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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평점 :

일상의 무게를 뒤로 하고 느른하게 펼쳐진 이국의 풍경에 마음을 맡기다!
페이지 곳곳에 새겨진 여행이라는 그 특별한 감각에 대하여!
언제부턴가 나는 여행자의 걸음을 따라가는 마음으로 차례를 쭉 살펴보곤 한다. 거기에는 일상의 무게를 뒤로 하고 떠난 첫 여행지의 설렘이, 늘 꿈꿔왔던 환상이, 낯선 관계로 기억되는 남다른 추억이 발자국처럼 남겨져 있다. 런던, 코펜하겐, 파리, 니스, 로마, 레이캬비크, 포르투, 에든버러, 제주…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는 그 낯선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감각적으로 여행을 받아들이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 이를 테면 도시와 풍경 아래로 차분히 내려앉은 노을 같은 여운을, 걸음걸음에 밟히는 낯설지만 익숙한 소리를.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 기억에, 마음에 오래 남는 것 역시 어떤 거창한 여행자의 경험이나 풍경이 아니라 그날 내 눈에 들어온 다정한 색감들, 한적한 골목길의 정취와 우연히 마주친 타인의 은근한 미소 따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속에는 우아, 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멋은 없어도 잔잔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내내 머물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 여행이란, 꼭 무언가를 얻고 대단한 깨달음을 배우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낯선 일상을 보내는 그 순간이 사실은 우리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그 정도의 마음만 얻어도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걷고, 쓰고, 찍고, 머물렀던 여행의 모든 순간
그녀는 여행이 주는 기쁨을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한다. 어린 나이에 독립해 혼자 살아오면서 학교에 다니며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학교 행사를 맡아 진행하면서도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이나 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였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잠시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여행은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달콤한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잠시 해방되는 것, 비록 돌아왔을 때의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을지라도 잠시나마 그 모든 것을 잊고 숨 쉴 곳을 기대어 찾아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가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세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평소에 먹지 않았던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서면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매 순간 사소한 모험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실수가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그렇게 낯선 일상이 반복되는 곳, 여행지. / 71p
유럽 여행을 결심하자마자 그녀는 친구와 함께 휴학계를 내고 아등바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은다. 여행을 일주일 남겼을 무렵, 1년 치 월세만큼의 돈을 모았지만 과연 이 돈이 유럽에서의 한 달과 맞바꿀 가치가 있을까 출국을 앞두면서까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러는 동안에 날짜는 다가오고야 만다. 앞으로 한 달을 어떻게 버티나,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까. 환상적인 풍경만 펼쳐질 것 같았던 유럽 여행의 시작은 이상하게도 기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을 뿐, 용기를 내어 숙소 앞 러셀 스퀘어의 잔디밭으로 나간 그녀는 단숨에 런던 공원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마트에 들러 와인과 맥주,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공원으로 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나른하게 몸을 뉘어 마음 맞는 친구와 마음 통하는 이야기하기. 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데, 충분히 매력적이다. 여행은 내내 그렇게 흘러간다. 정류장을 잘못 내려 30분 동안이나 숲길을 걸어가야 했던 브라이튼의 세븐 시스터스, 파리 센강 가운데 위치한 작은 삼각형 모양의 시테섬에 걸터앉아 마신 와인,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들까지. ‘니스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지만 그 기억은 모두 니스로 남았다’는 글처럼, 모두 거창할 것 하나 없지만 오롯이 그 자체로 아름다웠던 여행이 되었다.
닷새 정도를 조셉의 집에서 머물며 숱하게 로마 시내를 왔다갔다 했지만, 그 험난한 시골길은 끝끝내 익숙해지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우리의 여행은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숙소가 그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로마의 시골길을 낡은 버스로 달릴 일도 없었을 테고, 친절하고 유쾌한 조셉을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그가 해주는 파스타를 먹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 77p
일순간 그들이 사는 그림 액자 속에 갑자기 빨려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좀 전에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광경.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돌아 서서 다시 걷는 나는 어느새 싱글벙글이었다. 이때부터 여행 하다 길을 잃는 것에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버스 번호라던가,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어느 교통편이 가장 빠른지 등은 뒷전이 되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아무 버스에 몸을 싣기도 하고, 시선을 끄는 풍경이 있다면 내려서 다시 걷는다. / 85p



그렇다고 낯선 여행에서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리 없고, 또 아찔한 추억 하나 없을 리 없다. 첫 여행 후, 1년이 지나 다시 찾아간 세븐 시스터스로 가는 버스에서 두 정거장이나 일찍 내렸다가 무려 3시간 동안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던 웃지 못 할 추억과 스페인 시체스에서 귀중품이 든 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가 가까스로 찾은 사연 같은 것 말이다.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는 잠시 숙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숙소 안에서 자동으로 문이 잠겨 하마터면 동사 할 뻔한 기가 막힌 에피소드도 있다. 반면, 1년 전 가고시마의 한 가게에서 만난 사람과 또 한 번 그곳에서 만난 특별한 우연과 한국에서 미리 예매한 줄 알았던 기차표가 사실은 버스표여서 망연자실해 있을 때, 친절한 역무원이 도와줘 그것도 공짜로 일등석 기차표를 얻게 된 사연에서는 ‘여행의 완성이야말로 곧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마음이 맞는 이야기들의 끝에,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으러 브라이턴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다시 아까 그 풍경들을 반대로 마주하며 가는 길. 세븐 시스터스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려는 나에게 그 사람이 말했다.
“급하게 안 보내줘도 되니까 지금은 밖을 봐요.” / 98p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를 읽다보면 무엇보다 ‘어디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Best 10’, ‘어느 지역 맛집 리스트’ 같은 것들은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라던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남들은 모두 궁전이며 박물관, 유적 등을 보러 간다고 할지라도 내가 별로 내키지 않으면 굳이 갈 필요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나라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제대로 된 여행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그녀의 말은 우리가 여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핫 스폿이라고 추천하는 장소에서 사진만 찍고 서둘러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 바빴던 그간의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남겼던 것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여행을 떠나면 나는 여유를 배운다.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다음 사람을 위해 기꺼이 문을 잡고 기다려주며, 바쁜 발걸음으로 걷다가도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멈춰서서 도움이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들.
하루 종일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는 것도 조금 쉬게 된다. 24시가나 어디로든 배달되는 음식이 없으니 장을 봐서 직접 음식을 하고, 신선하고 값싼 과일과 유제품도 잔뜩 먹는다. 사람도, 환경도 여유로우니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도 여유를 가지게 된다. / 314p


책의 말미에 이르면 QR코드와 함께 트래블로그가 수록되어 있다. 현재 프리랜서이자 크리에이터로, 구독자 45만의 일상 브이로그 채널 ‘슛뚜(sueddu)'를 운영 중인 저자의 여행 브이로그 영상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영상 속에는 먹고, 걷고, 마주한 여행의 순간들이 일상처럼 연속된다. 사진으로는 미처 전해지지 않았던 혹은 글에서 다 마주할 수 없었던 그녀 특유의 감성이 영상 속에 녹아들어있다.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이 일상 같은 여행이 온 마음으로 충족되는 이유를 영상 속에서 한 번 더 확인해보시길 추천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