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은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훌륭한 길잡이다!
80여 편에 이르는 세계 문학을 한 권으로 만나는
지적 유희의 시간!
열일곱 살의 메리는 여행 도중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일행과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싹한 기분에
사로잡히거나 공포로 피를 얼어붙게 만들만큼 무서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메리는 우연히 내연의 관계이나 장차 남편이 될 퍼시와 유명 시인인
바이런이 나누는 대화에서 착안하여 굉장한 영감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나눴던 대화의 주제란, 당시 학계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던
‘갈바니즘’이었다. 이는 죽은 개구리 뒷다리가 전기 자극을 받고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이탈리아 의사 갈바니의 실험에서 유래한 혁신적인
요법으로, 인간의 힘으로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추측을 낳았으며, 이러한 상상이 광기에 사로잡힌 의사와 그가 생명을 부여한 괴물에 관한
공포소설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바로 그 유명한 『프랑켄슈타인』이다.
작품의 유명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이런 괴기스러운 공포 소설이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여성이 썼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뼈아픈 회환과 자기연민에 빠진 채 얼음 뗏목을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아무런
인과율도 없이 ‘괴물-악마’로 태어나 부조리한 삶을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유비”를 느낌으로써 ‘읽기’라는 행위의 숭고한 실존을
깨닫는 것은 또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 있어 고전 문학은 마치 정복의 대상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읽는 자’의 지적 유희를 채우는 가장 ‘이상적인 독서’임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여전히 어렵고, 고전만큼이나 더 어려운 평론가들의 해설은 심지어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 독자에게 얼마간 좌절감까지 느끼게 하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살다, 읽다, 쓰다』는 고전 문학에 대한 장애를 다독이고
진입 장벽을 낮추는 좋은 길잡이일뿐더러, 책을 덮고 나면 예전에 읽어봤던 고전을 다시 찾아보거나 이제야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책을 통한 공부는 내 인생의 전부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여전히
모범생일 필요가 있다.”라며 먼저 손을 잡아주는 그녀의 이끌림에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삶을 어떻게
꾸려 갈 것인가
『살다, 읽다, 쓰다』는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고 누구나 알아야 할 교양이 되는 세계 고전 문학을 한 데 모아,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사생활 등의 정보를 통해 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문학 에세이다. 소설가이자 서울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소설 창작을 강의하며 10년
동안 세계 문학 공부에 깊이를 더해 온 저자의 독서 기록이기도 하다. 여기에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쓴 8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인간의 욕망과 모순, 삶과 죽음의 사이에 존재하는 희비극 속에서 인간의 자의식과 근원을 찾아나간다.

책은 총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을 염두에 두고 『고리오 영감』, 『나귀 가죽』, 『적과
흑』, 『마담 보바리』 등을 조망한다. 특히 사실주의의 대가인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을 통해서 근대, 자본주의, 대도시, 속물들, 야망에 찬
청년, 전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의 삶 등 우리 삶의 축소판을 들여다보고,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목숨을 조금씩 앗아 가는 나귀 가죽의 이야기
『나귀 가죽』을 통해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삶(시간-욕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보게 한다.
1804년생인 라파엘은 물론 욕망의 화신이었던 못생긴 청년 발자크의 미화이다. 라파엘의
자살-욕망(타나토스)은 삶-욕망(에로스)과 등치되고 ‘그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양차 찾은 온천장에서 사소한 일로
결투(살인)까지 한 다음 라파엘이 택한 최후의 길은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중략)...죽음의 순간은 극적이지만, 나귀 가죽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시작된 삶-죽음의 과정(추정컨대 폐병에 걸린 듯하다.)은 속도가 느리다. 많이 욕망하면 빨리 죽는다. 하지만 욕망을 죽인 채
조심조심 영위되는 삶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우리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삶(시간-욕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점에서 『나귀 가죽』은 과연 부제대로 ‘철학 소설’이며 발자크의 거대한 문학 기획인 ‘인간 희극’의 첫 고리가 될 만하다. /
『나귀 가죽』편 중에서 28p
‘악’을 향한 끌림은 자연스레 ‘선’을 향한 갈망을 동반한다. 마찬가지로 패륜적이고 패덕적인 무보상적
행위의 저변에 윤리와 도덕에 대한 강박관념이 깔려 있는 일이 왕왕 있다. 실제로 ‘악’으로 변역되는 프랑스어 mal에는 ‘고통’이라는 의미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보들레르에게는 문학 자체가 악덕에 빠진, 온갖 소외된 자들을 향한 고통과 연민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 『파리의
우울』편 중에서 44p

