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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한국통사 - 다시 찾는 7,000년 우리 역사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국사교과서의 오류와 역사왜곡에 대한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다!
여러 번 거듭 읽어봐도 부족하지 않을 ‘우리 역사 바로 알기’를 위한 역사책!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으로 간 존 카터 코벨 교수는 “무엇 때문에 한국의 학계는 그렇게 소극적인가?... 남한의 젊은 학도들이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 고대미술이 모두 한국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남한 역사학자들은 오히려 이를 거꾸로 설명하고 있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덕일의 한국통사》의 저자 이덕일 역시 우리의 역사는 중화 사대주의 관점과 친일 식민사관이 혼재된 노예의 역사관이 아직도 득세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특히 현재의 남한 강단사학의 역사 서술 태도의 문제점을 강조한다. 일본인과 중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서술하면서 이를 보편성이라는 말로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신채호는 “지금까지 조선에 조선사라고 부를 수 있는 조선사가 있었는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라고 했을까.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그가 안다면 지하에서도 탄식하고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역사학자로서 사료에 대한 철저하고 세심한 고증, 대중과 호흡하는 집필가로서의 본능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문체로 한국사에서 숨겨져 있고 뒤틀려 있는 가장 비밀한 부분을 건드려왔던 이덕일의 신작이다. 오랫동안 한국사의 통념에 정면 도전하는 역사서와 강단사학의 주류를 이루는 식민사학을 해부하는 책들을 펴낸 까닭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반대파와 찬성파가 팽팽하게 맞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노론사학이 신민사학과 한몸이 되어 횡행하고, 중국의 역사공정에 의해 실재했던 우리 역사마저 축소되는 현실 앞에서 대중에게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는 시각을 전달하려는 그의 노력이 더욱 의미 있어 보인다. 《이덕일의 한국통사》는 바로 서기전 4,500년경에 성립했던 홍산문화에서 1910년 대한제국 멸망기까지 식민사관과 소중화주의에 의해 숨겨지고 뒤틀려 있던 역사를 바로잡고, 있는 그대로의 한국사를 다시 찾아내기 위한 그의 노력이 집대성된 역작이다. 오히려 한 권으로 집약된 것만으로는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고증과 서술, 300여 컷에 달하는 화려하고도 정밀한 도판으로 그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국사책 속의 역사관에 갇혀 있던 우리의 지식에 경종을 울린다.
저자 이덕일이 지적하는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시민사학의 문제점은 ‘국조단군 부인설’, ‘낙랑군=평양설’, ‘임나=가야설’로 축약된다.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조선 총독부의 ‘낙랑군=평양설’은 이병도·이기백이 주장한 ‘낙랑군=대동강설’과 같은 내용이다. 가야(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은 ‘임나일본부설’로서 다른 말로 ‘임나=가야설’이라고도 한다. 책은 첫 장에서부터 이와 같은 주장에 어떤 오류가 있고 어디까지 왜곡되어 있는지를 해부해봄으로써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각종 사료와 고증을 통해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다만,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민족 형성의 중심을 이루는 요하문명과 홍산문화를 거쳐 고조선과 열국시대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1장과 2장은 다양한 견해 속에서 가장 타당한 근거를 따라가는 과정인 까닭에 읽는 속도도 더디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이는 그만큼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시민사학 중심이었던 우리의 국사 학습이 얼마나 모호하고 축소되어 있었던 것인지를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고조선은 중국의 제후국과 같은 거수국을 거느린 황제국가였다. 그래서 황제의 계승자를 태자라고 청했다. 또한 비왕 장의 경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조선 국왕 아래 여러 왕들과 여러 재상들이 있었다. 고조선은 우수한 청동문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고조선의 다뉴세문경은 21센티미터 지름의 크기에 1만 3,000개의 원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현대 과학기술로도 재연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조선인들의 청동제작 수준은 청동기를 사용하던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고조선인들은 우수한 청동문화를 철기 문화로 발전시켜서 서기전 5세기경에 이미 철기사용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간 국사교과서에서 연나라에서 온 위만이 철기 문화를 가져왔다고 서술한 것은 일제가 만든 ‘한국사 정체성론’에 따라서 우리의 독자적인 철기 문화 생산능력을 부인하기 위함이다. / 61p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든, 민족사학계 일부의 견해대로 요녕성 요양으로 보든, 북한학계처럼 요녕성 봉황성으로 보든 이 명령은 공수부대가 아니면 완수할 수 없는 명령이다. 수나라 육군이 어떻게 황해도나 강원도로 먼저 왔다가 북상해서 평양이나 요양으로 간다는 말인가? 그래서 일찍이 성호 이익, 석주 이상룡, 단재 신채호 등이 모두 이 진격로를 근거로 한사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본 것이다. / 176p
이 중 ‘임나=가야설’이 어불성설인 이유는 무엇보다 명확하다. 저자는 그간 임나 강역이 일본인들에 의해 계속 확대되어간 것을 예로 꼽는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주장하면서 ‘임나=가라’는 지금의 김해 일대로 한정되었던 것이 총독부의 이마니시 류는 김해는 남가라라면서 임나일본부를 다스리는 치소는 경북 고령에 있었다고 하여 경북까지 확대시켰다. 또 조선총독부와 경성제대에서 근무했던 스에마츠 야스카즈는 임나가 경상남북도는 물론 충청도 일부와 전라남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확대시켰을 정도였다. 이렇듯 학자들에 따라서 임나 강역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는 사실은 임나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힐 사료가 없다는 고백에 다름 아닐까.
