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하고 게으르게
문소영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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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지만 불편한 것들에 눈 돌리지 않고

엉뚱하지만 자유롭게 광대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지적 통찰의 순간들! 

 

 

   언젠가 읽었던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우리에게는 사랑의 대상도, 사랑 그 자체도 아닌, 사랑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디 사랑뿐일까. 삶 전체에서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 즉 안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나의 경험만으로는 채워질 수 없기에 우리는 미술이나 음악, 책이나 영화 등과 같은 예술 작품을 보고 느끼고 읽음으로써 삶에 대한 다채로운 안목을 얻는다. 때로는 세상의 온갖 가십과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 속에서도 세상을 읽어내는 능력을 기를 수 있고 또 그 덕분에 취해야 할 것과 내려놓아야 할 것을 구분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으로 미술 전문 기자 문소영은 자신의 책 <광대하게 게으르게>의 전문을 통해 미술 작품, 영화, 웹툰, 광고, 길거리 디자인을 비롯한 모든 시각 문화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기발하고 황당한 이야기를 특히 좋아하지만, 현실 정치, 경제, 사회 코드로 파고들기도 한다고. 어쩌면 그녀 역시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삶을 보고, 살고,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안목을 길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가 본 것들, 그녀가 느낀 것들, 또 그녀가 파고들다 안에서 머물렀던 것들을 읽음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과민한 시선에 따른 삶의 안목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세상을 읽는 과민한 시선, 그리고 멈추지 않기 위한 글쓰기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게으르지만 불편한 것들에서 눈 돌리지 않고, 엉뚱하지만 자유롭게 광대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지적유쾌함으로 가득한 책이다. 시각 문화 탐구 블로그 ‘미술관 속 비밀도서관’을 10년 넘게 운영하며 7년 연속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미술, 책, 영화, 음악 할 것 없이 다양한 예술에 조예를 보이며 이를 통해 시류를 읽고, 현실의 부당성에 날카로운 펜을 드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유쾌한 감각이 글 곳곳에서 묻어나오니, 지적이면서도 쿨내가 진동하는 언니 한 명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온 기분이 든다.

 

 

 

   책은 제목의 그것처럼 ‘게으르게’, ‘불편하게’, ‘엉뚱하게’, ‘자유롭게’, ‘광대하게’, ‘행복하게’로 크게 나뉜다. 1부인 ‘게으르게’ 편에서는 늦게 꽃핀 대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뭔가를 끈질기게 하며 무기력한 게으름은 피하겠노라 다짐하고, 『술꾼의 품격』을 쓴 임범 작가가 “기호식품의 소비에 따르는 쾌감은 맛과 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거기엔 폼이 따른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커피 한 잔에 묻어나오는 자의식에 대해서 생각하며, 긍정적 예언을 통해 자기성취력을 기대했던 조선시대의 새해 덕담을 통해 자기암시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이 중 프랭크 매코트의 “계속 끄적거리세요! 뭔가가 일어날 겁니다. (Keep scribbling! Something will happen.)”라는 명언을 인용해 죽기 전에 한번 꽃펴 보려면 방황할망정, 느릿느릿 갈망정, 그냥 늘어져 있어서는 안 되겠다던 글이 유독 마음을 두드린다. 한창 글을 쓰다가 생활전선에 뛰어든 뒤로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나도 이렇게 계속 소소하게라도 끄적거리다보면 언젠가는 글을 쓸 수 있겠지, 믿고 있으면서도 내심 불안이 컸던 것이다. 그래, 내 끄적거림의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그렇지도 않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두 길은 똑같이 매혹적으로 보였고, 한 길을 택해서 거의 끝가지 걸은 “먼먼 훗날”에도 가지 않은 길이 더 좋았는지는 알 수 없을 뿐이다. 더구나 화자가 말하는 시점은 아직 그 “먼먼 훗날”이 아니라, 막 갈림길 중 한 길로 접어든 순간이다. 그는 “먼먼 훗날” 자신이 한숨을 쉬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어느 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여행자이기에.” 그게 바로 우리의 삶이 아닐까. / 49p

 

 

 

 

 

 

   2부 ‘불편하게’에서는 여러 예술 작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면면들을 들여다본다. 영화 「패터슨」을 예로 들어 타고난 성별과 인종, 신체 조건이 은근한 이점으로 작용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의 조건’ 혹은 ‘상대적 박탈감’에 대해 고민해본다. 또 최근 한 남자연예인이 자신의 집으로 여성스태프를 데려와 성폭행 사건을 두고 남자연예인을 질타하기 이전에 여성스태프의 행동을 지적한 댓글이 비일비재했던 것처럼, 피해자를 비난하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살펴보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특히 ‘“가해자가 물론 나쁘다, 하지만…….”에서 제발 “하지만”부터는 빼세요.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라고 갈무리한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가 여기저기 전해졌으면 좋겠다. 이 외에도 타인의 고통을 소비거리로 바라보는 심리, 분노의 댓글을 날리는 일은 쉬운 정의감 충족이지만 사회 변화의 비용을 감내하는 것은 어렵고 큰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글 역시 우리가 깊게 숙고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심리에 대해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는 ‘공정한 세상 가설(the Just-World Hypothesis)’로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이 공정하게 돌아간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부당한 희생자를 볼 때 손상되어 버리고 우리는 불안에 빠진다. 이때 그 피해자가 뭔가 원인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합리화해서 공정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 65p