2장과 3장은 문학 이상의 문학, 소설 이상의 소설에 관한 장으로, 인간과 세계의 ‘모순’을 탐구한 문학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삶의
일면과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을 들여다본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르게 하는 『오이디푸스 왕』으로 시작하여 사유라는 행위를 통해
유의미하고 존엄한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는 『팡세』와 욕망이란, 특히 ‘검고 깊은 욕망’이란 그 속성상 모순덩어리에 염치없는 대식가임을 확인케
하는 『맥베스』가 그러하다. 세계의 이원성과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찰에 이르게 하는 『파리의 노트르담』, 생명의 있음과 없음 사이의 경계,
삶과 존재의 이면을 이루는 어둠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이룬 『검은 고양이』도 등장한다. 특히 윤리와 도덕이란 동병상련에 기반한 것이며 상대적이고
위태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몬』과 『덤불 속』은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가장 읽어보고 싶은 인상적인
작품으로 손꼽고 싶다.
그렇다면 그의 죄는 대체 무엇인가? 어두운 욕망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한 무모함? 마녀들의 예언을, 즉
자기 안의 속삭임을 맹목적으로 믿은 어리석음? 실현된 욕망을 견뎌 내지 못한 나약함? 혹은 세속 권력의 쟁취에 덧붙여 도덕적인 완성까지
거머쥐려했던 탐욕? 아마 전부 다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각각 정반대되는 긍정적인 가치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실로 아름다운 것은 추억하고
깨끗한 것은 더럽다. 물론, 그 역도 참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모순이 곧 인간의 본질이며 그 흐름이 곧 인생이다. / 『맥베스』편 중에서
83p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악행쯤은 허용된다는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악이
양산된다. 그악하고 처절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하면 노파는 사기꾼 여자 덕분에, 사내는 또 이 노파 덕분에 살아남는 공생
관계가 유지되는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동병상련에 기반한 것, 그토록 상대적이고 위태로운 것인가. 「라쇼몬」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스물세 살
때 쓴 사실상 처녀작인데, 인간 본연의 이기주의와 선악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서슬 퍼런 묘사가 충격적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 나아가 진리인가.
/ 『라쇼몬』편 중에서 128p


4장은 주로 ‘생활과 일상’이 담긴 세태 소설과 영미 문학과 러시아 문학의 ‘웰메이드’ 소설을 담고 있다. 구혼 소설이자 가정 소설답게
미시적인 규모로 오밀조밀하게 포착된 세태와 풍속,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가 도드라진 작품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 단순히 페미니즘을 주장하기보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넘어 작가로서 바람직한 자세를 갖출 것을 촉구한 『자기만의 방』, 윌리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의 경제, 특히 1930년대
대공황을 조망한 『세일즈맨의 죽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5장에서는 저자가 청소년기에 즐겨 읽은 성장 소설과 예술가 소설에 대한 글을 담고
있다. 엄정한 시민 사회와 관능적인 예술 세계를 그려낸 『토니오 크뢰거』, 질풍노도의 한 가운데서 제각기 불안과 떨림의 병을 앓으며
‘데미안-압락사스’를 갈구하던 우리 청춘의 기록 『데미안』, 예술의 세계와 생활의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달과 6펜스』
등의 작품이 등장한다.
사춘기 때나 중년이 된 지금이나 『폭풍의 언덕』은 환상적인 소설이다. 즉,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음에도 여전히 아리송한 우리의 욕망과 인생의 깊은 속살, 그것을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20대 여성 특유의 거칠고 날선 야성의 문체로 포착한
음화(陰畵)에 다름 아니다. 때문에 폭풍우와 히스 꽃,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심지어 브론테 집안을 점령한 요절의 유전자(어머니도 단명했다.)와
성화(聖畵) 같은 분위기의 초상화까지 합세하여 이 소설은 우리 청춘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이다. / 『폭풍의 언덕』편 중에서
154p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원제는 ‘아버지들과 아들들’, 즉 복수이다.)은 제목이 암시하듯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표층적으로는 1890년대에 이르러 더욱더 첨예해진 사상 대립이 부각된다. ‘60년대 세대’, 즉 민주
진영을 대표한 젊은 지식인의 입장인 ‘부정(否定)’은 ‘니힐리즘’이라 불렸는데, 이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극히 정치적인 개념, 일종의 행동
강령에 가까웠다. 실제로 많은 니힐니스트들이 유형이나 추방, 망명까지도 감수한 혁명가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체르니셰프스키,
투르게네프와도 친분이 있던 바쿠닌이 대표적인 예이다. / 『아버지와 아들』편 중에서 169p

