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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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 방콕!

위태하고 불온한 삶 속에서 저마다의 존엄을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이 펼쳐진다!

 

 

 

   동남아시아의 빛나는 메트로폴리탄, 휴양과 향락의 도시 방콕. 뜨거운 태양 아래 화려한 사원이 도시를 웅장하게 밝히는 낮이 지나고 나면, 유흥과 만취에 달뜬 이들이 서로를 유혹하고 희롱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 붓는 밤이 이내 찾아온다.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한낮의 번민과 고민은 짙은 유흥의 향취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천국의 도시라 부른다.

 

 

 

   내게도 방콕은 그런 도시였다. 차오프라야강 사이에서 전통수상가옥과 드높게 뻗어 있는 도시의 화려한 빌딩이 이쪽과 저쪽의 삶을 나누고, 공장에서 찍어냈는지 직접 만든 것인지도 모를 공예품을 늘어놓고 한국말로 흥정하는 상인과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관광객들의 고단한 발을 마사지해주느라 정작 자신의 손과 얼굴은 피로에 찌들려 있는 여인들이 근근이 삶을 이어가는 곳. 고작 몇 걸음 앞에서 지독한 환락의 안개가 발걸음을 붙들고, 화려한 색채에 이끌렸다 추악한 향취에 이내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는 곳. 그곳은 그렇게 소비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의 무언가를 소모당하는 자들의 땅이었다.

 

 

 

 

 

 

머무르는 자를 허락하지 않는 땅, 내몰린 사람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스물네 번째 소설 『방콕』은 천사의 도시라 불리나 천국을 꿈꾸었던 자들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던 태국의 도시 방콕을 배경으로 우연과 오해로 점철된 삶의 불온성을 냉소적으로 묘파한 작품이다. 외국인 노동자 훙, 피아니스트 정연, 정연의 오빠이자 조지타운 대학교의 MBA 과정을 밟고 있는 섬머의 연인 정우, 정연과 정우의 엄마이자 훙이 다니고 있는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윤 사장, 은퇴한 미국인 벤, 환경운동가이자 벤의 딸인 섬머, 벤의 어린 여인 와이 그리고 웨이트리스 린까지 국적과 성별, 신분이나 지위, 어느 하나 같을 것 없던 인물들이 하나의 교집합을 이루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전개해간다. 사랑, 연민, 치정, 복수, 파국으로 이어지는 이 일련의 유형들은 시종일관 독자들의 마음을 편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결말은 그 어떤 비극보다 치명적이고 진한 잔상을 남긴다.

 

 

 

 

   훙의 회사는 장갑차와 탱크 부품 등을 만들어 원청 업체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이다. 직원 수는 302명이고 그중 31명이 이주 노동자다. 서른한 명 중 다섯 명이 불법 이주 노동자인데 훙이 여기에 속한다. 훙은 어릴 적, 동생인 트린과 함께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호치민의 에이즈 고아원에서 지내다 삼촌과 롱미로 갔고, 4년 전 러시아 어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가 베트남 노동자를 따라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다른 노동자들보다 작업량이 많이 주어져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의학 공부를 하는 트린을 뒷바라지하다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기자,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뜰리에를 가졌으면 하는 게 그나마 소원이라면 소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훙은 손가락 세 개를 다치고, 윤 사장은 얼마의 보상금과 치료비를 지원하기로 하고 그를 해고한다. 평소 윤 사장의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정인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으며 연모하고 있었던 훙은 사고 후, 다시 오갈 데가 없는 신세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그녀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한다. 한편, 윤 사장에 의해 악보 밖의 현실 따위는 모른 채 그저 커피 쿠폰에 도장을 찍듯 수많은 콩쿠르에 참가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정인은 공연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 밤, 훙에게 불시의 습격을 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는다. 이 날의 치욕과 상처로 정인은 이전과는 180도 다른 사람이 되버린다. 거지 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남자가 추근거리지 않았더라면, 훙이 분노의 대상을 정확히 했더라면,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다면, 아니 처음부터 이주 노동자들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전도유망한 피아니스트이자 엄마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딸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분노하면서.

 

 

 

 

트린에게서 소식이 끊긴 후, 훙은 해야 할 일을 머리에서 조금씩 지워 나갔다. 지금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거나, 자신이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만 있었다. 그 욕망만큼, 한 시간 뒤조차 예측할 수 없는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없는 삶에서 벗어난 것이 중요했다. / 39p

 

 

 

 

 

 

   ‘런던에는 300가지 종교와 세 종류의 소스가 있어. 파리에는 세 가지 종교와 300종류의 소스가 있고. 방콕은 어떤지 알아? 300종류의 소스와 300종류의 여자가 있지.’