 

 

모성애는 신화라고 한다. 아기를 낳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정신이 솟구친다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아기를 낳고 돌보며 심신이 녹초가 되고 자기 시간이 따로 없게 된 한 지인은 자식을 무척 사랑하지만 때로는 자식이 자기를 파먹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다. 나도 그렇게 엄마를 파먹었으리라. 엄마는 끝없이 인내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어머니가 되어갔으리라. 그래서 어머니 노릇을 하는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모성애가 신화에 불과하기에 더더욱 위대하다. 본능을 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며 어머니가 되는 것이기에. / 81p

 

 

성폭력뿐만 아니라 철저히 객체화·타자화된 여성을 향해 ‘성적 일탈’을 하는 작품들에 대해 내가 그간 느껴왔던 독특한 역겨움의 본질을 이제 좀 더 잘 알겠다. 파격과 혁명으로 포장된 작품이 사실 여성 타자화의 진부한 틀은 못 개면서 힘의 위계를 이용해 퇴행적인 약자 성 착취를 하는 난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시비를 거는 꽉 막힌 사람이 될까 봐 비판을 삼가며 느껴야 했던 그 불편함과 혐오스러움을. / 101p

 

 

 

   3부에서는 ‘엉뚱하게’라는 제목과 달리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케빈에 대하여」,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 그리스 신화인 『메타모르포세이스(변신 이야기)』 등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감수성에 공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한편, 4부 ‘자유롭게’ 편에서는 ‘불편하게’ 편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명 엄친아로 대변되는 비교강박의 역사와 철학자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의 진짜 의미를 들여다보고, ‘의심하는 토마’를 통해 ‘반향실’이 판치는 현실을 일깨운다. 또한 “일본 벚꽃 원산지는 제주도니까 이건 우리 전통이야.”라고 주장하는 비틀린 민족주의의 자기기만과, “뭐든지 될 수 있다”라는 말에 담긴 피로사회의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이 지옥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은 타인이 있는 한 그 시선과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걸 의식해 완전히 주체적일 수 없게 되므로, 타인의 존재 자체가 지옥이다. 하지만 또한, 처음부터 무엇이 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난, 즉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어찌할까. 뻔하지만 균형으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 / 158p

 

 

“21세기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피로사회』 중에서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러다가 ‘할 수 있다’가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 186p

 

 

 

 

 

 

   이어 5부 ‘광대하게’ 편에서는 한때 ‘파란 바탕에 검정 줄무늬’냐 ‘흰 바탕에 금색 줄무늬’냐로 전세계 소셜미디어가 들썩인 사진을 통해 우리는 순간적으로 얼마나 주관과 편견이 많이 섞인 의견을 갖는 것인지 돌아보게 한다. 또 무작위적이고 불특정한 이미지에서 의미 있는 형상, 이를테면 사람 얼굴 같은 것을 찾으려 하는 심리 현상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통해 자신이 보고 싶은 것, 믿고 싶은 것을 가짜 ‘기적의 이미지’나 억지 인과관계의 음모론으로 자행되는 현상을 지적하기도 한다. 문득 하정우의 먹방을 통해 노골적인 음식 낭비를 찬양하는 먹방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거나 셀럽파이브 노래의 가사처럼 유명세와 미디어,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해 고찰해보기도 하고 말이다.

 

 

 

로자노헤머는 이 작품의 제목 「파레이돌리움」이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는 인간 심리 현상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파레이돌리아는 무작위적이고 불특정한 이미지에서 의미 있는 형상, 이를테면 사람 얼굴 같은 것을 찾으려 하는 심리 현상을 말한다. “구운 토스트 그을림에 그리스도 얼굴이 아타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화성 사진을 보니 고원에 인간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지형의 명암이 그렇게 보인 것으로 딴 앵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사실이 아니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로자노헤머는 이런 심리를 역이용해서 재미있고, 시적으로 아름다우며, 동시에 은근히 섬뜩하기도 한 작품을 만든 것이다. / 206p

 

 

가사와 육아 등 돌봄 노동은 ‘사랑의 노동’으로 아름답게 표현되면서도 정작 경제 시스템에서 그 실제적 중요성과 가치는 막연하게 다뤄지고 도리어 저평가된다. 그래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가사와 돌봄 노동이 가정 밖에서 공급될 때 가격 책정이 제대로 안 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일례로 자녀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기자 동료들도 어린이집 보육교사 급여가 너무 적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사들이 과연 의욕을 가지고 양질의 보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것이다. / 240p

 

 

 

