾸는 2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첫 번째 방법은 자신이 모델로 삼는 사람의 필체를 흉내 내는 방법이다. (…) 글씨를 바꾸는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의 목표 달성, 또는 과제 해결에 부합하는 필적 특징을 부분적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현재의 자신에게서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공부를 잘하고 싶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인내심을 기르고 싶다.’, ‘연예인으로 성공하고 싶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하고 싶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와 같은 목표를 세운다. 그 다음에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필적 특징을 따라 쓰는 것이다. / 31p

 

 

필적학자들은 둥근 글씨는 친화적이고 사회성이 있으며 다정하고 편안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한다. 또 여성스럽고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으며 적응력이 있고 즐거움과 그것을 위한 돈을 버는 데 애착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각진 글씨는 용기가 있고 열심히 일하며 적극적이고 현실적이고 물질적이며 신뢰할 수 있으나 무례하고 거칠며 이기적이고 저항적이고 융통성이 없다고 말한다.

모서리에 각이 선명한 모난 글씨는 사회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쓴다. 의지가 굳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사람에게 비판적이며 유머가 부족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정직하고 고집이 있으며 원칙을 중시한다. 조직 관념이 강하고 품행이 단정하다. 모험을 좋아하지 않고 정의감과 책임감이 있다. 규칙적이고 꼼꼼하며 진지하고 고지식하다. / 51p

 

 

필압이 세다는 것은 정신적 힘이 강하고 의지가 굳다는 것을 의미한다. 활력이 있고 결연함, 열정, 주도권, 용기, 자기주장이 강함, 물질주의, 공격성, 호전적, 저항적, 감각적, 심미적임을 의미한다. 안중근, 박정희 전 대통령, 조선 후기의 송시열, 야구선수 최동원, 선동열과 같은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도 나타나고 유영철과 같은 살인범에게서도 나타난다. 일상 행동 역시 파워풀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주변 사람들과 불화가 있을 수 있다. / 55p

 

 

 

 

 

 

  나의 글씨체는 둥근 글씨체인가, 각진 글씨체인가.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글씨체인가 내려가는 글씨체인가. 획 사이가 여유 있는 글씨체인가 획이 가까이 붙어 있는 글씨체인가. 혹은 글을 쓰는 속도가 빠른가, 느린가. 책을 읽다보면 내가 쓰는 글씨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해봄으로써 나의 성향이나 성격이 이런저런 장단점을 지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이를 어떻게 고쳐 써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해볼 수 있어 흥미롭다. 무엇보다 공부 잘하는 글씨, 합격하는 글씨, 존경받는 글씨, 큰 부자 되는 글씨 등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상에 따라 꾸준히 연습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인생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봄으로써, 이를 자기긍정이자 특별한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삼아볼 만하다.

 

 

 

훌륭한 글씨체로 정약용의 글씨를 소개하고 싶다. 그의 글씨는 보기에도 멋스럽지만 필적학으로 접근해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그는 군자나 대인과 같은 이상적인 인간의 수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형태가 네모반듯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보통 보수적이고 이성적이며 곧다. 하지만 글자의 간격이 충분히 넓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하고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 174p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씨를 두고 악필이라 평가하는데, 저자는 일반적으로 예쁘고 단정한 글씨를 잘 쓴 글씨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글씨가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나쁜 글씨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잘 쓴 글씨와 못 쓴 글씨는 스스로 추구하는 인간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필적학적으로 악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는 당장에 바른 글씨 쓰기 책을 사서 무조건 따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 그에 맞는 글씨체를 지향하는 것에 목표를 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이 책을 나를 이해하고, 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해볼 수 있는 좋은 가이드로 삼아보기를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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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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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말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 페미니즘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넘어서 연대를 모색하다!

 

 

   사월의책 출판사의 편집장인 박동수는 인문잡지 《한편》을 통해 오늘의 2030세대를 ‘페미니즘 세대’라 명명한다. 이 말은 오늘날 청년세대 모두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페미니즘과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관계 설정 없이는 자신의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대중적 페미니즘’이라는 비가역적 사건을 경험하고 그 사건을 주체화한 세대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견을 갖든 무관심하든, 청년세대의 생각과 행동이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탈여성이라는 기표와 근대라는 단절적 시간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대적 연결과 연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박동수는 여기에서 ‘이 연결과 연합을 어떻게 추적하고 관찰하고 사유하며 또한 어떻게 거기에 참여할 것인가가 남겨진 과제’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이형의 『붕대 감기』는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편가르기식의 분열과 혼란 등의 각종 복잡한 문제와 박동수가 제기하고 있는 과제들로부터의 응답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짜’, ‘좋은’, ‘완전한’으로 귀결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말하기’ 즉,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것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라는 것을.