   방콕에서는 남자들의 수다꺼리 하나쯤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고 한다. 와이는 코사무이 해변을 가득 메운 젊은 여자들을 보며 자주 딴생각에 빠지는 벤을 보고 한없이 우울해진다. 벤은 미국인이었고 2년 전 방콕으로 은퇴 이민을 왔다. 그는 인생의 반을 군인으로 살았고 나머지 반은 대형 유통업체 중간관리자로 일했다. 저축한 돈 대부분을 주식으로 날렸지만 매년 4만 달러 정도의 연금이 나왔고 필라델피아에 세를 준 집이 남아 있었다. 태국 북부 출신인 와이는 벤을 ‘탕푼 투어’에서 만났다. 투어 도중 와이는 벤의 손을 낚아채듯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들뜬 얼굴로 방콕행 기차에 올랐다. 벤은 와이와 함께 천국의 방문객처럼 방콕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함께 살 집을 구했다. 늦은 밤에는 팟퐁을 갔다. 팟퐁은 유명한 환락가였다. 와이는 방콕의 여자들을 만났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버리는 다른 남자들처럼 벤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커플들이 그랬다. 그들은 종착역이 아닌 정거장처럼 방콕에 머물렀다. 쾌락을 충전하고 있는 힘껏 소모한 다음 부지불식간에 떠났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우면 느닷없이 다시 찾아왔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와이나 린과 같은 부류의 여자들에겐 금세 사라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자신에게 줄 사람이 절실하다.

 

 

 

 

방콕은 그러려고 오는 거야. 나도 세 번째 방문인데 여전히 방콕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한다고. 배려, 헌신, 신뢰 같은 감정들이 개입될 틈이 없지. 여기 여자들도 대부분 그걸 알고 있어. 그리고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서로 동의만 하면 문제될 게 없잖아?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섹스는 애들이나 하는 거야. 존중과 사랑은 언제 해?

존중과 사랑은 미래를 위해 남겨 두는 거지. 현재는 그냥 즐기는 거고. 떠날 시간이 오면 과거는 방콕에 던져두고 훌훌 날아가는 거야. / 72p

 

 

누구도 싸움에 간섭하지 않았다. 간섭하면 칼부림이 날 때도 있었다. 더 치열하고 비열하게 싸우는 건 간섭으로 인한 다툼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이렇게 생각할지도 몰랐다. 사유와 사투 중에서 사유를 빼면 그게 바로 삶이며, 가끔 둘 사이에서 찌부러지는 게 삶이기도 하다고. / 115p

 

 

 

 

   이처럼 저마다 자신의 욕망을 좇아 원하든 원치 않든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소설 속에서 환경운동가인 섬머 만은 유독 특별한 인물처럼 여겨진다. AAI 아시아 지부 캠페인 매니저를 맡고 있는 섬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적어도 자신만큼은 모른 척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유별난 그녀의 정의로움은 외부로부터 수시로 공격을 받는다. 산악고릴라 밀렵 근절 운동을 벌인 동물학자 다이앤 포시가 자신의 텐트에서 손도끼로 얼굴이 난자당한 채 발견되고, 동물 구조단원은 복면의 괴한에게 납치되어 목이 잘린 시체로 돌아온 사건을 그녀라고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이 주변에서 그녀를 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끝내 코끼리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라탄다. 너무나 무모하고, 어쩌면 이 결말이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지만 그녀는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섬머는 인간의 이익을 위해 정의가 짓밟히고 동물의 존엄이 위협받는 현실을, 그것을 수호하는 일조차 공격받는 부당한 현실을 담고자 한 작가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 역시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몰두하느라 정작 내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편협한 인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선한 사람이 아니야.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 53p

 

 

많이 벌려면 많이 잃어야 해.

뭘 잃어?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존엄. / 182p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타인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 않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다. 위대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동시에 치료도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 어딘가가 크게 구멍이 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정우는 눈앞에 있는 섬머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 234p

 

 

 

 

 

 

   이렇게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서서히 방콕이라는 무대로 모여든다. 윤 사장은 갑자기 돌변한 딸 정인과 자신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훙을 찾아야만 한다고, 그를 찾으면 나머지 손도 부숴버릴 거라며 혈안이 된 상태로 사람을 붙여 그를 추적하고, 이를 알 리가 없던 훙은 린을 만나며 이제 방콕이야말로 자신이 자리를 잡고 살아갈 곳이라고 믿었다가 문득, 정인의 오빠인 정우와 섬머와 마주치며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와이는 벤이 미국에 있는 집을 처분하고 돌아온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깊은 불면증에 시달린다. 정우는 한사코 만류해보지만 코끼리 병원으로 가겠다는 섬머를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다. 가만 보면 이야기는 마치 잘 짜놓은 함정에 걸려든 주인공들이 러시안룰렛이라는 게임에 운명처럼 합석하게 된 모양새처럼 보인다. 한 시간 이후의 삶조차 예상할 수 없는,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반드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방콕은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도시였다. 누구든 머물고자 한다면 머물 수 있고, 숨고자 한다면 숨을 수 있는 도시였다. 훙은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이곳에서 만났다고 해도 받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훙은 잠시 희망을 품기도 했다. 저 해맑은 웃음을 간직한 남자는 기적처럼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정말 가능할까? 정말 우연일 뿐일까? / 247p

 

 

 

  소설 속의 『방콕』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생명체에게 지옥인 곳이 다른 생명체에게 천국일 수는 없다고, 누군가의 고통은 부메랑처럼 결국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다는 어떤 지독한 순리를 방콕이라는 도시가 지닌 이미지를 이용해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또 간결한 문체, 냉소에 가까운 유머, 지독한 고독과 실존의 문제를 다층적인 캐릭터로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거리낌이 없다. 특히 폭주하는 라스트 스퍼트와 인간의 희비극을 유연하게 다루는 능력은 비상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김기창이라는 이름의 작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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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 미트 - 인간과 동물 모두를 구할 대담한 식량 혁명
폴 샤피로 지음, 이진구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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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사육을 종식시키고 고기 없는 고기의 미래를 열어갈 대담한 식량 혁명!