   끝으로 6부 ‘행복하게’ 편에서는 진짜 행복은 어디에서 오고 행복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여기서는 학부 시절 은사님과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묻는다.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이내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말하며 “난 노력해서 그 모든 난관을 극복했는데, 왜 너는 그러지 못하느냐, 왜 세상 탓만 하느냐고 그 사람들은 묻지. 강철 같은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런 강철 같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의 성공에 과연 운이 전혀 없었을까?”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 끝에는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형편에서 자수성가했다고 해서 그게 다 온전히 자신이 이룬 거라고 생각해선 안 돼. 거기에도 운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리고 그 운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해.” 라고. 나만 노력하면 다 될 거라는 강박이 만연한 사회를 꼬집으면서, 내가 기회를 얻는 순간에 기회를 박탈당하고 얻지 못한 이들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에서 오는 균형, 바로 거기에서 비로소 모두의 행복이 찾아오리라는 그의 말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예술 에세이에도 불구하고 예술사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예술을 통해 세상을 읽는 법을 보여주는 매우 보기 드문 책이다.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기법 등을 일러주는 여느 책들과 달리 일상에 보다 가깝게 예술을 끌어들일 줄 아는 그녀의 화법 덕분에 오히려 예술을 읽는 시야가 넓어진 기분이다. 무엇보다 적당히 분노하고, 적당히 불편해면서 유쾌한 위트와 희망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벼운 듯 결코 가볍지 않은 이 정도의 무게감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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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2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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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위대한 발명인 금속활자의 전파에 관한 실체를 파헤치다!

직지에서 한글, 쿠텐베르크의 성경, 반도체로 이어진 위대한 여정을 아우르는 상상력의 힘!

 

 

 

   앞서 <직지> 1권에서 전형우 교수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던 기자 기연은 교수가 로마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때 쓴 논문의 이름이 <바티칸 수장고 공개의 제문제-계량서지학적 관점에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전 교수가 바티칸 교황청의 비밀수장고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카레나라는 이름에 도달하게 되고, 그러다 이와 관련된 교황청 수장고의 어떤 거대한 비밀을 알게 되면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추리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한때 전형우 교수와 같은 신학부에 다녔으며 현재 바티칸 수장고 관리신부로 있는 파블리오 인데르노로부터 카레나가 조선 세종 때 유럽으로 건너간 여성이었으며 그녀가 금속활자를 유럽에 가져갔고,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추기경인 쿠자누스가 그녀로부터 코리의 군주가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든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일까지 이르는 놀라운 정보를 얻게 된다.

 

 

 

   대체 카레나, 그녀는 누구인가. 기연은 이 이야기의 출발점인 전 교수의 살해사건은 관심 밖으로 두고, 이제 자신에게 허용된 모든 시간을 카레나와 쿠자누스 두 이름을 추적하는 데 바치면서 이들이 펼친 1400년대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복원하는 데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직지> 2권의 초점은 자연스레 카레나가 살았던, 즉 조선의 세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은수라는 여성과 마주하게 된다.

 

 

 

직지와 한글 그리고 쿠텐베르크의 성경에 이르기까지

 

 

   세종은 글자가 완성되면 바로 금속활자를 이용해 대대적으로 인쇄에 돌입하여 온 세상에 책이 넘쳐나게 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활자 주조를 맡은 양승락과 그의 여식인 은수는 편안하면서 세종의 정신을 담아 당당한 글자체를 만들어 그의 뜻을 보필하려 했다. 그런데 세종이 한글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명나라 사신이 이를 반역으로 몰아세우면서 양승락과 은수의 목숨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끝내 양승락은 자객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은수는 선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지만 원에 끌려가 온갖 위험과 고초를 겪게 되고, 운이 좋게도 베르나르 신부를 만나 바티칸에 이를 수 있었다. 워낙에 총명한 그녀인지라 로마의 감옥에서 필경사들의 실수나 고의에 의해 죽어서는 안 되는 이들이 죽고 살아서는 안 되는 이들이 사는 폐해를 발견해냈고, 이를 지적한 공로로 교황을 만나 아버지로부터 배운 금속활자의 제조를 시연해보일 기회를 얻었다.

 

 

 

   교황은 제 눈앞에서 본 이 어마어마한 기술에 당연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은수를 칭찬하며 필사업이 가장 성행하는 마인츠로 그녀를 보냈다. 여기에서도 은수는 조선에서 백성을 위해 글자를 퍼뜨리는 게 의미가 있다면 여기서도 글자를 퍼뜨리는 건 똑같이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순박한 청년 폴츠의 도움을 받아 금속활자를 재현해냈다. 하지만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교황이 ‘사람들이 쉽게 글자를 대하고 책을 읽는다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궤변의 지옥에 빠질 것’이라며 다시 한 번 더 그녀가 금속활자를 만들려고 한다면 바로 제거해 교회의 신성함과 사제의 권능을 지키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조선이 그러했던 것처럼.

 

 

 

글자체를 빼앗긴 건 억울했지만 이 사건은 은수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세상 어디에나 권력과 탐욕이 결탁한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고, 이 힘은 턱없는 억지를 약자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며, 약자는 이를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은수는 확실히 깨달았다. / 131p

 

 

 

 

 