 

 

 

 

 

 

낯설지만 익숙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지난 해, 한국대표 작가 29인이 모여 박완서 작가의 콩트를 오마주한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작가 윤이형은 「여성의 신비」라는 작품을 통해 쌍둥이를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된 지혜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이기적이라는 말까지 들어가며 자신의 경력을 되찾고 싶어 하는 지혜를 통해 한국 사회 내에서 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우울한 현실과 비애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붕대 감기』는 이의 연장선상에 있는 소설로서 지혜의 이야기를 더욱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로 확장하고 구체화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나이, 직업, 학력 등 제각기 다른 여성들의 독립적인 서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겹쳐지는 독특한 구성 방식을 취함으로써 워킹맘의 고충, 성폭력, 미러링, 탈코르셋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문제와 상처들을 정교하게 엮어나간다.

 

 

 

   이야기는 미용실의 실장인 해미가 ‘언제나 온몸과 마음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 손님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한다. 그 손님이란 영화 홍보기획사에서 일하는 은정으로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워킹맘이다. 서균을 갖고 배 속에서 태동이 커져가는 걸 느끼면서도 절대로 커리어를 놓지 않겠다고, 또한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식한 아이 엄마’로만 남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는데, 서균이 눈썰매를 타다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고로 인해 휴직 신청을 해야 했다. 아이는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모르고, 모두가 자신의 눈치만 보거나 말을 아끼기만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 군데만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엉망으로 길어져 흐트러진 머리,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다리를 절뚝이며 혼자만의 긴 싸움에 지쳐있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마주한 그녀는 미용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누군가가 머리를 감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영양제 서비스로 넣어드릴게요, 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

 

 

 

하지만 그 이름이 어느 순간부턴가 조금씩 자랑스럽지 않아졌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백질을 먹고 소화시켜 머리카락으로 바꾸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그 일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그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외의 시술들이 갑자기 낯설고 이상하게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산업의 어디까지가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어디서부터가 여성을 아름다움에 억지로 묶어 자유를 빼앗는 일일까. 지현은 구분할 수가 없었다. / 36p

 

 

범죄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받게 해야 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어째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살기 위해 모여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결코 단일한 집단이 아닌 그들을 끝끝내 단일한 혐오 집단으로 몰려는 사람들만 이렇게 많은 것일까? 애써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의제를 만들어서는 안 됐다. 지현은 집회에 나갔지만 그 집회를 둘러싸고 일어난, 여자들끼리 하는 싸움에 끼지는 않았다. 그런 건 소모적으로 보였다. / 39p

 

 

‘……아이는 아직 모른다. 달착지근한 마카롱 몇 개나 갑작스럽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같은 것으로는 괜찮아지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 55p

 

 

 

 

 

 

   미용실 실장인 해미와 워킹맘 은정의 사연으로부터 비롯된 이야기는 이제 미용실 직원인 지현을 거쳐 진경과 세연의 이야기로 거쳐 간다. 진경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살가운 친구였고, 각각 다른 대학을 가면서 드문드문 만나게 되었을 때도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런 그들이 3년 전쯤부터 멀어진 건 무엇 때문인지 경진은 생각한다. 무료해서, 무언가 칭찬이 필요해서, 인생이 칡 덩어리를 억지로 씹는 것처럼 쓰고 건조해서, 필터를 씌운 자시의 얼굴을 페이스북에나 찍어 올리는 아이 엄마와 잘 나가는 프리랜서 출판 기획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세연의 간극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상한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발산해내는 과도한 에너지에, 휴식 없는 생활에 지쳐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말을 길게 나누고 싶지도 않은 남자 페친들과 영혼 없는 웃음으로 범벅이 된 댓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남편 자랑을 하는 걸 비웃지 않고 맞장구를 쳐주고 있을 때, 새로 산 립스틱의 발색 샷을 여러 장 올리고 있을 때, 가장 한가운데에서 혼자일 시간도 없이 외롭다고 끄적이고 있을 때, 그런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세연의 시선을 떠올린다. 하지만 자궁근종을 얻어 자신을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 하나 없는 상태에서 친구인 진경에게조차 연락을 하지 못하는 세연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혼자 사는 여자의 삶 그리고 진경에게는 당연히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는 없는 데에서 비롯된 구차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이해할 수 없을 걸, 그렇게 세연은 친구를 상상 속에서 속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68p

