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1호 세대 인문 잡지 한편 1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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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와 불평등, 젠더에 관한 가장 콤팩트한 담론들!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논쟁이 되는 주제를 전면에 제시한 새로운 형식의 인문잡지!

 

   총선을 앞두고 있다. 어김없이 세대 프레임을 극복하고 청년의 정치 참여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세대교체론’이 대두될 예정이다. 특히 ‘청년 정치’는 한결같이 이전 정권의 낡은 기득권적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선동이자 표심 공략법으로 작동되어 왔다. 하지만 《청년정치는 왜 퇴보하는가》(안성민)에 따르면 20대 국회는 ‘40대 미만 국회의원 역대 최저’라는 기록을 세웠고, 19세부터 39세까지 이른바 ‘2030세대’의 경우 유권자 수가 무려 전체의 35.7%였음에도 불구하고 40세 미만의 지역구 출마자 중 당선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고작 1%도 되지 않는 청년 정치인들이 무려 36%의 유권자인 청년들을 대변해야 하는 비상식적이고 기형적인 대의민주주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세대주의와, 청년팔이(김선기, 「청년팔이 사회」)가 이제는 가장 낡은 정치적 언어이자 한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물며 기성 세대와 청년 세대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구조는 우리 사회의 끈질긴 병폐다. 현실이 이러한데 왜 여전히 세대주의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는 것일까.

 

 

 

세대의 역사, 그 가능성과 과제에 대한 담론

 

 

   지난 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책이 있다. 바로 《90년생이 온다》(임홍택)이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로 대표되는 현 청년들의 세태와 고민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이 ‘세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앞에서는 늘 중요한 의문이 하나 생긴다. 《90년생이 온다》 속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밀레니얼 세대로 대표되는 특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세대로 묶어서 잘 설명되는 현상이 있고, 아무래도 세대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베이비붐세대, X세대, 386세대, N포 세대, 밀레니얼 세대와 같은 세대론을 끊임없이 관통해왔다. 왜 우리는 인간을 나이대에 따라서 구분을 하고 또 그것에 이름표를 붙여가며 세대론을 계속해서 양산해 내는 것일까. 애초에 세대라는 개념은 누가 만들어 내는 것일까. 세대는 왜 문제일까. 세대는 세대론이 만들어 내는 환상일까, 변화의 실마리가 될 가능성일까. 2020년에는 세대 이야기를 이제 그만해야 할까, 앞으로 더 해야 할까. 사람들이 세대를 말할 때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민음사에서 출간한 새로운 형식의 인문잡지 《한편》은 ‘세대’를 그 첫 번째 화두로 내걸었다. 여기에는 아주 콤팩트한 형식의 열 편의 원고가 수록되어 있다. 근대성과 세대 그리고 청년이라는 연쇄적인 담론 고리를 통해 세대 이론의 중심 서사를 살펴본 박동수의 「페미니즘 세대 선언」, 세대주의를 직접적으로 청년팔이라고 선언하며 세대론의 한계에 대해서 지성적으로 인지하면서도 다시금 세대론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 세대주의적인 발화와 행동을 실천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김선기의 「청년팔이의 시대」, 꾸밈을 시작하는 연령대가 점점 더 낮아지는 현실에 대항하기 위하여 1020 탈코르셋 운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가를 진단하고 있는 이민경의 「1020 탈코르셋 세대」, 이른바 ‘20대 남자’들에게서 엿보이는 반페미니즘의 기원과 성격을 살펴보고 그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왜, 어떻게 반대하는가를 자신의 언어와 맥락으로 살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우창의 「“20대 남자” 문제」, 개인이 강조되는 밀레니얼 세대 내에서 오히려 가족 배경의 결정력이 더욱 커지고 계층간의 이질성이 강화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김영미의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롯된 세대론의 기원과 동력을 살펴본 고유경의 「세대, 기억의 공통체」가 바로 그러하다.

 

 

 

요컨대 근대사회에서 근대성, 세대, 청년은 하나의 연쇄적인 담론 고리를 형성해 왔다. 기성세대의 근대화 기획에 의해 주조된 청년세대가 고유한 세대를 형성하고, 기성세대와 변별되는 새로운 근대화 모델을 주창하며 세대 간 갈등이 발생하고, 이 갈등 속에서 ‘근대화의 근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근대적 세대 이론의 중심 서사이며, 이 때문에 청년세대가 사회와 역사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규정하는 일이 세대론의 핵심 문제가 된다. 따라서 세대론은 언제나 청년론이자 근대화론이다. / ‘페미니즘 세대 선언’ 중에서 19p

 

 

이 같은 맥락에서 세대주의는 교묘하게 계산된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일상적으로 편재해 있는, 대다수 사회 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상(imaginary)에 가깝다. 데이터에서 세대에 따른 차이가 별로 두드러지지 않을 때도 세대론이 생산되고, 또 그러한 세대론이 무리 없이 수용되는 바탕에는 ‘세대는 중요하다’, ‘세대 차이는 존재한다’, ‘청년은 기성세대에 비해 어떠하다.’라는 데 대한 느슨하지만 견고한 믿음(belief)이 깔려 있다. 담론과 실재는 순환하며 서로를 강화한다. 세대주의적인 믿음은 세대주의적인 행위와 제도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세대라는 실재가 현저한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이어져 다시금 믿음을 확신으로 바꾼다. / ‘청년팔이의 시대’ 중에서 41p

 

 

국가와 민족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것처럼 보일 때 청년세대는 국가의 숭배 대상으로 부상했다. 통일로 성립된 독일 제국(1871~1918) 시기에 널리 유포되었던 청년 예찬론은 청년(Jugend)을 단지 인간의 생물학적 발달 단계를 지칭하는 표현을 넘어,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는 수사로 활용했다. 순수하고 도덕적인 청년들의 자발성과 개방성, 희생정신이야말로 타락하고 낡은 독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변혁과 전복의 아이콘으로서 청년은 기성세대에게 희망과 공포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청년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통제의 대상이었다. / ‘세대, 기억의 공동체’ 편 중에서 151p

 

 

 

 

 

 