  그렇게 이제 죽을 일만을 앞두고 있는 은수 앞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철학자이며 유럽 최고의 권력과 부를 가진 쿠자누스 대사가 나타났다. 그는 은수를 구하고 아비뇽의 고르드 수녀원에 맡기기로 하면서 그녀의 안전을 도모해주기까지 했다. 이에 은수는 쿠자누스를 비롯하여 자신을 양녀로 받아들이고 도피시켜준 유겸, 객주에서 불한당을 제지하던 이름 모를 노인과 손님들, 모두 자신이 힘들어지더라도 남을 위해 나선 거룩한 이들을 생각하며 할아버지가 준 목걸이에 새겨진 글귀를 되뇌었다.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세월은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는 뜻이었다. 그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 그녀가 전할 차례였다. 은수는 쿠자누스로부터 ‘코리에서 온 미인’이라는 뜻으로 카레나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금속활자로 하여금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쿠텐베르크라는 이에게 금속활자의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침잠의 방으로 들어가 아주 오랜 기간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철학자로서 그는 권력을 야만성과 피지배층의 고통에 고뇌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권력을 따라가기만 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에 고심했을 터였다. 그런 중에 백성을 위해 글자를 만든다는 세종대왕의 초파격은 그에게 정신사적 개벽으로 다가갔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의 어떤 현군도 한 적이 없었던 일이란 사실은 차치하고, 글자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자연 발생하는 줄로만 알았던 그로서는 세종대왕을 알고 난 뒤 존재론적 충격에 휩싸였을 법한 일이었다. / 13p

 

 

“상감께서 성공하셔서 조선의 백성들이 금속활자로 찍은 새 글자를 보고 있는 걸 그리며 잠들곤 했어요. 이제 당신이 이 땅에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급해주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세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이 물을 마시듯 책을 볼 거예요. 그건 상감의 꿈이고, 제 아버지의 꿈이고, 저의 꿈이에요. 지금 기도하신 대로 꼭 당신이 이루어주셔야 해요.” / 182p

 

 

 

 

 

 

   훗날 기연은 엘트빌레 수도원 측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필사방에서 자연스럽게 카레나를 떠올린다. 거의 모든 수도원에서 노동의 일환으로 필사를 하던 시절, 혼잣몸으로 이 낯선 세계에 들어와 금속활자를 퍼뜨렸던 카레나. 세낭크 수도원 앞 라벤더 꽃밭에서 한평생 참아온 한마디를 터뜨리고 산화한 그녀는 기연의 마음속 싶은 곳에 또 하나의 자아로 자리 잡았다. 이제 기연은 전 교수의 죽음에서 시작되어 직지로 이어지고 유럽에 금속활자의 기술을 전수한 카레나라는 조선 여성에게까지 가 닿은 이 사건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사건의 시작이자 온갖 비밀로 점철된 엘트빌레 수도원의 중심부로 들어간다.

 

 

 

“지금 나는 성경 180부를 완성했고 이걸 팔면 돈을 다 갚고도 한참 남습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성경 180부와 인쇄기를 넘겨주라는 판결을 했습니다. 재판소가 돈 많은 푸스트와 결탁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와 결탁한 권력의 희생양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지만, 우리의 후손은 다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법전을 인쇄할 것입니다. 역사를 인쇄하고 철학을 인쇄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힘없고 가난해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저들은 내게서 기계와 인쇄물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동행이라는 인쇄의 정신은 빼앗지 못합니다.” / 222p

 

 

“언어학자들은 앞으로 지구상에 여섯 개의 언어만 남을 거라 예측합니다. 바로 영어와 중국어, 아랍어와 스페인어, 불어입니다. 이 언어들은 쓰는 사람이 워낙 많아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한글인데, 쓰는 사람은 적지만 한글이 꼽히는 건 오로지 글의 우수함 때문입니다. 이처럼 직지와 한글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기 이전에 인간 지능의 금자탑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직지와 한글은 그 존재 자체가 소수의 독점으로부터 지식을 해방시켜 온 인류가 손잡고 동행하자는 지식혁명입니다.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타심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위대한 메시지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 262p

 

 

 

   이렇듯 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직지’를 환기시키고 나아가 한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반도체로 사슬처럼 이어지는 이 어마어마한 전개 스케일(너무 광대해서 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을 듯하지만)은 그냥 압도적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현재에서 바라보는 직지와 과거에서 시작된 직지를 한 쾌에 관통해내는 것은 물론 유럽으로 시선을 옮겨 직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구축해내는 완성도 역시 탁월하다. 직지냐 쿠텐베르크냐의 논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전하는 가치와 정신을 오롯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메시지 또한 묵직하다. 늘 그러했듯 김진명의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 이르면 가슴이 벅차면서도 한편으로는 풀리지 않는 숙제를 떠안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이것이 그의 소설을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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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1 - 아모르 마네트
김진명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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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살인에서 시작된 ‘직지’ 미스터리!

역사 미스터리의 대가 김진명이 세상에 던지는 또 하나의 놀라운 메시지!

 

 

마음을 바로 보면 그곳에 길이 있다

 

 

   직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이른바 ‘직지심체요절’이라 불리며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고려 말에 국사를 지냈던 백운이라는 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으로,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사서로 있던 박병선 박사가 발견해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 문화유산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렇듯 우리 조상이 인류 역사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사실은 민족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훌륭한 산물임에 틀림없다.

