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과의 관계 앞에서
늘 약자였던 나, 내 마음조차 잘 모르겠는 나,
내 인생에 정작 나는 없었던 세상의 모든 ‘나’에게
추천합니다!
남편과 내가 연애하고서부터 지금껏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의아한
반응을 보이다가도 이내 “얘가 착하잖아.”, “네가 보살이지.” 하고 하나같이 나를 이해심이 넓고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갈무리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편뿐만 아니라 그 누군가와도 다퉈본 적이 없다. 착하니까,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스스로 잘 하는 아이니까. 유년 시절부터 나는 부모님에게
늘 기특한 아이였고, 타인에게는 곧잘 배려하는 착한 사람이었으며 뭐든, 알아서, 스스로, 잘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애석하게도.
그건 분명 ‘기대감’이라는 또 다른 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타인이 생각하는 어떤
기대치에 못 미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에게도 무척 엄격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싫은 사람의 부탁도 잘
거절하지 못한다면, 거절하느니 차라리 맞춰주는 게 편하다면, 인정받지 못하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욕 좀 먹는 게 죽기보다 싫다면, 눈치
보느라 할 말 못하고 이불킥만 날린다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언지 모르겠다면, 이런 분들에게 강력 추천’한다던 바로 이 책에서 나오는
얘기가 다 얘기다. 거절을 잘 못하는 건 당연하고, 그냥 부탁도 웬만해선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민폐가 될까봐. 식사를 할 때도 상대방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따라 먹는 게 편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상대방이 하고 싶을 걸 하는 게 더 익숙하다. 이러다보니 어쩔 때는 내가 먹고
싶은 게 뭔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히 나조차도 모를 때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에 옳고
그름은 없다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걸까요?”
“나를 사랑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죠?”
통합예술심리상담센터 <나루>의 대표로 개인과 집단 상담을 통해 마음에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있는 저자는
심리상담을 하면서 이와 같은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내 마음 읽어주는 일에
인색해서 정작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뜻이 아닐까. 그녀를 찾아 온 영미라는 이름의 내담자는 심지어 “욕구가 없을
수도 있나요?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건 왜 그런 거예요?”라는 질문을 하기까지 한다. 과연, 정말
아예 욕구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에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는 상담자의 말은 책을 읽고 있는 내 마음까지 덜컹 내려앉게 만든다.
부모님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다 쓸데없는 짓이라 했다고. 우리가 흔히 들었던 말이자, 내가 아이에게 너무도 자주 하고
있는 바로 그 말. “울지 마.” “떠들지 마” “만지지 마.”
저자는 욕구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며 정서적 안정과 정체성, 자존감을 형성하는 중심축이 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러한 욕구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보살핌과 사회적·정서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유아기 시절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안전감,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과 같은 마음의 영양분을 잘 공급받았을 때 자신의 욕구(필요)를 정당하고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린다는 건 나약하다는 뜻이니까 강하게 컸으면 하는 마음에, 떠들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니까, 만져서는 안 되는 걸 만지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는 이 합당해 보이는 이유가 아이의 무한한 호기심과 세상을
향해 내보이는 자유의지를 방해하고 욕구를 억압시켜는 일이 되어버려서, 결국 어릴 적부터 강하게 욕구를 억압당해온 내담자의 사례처럼 최후의
수단으로 욕구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택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와 나의 부모 그리고 나와 내 아이의 관계까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내 아이마저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표현의 기본은 말하기이며, 말하기의 활기찬 버전인 떠들기는 자기표현의 확장일 뿐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은데 엄마는 바쁘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입을 다물라고
한다면, 이는 표현하지 말 것을 강제하는 일이자 소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떠들지 말 것을 요구받은 예민한 아이는 “나는 너와
소통하고 싶지 않아”로 받아들여 상대에게 거절받았다고 생각하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 19p
가족치료사이자 《가족》의 저자인 존 브래드쇼는 “부모가 아이를 잘못 다루고 학대하는 일은(아이가 부모의
욕구를 채워주며 어른 노릇을 하게 만드는 정서적인 학대를 포함해) 대부분 부모 자신의 완성의 필요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자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하고 자녀의 의존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은 부모 또한 그들의 부모로부터 자신의 필요를 채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받지 못한 것을 채워 완전해지기 위해 자녀로부터 그 결핍을 보상받길 원한다. (중략)
누구에게나 생의 과업이 있다. 저마다 짊어져야 할 고통이 있고, 완수해야 할 삶의 주제가 있다. 그들의
외로움과 공허를 채우고 자신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그건 그들의 몫이다. 애초부터 내가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다. 그걸 대신해주는 건 인생 침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욕구와 부족함을 채워주며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나의 인정 욕구 또한 타인을 통해
이뤄질 수 없다. 자녀 역시 엄연한 타인이다. / 110p