   뿐만 아니라 중국은 어떠한 세대적 변화를 거쳐왔는지 그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하남석의 「오늘의 중국 청년들」, 한국과 베트남의 밀레니얼 세대를 비교 분석 하여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석한 조영태의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와 같이 한국 사회의 범주에서 벗어났을 때 세대 문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세대 문제와 비교해보는 텍스트들도 눈에 띈다. 아울러 영화 <벌새>를 통해 주인공인 은희의 시선에서 바라 본 현대 사회라는 시대적인 감각과 성장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이나라의 「<벌새>와 성장의 딜레마」, 기후위기를 통해 미래세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혜선의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는 학술적인 의미를 넘어서 다양한 개념의 지도를 넓혀가려는 인문잡지 《한편》의 시도가 엿보이는 부분들이라 또한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더 윤리적인 ‘청년팔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 또한 끊임없이 조정되겠지만) 잠정적인 두 가지 원칙은 이렇다. 우선, 대안적인 ‘청년팔이’는 다차원적인 불평등과 사회적 배제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 만 19~39세의 청년층 인구는 천만 명이 넘기 때문에, ‘청년’을 주어로 전체를 이야기하게 되면 같은 청년이라도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배제되는 효과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청년’에 대한 강조가 세대내의 불평등과 격차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 될 수 있으므로, ‘청년’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문제에 각별히 성찰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 ‘청년팔이의 시대’ 중에서 51p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출발한 (반)페미니즘이 불과 2~3년 만에 해당 세대 남성 집단 전반으로 퍼져 나간 데서 알 수 있듯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과거와는 다른 장치, 다른 매체, 다른 동학, 다른 전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로인 언어와 담론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그것들이 어떤 요소들로 이우러졌으며 어떤 지향점과 취약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석하지 않는 한, 20대 남성이 586세대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나는 일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반복 속에서 서로를 향한 경멸과 분노의 심정이 회전하는 나사못처럼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예측할 수 있다. / “20대 남자 문제” 중에서 91p

 

 

이제 우리는 부모 세대에서의 불평등이 자녀 세대에서의 기회 불평등을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증폭시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불평등은 개인들의 타고난 능력 차이에 따른 경제적 결과를 증폭시켜 약간의 지능 차이가 고액의 연봉 차이로 귀결되게 만든다. 불평등은 부모들의 교육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 구조를 변화시켜 자녀의 계층 하강 위험에 극도로 민감해진 중간 계급 교육 기회 사재기를 부추긴다. (리처드 리브스, 『20 vs 80의 사회』) 또한 불평등은 파워 집단이 자녀의 재능과 상관없이 성공할 수 있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권력의 불균형 상태를 초래한다. / ‘밀레니얼에게 가족이란’ 중에서 104p

 

 

 

 

 

 

   괴테가 ‘경험의 공유가 개인의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하였듯 ‘세대’를 주제로 각각의 텍스트들을 읽다보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세대주의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세대주의가 촉발한 다양한 불평등 문제, 이제는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의 구도가 되어버린 젠더의 관한 이견들이 우리 사회를 더욱 양극으로 갈라놓고 상황에서, 내 아이가 성장하여 맞이할 미래 세대는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딜레마에 더 큰 타격을 입으리라는 전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주제를 전면에 내세워 읽고 다함께 이야기해보자는 《한편》의 의도는 나름 성공적인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은 각기 독특한 사회적 경험을 하며, 그에 기반을 둔 자전적인 사회학적 성찰을 만들어 가는 자기 삶의 사회학자들’이라 하여 ‘특정한 세대론을 채택하거나 거부하는 일, 그러한 담론을 바꾸는 일, 나아가 자신과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일은 모두 보통의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달려 있는 일’이라고 강조한 박동수의 글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되새겨봄직 한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 세대론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회 변동을 이끄는 집단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존재한다. 실재하는 주체이건 지배 집단의 의도로 만들어지는 기회이건, 경험의 공동체이자 기억의 공동체로 세대를 중심에 놓을 때 역사는 새롭게 쓰일 수 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여전히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와 민족 중심의 서사는 청년세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주변부에 위치해 왔던 여러 집단적 범주들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거대 서사에서 소외된 다양한 주체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어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다변화하는 일은 민주 사회의 구성원을 양성하는 시민 교육의 맥락에서도 중요하다. / ‘세대, 기억의 공동체’ 중에서 158p

 

 

 

 

 

 

   이처럼 《한편》은 ‘세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사회학,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인구학, 미학, 철학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자들을 연결한 독특한 형식의 인문 잡지를 지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열 편의 글 모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는다. ‘인터넷이 발명된 이래 종이책 판매는 꾸준히 감소하고 있고, 사르트르와 같은 권위 있는 지식인은 이제 나오지 않는 시점에서 우리가 최악의 도구이자 최고의 도구인 인터넷을 활용할 때, 한명의 사상가에 기대는 대신 여러 분과 학문의 연구를 연결할 때 인문과학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이반 자블론카의 말처럼 다양한 분야의 목소리가 한편, 한편으로 엮여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고자 한 이들의 의도는 주효한 듯하다. 창간호의 ‘세대’ 편은 그 시작과 방향성을 타진하며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앞으로 나올 2호 ‘인플루언서’, 3호 ‘환상’은 또 무엇을 이야기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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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
임선경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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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먹는 나이, 체하지 않고 건강하게 먹어봅시다!

인생의 반환점을 맞은 50대, 나이 먹는 일에 대한 유쾌 발랄한 공감 에세이!

 

 

  “이제 너희 애들이나 봐주면서 살아야지 뭐.”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깊은 상실감과 공허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든 노모에, 그것도 꽤 오랫동안 치매를 앓아왔던 만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법도 한데 그래도 엄마는 떠난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위로해보기 위해 “이제 엄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편하게 살아” 하고 말했다. 엄마는 그래야지, 하면서도 당장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제 와서 뭘 새로운 걸 해보겠느냐고, 너희 아이들이나 봐줘야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목이 탁, 막혔다. 아이를 낳아보고 나서야 알게 된 가장 큰 사실 하나는 우리가 엄마의 시간을 갉아먹고 이만큼 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남은 시간마저 나와 내 아이들을 위해 갉아 먹히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 이제 엄마 시간을 살아. 그간 충분히 애써왔으니까.”

 

 

 

   나는 내 아이들이 섭섭해 하지 않게 일찌감치 두고두고 선언할 것이다. 너희들을 돌보고 키우고 먹여야 하는 시간동안에는 엄마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할 거라고, 하지만 엄마의 시간이 너희들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엄마도, 너희들의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 권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늙어갈 순 있지만 젊어갈 순 없다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가장 열심히, 꾸준히 한 일이 바로 나이 먹는 일이었다.’