 

 

저기, 그런 게 아니거든요? 저는 아이를 가질 생각도 전혀 없고요. 제 삶에는 남자가 오래전부터 아예 없고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건데요. 사실은 한달에 한 번 배란이 되고 생리를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거든요. 저는, 적출한대도 아무 상관 없는데, 회복이 빠르다기에 빨리 일로 돌아가야 해서 하이푸 쪽을 선택한 건데요. 여자로서 삶이 망가진다는 무슨 말씀이세요. 세연은 정색하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저곳 비교해본 결과 그 병원의 시술 비용이 제일 합리적이서 그냥 참고 넘겼다. / 75p

 

 

 

 

 

  이 외에도 소설 속에는 불법영상촬영 피해자인 바람을 도와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껴 집회에 나간 지현, 일을 따내려고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들이댄다는 말이 돌자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간 윤슬, A교수의 추행 사실을 고발하는 대자보를 쓴 뒤 보복을 당할까 두려움에 떠는 채이, 제자인 채이를 위해 A교수에게 보내는 격문을 써서 학생회관 벽에 붙였다가 ‘페미니스트 투사’가 된 대학 교수 경혜 등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러는 동안에 행동하고 분노하는 젊은 여성과 그런 젊은 여성을 철없다고 단정 짓는 늙은 여성의 대립이, 전업주부와 워킹맘이 서로를 견제하고 기혼녀와 비혼녀가 적대시하며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상황이 흔하게 발생한다. 마치 여성들에게 꾸밈노동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면서도 미용업에 종사하는 자신의 직업정신에 자부심을 느끼는 지현의 그것처럼 여성들간의 연대는 불완전해 보인다.

 

 

 

아무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니까 여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연은 어째선지 조금 마음이 편했는데, 그건 ‘여자’라는 말이 자신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블라우스 밑 가슴께에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어서, 숨이 막히는 게 자신뿐은 아니라는 생각, 간신히 다른 아이들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 126p

 

 

진경은 거울일 뿐이었다. 진경을 보며 진경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을, 27년 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 붕대를 들고 서 있던, 단지 완전히 성숙하지 못했고,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엉거주춤 서 있던 어린 자신을, 세연은 한없이 미워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도,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게. / 142p

 

 

하지만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평행선이잖아, 채이는 말했다.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말하는 건 아예 불가능한 걸까? 의제 하나에 쌍둥이처럼 집회가 두 개씩, 그것도 동시에 열리는 게 너는 바람직해 보여? 나는 부조리해 보이는데. 언제까지나 저신과 똑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살면 어떻게 발전을 하지? 우리는 서로의 대립항이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 우리가 가진 공통점은 왜 중요하지 않아? / 146p

 

 

 

 

 

 

   『붕대 감기』가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바 페미니즘으로 제기되는 여성들의 문제점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갈등을 유발하는 것인지 또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직시하고, 질문하고, 자책하며 자조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진짜’, ‘좋은’, ‘완전한’ 페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저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서로의 이야기를 터놓고 ‘말하기’ 함으로써 관계 맺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한다던 세연의 말처럼 말이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하다못해 수십 년을 함께 해온 친구들에게조차도 나는 꾸미고, 감추고, 덜 내어놓는다. 딱히 보여줄 것이 있다기보다 그들을 실망시킬 것이 더 두려운 까닭이다. 하지만 『붕대 감기』를 읽고 나서 그들을 조금 더 믿어보기로 했다. 나의 상처를, 불안을, 모순을 더 감싸 안든 덜 감싸 안든 그래도 이야기 해보자고, 들어봐 주겠다고 “뭐해? 만나자” 말해주는 이들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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