이른바 ‘착한 사람’의 특징 중에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거절을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 역시 누군가가 부탁을
해오면 쉽게 거절을 못한다. 조금은 내가 희생을 하더라도 여건이 된다면 최대한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곧잘 떠안곤
사서고생을 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우리가 거절이 힘든 이유는 타인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정 욕구’는 남들을 의식하는 타인지향성과 연관을 지어 설명할 수 있다. 타인지향성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타인이 나에게 실제로 무언가를 요청하든, 특정한 태도로 무언의 압박을 하든 모두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민감성은 인정뿐 아니라
비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타인지향성이 높은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혹평하는 것, 나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 미덥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등에 쉽게 상처받는다. 쉽게 말해 내가 거절당하는 게 두려우니 상대방도 거절당하면 상처받을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저자는 거절을 확대해석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거절당한다고 내 존재가 거부당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누군가의 감정적
호소를 뿌리친다고 해도 그 사람을 버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란 뭘까? 남들을 귀찮게 하거나, 주야장천 제 자랑만 늘어놓거나, 사사건건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을 가리켜 좋은 사람이라고 하진 않는다. 본인이 손해를 볼지언정 남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자랑은 하지 않고 겸손하게 타인을 적당히
추켜세우며, 목소리를 내기보다 집단의 의견에 순응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 ‘겸손하다’, ‘법 없이도 산다’
같은 칭찬을 한다. 그 칭찬은 받는 사람에게 약이 되어 또 ‘좋은 일’을 행하게 만든다. ‘착한 일-칭찬이라는 보상-인정 욕구 충족-다시 착한
일’, 이렇게 인정 중독에 빠져드는 것이다. / 71p
여태껏 우리는 자기통제력을 남을 위해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른다. 내가 감당이 안 되는 일인데도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떠안아 놓고 나의 감정과 욕구를 통제했다면, 이 능력을 남을 위해 쓴 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자기통제력을 나를 위해
쓰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하다. 나의 선택과 행위 중심에 남이 아닌 내가 있는지, 그것이 진정한 나의 욕구인지 살펴야 한다. /
75p


이렇게 책은 인정 중독, 억압된 분노와 죄책감, 피해의식, 완벽주의와 같은 요소들이 ‘나’로서의 삶을 어떻게 방해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살펴보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뼈때리는 대목이었던 것이 ‘착함의 이면’ 즉 착한 행동 뒤에 숨겨진 진짜
감정을 들여다본 부분이었다. 지원이라는 이름의 내담자는 누가 자기를 소개할 때 “이 친구 참 착한 사람이야”라고 하면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자신이 인격적으로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게 되고,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고 안심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일화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진짜 착한 게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칭찬받고 싶었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밝힌다. 이건 그 누구보다 인정 욕구를
갈망하는 내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 저자는 타인에게 도움을 주면서 얻는 기쁨은 표면적인 감정이고, 그 이면에는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보상 욕구가 작동하는데, 더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면 잘난 척하고 싶고, 우월함을 드러내고 싶은 나르시시스트의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과 욕구보다는 타인의 욕구와 시선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욕구인 자기애적
욕망이 억압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잘난 척을 하면 사람들이 비아냥거리거나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어서다. 대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용인되는 이타적인 행위를 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가,
피해의식이니 죄책감이니 하는 것보다 나의 진짜 욕구를 들킨 것 같지 않은가. 그러니 애써 좋은 사람인 척하지 말자. 그냥 인정하자. 나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나, 자기표현에 서투른 나를 받아주고 인정해주자.
착한 사람들은 화를 잘 못 낸다. 잘 참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병에 잘 걸린다. 또는 화가 나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에서도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아예 느끼지 못하거나, 이미 일어난 감정을 무시하기도 한다. 모두 분노를 억압하는 일이다.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특히 화를 내는 일은 어쩐지 교양 없어 보이고 때로는 유치하거나 치졸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대인관계 능력이 떨어지고 인격적으로 미숙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분노는 나쁜 것’이라거나 ‘착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이 직면해야 할 진짜 선입견이다. / 81p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방식의 행동양식을 거두고 온전한 나로 서는 이 치유의 과정을 걸음마기라고
가정해보자. “안 돼”, “싫어”, “내 거야”를 실천하면서 자율성과 독립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해보자. 좀처럼 그렇게 살아보지 못한 나에겐,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누리는 탁 트인 시야와,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는 기쁨을 승낙해주자...(중략)...주변 사람들의 방해나 질투, 불안과
분노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변화는 낯선 것이고, 우리는 낯선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주변 사람들의 저항을
맞닥뜨릴 땐 ‘그대가 두려운가 보오’ 해두자. 그것 또한 그의 몫이며, 나는 내 갈 길을 가면 된다. / 152p
이런 완벽자주의자 치고 행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대개는 상대가 달라고 하기도 전에
퍼주고 나서, 나중에 자신은 그만큼 돌려받지 못했다며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한다.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완벽을 기한 만큼 나의 진짜 감정과 욕구, 소망은 희생된다. 그러니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속이 허하고 억울하다. 혹시
내가 유독 억울함이 많은 것 같다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애쓰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 248p


『당신 생각은 사양합니다』는 오늘도 남에게만 좋은 사람으로 사느라 내 인생에 정작 나는 없었던 세상의 모든 ‘나’를 위한 좋은 치유제
같은 책으로, 읽는 내내 많이 공감하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끝으로 내가 원하는 것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을
되새겨보려 한다. 그래도 되는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도 없다고. 누구도 내가 원하는 것을 비난할 수 없기에 관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을 이제는 내가 먼저 지지해줘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