   아, 뭐 이리 찰떡같은 문장이 다 있나. 게다가 자신은 지금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고백하는 책의 저자는 이렇게 심경을 토로한다. 남편, 애들과 한 팀으로 묶여 내 정신이 아닌 채로 살아왔지만, 이제라도 정신 좀 차리고 잘 살아 볼까 하니 나이 오십이더라고.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아이들이 다리에 감기던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내 다리로 어디든 갈 수가 있긴 한데 대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때가 왔노라고 말이다. 평소 나 역시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다 키워내고 마침내 뭔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 정작 나이 때문에 발목 잡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없을 때가 분명 찾아오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이 먹는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저자는 어른이 되는 일, 사는 일에 허기가 져서 그간 맛도 모르고 허겁지겁 집어먹기 바빴으니 이제라도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대체 뭔지 요모조모 뜯어보고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는 인생의 반환점과 제2의 사춘기라 불리는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서 ‘요즘 어른’이 겪는 리얼한 일상과 고민들을 담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신세대 보고 어른들은 몰라요」,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극본을 쓴 방송작가 겸 소설가답게 솔직담백하면서 유쾌한 그녀의 입담에는 웃다가도 울컥하게 만들고 이내 끄덕끄덕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실려 있다.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걸 아시는지? ‘늙다’는 움직임과 과정이지만 ‘젊다’는 어떤 상태나 성질을 나타낸 것이다. ‘늙어갈’ 수는 있지만 ‘젊어갈’ 수는 없다니… 참 섭섭하다. / 10p

 

 

실제로 나이 들수록 피부 감각도 늙는다고 한다. 피부의 촉각을 담당하는 수용체의 숫자가 감소하고 신경 전달 속도가 느려지면서 노화를 겪는 것이다. 감각이 늙으면 통증을 느끼는 정도도, 온도를 느끼는 정도도 둔해진다.

피부 감각이 둔해지고 유방과 자궁이 긴장을 잃으면서 얻은 것은 평화다. 더 견딜 만하고 더 순조롭다. 첫째 낳을 때보다 둘째 낳을 때 고통이 덜한 것도 심리적인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 22p

 

 

 

   문득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제 서른일곱인 내 나이, 오십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면 아줌마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까 하고 말이다. 아줌마. 아무래도 그건 평생 받아들여지지 않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다. 그나마 ‘애기 엄마’ 하고 불러주는 지금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여전히 ‘어머님, 아주머니, 저기요’와 같은 애매한 호칭 앞에서 마음이 들쑥날쑥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이렇듯 책에는 중년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고 공감할 법한 상황들이 등장한다.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는 아줌마들의 대화에 얽힌 속성들, 스마트폰이나 자동화된 시스템에 바로바로 적응하지 못해 난감해지는 순간들, 살던 대로 살게 되는 삶의 관성들 그리고 빈약한 근거로 나이만 믿고 꼰대짓을 하는 세대로 자연스레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그렇게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할 테지. 솔직히 이건 뭐 뾰족한 수는 없어 보인다. 그저 받아들일 것은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모르는 건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 억지로 애쓰려고 하지 않고 사는 수밖에.

 

 

 

아줌마들의 대화는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조용히 듣는 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모두가 그 대화에 한꺼번에 참여해야 한다. 말을 거들어주는 조력자가 없으면 이야기 자체를 할 수가 없다. 모두가 적극적으로 머릿속의 물방울을 떠올리고 물방울을 건네주고 받고 해야 한다. 그러니 대화에 독점이 있을 수 없고 동시에 소외도 없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민주화가 이뤄진다. 남들이 듣기에는 아줌마들은 왜 저렇게 동시에 다 떠들고 있냐고, 참 시끄럽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줌마들의 대화는 평등하고 기회가 있고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는, 말 그대로 인터랙티브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아줌마의 수다는 그래서 즐겁다. / 32p

 

 

나이가 들면, 한 50년쯤 살다 보면 어디서 주워들은 것도 많아진다. 이런 일 저런 일 겪기도 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당연히 경험도 많다. 원래 의견과 주장은 지식과 경험이라는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은 매 사안에 의견과 주장을 가지기 쉽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거 옛날에 나도 다 해본 건데’ 하며 확신하는 것이다. / 63p

 

 

 

 

 

 

   ‘껌딱지처럼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이젠 나를 껌종이 취급하다니.’ 사내 아이 둘을 키워낸 엄마로서 ‘우리 사이는 이제 끝났다. 애정으로 충만한 사이.’라고 단언하는 그녀의 말투가 나의 뼈에까지 새겨지는 듯하다. 나 역시 사내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엄마로 몇 번이나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게 있다. 이 두 녀석들에게 엄청난 존재였던 시절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고 말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자랑하려 뛰어오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엄마를 찾으며 울고,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은 엄마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고, 엄마가 해 준 음식이 제일 맛있고, 엄마가 있어야 안정이 되던 그런 아들은 길어야 중학생이 되기 이전까지일 거라고. 곰살맞은 우리 아들은 안 그럴 거라는 믿음은 애당초 가지지 않는 게 뒤늦게 찾아올 상처에 크게 데이지 않는 방법이라고. 그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미리 이렇게 마음의 준비라도 해놓아야지. 아이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 사이에서 서로 할퀴지 않고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고심해보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면 이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나는 말하고 싶다. “모모야 제제야, 내게 와서 울어라. 내게 와서 한탄해라. 내게 와서 밖의 사람들 누구를 욕하고 화내라. 좋은 일은 실컷 좋아하고 잘한 일은 지치도록 자랑하고 으쓱대라.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란다.” / 131p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까

 

 

  갱년기는 쇠락과 상실의 시기일까? 각종 사회적 의무와 양육의 부담, 여성성의 멍에를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의 시기는 아닐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확실한 것은 갱년기는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신체가 격변을 겪는 때라고. 그러니 사춘기처럼 예민하게 느끼고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왕성하게 배우고 무한히 감동하고 그러면서 훌쩍 자를 수도 있는 시기라고 말이다. 비록 폐경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와 무뎌진 신체 기능, 혹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의 건망증이 멘탈을 흔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수영을 배우고, 귀를 뚫고, 친구 혹은 나혼자 만의 여행에 눈을 뜨고, 노년에 그림책 그리는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며 그림을 배운다. 체하지 않고 나이를 먹기 위해, 건강하게 먹음으로써 다채롭게 채워질 나의 새로운 시간을 위해.