끝으로 6장과 7장에서는 카프카, 카뮈, 쿤데라, 보르헤스 등 실존과 부조리에 대해 고민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과 문학 속에서 드러나는
정치의 본질을 담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인간이 인간이길 멈출 때 비로소 그 본질을 들여다보게 되는 『변신』, ‘자리-이름’과 각종 서류에 기초한
관료제의 암흑과 미로가 폭로된 『성』, 문학은 논리와 조리와 상식이 놓쳐 버린, 인과 관계와 필연성의 원칙으로는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우연한
틈새(부조리)를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이방인』, 전체주의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마모돼 가는 개인의 실존을 포착한 걸작
『1984』, 만성 폭력,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을 문제 삼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보게 만든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고골의 소설가적 재능은 예민한 코와 왕성한 위장에 있었다. 1830년대와 1840년대 초반, 러시아
문학이 낭만주의의 끝물을 붙잡고 있을 무렵, 그는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자는, 절대 죄스러울 것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에 주의를 기울인
최초의 작가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초월성도 담보하지 못하는 이 허망한 욕망을 혹독히 단죄하고자 했다. 속물스러운 가치를 탐했던 그의
주인공들은 실제로든 비유적으로든 모두 죽는다. 한편, 소설 바깥에서 고골은 자기 자신을 단죄한다. 말년에 이르러 종교에 심취한 그는 기괴한
단식을 감행, 포도주 몇 방울로 연명하다가 스스로를 굶겨 죽이기에 이른다. 서른 살만 돼도 웬만큼 타협하게 되는 속물스러움에 고골은 왜 그토록
큰 우수를 느꼈던 것일까. / 『뻬쩨르부르그 이야기』편 중에서 282p
『파리대왕』은 ‘어른-아빠’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 바깥에 더 큰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섬 속의 아이들이 봉화냐, 사냥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두 명의 희생양을 내기에 이르렀다면, 섬 밖의 어른들은
숫제 핵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른 세계라고 ‘짐승’이라는 이름의 불안과 공포가 없을 리 없다. 잭 일당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어, 무수한 파리 떼에
뒤덮인 암퇘지의 머리, 즉 ‘파리대왕(베엘제붑-악마)’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결코 아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 이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 『파리대왕』편 중에서 330p
닮음에 대한 게르만의 강박관념은 ‘나’가 그 자체로 고유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믿음의 부재와 자존감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나의 존재가 대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에 앞서 나를 지우고 싶은 욕망, 나아가 나의 손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좀비(분신)’를 갖고 싶은 욕망은 거의 동일한 메커니즘에 종속된다. 이는 걸작이 되어야 마땅한 자신의 소설이 기존 문학의 질 나쁜
모방이자 우스꽝스러운 패러디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궤를 같이한다. / 『절망』편 중에서 341p


『살다, 읽다, 쓰다』를 읽다 보면 무려 8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아우른 저자의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덕분에 고전이라는 무게감을 제법 덜어낸 기분이다. 책에 수록된 작품을 미리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작품의 어떤 부분에
주목해야 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들여다보아야 하는지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덕분에 글쓰기는 ‘인간의 산물’이며,
우리는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숭고하며 때문에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람은 무릇, 책을 읽어야
사람이라 했던가. 오늘도 한 권의 책을 읽기 전보다 더 성숙해진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열심히 읽고, 써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