인류에게 닥친 중대한 문제이자 고기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가장 영향력 있는 리포트!

 

 

   제레미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육식의 종말」을 통해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식생활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고기를 먹으면서 파생되기 시작한 문제는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일례로 12억 8천 마리의 소들이 전 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 곡물의 70%를 소나 가축들이 먹어치우는데 이는 인간의 수요를 뛰어넘을 정도다. 이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가축이 받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동물의 공장식 사육은 단언컨대 역사상 손꼽히는 범죄행위’라고까지 지적한다.

 

 

 

 

 

 

 

   이렇듯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데서 초래되는 기후변화, 식품 안보, 지구의 자원, 건강 등의 문제가 사회 전반에 알려지면서, 이를 의식한 듯 소신껏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채식이라는 것인지, 고기를 먹지 않고 얼마나 지낼 수 있냐는 듯 채식주의자들에게 보란 듯이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척추동물의 상당수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호모사피엔스라는 한 동물에게 지배받고, 공장식 축사에서 고기나 우유, 달걀을 생산하는 기계 취급을 받는 현실과 아울러 그들을 극한의 환경에까지 몰아감으로써 유발되는 각종 문제들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 역시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지금 인류에게 당면한 중대한 문제 앞에서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지구를 위해서 천단과학의 최전선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해 고기를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연구 중인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클린 미트」는 공장식 사육에 따른 축산업의 해악을 종식시키고 고기 없는 고기의 미래를 열어갈 대담한 식량 혁명의 보고이자, 미래 식량 생산 시스템의 비전을 다양한 각도에서 제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리포트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오늘 내 밥상 위에 올라와 있는 고기 한 덩이가 이전과는 많이 다르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고기가 웰빙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 사육과 도살이 사라질 미래를 위해

 

 

 

 

   「클린 미트」의 저자 폴 샤피로는 2050년에는 90~100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발을 딛고 살게 될 것이라 예측한다. 그중 대다수가 서양인, 특히 미국인처럼 호사스럽게 먹을 여유가 생긴다면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막대한 양의 땅과 다른 자원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미국만 하더라도 매년 9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을 키우고 도축을 한다고 한다. 마리가 아닌 무게로 계산하는 생선 같은 수생동물은 포함되지도 않은 수치다. 달리 말하면 미국에서 식용으로 쓰이는 동물의 숫자가 지구상의 인구보다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동물들이 거의 평생 동안 농장이 아닌 수용소나 다름없는 공장 안에 갇혀 산다는 점이다.

 

 

 

   공장식 동물 사육이 야기하는 위험 요소들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항생제의 내성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의학·공중보건 전문가들이 축산업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 전체 항생제의 80퍼센트 가량이 농장 동물에게 질병 치료의 목적이 아닌 체중 증가와 밀집 사육 시에 일어날 수도 있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투여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학협회는 생명 구조와 직결되는 항생제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우려하며, 항생제가 농장 동물의 성장 촉진용으로 사용되는 것을 금지하라고 연방정부에 요청하고 있지만, 농업계와 약품 업계의 로비로 연방정부는 이 요구에 귀를 막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니 우리라고 예외는 아닐 듯하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처칠은 “새로운 먹거리는 자연에서 만들어진 것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으며, 이러한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점진적일 것이다.”라 하여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단백질을 획득했던 방법에 큰 혼란이 찾아올 것임을 내다보았다. 자동차가 마차 여행을 역사책에나 나올 이야기로 밀어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기술의 진보가 인간과 여타 동물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바꾸리라 예상한 것이다. 그리하여 과학자와 기업가들은 수많은 병폐의 중심에 있는 농·축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고기와 다른 동물 생산물을 닭이나 칠면조, 돼지, 물고기, 소를 죽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감정을 가진 동물들을 완전히 배제한 배양 공정을 통해 비전을 실현하려한 것이다. 즉, 동물을 키우지 않고도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생선을 먹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안전한 새로운 고기를 만들어 내는 것, 바로 ‘청정고기’다.

 

 

 

   이들은 이런 스타트업이 성공한다면 환경 파괴나 동물학대는 물론 식중독과 심장병 등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들을 안겨준 허점투성이 식품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갈아엎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젊은 스타트업들은 환경이나 동물복지, 공중보건상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고기와 다른 동물 생산물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마치 공상과학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마크 포스트가 소 줄기 세포를 배양해 햄버거용 패티를 만들어 상용화 가능성을 증명하고, 안드라스 포르각스는 새로운 형태의 스테이크 칩을 선보인 것은 물론, 우마 발레티 박사는 고기를 세포 배양하여 기존 고기와는 다른 더 건강한 고기를 만들고자 하였으며 멤피스미트는 세계 최초의 배양 미트볼을 완성해냈다.