 

 

 

나이 든 것이 확실하니 이제는 정말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미룬 일’이다. 해야 하지만, 하고 싶지만 이제껏 미루었던 일을 ‘드디어’ 해야 한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왜냐면 미룰 시간이 없으니까. 미루고 미루었는데 또 미루다 보면 이번 생에서는 영영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아주 옛날부터 그러니까 몇 십 년 전부터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루고 미루다 하지 못한 일. / 43p

 

 

나는 ‘나이 먹은 나’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이 먹은 내가 쓰는 글’에 대한 기대다. 숙련은 없을지라도 정년도 없으니까. 늙어서는 훌륭한 작가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계속 쉬지 않고 써야 한다고 자신을 독려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 229p

 

 

 

 

 

 

   어릴 때의 나는 막연히 나이가 들면 ‘아줌마가 되면 남들 다하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는 하지 않을 거야’, ‘편하다고 몸빼 바지 입지 않고 집에서도 우아하게 꾸미고 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독려하고 지지해주면서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기꺼이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자세임을 이 책을 통해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나이 먹고 급체하지 않기 위해, 가뿐하고 유쾌하게 나로 살 수 있는 방법들이란 무엇인지 지금부터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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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도둑 - 아름다움과 집착, 그리고 세기의 자연사 도둑
커크 월리스 존슨 지음, 박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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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라서 더 강렬하고 치명적이다!

완벽을 향한 열정과 탐욕,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낳은 가장 독특한 이야기!

 

 

인간은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고 반드시 소유하려 한다.

-마이클 소마레 파푸아뉴기니 총리(1979)

 

 

 

   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깃털에 대한 이야기이자 완벽하고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낳은 범죄에 관한 이야기로, 장대한 자연사와 인류사가 한 데로 얽힌 르포르타주이다. 우리는 새의 깃털을 훔친 한 남자를 추적함으로써 플라이 중독자, 깃털 장수, 박물학자, 수집벽이 있는 은행 재벌, 큐레이터, 형사, 수상쩍은 치과의사 등을 거쳐 어떻게 이토록 놀랍고도 거대한 진실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지켜보게 될 것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진실이라기에는 더욱이 믿고 싶지 않은 강렬하고도 이 묵직한 이야기에 한 방 맞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할지도.

 

 

 

 

 

 

인간의 욕망이 낳은 가장 잔혹한 현실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이라크 난민들을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일을 돕고 있던 커크 월리스 존슨은 플라이 낚시를 하다가 유별난 이야기 하나를 듣게 된다. “혹시 에드윈 리스트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어요? 아마 그가 플라이 타이어들 중에 최고일 겁니다. 플라이에 붙일 깃털을 구하기 위해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새들을 훔쳤을 정도니까요.” 낚시꾼들과 플라이 타이어들 사이에서 플라이는 이른바 ‘낚시의 예술’로 통한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깃털로 만든 아름다운 빅토리아식 연어 플라이는 예술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실현된 상징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류 관련 표본을 보유하고 있는 트링의 자연사박물관을 침입한 기이한 도둑이자, 열아홉 살의 천재 플루트 연주자이며 ‘플라잉 타잉의 미래’라고 알려졌을 만큼 빅토리아 연어 플라이의 천재 제작자인 에드윈 리스트의 이야기는 금세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깃털 도둑』은 바로 에드윈 리스트가 트링의 자연사박물관에 침입하던 그 날 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한 점도, 궁금한 점도 늘어갔다. 나는 결국 직접 진실을 파헤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것이 플라이 중독자, 깃털 장수, 마약 중독자, 맹수 사냥꾼, 전직 형사, 수상쩍은 치과의사 같은 사람들을 만나, 은밀한 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속임수와 거짓말, 위협과 루머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가도 좌절하기를 수없이 반복한 뒤에야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물론, 아무리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이해하게 됐다. / 23p

 

 

 

 

 

 

   2007년, 에드윈 리스트는 꽤 이름난 훅 기술자인 론 루커스의 웹사이트에 이런 글을 올린다. “플라잉 타잉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다. 상당한 시간을 쏟아부어 깃털 구조를 관찰하고, 플라이를 디자인하고, 하나의 플라이 안에 우리가 정확히 원하는 것을 모두 담아내도록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가는 집념의 작업이다.” 에드윈이 플라이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은 아버지가 연구를 위해 틀어놓는 어느 비디오를 우연히 본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곧장 플라이를 직접 만드는 일에 매달리고, 이내 플라이 타잉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플라이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진짜’ 깃털이 없다는 생각은 플라이 타잉을 향한 그의 예술적 집념을 수시로 꺾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플라이 타잉만큼이나 뛰어난 플루트 연주 실력을 지니고 있던 그는 런던 왕립음악원 합격 통지서와 함께 쿠튀리에로부터 트링 자연사박물관에 가보라는 운명의 이메일을 받게 된다. 이때, 트링 자연사박물관에서 본 희귀새에 매료된 에드윈은 새들을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져오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스무 살의 에드윈에게 박물관의 새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은 여러 가지 이유로 점점 더 정당화된다. 그 새들만 있으, 플루티스트로서 야망도 실현하고, 타잉계에서 그동안 누리고 싶었던 지위도 누리고, 형편이 나빠진 가족도 도울 수 있다고 말이다. 시간이 갈수록 새의 가치는 점점 높아질 것이므로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보험이 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렇게 계획은 실행되고, 너무나 허술해 보이지만 어쩌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 범죄는 무려 500일하고도 7일이 지난 뒤에야 꼬리가 밟히고 만다.

 

 

 

범인을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욱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쇼트하우스나 메이너츠하겐 사건처럼 표본에 붙은 이름표가 손상되거나 변경되는 일 없이, 원상태 그대로 찾는 것이 중요했다. 수집 날짜와 지역 정보가 없으면, 그 표본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추론을 끌어낼 수가 없으므로 연구원들에게는 쓸모가 없었다. 박제에 사용된 재료나 솜으로 학문적인 추론을 해볼 수는 있지만, 시간도 엄청나게 걸릴뿐더러 확실한 결과를 보장할 수도 없었다. / 164p

 

 

 