 

 

 

   일단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며, 또 그렇게 배워왔다. 그런데 그 이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을 완성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100대 사건’의 1위에 손꼽힐 만큼 인류의 역사에 공헌한 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되었다. 전 미국 대통령인 앨 고어 역시 “한국은 금속활자 발명과 디지털 기술로 인류에 큰 선물을 줬다”고 하면서도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다.”고 말했다.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을 인정은 하되 인류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최초’라는 명예에 자긍심을 느끼며 우리의 금속활자를 자랑스럽게 여겨왔지만, 오로지 ‘최초’라는 프레임에 갇혀있기만 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문제다. 또 우리의 금속활자가 정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준 것인지, 혹은 우연의 산물인지에 관한 논의가 뜨겁게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중들은 이에 대해 무감각하기만 하니, 학술적인 관점과 교과서적인 프레임을 넘어 대중적인 관심 역시 필요해 보인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역사 미스터리의 대가인 김진명 작가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금속활자가 우리의 직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이란 화두를 내걸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제목 역시 에두르는 법 없이 <직지>다. <황태자비 납치사건>, <천년의 금서>, <싸드>, <고구려> 등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적 문제 앞에서도 특유의 상상력과 뚝심을 발휘해 역사를 되돌아보고 민족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앞장 서왔던 그인 만큼 이번 작품 역시 예사롭지 않다.

 

 

 

피살된 교수가 해석해낸 중세 교황의 편지에 담긴 진실은?

 

 

   서울의 한 주택가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시신의 것으로 보이는 귀가 바닥에 핏덩어리처럼 잘려 나와 있고, 마치 드라큘라에게 물린 것처럼 목에는 송곳니 자국이 선명하다. 결정적인 사인으로 그의 등을 관통한 것이 있었으니 믿기지 않게도 중세시대 무기인 철창이다. 라틴어를 가르쳤던 전직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참혹한 모습이다. 현장 취재를 나선 기연과 사건 반장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완벽하게 현장을 처리한 프로의 솜씨에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다.

 

 

 

상징살인이란 사람을 죽일 때 살인현장에 장미꽃잎을 뿌리거나 물고기 표시를 하는 등의 상징적 행위로 행위자의 목적과 의지를 분명히 알리는 걸 말한다. 징벌과 경고가 본질이지만, 한편으로는 엘리트 살인자들이 살인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죄의식을 희석하려는 목적도 있다.

이 상징살인은 역사적으로 개인보다는 주로 뚜렷한 목적을 가진 비밀단체에 의해 자행되며 수백 년 이상 베일에 싸인 채 계승되어 오기도 하는데, 각종 종교의 암살단에 의해 행해지는 살인이 그중 하나로 꼽힌다. / 75p

 

 

 

   평소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는 전 교수 부인의 말에 기연은 교수의 차 내비게이션을 검색하게 되었고, 그러다 그가 청주에 있는 서원대학교에 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원대학교의 김정진 교수와 전 교수가 왕래가 있었다는 정보를 얻게 된 그녀는 그에게 직접 찾아가 전 교수의 죽음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낸다. 김정진 교수의 말에 의하면 서원대학교와 청주시는 함께 직지 알리기 운동을 같이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간 직지가 최초라는 것만 인정받지 세계사에서는 이렇다 할 인정을 받지 못하자 직지가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의 뿌리라는 증거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바티칸 비밀수장고에서 이에 해당하는 의문의 편지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편지란 고려로 추정되는 ‘코럼’이라는 나라의 왕에게 보내는 교황의 편지로, 이에 대한 해석을 라틴어에 능통한 전 교수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직지 연구자들의 기대와 달리 전 교수는 이 편지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것이란 점을 부정하는 해석을 내놓았고, 이에 연구자들은 그에게 분노했다고 한다.

 

 

 

“의외로 직지에 대한 세계의 반응은 냉담해요. 그래, 인정한다, 직지가 가장 오래됐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냐.”

“가장 오래됐다는 사실만 인정받지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지식혁명의 주인공으로 대접을 못 받는다는 거군요.”

“그래요. 직지를 어떻게 감히 구텐베르크의 위대한 인쇄혁명에 견주려는 거냐? 직지가 가장 오래된 건 맞지만 조야하기 짝이 없고 어디 절간에 처박혀 있었을 뿐 도대체 한 게 뭐냐? 직지가 정말 쓸모 있는 거라면 당신네 한국인들이 위대한 지식혁명을 이루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당신네 한국인들이 책을 인쇄하고 신문을 제작하는 모든 기술조차 직지에서 뽑은 게 아니지 않느냐? 그게 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수입한 거 아니냐 하고 묻는 거예요.” / 50p

 

“현대인의 가장 큰 오류는 과거를 함부로 무시한다는 사실이에요. 세상에는 현대의 기술이나 지식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의 유산이 얼마든지 있어요.” / 82p

 

 

“책은 최고의 문화국만이 수출하는 거예요. 팔만대장경만 봐도 고려가 엄청난 문화국임을 알 수 있지만, 당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던 잠견지를 만들고 책을 수출하던 나라가 바로 고려예요. 조선에 뭉개졌지만 고려는 정신도 문화도 대단했던 나라예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그걸 얘기하고 있잖아요.”

“갑자기 안타까워지네요. 고려라는 우리의 나라가.”