 

 

 

 

이 기술이 실제로 축산업을 대체(교체가 무리라면)하기 시작한다면 농업경제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란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미 수십 년 동안 미국 농업인의 숫자는 감소 추세이고 점점 더 많은 농업인과 축산인들이 다른 직업군으로 재편될 것이다. ‘미래의 미국 농업인은 목장 주인이 아니라 미생물학자’라는 제이슨 매시니의 예측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 116p

 

 

 

 

진정한 의문점은 우리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등 수많은 동물 생산물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면 기존에 고기를 먹던 사람들이 과연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모던미도의 실험관 가죽을 입고 실험실에서 키운 동물 생산물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받아들이기나 할까? 그리고 우리가 그런 음식과 의복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모던미도 등의 업체들이 더 늦기 전에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여 축산업의 해악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평범하지만 비싼 이 스테이크 칩이 미래 식량의 예고편이 될 수 있을까? / 20p

 

 

 

 

 

 

 

 

 

 

 

 

 

   저자는 청정 고기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우려되는 몇 가지 중요한 난관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선 비용을 아주 많이 낮춰야 한다는 점이다. 생산 가격을 낮춰 기존 육류 업체와 경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규모와 비용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더라도 정부 규제와 기타 행정 문제가 난관으로 작용하여 시장 출시가 늦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의문은 아무리 품질이 좋고 가격이 싸더라도 소비자들이 이런 식품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공이 최소화된 식품, 더 나아가 ‘자연산’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남에 따라 과거 GMO식품이 프랑켄-푸드라고 불린 것처럼 배양된 동물 생산물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 변화는 매우 중요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비용 대비 효과가 높고 동물에서 유래하지 않은 배양액이 없다면 청정고기가 절대 나올 수 없습니다. 이 점은 확실합니다.”는 피셔의 말처럼, 세포를 키울 저렴하고 풍부한 영양원을 개발하지 않는다면 청정고기로 동물과 지구에 더 나은 미래를 안겨주려는 꿈은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값비싼 사치품으로 전락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청정고기 영역에 대한 투자는 더욱 절실해 보인다. 무엇보다 “비효율적이기 그지없고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식량 생산 시스템에 전 세계가 계속 의존한다면 식량 부족과 기후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제도의 변화가 훨씬 중요하다.”며 좋은 식품 연구소의 브루스 프리드리히가 2016년 《와이어드》에 기고한 글처럼 이를 뒷받침해줄 제도적 장치 마련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네덜란드에서는 열성적인 환경주의자들이 공직에 종사하며 힘을 실어준 덕분에 최근 몇 년간 동물이 아닌 식물을 원료로 하는 대체 단백질이 연구되고 있다고 하니, 우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음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강력 범죄나 테러를 두려워하지만 진정한 위협은 식탁 위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인의 사망원인 1위인 심장질환은 육류 중심의 식사와 관련 있다는 증거가 셀 수 없이 많다. 과도한 육식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심장병의 주범임에는 틀림없다. 같은 이유로 미국심장협회는 ‘식물성 음식이 포함된 건강한 식단’을 홍보하고 ‘월요일은 고기 없는 날’ 같은 운동에 사람들의 동참을 유도한다. / 152p

 

 

 

 

우리가 고기 등의 동물 생산물에 집착하여 생긴 모든 문제들은 반세기 전에 볼로그가 이야기한 녹색혁명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그 혁명을 달성할, 잠재적으로 가장 유망한 해결책은 축산업을 키우지 않고 세포농업으로 규모를 줄이는 것이다. 혁명은 농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동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존중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부차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다. 하지만 세포농업이 가축에 대한 의존성을 줄인다는 사실이야말로 여러 환경주의자와 공중 보건 전문가 그리고 동물복지 지지자가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다. / 299p

 

 

 

 

 

 

 

 

 

 

 

 

 

   오늘도 나는 밥상에 꼭 고기 반찬을 떨어뜨리지 않고, 여전히 아이에게 고기를 잘 먹어야 속이 든든하고 튼튼해진다는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다. 또, 청정고기가 출시되어 마트에 진열되는 날이 가까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100% 신뢰할 수 있을지 역시 미지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식탁에 오르내리기 위해 희생되는 동물의 생사에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며 보다 지구를 위한 선택에 습관을 들이자는 다짐을 해본다. 나와 내 가족 모두의 진짜 건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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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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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허물에 덮이는 피부병을 앓는 도시 속 사람들!

공포가 어떻게 조작되고 이용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강렬한 소설!

 

 

 

   D구역. 이 도시의 풍토병으로,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전문가들은 각질세포 형성에 관여하는 구조단백질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유독 티셀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고 증세가 심한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때문에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초래하는 귀결은 D구역은 다른 구역과 격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가 허물로 뒤덮이자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다국적 제약 회사의 기업도시로 지정한다. 세계적인 피부과 질환 권위자이자 신단백질 전문가인 공 박사가 책임자로 와 방역 센터와 방역대를 만들어 T-프로틴을 공급하고 방역 지침을 발표한다.

 

 

 

   주인공인 ‘그녀’가 무릎을 힘주어 문지르자 갈라진 허물 사이로 진물이 진득하게 묻어나온다. 몸 안의 불순물이 배출되지 못해 곪은 냄새가 나고 씻어내야 잠시나마 가라앉힐 수 있지만, 물을 끼얹다가도 손톱에 허물이 걸리고 피고름이 주르륵 흐른다. 이제 통증은 대수롭지도 않다. 그녀는 허물을 벗기 위해 방역 센터에 입소한다. 방역 센터는 허물을 벗겨내는 도시 내의 유일한 기관이다. 방역 센터로 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방역버스에 올라탄다. 방역 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퇴소하면 다시 허물을 입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지만 이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치료 병동에서 머무는 기간은 평균 8주에 이르고, 감염률에 따라 다섯 그룹으로 나뉘는데 그녀는 위험 단계로 분류되어 그곳에서 김과 후리, 뾰족 수염, 임상시험으로 끌려가던 척을 만나게 된다. 파충류 사육사인 그녀, 센터 내의 정보를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고 어딘지 묘한 구석이 있는 아이 후리, 재생타이어 가게를 운영하고 늘 센터 내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불안해 보이는 김,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 욕을 하는 뾰족 수염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다 D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던 전설 속의 거대한 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난 엄마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공 박사는 우리 엄마에게 대해 나보다 더 잘 알 거 아냐. 엄마뿐이야? 이 세상에서 방역 센터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존재는 없을 걸. 모니터에 작대기들과 사진들이 떠 있었다고.”