   이쯤되면 무단으로 자연사박물관을 침입했을 뿐만 아니라, 희귀새 표본을 무려 299점이나 훔치고 일부를 훼손하여 판매까지 한 에드윈에게 중형이 내려져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간다. 아스퍼거증후군을 앓고 있는 데다 금전적인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한 거짓으로 보였음에도 법원은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그렇게 자칫 깃털 오타쿠의 가벼운 범죄쯤으로 묻힐 뻔한 사건을 들추면서 작가인 커크 월리스 존슨은 그의 범죄 행위에 관한 진실만큼이나 여러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조류 표본 도난 사건의 피해로 전세계 자연사박물관이 처한 어려움, 예산부족으로 인한 허술한 박물관의 경비 시스템, 박물관을 ‘먼지 날리는 낡은 쓰레기장’이라고 표현하는 시각들, 보호종으로 지정된 새들이 버젓이 사고 팔리는 것에서 오는 회의감, 뚜렷한 근거와 기준이 불분명한 정신 질환이 재판에 미치는 악영향까지, 우리 사회의 각종 모순들이 그의 글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채집 열풍이 크게 번지면서 프랑스인들은 조개류 수집을 유행시켰다. 덕분에 소라고둥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콘칠로마니아라는 말이 생겼다. 뒤이어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일명 테리도마니아라는, 양치식물 채집 광풍이 일어나면서 영국 구석구석의 이끼라는 이끼는 모조리 뽑혀나가 정원을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역사학자 D. E. 앨런에 따르면, 사람들은 희귀한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자연 수집품으로 채워 넣은 응접실 장식장이 교양인의 필수품이 되었다고 한다. / 32p

 

 

1886년 어느 유명한 조류학자가 깃털 열병의 심각성을 알아보기 위해 뉴욕 외곽의 쇼핑 구역에서 오후 시간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비공식적으로 조사했다. 700명의 여성이 모자를 쓰고 있었고 그중 약 3분의 1이 새 한 마리의 깃털을 통째로 달고 있었다. 모자에 꽂힌 새들은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볼 수 있는 새들이 아니었다. 뒤뜰에 날아오는 흔한 새들은 패션계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유행을 선도하려면, 극락조, 앵무새, 큰부리새, 케찰, 벌새, 루피콜라새, 쇠백로, 물수리 정도는 되어야 했다. 모자가 이렇게 새들의 공동묘지가 되어가는 동안 의류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한 상인은 벌새 8000마리로 숄을 만들어 팔았다. / 72p

 

 

 

 

 

 

   이처럼 『깃털 도둑』은 깃털을 훔친 한 남자의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멸종의 시대를 맞이해야만 했는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르포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다윈과 함께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를 밝힌 월리스가 오랜 지구의 역사가 손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박물관에 최대한 많은 표본을 소장해달라고 영국 정부에 간곡히 요청한 대목은 큰 울림을 준다. “지구의 역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분명 활용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새 가죽에는 과학자들이 아직 묻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이 숨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철저히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 훗날 우리는 돈에만 눈이 멀어, 우주 탄생의 비밀을 풀어줄 기록을 지키고 보존하는 대신 어리석게도 그 기록들이 파괴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후손들이 우리를 비난할 것입니다.”

 

 

 

“수집가들 덕분에 동물학이 발전했다는 자네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어. 그들은 박물관을 채웠다고 자랑스러워하겠지만, 사실은 자연을 비운 것이지……. 매우 부적절한 생각이라고 생각하네.”

로스차일드가 고용한 수집가들이 홍역이었다면, 괴저 같은 사냥꾼도 있었다. 트링박물관을 채우기 위해 아무리 많은 새를 잡았다고 해도 전 세계 곳곳의 정글과 늪지 그리고 강가에서 벌어진 살육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1869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문명인’들이 몰고 올 파괴적인 잠재력이 두렵다고는 했지만, 역사가들이 말하는 “멸종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실현될 줄은 몰랐다. 그 ‘멸종의 시대’에 지구 역사상 가장 많은 동물이 인간의 손에 처참히 죽어갔다. / 69p

 

 

프리스 존스 박사와 애덤스는 세상이 이미 이러한 표본들에 지식이라는 빚을 졌다고 설명했다. 월리스와 다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밝혀낸 것도 그 덕분이었다. 20세기 중반, 과학자들은 박물관에 있는 오래된 알 표본들을 서로 비교해 DDT 살충제가 쓰인 이후부터 알껍데기가 얇아지고 알의 부화율도 줄었음을 밝혀냈다. 덕분에 이 살충제의 사용이 완전히 금지될 수 있었다. 좀 더 최근에는 150년 된 바닷새의 표본에서 뽑아낸 깃털 샘플을 사용해서 바닷물의 수은량이 증가했음을 알아냈다. 그것 때문에 다른 동물들의 개체 수가 감소하고, 수은에 중독된 물고기를 먹는 인간에게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깃털을 “바다의 기억”이라고 표현했다. / 234p

 

 

 

 

 

 

   “나는 누군가는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주기를 바랐다”던 작가의 고백이 내내 마음을 씁쓸하게 만든다. 한 편의 소설 같은 깃털 도둑의 이야기가 전하는 인류에 대한 경고를 우리 모두가 책임감을 갖고, 잊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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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끝내는 세계사 - 암기하지 않아도 읽기만 해도 흐름이 잡히는
시마자키 스스무 지음, 최미숙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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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이들에게 제안하는 특별한 세계사 수업!

주요 키워드를 통해 접근하다보면 어느 새 세계사 전반을 통달하게 되는 책!

 

 

  미국이 지난 3일 새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이란군의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공습 살해하자,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이 주둔해 있던 군사기지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 속에 이라크가 대리 전쟁터의 형국이 되어가고 있는 양상이다. 한편,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미군 철수를 요구하고 미국은 그럴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이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한 미군 철수 문제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과 같은 민감한 현안을 떠안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비록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는 하나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눈감고 볼 일은 아닌 까닭이다.

 

 

 

   이제 우리는 좋든 싫든 세계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수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이 주둔해 있던 군사기지에 미사일을 공격한 날, 휴대폰에 해당 뉴스가 속보로 도착했을 때 평소 스팸문자를 넘겨버리듯 읽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였을 것이다. 어째서 이란이 미군의 군사기지에 미사일을 공격한 것인지, 왜 그것이 이라크 영토 내에서 벌어진 일인지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관심을 가지기 어려운 뉴스였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중동 내의 갈등은 워낙 복잡한 세계사가 얽히고설켜있어 감히 어디서부터 어떻게 살펴봐야 할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세계사 전체의 흐름을 파악하는 일이라고 쉬울 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에 끝내는 세계사』는 그간 세계사를 공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이들에게 특별한 학습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지역별로 구분해 시계열로 가르치던 기존의 세계사 수업 방식과는 달리 특정 주제에 맞춰 가로지르듯 세계사를 통독하는 이 책의 방식은 세계사 공략을 위한 새로운 첫걸음에 딱 걸맞은 책이 되어 줄 것이다.