“그러니 고려 최고의 유산인 직지를 잘 살려야 해요.” / 85p

 

 

 

 

 

 

   기연은 전 교수가 고의로 무엇을 왜곡하거나 진실과 동떨어진 해석을 내놓은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당당히 자신의 학문적 소견을 밝힌 그를 살해한 자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 시작한다. 그러다 <살인의 역사>를 쓴 저자 이안 펨블턴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용의자가 외국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전 교수의 서재를 뒤지다 남프랑스 여행책과 스트라스부르대학의 피셔 교수, 아비뇽의 카레나라는 의문의 두 이름을 발견하고야 만다. 이는 곧, 전 교수가 프랑스로 날아가려 했다는 건 비밀의 단서가 거기 있다는 것이고, 이 두 사람은 비밀에 다가서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결국 기연은 김정진 교수와 함께 비밀의 단서를 파헤치기 위해 프랑스로 날아가고, 그곳에서 피셔 교수를 만나거나 세낭크 수도원을 찾아가는 등 의문의 여인인 카레나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과 신변의 위협까지 마주하게 된다.

 

 

 

“본래 귀를 자르는 행위는 1542년 교황 파울루스 3세가 로마에 종교재판소를 만든 이후에 시작되었소. 말이 재판이지 사실은 무자비한 고문과 극형이 수시로 자행되었던 그 종교재판소에서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의 목소리 대신 사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이유를 붙여 귀를 자르는 형벌을 가했소.”/ 231p

 

 

 

   이렇게 총 두 권으로 구성된 <직지>의 1권은 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직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기자가 점점 비밀의 단서와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쫓아간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금속활자로 대표되는 직지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간의 대립 구도가 눈에 띄는데, 직지의 의미와 가치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기연이 느낀 것들을 학자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그녀는 마치 월드컵 축구처럼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독일과 한국 양국이 무엇을 얘기해도 학문적 진전이 없음을 지적하며, 과학적으로 비교한 결과 직지에 나타난 활자의 자국과 구텐베르크 성경에 나타난 활자의 자국이 일치하는 바,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경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되 구텐베르크의 업적 또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며 합리적이고 진전 있는 접근을 제시한다. 즉, 독일은 직지의 씨앗을 인정하고 한국은 독일의 열매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해 직지에 대한 새로운 의미와 미래를 제안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구텐베르크가 했든 그 누가 했든, 1455년에 독일의 마인츠에서는 180부의 성경이 금속활자로 찍혀 나왔습니다. 1,300페이지에 가까워 그 당시까지 조선에서 인쇄한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데다 색깔과 무늬가 다양하고 아름다워 마치 예술품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기계로 찍혀 나왔고 인쇄용 유성잉크도 개발되었습니다. 1500년 무렵에는 유럽의 250개 도시에 1,500곳 가량의 인쇄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조선에는 단 하나의 인쇄소가 있었고, 그것마저 나라에서 관리했으며, 한 번에 수십 권, 많아야 200권씩 1년에 몇 번 찍는게 다였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의 인쇄가 유치원생이라면 독일의 인쇄는 대학원생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독일은 직지의 씨앗을 인정하고 한국은 독일의 열매를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 207p

 

 

 

 

 

  이제 기연은 전 교수의 사건이 범인을 잡는 것보다 왜 그런 범행이 일어났는가를 규명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2권에서는 향방이 달라질 것을 예고하며 마무리된다. 과연 전 교수를 죽인 자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 것일까. 직지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까닭에 얼른 갈무리하고 2권으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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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은 위대한 문학작품에 얽힌 탄생비화!

고전 작품을 읽는 재미만큼이나 흥미로운 영감의 순간들!

 

 

 

   모든 예술 작품은 탄생 그 이전에 번뜩이는 어떤 순간과 반드시 마주하게 된다.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을 가리키는 말로, 우리는 이를 ‘영감’이라 일컫는다. 단언컨대 수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에게 찾아올 이 한 순간의 강렬한 영감에 도취되기를 열망하며 그 원천이 되는 소재들을 찾아 헤맨다. 우리 시대 이전의 예술가, 즉 위대한 문학 작품을 탄생시킨 작가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단 하나의 구체적인 아이디어, 혹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치열한 주제의식을 얻기 위해 그들 또한 문학적 영감이 스치는 찰나와 상상 속의 무한한 가능성을 샅샅이 뒤져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의 저자 실리어 블루 존슨은 어느 추운 겨울날, 《댈러웨이 부인》을 여러 번 완독한 후 이 이야기의 첫 줄이 탄생하기 이전의 일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이 우아한 사교계 명사를 창조하기 위해 밟았던 절차들을 되짚어 따라가 보았는데, 현실세계에도 ‘댈러웨이 부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설 속의 댈러웨이 부인처럼 복잡 미묘한 인물이 실존했다니. 덕분에 저자는 평소 좋아하는 작품들의 탄생배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위대한 작가들로 하여금 펜을 들고 시대를 초월하여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쓰게 만든 그들의 반짝이는 영감과 그 근원을 캐내기 시작했다. 출발은 이렇듯 사소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위대한 작품의 탄생비화와 영감을 발견해낸 순간과의 조우는 작품 속 이야기 못지않게 우리를 빠져들게 한다. 도로 위를 달리던 가운데 떠오른 생생한 문장 하나가 가던 길을 되돌리게 하고,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즉석에서 지어 들려준 이야기가 위대한 작품이 되며, 헤밍웨이 소설의 《노인과 바다》 속 노인을 자처하는 가짜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해프닝 등 한 작품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하기까지

 

 

   책은 작가들에게 영감이 번쩍하고 스치는 마법 같은 순간을 비롯하여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가 된 순간까지 총 50편의 작품을 따라가본다. 1장인 “번쩍 스치는 황홀한 순간” 편에서는 톨스토이가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불쑥 스쳐지나간 ‘맨살이 드러난 여인의 팔꿈치’ 이미지로 《안나 카레리나》를 탄생시킨 일화와 가족여행을 갔다가 무료함에 그린 지도 그림 한 장이 《보물섬》이란 모험 소설을 탄생시킨 사연, 학생들의 시험지를 채점하다 《호빗》을 탄생시킨 톨킨, 한 신문 기사에 난 여행사 광고 문구에서 착안하여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완성시킨 쥘 베른의 이야기 등이 실려 있다.