더욱이 저자는 야마토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다는 사실까지 《일본서기》에서 찾는다. 《일본서기》<서명> ‘11년(639)’조에 따르면 큰 궁전은 백제궁, 그 근처를 흐르는 강은 백제천이라고 불렀고, 왜왕의 빈소를 백제대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지석은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으로 썼다. 또한 그 관을 짠 목재는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 일본산 적송이었다. 황제의 죽음에 제후국에서 관재를 공납한 것이다. 이는 야마토왜가 백제의 제후국이었음을 증명하는 바이다. 메이지시대 일본인들은 이를 거꾸로 뒤집어 왜를 백제의 상국으로 만드는 역사왜곡을 단행했는데, 이렇듯 명백한 근거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남한 강단사학은 아직도 그들의 논리에 따라 역사왜곡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일본 열도의 조선식 산성_
(중략) 백강 전투에서 패한 백제인들은 신당연합군이 야마토왜까지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고 대마도와 일기도(이키시마)에 조선식 산성을 축조해 결사대를 배치하고, 이 두 성이 함락당하면 규슈의 후쿠오카 등에서 다시 결전을 하고, 이 성들도 함락당하면 수도인 나라 부근에서 결전하려 했다. 패전한 백제인들이 일본 열도 각지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야마토왜가 백제의 제후국(담로)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신당연합군이 야마토왜까지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의 고안성 등이 701년에 폐성된 것을 비롯해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 열도 곳곳에 남아 있는 조선식 산성과 신롱석식 산성은 본국을 빼앗긴 백제인들의 한과 집념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적들이다. / 189p
<이덕일의 한국통사>를 쭉 읽다보면 흥망과 성쇠의 역사적 순간을 곧잘 마주하게 된다. 특히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국력을 크게 떨쳤던 발해의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11대 대이진부터는 왕의 시호조차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고구려의 후신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고구려의 옛 강역을 상당 부분 회복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천자의 제국으로 우뚝 서려고 노력했음에도, 신라 중신 사고에 젖어 조선 후기 유득공이 남북국 시대라는 인식으로 《발해고》를 쓰기 전까지는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지도 못했다는 것은 더욱 통탄할 만한 일이다.
세종 역시 분명 우리 역사에 있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성군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에게도 명암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많이 않을 것이다. 조선의 태종이 민간에서 태어나 온갖 신선스런 경험 끝에 왕위에 오른 데 비해서 세종 이도는 태생부터 왕실의 일원이었던 까닭에 신분제를 하늘의 법칙으로 여기는 그릇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세종은 ‘나라는 군주와 사대부가 함께 다스리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고, 수령고소금지법(역모와 불법살인이 아닌 한 수령을 고소할 수 없다)과 부왕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종부법을 다시 종모법으로 되돌림으로써 시대에 역행하는 신분제를 지속하게 한 것은 참 애석한 일이다.



이 외에도 책은 우리가 기존에 국사교과서나 다른 역사서를 통해 익히 배우고 알고 있었던 역사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 사료와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합당한 주장을 펼친다. 이를 테면 진평왕의 셋째공주이자 ‘서동요’로 잘 알려진 선화공주가 백제의 무왕에게 “큰 절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여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미륵사가 실은 익산 지역 호족 사택씨의 딸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진평왕의 큰 딸 덕만이 27대 선덕여왕이고, 둘째 천명은 태종무열왕의 어머니라는 것과 달리 셋째 딸이라던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지도 않는다.