 

 

 

7가지의 맥락으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읽어나가다

 

 

   『한번에 끝내는 세계사』는 지도자, 경제, 종교, 지정학, 군사, 기후, 상품과 같은 7가지테마를 선정해 각각을 ‘세계의 역사’라는 하나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설명한 책이다. 즉, 7가지 테마를 통해 시대적인 배경과 핵심을 동시에 읽어냄으로써 세계사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짧은 시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세계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첫 장인 ‘지도자’ 편에서는 중국 사회의 기틀을 세운 고대 중국의 황제와 로마제국의 황제, 위대한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초창기의 지도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몽골의 칭기즈 칸 그리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같이 대제국의 토대를 쌓은 지도자, 20세기의 독재자 등 지도자를 중심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살펴본다.

 

 

 

나폴레옹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연승가도를 달렸다. 막강한 나폴레옹 군대의 저력은 나폴레옹의 뛰어난 리더십과 국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일치단결한 징병 부대에 있었다. 전력의 과반수를 용병에 의존하던 당시 유럽 사회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매우 특이한 존재였다.

국민이라는 개념도 국왕의 신민이나 귀족의 영주민을 대신하여 프랑스인 모두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급작스럽게 만들어졌다. 프랑스군의 성공을 목격하고 나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잇따라 국민의 개념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 ‘지도자’ 편 중에서 35p

 

 

중국에서 새 왕조를 창건할 때나 절대주의 전성기의 서구에서는 황제나 국왕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20세기에 등장한 독재자들의 독재 권력은 전근대의 것과 크게 달랐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일시적이지만 대중을 열광시켰다는 것이다. 이념으로 따지자면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둘 중 하나인데,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지지를 받았다기보다 구국의 영웅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우연이 촉진된 면이 더 강하다. / ‘지도자’ 편 중에서 51p

 

 

 

 

 

 

   2장의 주제는 경제다. 소금과 철의 전매를 실시해 국가 재정의 기둥이자 통치 체제로 편입시킨 한의 무제, 지폐가 화폐의 주역이 되는 과정, 인도양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의 진출 과정, 유럽 국가들의 노예 무역과 세계 경제를 위기에 빠뜨린 세계 대공황 등에 대해 살펴본다. 얼마 전에 읽은 『이덕일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조공이 제후국이 일방적으로 물품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황제국이 회사로 답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국가 간의 실리외교였다는 점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적지 않게 놀랐었는데, 이 책에서도 조공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중국은 황제의 덕을 공경하며 공물을 가져온 다른 나라의 군주 내지는 사신에게 회사의 형식으로 은혜를 베풀고 작호를 수여한다. 여기에서 회사란 조공의 대가로 주는 답례품을 의미한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 체제가 세계사에서 특이한 것은 덕이 관건이 되기 때문에 속국보다 중주국의 부담이 크다는 점’이었다. 공물을 받은 덕이 있는 종주국 입장에서는 받은 공물에 대한 등가 교환은 있을 수 없고, 최소한 두 배는 채워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하니, 조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달리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15세기 말 스페인으로부터 유대인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유대인의 막강한 자금력이 네덜란드의 성장에 기여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연구자 중에는 네덜란드를 세계 최초의 헤게모니 국가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헤게모니’의 사전적 의미는 우두머리의 자리에서 전체를 이끌거나 주동할 수 있는 권력이나 주도권을 뜻한다. 즉 헤게모니 국가는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아 병합하는 것이 아니라, 물류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는 방식으로 수고와 비용을 최대한 줄인 상태에서 많은 국가나 지역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국가를 뜻한다. / ‘경제’ 편 중에서 78p

 

 

 

   3장의 주제는 종교다. 세계사라는 무대는 그야말로 종교에 웃고, 종교에 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여기서는 유대교의 차별과 박해가 독특한 규율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관점에서부터 우리의 역사와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교와 유교 등에 대해 살펴본다. 개인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웠는데, 책에서 설명하는 것에 좀 더 보충해서 공부를 해본다면 그간 어려워했던 점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여 큰 도움이 되었다.

 

 

 

유대교의 교리는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 규정된 도살 방법에 따르지 않은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돼지고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 등 식사 규율에 엄격한 편이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인데, 토요일에는 절대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중략) 이런 독특한 규율 때문에 유대교는 주위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고 차별이나 박해를 당하는 일도 일상다반사였다. 그 때문에 중세에는 교회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 또 근대 이후에는 내셔널리즘 고양을 위한 희생물로 이용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나치 정권에 의한 홀로코스트 대학살은 그 극치였다. / ‘종교’ 편 중에서 96p

 

 

유교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는 데 적합했고, 이런 유교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으면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을 통치하기에 용이했다. 명나라 태조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연장자를 공경하라’ 등 농민의 일상생활에 밀접한 가르침을 유교 사상에서 골라 ‘육론’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장려했다. 한편 도교의 교리는 현세 이익적인 특징이 있다. 특히 재물이나 소중한 자식을 갖도록 도와 주거나 병을 낫게 해주는 신이 인기가 많았는데, 돈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고 큰 병 없이 많은 자손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최대의 행복으로 삼는 당대의 가치관이 잘 드러난다. / ‘종교’ 편 중에서 104p

 

 

앞에서 서술했듯이 구교, 신교라는 번역 용어를 보면, 자칫 프로테스탄트가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느끼기 쉬운데 프로테스탄트의 ‘성서 중심주의’, ‘만인 사제론(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직접 예배하고 교통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로, 개신교의 신학 개념이다-옮긴이)’ 원리에는 위험한 함정이 따라 붙는다. 성서의 해석이 개인에게 맡겨지고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상황이 컬트 교단(유사 종교 혹은 사이비 종교)을 낳는 토양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교황과 공회의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조직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일탈이 심한 세력은 이단으로 배제 내지는 파문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에는 그러한 제동 장치가 없다. / ‘종교’ 편 중에서 122p

 

 

 

 

 

 

   4장인 지정학 편에서는 세계 4대강을 중심으로 문명이 어떻게 발달했는지를 살펴보고, 세계의 주요 산맥 그리고 해협, 운하 등과 같은 지정학적 요소들이 세계사에 어떠한 기능으로 작용했는지를 훑어본다. 이어 5장 군사 편에서는 기마전술이나 화약 같은 무기 등이 전쟁에서 어떻게 이용되고 변용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뿐만 아니라 백년 전쟁이나 제1차 세계 대전, 걸프 전쟁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무엇으로 비롯되었으며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소개하기도 한다. 비록 백년전쟁은 프랑스군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귀족의 자존심 때문에 패배를 답습한 프랑스군의 귀족의식에 얽힌 이야기 등은 또 다른 이야기적인 요소로 재미있게 읽혔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쭉 나열하는 게 아니라 책 곳곳에는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보다 쉽고 재미있게 세계사에 접근하기를 바라는 저자의 노력이 담겨 있다.