“작대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그게 로마숫자더라고. 자기 표식 같은 건지도 모르지. 공 방사는 내 뼛속까지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난 죽었다 깨도 그게 뭔지 모르겠더라고. 그 숫자들이 얽히고설켜서 내 몸이 이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숫자의 주인은 공 박사니까, 어떤 의미에선 공 박사가 내 몸의 주인이란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야. 안 그래? 흐흐.” / 50p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 72p

 

 

 

 

 

 

   전설 속 거대 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허물이 죄다 벗겨진다는 속설. 한때 B구역 산기슭에 있는 사설 동물원에서 일하다 산사태가 발생해 사라진 비단뱀 하나가 있었는데, D구역에 나타났다는 뱀이 이 비단뱀인지 정말로 롱롱인지 알 길이 없는 그녀는 방역센터를 퇴소하면 이들과 함께 롱롱을 찾아 나서자고 약속한다. 마침내 퇴소를 하고 모여든 이들은 100여 년 전에 불타 쇠락한 궁에서 수십 개의 땅굴을 파고 서식 중인 뱀과 마주한다. 구렁이도 아니고, 비단뱀도 아니며 아나콘다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렇게 크고 단단한 용골돌기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이 뱀이 정말 롱롱일까?

 

 

 

방역 센터는 ‘T-프로틴’을 하루에 두 번 이상 복용할 것을 권장했다. 처음 방역 센터에서 프로틴을 공급했을 때만 해도 80% 할인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도시 기능을 신속하게 정상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부 지원금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보조금 혜택이 사라진 지금, 캔 한 개의 가격은 한 끼 밥값에 육박했다. / 73p

 

 

“신화와 전설이란 그런 겁니다. 인간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최소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막연한 희망이 허물을 벗겨줄 거라고 정말 믿는 겁니까?” / 102p

 

 

그녀는 뱀을 위한 신당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뱀의 탈피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어둡고 좁은 공간, 적절한 먹이 외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기도 따윈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저들의 기도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어디에 버려질 것인가, 두렵기까지 했다. / 124p

 

 

 

  이들 일행이 사로잡은 뱀으로 인해 전설의 뱀 롱롱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시 전체가 흥분에 휩싸이게 한다. 뱀을 사로잡으려는 방역대장과 대치하고, 신에게 바칠 제물이라며 자신들이 마셔야 할 프로틴을 대신 뱀에게 바치면서 그렇게 공포와 탄성이 어수선하게 교차된 채로 사람들은 뱀이 허물을 벗는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다. 이런 가운데 오로지 척 만이 “공포는 방역 센터가 시민을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허물을 퇴치하기 위해 세금을 걷고 수십 종의 프로틴을 출시해 점점 가격을 올리고 방역대를 도심에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 허물을 입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허물에 대한 공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을 지배합니다. 전설 따위에 기대 당신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냉정하게 판단한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척이며, 지금 뱀에게 가장 현실적인 위협은 공 박사라고 내뱉는 그녀를 통해, 우리는 근거 없는 모순과 판타지에 기대서라도 공포와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군중의 심리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방역 센터 안에서 임상시험은 사실상 강제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임상시험 동의서에 사인하는 사람은 당장 돈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허물 쓴 사람들 중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임상시험 동의서엔 연구 내용에 관해 피상적인 내용만 기술돼 있습니다. 부작용에 대한 보상도 허술합니다.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 모두 통과해 시판이 허가되는 신약은 10%밖에 안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시험 중인 신약의 90%는 인체에 해롭다는 겁니다.” / 150p

 

 

“프로틴은 허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이 도시에서 거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그리고 롱롱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타이어 가게에 있는 뱀은 그 전설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롱롱프로틴은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뱀은 다시 숭배의 대상이 될 겁니다.” / 157p

 

 

 

 

 

  이제 그녀는 갖가지 방역 업체가 성업을 이루고 피부과와 피부 관리실, 피부보호제와 약, 향초, 피부 보호 기능을 첨가한 갖가지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허물에서 파생되는 경제 부양의 효과가 없었다면 시의 발전은 불가능했을 거라는 아이러니와 마주한다. 즉, 시가 허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구호는 부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진실이 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롱롱에게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롱롱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이용한 프로틴이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하며, 이제는 제 손으로 롱롱에게 프로틴을 바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다. 이 기이한 현상과 허물에 대한 불안을 수치로 증명하고, 만일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해야 한다고 고객을 설득한 어느 보험왕의 고백 같은 것들이 합쳐져 더 이상 실체는 보이지 않고 부풀린 환상만 남아 조작된 진실이 진짜 진실이라 믿게 되는 현실은 너무나 낯익어서 더 끔찍하다.