 

 

 

   하나의 개념, 단순한 환영, 한 줄의 문장 등 환하고 커다란 빛이 시커먼 어둠을 뚫고 번쩍 비치는 듯했던 이 순간들은 형태야 어떻든 이 위대한 작가들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한 번의 반짝임이 활활 타오르는 창작욕으로 이어져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걸 보면 때로는 영감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캐치-22》의 작가 조지프 헬러 역시 “내가 일부러 짜내는 게 아니다. 하늘이 정한 몽상의 길을 따라 저절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고 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들 스스로 이미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으며, 단순한 이야깃거리 하나를 두고도 어떻게 비틀고 매만져야 흥미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경험이 나에게 귀중한 교훈을 안겨주었다. 특히 민주국가의 진보한 국민들조차 전체주의의 선전활동에 너무나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오웰이 소련과 사회주의에 관한 환상을 단호히 내팽개치기로 마음먹었을 무렵, 채찍질하며 말을 모는 소년의 모습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간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하던 오웰의 의도를 정확히 담을 수 있는 비유적 소재를 비로소 찾아낸 것이다. / 조지 오웰, 《동물농장》 중에서 53p

 

 

 

 

 

   2장인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편에서는 자유로운 말하기에 매력을 느끼고, 거기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은 작가들이 등장한다. 휴가지에서 ‘갈바니즘’을 주제로 한 어떤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 광기에 사로잡힌 의사와 그가 생명을 부여한 괴물에 관한 공포소설을 완성해낸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창 말하는 가운데 엉뚱하게도 오즈라는 세계에 닿은 프랭크 바움의 《오즈의 마법사》,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 만들기 놀이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마찬가지로 아들의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곰돌이 푸우가 탄생하게 된 A. A. 밀른의 《곰돌이 푸우는 아무도 못 말려》가 바로 그것이다. 문득, 케네스 그레이엄과 A. A. 밀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이들이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꾼은 바로 부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아이의 머리맡에서 들려주는 따뜻한 이야기 하나, 꿈을 키우게 하는 이야기 하나가 그 어떤 동화 못지않은 상상의 세계를 펼쳐줄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도 그런 부모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잠깐, 이거 정말로 지금 막 지어낸 이야기 맞아?”

캐럴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응. 얘기하면서도 계속 지어내는 중이야.”

그로부터 25년 후, 캐럴은 자신의 이야기 중 상당수가 “햇살이 눈부신 황금빛 오후를 제 나름대로 화려하게 장식하며 살다가 덧없이 죽는 여름철의 꼬마벌레들 같았다.”고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는 작은 친구들 중 하나가 그날의 이야기를 글로 쓰면 좋겠다고 청했다.”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109p

 

 

그레이엄은 미국 출판사인 스크리브너와도 출판계약을 맺고 싶어 했지만, 스크리브너는 이 원고에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레이엄에겐 스크리브너가 절대 무시할 수없는 열혈 독자가 있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그의 전작을 읽고 열렬한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떠올린 그레이엄은 잽싸게 원고를 복사하여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레이엄의 출판 에이전트인 커티스 브라운의 회고에 따르면, 이 원고를 읽은 루즈벨트는 “굉장히 아름답고 훌륭한 소설이므로 스크리브너가 ‘반드시’ 출판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스크리브너는 기존의 결정을 뒤엎고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책으로 만들어냈다. / 케네스 그레이엄,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중에서 125p

 

 

 

   3장인 “현실 속, 그와 그녀의 이야기” 편에서는 실존하는 현실의 인물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소설 속 세계로 유인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유년시절의 친구가 소설 속 반항아 ‘허클베리 핀’으로 되살아난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자신이 열광했던 교수님을 소설 작품에 옮긴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일찍 여읜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키워주고 상류층 사교계의 일원이 될 수 있게 해 준 키티를 모델로 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의 작품이 그러하다.

 

 

 

   여기서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서 남겨보고자 하는데, 피츠제럴드는 일찌감치 소설의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로 정해 놓고서도 결코 그 제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골칫덩어리 주인공 이름을 굳이 제목에 올리기는 싫었을 것이다. <거지와 백만장자 사이에서>,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 <웨스트 에그로 가는 길>,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인생역전을 이룬 남자의 사랑> 등 수많은 제목안이 있었지만, 편집자인 퍼킨스는 한사코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만을 고집했다고 한다. 퍼킨스의 고집대로 책이 출간되기 직전, 피츠제럴드가 급하게 전보를 쳤다. <붉고 희고 푸른 깃발 아래>라는 제목에 꽂혔으니 당장 진행을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된 제목을 바꿀 순 없는 노릇이었다. 책은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 그래도 출간되었고, 피츠제럴드는 ‘제목이 그저 그래서, 솔직히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에 가깝기 때문에’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두고 왜 ‘위대한’이란 표현을 썼을까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저마다 다른데,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거라던 작가의 우려와 달리 어찌 보면 제목 때문에 작품이 더 화제가 된 셈이기도 하니 억울할 것은 없지 않을까 싶다.