 

 

 

영국은 처음에 수에즈운하가 갖는 의미를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개통하고 보니 이용하는 선박의 과반수가 영국 국적임을 깨닫자 입장을 180도 전환했다.

영국은 때마침 재정난에 허덕이던 이집트가 수에즈운하 주식의 매각을 검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의 영국 수상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의회에 상의하고 절차를 밟다 보면 기회를 놓칠 수 있겠다고 판단, 일단 유대계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에게서 긴급 융자를 받아 그 돈으로 수에즈운하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 ‘지정학’ 편 중에서 156p

 

 

  그 어떤 노력도 자연의 위대함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순리를 생각하게 하는 6장 기후 편은 특히 인상적이다. 자연재해와 이상기후가 역사상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자세와 미래의 자연환경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대목이라 큰 의미가 있다. 끝으로 마지막 장에서는 비단, 차, 도자기, 향신료, 금 등의 상품이 어떤 방식으로 동서양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또 하나로 연결하기도 하는지 살펴본다.

 

 

 

마야 문명의 쇠퇴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복합적일 가능성도 있다. 대규모 파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기후 변동을 축으로 한 복합적 요인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 8세기 후반부터 40년간 서서히 건조화가 진행되다가, 810년 무렵을 경계로 상황이 급변하여 9년간 여섯 차례나 심한 가뭄이 덮쳤다. 그 후 비교적 평온한 시기가 42년간 이어지다가 3년 동안 비가 적게 내렸다. 다시 별 탈 없는 시기가 47년간 이어졌고, 이후 910년부터 6년간 세 차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다가 고전기 마야 문명은 종언을 맞는다. / ‘기후’ 편 중에서 213p

 

 

영국은 인도의 면직물, 중국의 차와 도자기 등을 계속 수입해야 했는데, 여기에서 수출할 만한 자국 상품이 없다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였다.

모직물 제품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기후가 다른 인도나 중국에서는 수요가 전혀 없어서, 영국은 어쩔 수 없이 은을 대금으로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은의 일방적인 유출이 계속된다면 국고의 파산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에 아편을 밀매하기 시작했다. / ‘상품’ 편 중에서 256p

 

 

 

 

 

 

   이렇듯 7가지 테마를 통해 세계사를 가로지르듯 살펴본 책은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되었고 또 거대한 흐름 앞에서 흥하고 무너져갔는지를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시도였다. 다만 현미경 보듯 세밀한 부분까지 설명하지 않는 비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가 채워나가야 할 숙제로 보인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어렵게 읽혀질 만한 부분도 다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대한 세계사를 이렇게도 공부할 수 있구나, 새로운 접근법에 따른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특히 책의 앞장에 부록으로 수록된 간추린 연표는 동시대에 지역별로 어떤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는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으니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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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천천히, 북유럽 -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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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작가 리모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북유럽의 풍경과 정취들!

북유럽과 드로잉 여행이 만나 더욱 특별해진 마법 같은 여행에세이! 

 

 

   신랑이 울상인 얼굴을 하고서 한숨을 토해낸다. 어찌된 영문인지 지난달에 다녀온 강원도 여행의 동영상이 죄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아, 거기에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순간과 새해 설산의 풍경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두 사람은 허무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여행은 찰나와도 같아서 무엇으로든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무심코 흘러가버린다. 너무나 기억해야 할 것도, 기억하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는 그래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여행 드로잉 작가 리모의 책 『혼자, 천천히, 북유럽』에는 북유럽의 풍경이, 정취가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 페이지 곳곳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국의 거리 위에서, 대자연의 거대한 시간 앞에서, 낯선 이의 작은 미소와 사소한 눈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손끝으로 기록해둔 그의 여행은 유난히 더 특별해 보인다. 그의 펜 끝에서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의 이 새로운 순간과 마주함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그래서 그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행복한 일인 듯하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사진이었다면 무심코 흘려버렸을지도 모를 장면들까지도 그 생생함에, 섬세함에 집중하게 된다. 아주 특별한 여행을 그와 함께 한 것처럼.

 

 

 

 

 

 

부지런히 기록한 그해 여름은

그저 그런 일상에 큰 위로가 되었다.

 

 

   『혼자, 천천히, 북유럽』의 리모 김현길 작가는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그리는 즐거움’을 알리기 위해 여행 드로잉을 강의하며 베테랑 여행 작가로 거듭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책은 그가 한 달 동안 북유럽의 대표 도시인 핀란드와 스웨덴, 노르웨이와 덴마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손끝으로 남긴 섬세한 기록들을 차분하게 쓰인 글과 함께 엮은 결과물이다. 여행을 하며 직접 보고 겪은 소소한 일상 같은 이야기에서부터 각 나라의 역사 혹은 문화에 얽힌 이야기까지.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했던 그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들은 아득하기만 했던 북유럽의 이미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여행 전과 여행 후에 인상이 달라지는 도시가 있다.” / 25p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으로 가득한 나라,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강력한 복지 시스템이 갖춰져 있으며 국가청렴지수 또한 세계 Top3를 놓치지 않는 선진국,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러운 점이 많은 나라 핀란드. 그 중에서도 수도 헬싱키 하면 세련되면서도 어쩐지 조금은 깐깐하고 새침할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헬싱키를 둘러보면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소박하고 따뜻한 곳이었다고 말한다. 어디든 깨끗한 거리와 주요 관광지인 데도 불구하고 각자의 일상을 찾아 저녁 6시에 문을 닫는 노점, 소박하지만 친근한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들.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가 한껏 멋을 부린 귀부인이라면, 헬싱키는 꽃다발을 든 소녀의 순박한 웃음과 같았다’는 그의 표현이 참 어울리는 곳인 듯하다.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이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헬싱키에는 영화의 실제 배경이 된 식당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영화 속 카모메 식당은 촬영 이후에 핀란드인에게 인수되었고, 그 후 ‘카빌라 수오미’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한동안 운영되었다가 현재는 일본인이 인수하여 다시 ‘카모메 식당’이라는 이름으로 영업 중이라고 한다. 작가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사치에의 흔적을 좇아 식당을 찾아간다. 빗속을 걸어 마침내 갈매기 한 마리가 그려진 파란 간판을 발견했지만 내부는 리모델링 되어 있어 영화 속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게다가 메뉴판에는 영화 속에 등장했던 오니기리도 보이지 않았고 현실의 카모메 식당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어서 당혹스러웠다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영화 속의 카모메 식당을 찾으러왔다가 적지 않게 실망을 안고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묘미이리라. 상상했던 것과는 다를 때 혹은 달라졌을 때 다가오는 실망감을 받아들이고 현실의 이미지를 다시 나에게 덧입히는 것, 그 또한 경험을 해봤을 때만 가능한 것일 테니까.