 

 

 

 

 

 

   소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유명 프로그램이 순위를 조작해 대중을 기만하고, 다양한 곳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진영의 논리에 따라 의식을 조장하는 현상들을 경험하고 있다. 그야말로 조작된 도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조장된 공포가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대중이 우스꽝스럽게 놀아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소설을 읽다보면 자주 간담이 서늘해진다. 누군가는 진실에 눈을 떠 허물을 벗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강제로 덧씌워진 허물을 자신도 모르게 덧입고 사는 불온한 현실을 은유적이면서 한국적 색채의 판타지로 승화한 독특한 작품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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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땐, 책 - 떠나기 전, 언제나처럼 그곳의 책을 읽는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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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떠나고 싶고, 떠나고 싶어 읽었던 여행 작가 김남희의

책으로 기억되는 여행 혹은 여행으로 기억되는 책!

 

  돌이켜보면 나는 떠나는 일에는 한없이 게으른 사람이었다. 사람에서든, 집에서든.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동경과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도 아닌데, 떠돌고 헤매고 낯선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일에 자주 주저하곤 했다. 익숙한 것들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곳이 아닌 저곳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떠나는 일에도 반드시 이유가 필요했다. 떠나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게 이유라면, 책에라도 핑계를 대어볼 걸. 난생 처음으로 영화 <밀양>을 보고,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를 읽고 느닷없이 밀양행 기차를 탔던 그날처럼.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밀양 가볼 만한 곳’, ‘밀양 맛집’을 검색해가며 그때그때 갈 만한 곳을 찾아볼 수라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떤 정보도 없이 그저 영화의 흔적을, 소설의 느낌만을 좇아 그렇게 기찻길에 올랐었는데.

 

 

 

   딱히 지켜야 할 것이 없었던 보다 더 젊은 시절에 혼자서 여행이라도 많이 다녀볼 걸, 하는 후회가 많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줄곧 소설만 읽을 정도로 독서 편식이 심했던 내가 언제부턴가 여행에세이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이런 세계가 있었구나, 이런 여행도 가능한 거였구나, 이 정도 이유만으로도 떠날 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구나. ‘소설 한 구절에 마음이 빼앗겨 충동적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나는 그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된다’던 김남희 여행 작가의 <여행할 땐, 책>을 읽으며 더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었던 거리를 내 발로 걸어보기 위해, 소설의 주인공이 팔던 음료를 마시겠다고 쇠락한 도시의 오래된 카페를 찾아가며, 매혹적인 남자 주인공이 32년간 갇혀 있던 호텔에 하룻밤을 머물며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던 그 고백이 내게는 그 어떤 여행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신의 여행 가방에는 어떤 책이 들어있나요?

 

 

   「여행할 땐, 책」은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등 길 위에서의 순간을 기록한 다수의 여행에세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남희 작가의 신작이다. 전작인 「길 위에서 읽는 시」가 여행길에서 읽은 스물여덟 편의 시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신작의 주제는 바로 ‘책’이다. 그녀는 ‘내 여행은 배낭에 넣어갈 책을 고르는 일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치앙마이에서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천천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볼까. 고요한 언덕의 리스본에서는 리스본을 사랑한 작가의 소설로 골라볼까. 불과 얼음의 땅,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자연이 살아 있는 레이캬비크에서는 범죄 소설이 어떨까, 고민해보며 평소에는 잘 읽지 않을 장르의 책에도 과감히 손을 뻗어보는 것이다. 마음의 그물이 느슨해지는 여행지에서는 독서의 취향조차 넉넉해지기 때문이다.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에 문득 혼자임이 새삼스러워질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기에는 애매한 오후의 시간에, 빗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에,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릴 때 습관처럼 펼쳐든 시간이 이 책 속에도 추억처럼 새겨져있다. 한낮의 시에스타처럼 느른한 그리스의 이드라 섬에서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양이 섬’이라 할 만큼 골목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들이 넘쳐나는 곳,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금지된 섬이니 골목 한복판에서 기나긴 낮잠을 청하고, 포구의 카페마다 제일 좋은 자리를 지정석으로 삼는 그들. 끼니때마다 사료를 챙겨주고 물을 갈아주는 집사들이 골목마다 상주하니 이만하면 사람보다 나은 인생이지 않은가.

 

 

 

   게다가 2시부터 4시 사이에는 시에스타가 있어서 매일 두 시간씩 낮잠을 자는 삶이 가능한 섬이라 그 시간이 되면 고양이도 사람도 최선을 다해 잔단다. ‘난 낮잠 자는 것도 아까워’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나에겐 이런 의무적인 낮잠이 새삼 부럽다. 그렇게 작가는 매일 고양이와 함께하는 날들을 두 달 가까이 보내며 후지와라 신야의 에세이집 「인생의 낮잠」 속의 한 글귀를 떠올린다. ‘고양이는 본디 넘쳐나는 인간의 생활 냄새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동네 바보 같은 동물이며, 고양이가 많다는 것은 동네 바보를 거둘 만큼 마을에 활기가 넘쳐난다는 얘기이자 주민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고. 넉넉한 인심과 묘심이 어우러진 풍경을 즐기기 위해 아침마다 포구로 나가 날마다 찬연하게 쏟아지는 빛을 맞으며, 그늘에서는 고양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섬에서 보낸 한철은 마치 ‘인생의 낮잠’ 같았다는 그녀의 말이 나를 저절로 그리스 이드라 섬으로 이끈다.