고종 23년부터 38년까지 16년에 걸쳐 판각된 팔만대장경에 대해 우리는 그간 이규보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몽골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판각했다고 쓴 것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온 것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다. 민영규 교수가 <고려대장경 신탐>에서 “무신정권이 불교계를 포용하기 위해 대규모 불사를 조직한 것”으로 본 것이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현종 때 만든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골군의 침략 때 붙타버리자 다시 각판한 것이 팔만대장경인데, 여기에 큰 힘을 보탠 것이 집권자였던 최우였다. 즉, 최우는 무신정권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불교계를 포용하기 위해 대장경을 판각했다는 저자의 말에 더욱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이가 주장했다던 십만양병설의 경우, 김장생이 스승 이이를 임란을 예견한 충신으로 떠받들고 남인 여수 류성룡을 격하시키려는 악의에서 나온 거짓말이었다는 것 또한 그러하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이를 “조선 역사상 1,000년 내 제1대 사건”이라면서 고려 전통의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라고 규정지었다. 묘청의 봉기를 고려 전통의 자주적 낭불사상 대 사대주의 유가의 싸움으로 본 것은 탁월한 해석이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에서 사대당이 승리한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대주의 사상의 극심한 폐해의 뿌리를 이 싸움으로 본 것이기 때문이다. / 250p
조공과 회사_
우리는 고려와 조선이 명나라에 일방적인 사대를 하고 조공품을 바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전혀 다르다. 조공이란 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일방적으로 바치는 진상품이 아니었다. 제후국이 조공을 제공하면 황제국은 회사로 답해야 했다. 조공은 일방적으로 물품을 바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물품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관계였다. 조공이란 또 일종의 국제무역행위였다. 명 태조 주원장은 공민왕 22년(1373) 고려에 국서를 보내 3년에 한 번 조빙하라는 3년 1공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고려에서 1년에 세 번 조빙하겠다며 1년 3공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고려의 사신들을 일종의 간자로 보아 3년에 한 번만 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고려는 조공 무역의 이득이 많았기 때문에 1년에 세 번 가겠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중략) 형식적으로는 명나라를 정점으로 하는 조공체제였지만 내용적으로 국가 간 무역의 이익을 차지했던 실리외교였다. / 309p
훈민정음의 이런 장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크게 퇴보했는데, 일제는 1912년에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만들면서 아래아를 폐지하고 받침에서도 한 글자 받침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일곱 개와 두 글자 받침 ‘?, ?, ?’ 세 개 등 모두 열 가지만 인정했으며, 설음 자모 ‘ㄷ, ㅌ’ 등과 ‘ㅑ, ㅕ, ㅛ, ㅠ’의 결합을 인정하지 않는 등 훈민정음의 발음체계를 크게 제한했다. 1930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언문철자법을 만들면서 표현 가능한 발음을 대폭 제한했고, 여기에 ‘ㄹ·ㄴ’이 어두에 오면 ‘o’으로 발음하게 한 두음법칙 같은 비언어적 규제가 더해지면서 우리 발음체계가 크게 퇴화했다. / 341p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정치가이자 역사였던 양계초는 학문의 가장 크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며, 국민의 밝은 거울이고,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했다. 연구성과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북한 역사학자들은 1963년경까지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 이론구조를 해체하고 자국의 관점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관을 확립시켰다. 중국은 자국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역사 서술의 확고한 원칙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광복 후 70여 년이 훨씬 넘도록 신민사학이 여전히 주류로 행세할 정도로 친일 카르텔은 청산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는 순수한 고대사 논쟁이 아니라 첨예한 현대사가 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견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만큼 철저히 지배층의 논리에 왜곡당하고 이용당해왔던 역사가, 백성들의 삶이 뼈아프게 느껴진 까닭이다. 처음에 이 책을 펼쳤을 때만 하더라도 마치 국사 공부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국사란 암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흐름으로 흘러왔고 또 그것이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또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소 두터운 감이 있어서 읽기를 주저하는 분들이 있다면 꼭 이 책만큼은 읽어보시라 추천을 드리고 싶다. 한 번이 아니라 거듭 또 거듭 읽어도 부족함이 없을 책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