 

 

 

저 멀리 처음에 떠나왔던 헬싱키의 구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사라진 청명한 사늘 아래로 핑크빛 석양이 비스듬히 쏟아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몹시 차가웠지만, 갑판 위에서 헬싱키 도심의 뽀얀 풍경이 석양에 물드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황홀한 그 풍경은 마치 어린 소녀의 두 뺨에 발그레 피어난 홍조 같았다.

핀란드 사람들이 이해가 됐다. 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핀란드, 수오멘린나에서의 하루 편 중에서 48p

 

 

여행을 하면 하루의 목표는 단순해진다. 현지인에게 말 한마디를 거는 사고한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한 식사가 아닌 이곳의 낯선 음식을 먹는 것 그 자체가 하루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숨 가쁘게 다가오는 순간들에 집중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한 염려는 잠시 설득력을 잃는다.

지금의 여정이 모두 끝나기 전까지는 너무 멀리 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실체가 없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여행은 어쩌면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닐까. / 핀란드, 잘카사리의 백야 편 중에서 85p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유독 동상에 얽힌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 것은 왜일까. 바로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마주한 <아이언 보이>라는 미니 동상과 덴마크 코펜하겐 시청사 앞의 안데르센 동상, 게피온 분수에서 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어공주 동상이다. 다소곳이 다리를 모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 높이가 14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몸집에서 어딘가 애잔함이 느껴지는 <아이언 보이>. 오래전 스톡홀름항 부둣가에는 선박의 짐을 나르며 연명하던 고아가 있었는데, 고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감라스탄의 차갑고 허름한 골목 어딘가에서 끝내 숨졌다고 한다. 이 청동상은 그처럼 안타깝게 스러져 간 부둣가의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가 그린 그림의 필체 때문인지 자그마한 아이의 고단함과 쓸쓸함이 가슴에 더 크게 사무치는 듯하다. 세계적인 동화작가의 생애치고는 너무나 외롭게 살아갔던 안데르센의 동상도, 가녀린 외모의 동상이 사회적 의견 표출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인어공주의 동상도 다르지 않다. 마치 우리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동상이 생각나서 그런 것일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검을 든 기사의 시선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용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 너머의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긴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는 행위는 대상을 깊이 관찰하게 된다. 오랫동안 느슨히 바라보자 어느 순간 이해되는 것이 있었다. 성 조지의 어색한 시선은 눈 앞의 작은 승리에 취하지 않겠다는 다짐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의 시선은 어쩌면 더욱 멀리 뻗어 나갈 스웨덴의 미래에 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 스웨덴, 성 조지와 용 편 중에서 137p

 

 

좀 더 멀리 시선을 옮기자 올레순을 둘러싼 산맥과 바다가 보였다. 서쪽으로부터 힘차게 뻗어 오던 산맥은 바다를 만나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고, 그 뒤에 아득하게 놓인 수평선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 서정적인 도시가 대화재로 인한 폐허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잿더미 위에 다시 피어난 아름다운 꽃. 떠나는 아쉬운 발걸음에서 올레순의 이미지는 그렇게 각인되었다. / 노르웨이, 아르누보의 도시 편 중에서 242p

 

 

이 동상은 잔인하게도 온갖 수난을 겪어야 했다. 몸체에 비키니가 그려지거나 때로는 페인트 세례를 맞기도 했고, 팔이 절단되거나 머리가 잘린 채 도난당한 적도 수차례였다. 심지어 2003년에는 폭파 당해 동상이 바다로 추락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덴마크 정부는 굴하지 않고 인어공주를 매번 부활시켰다.

가녀린 외모의 동상이 사회적 의견 표출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수난의 역사를 알게 되자 동상의 움츠린 어깨와 아래로 떨어뜨린 시선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졌다. 어쩌면 수년 후 코펜하겐을 다시 방문했을 때, 지금의 것이 아닌 새로운 동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동상이 다치질 않길 바라며, 지금의 인어공주를 잊지 않기 위해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들었다. / 덴마크, 풍요의 여신과 비운의 공주 편 중에서 306p

 

 

 

 

 

 

   수백 미터의 아찔한 절벽 위로 아슬하게 튀어나온 암반에서 홀로 서 있는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책을 펼치다가 나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켠 장면이 하나 있다. 바로 노르웨이 트레킹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트롤퉁가다. 북유럽여행의 원탑이라고 불린다던 바로 그곳이다. 빙하가 만든 짙고 푸른 호수와 장엄한 절벽 그리고 고원지대의 만년설이 함께 펼쳐져 있는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작가의 가슴은 얼마나 크게 방망이질 쳤을까. 트롤의 혓바닥이라는 이름답게 깎아지른 듯한 좁디좁은 암반 위에 단독자로 서본 사람이라면, 서기 전과 선 후의 나는 어쩐지 많이 달라져있을 것 같다. 아니, 잘 익은 소면처럼 다리가 흐늘거렸다던 그의 표현이야말로 웃음이 나지만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암반 끝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포는 더욱 강렬해졌다. 평소에 고소공포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극한의 상황에 처해 보지 못해서였다. 좁디좁은 암반 위에서 잘익은 소면처럼 다리가 흐늘거렸다.

인생의 고비를 넘긴 후 트롤퉁가가 잘 보이는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아 가방에 넣어 두었던 점심을 꺼내 먹었다. 오랜 산행으로 다리는 무거웠지만, 기분 좋게 번져 오는 성취감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가방 속에서 펜과 물감을 꺼냈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이날의 기억은 그렇게 소중한 한 장의 기록이 되었다. / 노르웨이, 트롤의 혓바닥 편 중에서 269p

 

 

 

 

 

 

   선 하나하나에 담긴 감각을 따라 그의 여행을 함께 쫓아가는 독서 여정은 사진보다 오히려 몰입도가 높아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다시 사진으로 찾아보는 수고로움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드로잉 자체를 즐기고 그 풍경을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다른 책으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도 기꺼이 당신의 책을 찾아보겠노라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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