 

 

신분도 국적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제각각의 사연으로 이곳을 찾아오지만 이곳에서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순례자.

그 평등과 관용의 정신이 어느새 전통이 되었고, 그 전통이 다시 세계의 순례자를 끌어들이며 더 강화되어 오지 않았을까. 산티아고의 신성은 결국 변화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다른 나를 찾고 싶다는 갈망, 더 많이 감사하고, 좀 더 겸손하고, 더 자주 웃는 나를 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우리는 이 길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 33p

 

 

우리는 겨울 오후에 비껴드는 햇살의 따사로움, 시내에서 일을 보고 걸어 돌아오는 초여름 밤에 밀려오는 라일락 향기, 동네의 계곡에서 겨울을 이기고 산란한 도롱뇽 알을 본 봄날의 작은 작은 흥분 같은 것들. 이런 기쁨을 놓치지 않으며 살고 싶다. 생활의 작은 풍요를 날마다 누리며 살고 싶다. 모든 것이 소멸해가는 세월 속에서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건 이토록 구체적이면서도 사소한 것들이다. / 43p

 

 

인간이 장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는 한 세상 어디에도 슬픔이 베이지 않은 도시는 없을 것이다. 삶이 있는 한 어떤 공간에서나 고통스러운 일들은 생겨난다. 다만 시간이라는 열차의 바퀴 자국이 그 상처를 희미하게 만들 뿐. 냉정한 시간이 이제는 치유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이 고스란히 쌓여온 공간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공간을 바꾸어 삶 또한 변화시키고 싶다는 모순되는 욕망을 안은 채로. 리스본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길 원했던 도시였던 동시에 과거를 향한 진한 향수병을 앓는 도시였다. 소설 속 남자 아마데우 안에 길을 떠나길 원하는 여행자와 과거를 향한 그리움을 앓는 두 사람이 있었듯이. / 70p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 사람들을 냉대하지 말라, 그들은 변장한 천사일지 모르니.”

파리에 가면 오갈 데 없는 창작자들의 몸 뉠 곳을 마련해주는 예술가들의 안식처가 있다고 한다.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이다. 창작자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도시답게 나는 줄곧 혼자서 여행을 한다면 파리에서도 꼭 이곳에 가보고 싶었다. 예술가들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해주는 곳이라니 어쩐지 낭만적이다. 「여행할 땐, 책」 속에도 이 서점이 등장한다. 지난 백 년 동안 책 도둑과 흥망성쇠를 같이 했다고 과언이 아닐 만큼 번번이 사라지는 책들, ‘고객’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은 뜨내기 관광객들의 예의 없는 행동들이 어쩌면 이 오래된 서점의 낭만을 깎아먹는 듯하지만, 넓은 지구에서 내가 누군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이 아름다운 통로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기록된 이 작지만 커다란 세계가 내내 그 자리에 머물러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지 않을까.

 

 

 

《행복의 지도》에서도 지적한다. “민주주의가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곳이 민주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고. 시스템이나 체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를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주변 풍경을 사소한 것에서부터 바꿔가는 개인일지도 모른다. / 58p

 

 

아마데우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라고 했듯이,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결국 삶의 예외성과 우연성 속으로 뛰어들어 삶 자체를 바꾸어내려는 의지가 아닐까. / 68p

 

 

  조르바를 동경해 조르바처럼 살고 싶었던 20대의 나와, 이제는 빛의 세례를 누리며 살아가되 광기에 휩싸이지 않고 열정을 잃지 않되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꿈꾸는 지금의 나를 마주하게 한 그리스,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흔적을 좇아 찾아간 가마쿠라에서 건져낸 일상의 힘, 경이로운 아마존의 신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았을 때 ‘숲에서 우주를 보’게 해준 조지 해스컬의「나무의 노래」, 네팔의 희말라야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야생으로 들어간 청년의 「인투 더 와일드」까지. 이 무수한 길 위의 시간 속에서 그녀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치열하게 마주함으로써 단독자로 서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기도, 유목민의 삶과 정주민의 삶에서 어디에 속하기를 원하는지 고민하며 자신을 읽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여행이 내게 순간을 열어주는 한, 나는 마지막까지 떠돌며 살아갈 것이고, 다시 힘을 내어 이 세계의 온갖 미혹 속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잠들지 못하는 ‘몽유병 여인’이 될 것이라 다짐해보기도 한다. 이렇듯 여행 그리고 책은 끊임없이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 그 속에서 늘어나는 깨달음이 그녀를 계속해서 길 위로 이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이들일수록 그들에게는 강력한 배후가 있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지상이 아닌 천상에서의 보상을 믿고 있었다. 현실의 벽이 견고할수록 지금 여기의 삶이 아닌 다른 세계의 더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일까. 내세, 천국, 윤회, 구원, 업보. 이런 단어들이 내게는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드는 거짓과 기만으로 다가왔다. 고결하고 신성한 세계로 귀의하고자 하는 갈망이 비루한 일상의 견디는 힘이 되어주는 현실이 우스웠다. 지금 이곳의 삶을 개선하지 않는 종교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 178p

 

 

결국 품위 있는 삶은 공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과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다정하고 성실한 태도.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다 해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 해도 자신의 세계를 아끼며 가꾸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삶의 품격이란 결국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 214p

 

 

 

 

 

  그녀는 ‘인간은 희미한 타인의 마음으로도 꽤 멀리 나아가고, 놀랄 만큼 오래 꿈꿀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을 되새긴다. 그녀가 지치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는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세상 어딘가에서 내 손을 잡아줄 낯선 얼굴을 상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온기를 믿기에 늘 떠날 수 있다는 믿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믿음까지 동경하게 되었다. 그 믿음의 부재가 나의 발목을 계속 붙잡고 있었기에. 덕분에 나는 이제 그녀처럼 오롯이 나를 위해서 책과 함께 할 여행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때는 무슨 책을 읽고, 또 무슨 책을 들고 가 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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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업 - 하 - 반룡, 용이 될 남자
메이위저 지음, 정주은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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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 그 속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음모와 배신,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철의 여인!

 

 

 

   선황이 갑작스레 붕어하고 황후는 중풍으로 쓰러진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경사의 정국이 불안하여 제왕의 난 이후로 남방 왕족은 경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오랜 세월 경사의 황실과 대등한 세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왕공귀인들은 각자 군대를 두고 힘을 키웠으며 권문세가의 세력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것도 모자라, 근래에 들어서는 관리들이 갈수록 부패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그야말로 난세 중에 난세다. 이에 난세를 평정하고, 3황자였던 자담으로 하여금 황제에 오르게 하고 스스로 실권자가 되어 경사의 정세를 안정시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소기다.

 

 

 

   한편 ‘남자의 천직이 개척과 정벌이라면, 여자의 천직은 보호하고 돕는 것이다.’는 말을 고모인 황후로부터 오랫동안 들어왔던 왕현 역시 음모와 배신, 역모를 꿈꾸는 잔당들로 얼기설기 얽힌 구중궁궐의 음험한 비밀 앞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한때는 정인으로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담을 황제의 자리에 내세운 것도 모자라, 훗날 소기를 제왕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앞서 『제왕업』 상권이 왕현과 소기의 운명적인 만남과 더불어 음모와 배신이 도사리고 있는 구중궁궐의 중심에 들어서기 시작한 과정이 그려졌다면, 하권에서는 허울뿐인 황제를 대신해 왕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지키고자 피비린내를 무릅쓰고 온갖 위기 속에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본격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당신이 패업을 이루고 천하를

통치하는 것을 지켜볼 거예요!” / 196p

 

 

 

   때마침 유산을 한 몸에다 여린 몸으로 여러 위기와 고초를 겪어 몸이 약해진 왕현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다. 두 사람에게는 경사요, 나라에도 경사이며 드디어 소기와 왕현의 사이에 자식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까지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지만, 당경이 모반을 일으키고 돌궐이 국경을 침범하여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난다. 이에 소기는 부대를 이끌고 친히 정벌에 나선다. 이제 이렇게 떠나면 출산은 물론, 꼬물꼬물 아이가 기어 다닐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기에 왕현으로서는 원망과 외로움,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마음이 괴롭지만 그녀는 소기의 아내이자 예장왕의 왕비였고, 수많은 사람이 전쟁 중에 가족과 목숨을 잃고 피붙이와 헤어지는 고통을 겪을 것을 생각하며 이를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과연 소기는 나라의 위기를 평정하고 난관을 뛰어넘어 왕현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소기가 궁에서 사라진 지금, 왕현에게는 또 어떤 위기가 닥칠 것인가.

 

 

 

내 뱃속에는 나와 소기의 아이가 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전쟁통에 부모와 모든 것을 잃은 이 아이도 이제 내가 사랑하는 보물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지켜줄 것이며, 아이에게 사랑과 온기를 보상해줄 것이다.

이 아이뿐만 아니라 그 많은 의지가지없는 아이들 모두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심아의 손을 잡고 회랑을 지나면서 내 마음속은 점점 더 밝아지고 분명해졌다. ‘사내들의 세상인 전쟁에서, 여인은 그저 집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밖에도 매우 많았다. / 289p

 

 

난세에는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죽는 법, 왕씨 가문과 사씨 가문처럼 대단한 명문세족이라도 언제 어느 때고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와, 그 정점에서 겨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자의 차이다. / 355p

 

 

 

한때 나와 소기는 각자의 간교한 심보 탓에 수많은 오해와 의심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끊임없는 풍파를 겪으면서 마침내 마음속의 응어리를 내려놓고 서로를 온전히 믿게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태로는 순간을 모두 버텨냈다. 만약 심중의 부담을 내려놓지 않았다면 어찌 마지막 난관을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 404p

 

 

 

 

 

 

   소설은 왕현과 소기가 음모와 배신,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난관을 헤쳐 가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는 전개로 마지막까지 휘몰아친다. 소기가 출정을 떠나고 예상치 못했던 반전으로 위험에 처하는 왕현과 여인의 몸으로 이에 단호하게 맞서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이렇게 장대한 스케일과 서사, 긴장감 넘치는 액션을 겸비하면서도 섬세하고사실적인 묘사, 아름다운 로맨스까지 두루 갖춘 소설은 근래에 참 오랜만인 듯하다. 복잡한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이토록 거대한 상상력을 유려하게 조직해낸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이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이렇듯 원작에 대한 인상이 좋았던 데다 소설 속 후기의 여운이 아직도 가시질 않는 만큼 드라마도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무척 기대가 된다. 장쯔이 주연의 2020년 중국 최대의 기대작이라 하니 꼭 찾아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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