 

 

 

배리는 꽤 어릴 적부터 불로불사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여섯 살이던 해에 형 데이비스가 스케이트를 타다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배리의 어머니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어린 배리가 형의 옷을 입고 형을 흉내 내면서까지 어머니를 위로했지만, 그는 결코 데이비드가 될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의 형은 가족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완벽한 아이의 모습으로 남았던 것 같다. 이렇게 비극적인 사연을 간직한 채 어른이 된 배리는 어릴 적에 잃어버린 형을 글로나마 되살리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피터팬이 작가의 형처럼 영원히 유년기에 갇혀버렸는지도. / J. M. 배리, 《피터팬》 중에서 181p

 

 

 

 

 

  이 외에도 4장 “어둠 속 저편, 영감이 떠오르다” 편에서는 누추한 감옥이나 어둡고 위험한 세계, 비열한 거리에서 무한한 창조적 영감이 탄생하는 순간을 만나보고, 5장 “영감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 편에서는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아이디어를 찾아 나선 작가들을 따라가본다. 끝으로 6장 “내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다” 편에서는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작가들과 그 현장에서도 번뜩이는 문학적 영감을 포착한 순간들을 만나본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을 법한 어둡고 위험한 세계에 과감히 몸을 던지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생생한 경험을 쫓으려한 작가들의 열망과 노력이 있었기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오하라의 아내 메리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갑자기 발칵 성을 내며 끼어들었다. 그녀는 두 남자가 전쟁 중에 겪은 일들을 일종의 화려한 무용담으로 기억하는 것에 진저리를 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무결한 영웅들의 싸움이 아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나간 이들은 고작 열 몇 살, 끽해야 스무 살 초반의 어린애들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말이었다. 보네거트는 “메리의 발언으로 나는 주관적인 기억의 속박에서 벗어났고, 이렇게 얻은 새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참전 당시의 진짜 우리들, 즉 열일곱 살, 열 여덟 살, 열아홉, 스물, 스물한 살 애송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밝혔다. /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 중에서 252p

 

 

“본드, 제임스 본드.”라는 대사는 이제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신비로운 매력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이 이름이 탄생한 배경은 의외로 좀 시시한 면이 있다. 플레밍은 진짜 첩보원에게 번지르르한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지노 로얄》을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책장을 바라보았다. 책등에 적힌 저자명을 쭉 훑던 그의 시선이 《서인도 제도의 새들》에서 멎었다. 책의 저자는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짧고 단순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이름-플레밍이 찾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 이언 플레밍, 《카지노 로얄》 중에서 355p 

 

 

 

 

 

   편식 없이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간 고전 문학은 생각보다 많이 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여실히 느꼈다. 그래서 작품의 탄생비화를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몰랐던 고전 문학을 상당수 알게 되었다는 점이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를 테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 대실 해밋의 《붉은 수확》 등은 탄생 비화 덕에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미 읽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책 덕분에 또 다른 관점에서 다시 읽는 게 기대되는 것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 작품에 얽힌 갖가지 사연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수록 작품을 미리 읽어보지 않았어도 재미있게 잘 읽혔다. 물론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보다는 탄생 배경이나 출간 전후에 있었던 특별한 일화에 주목하다보니 가볍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을 읽기 전에 한 번쯤 이 책을 읽어본다면 등장인물이나 배경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에 고전 문학과 친해지는 책읽기의 좋은 방법으로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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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작가 김애란의 어느 한 시절과 사람이 있던 자리를 더듬어본 이야기들!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났을 때 발화하는 순간들에 대한 단상!

 

 

 

   나는 무슨 이유로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일까.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넣어가며 드문드문 소설 쓰는 재미에 빠져있던 나는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것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쓰고 싶은 소재가 하나 떠올라 그걸 내내 붙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시험을 망쳤고(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길로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해 나름 유명세를 얻었다. 날이면 날마다 독자들이 늘어가는 재미에 비례해 소설을 쓰는 재미도 늘어났고, 그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문예창작학과에 대뜸 가보겠다고 호기롭게 지원까지 했다. 하지만 높아진 나의 어깨는 학과 선배들이 가득한 동아리 학회 첫 시간부터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이건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문학이 대체 뭔데. 흙빛이 된 얼굴로 내 언젠가 저들보다 잘 써서 먼저 등단하겠노라 다짐하며 그때부터 이혜영, 김연수, 천운영, 박민규, 편혜영, 김애란 같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정말 말도 안 되게 끊임없이 읽어나갔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좌절하게 한 것은 이 평이한 삶에서는 문학이란 게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고, 내게는 그들과 나란히 설 만한 재주가 없다는 뼈아픈 자책뿐이었다. 언젠가 김애란 작가가 학과에서 주최하는 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왔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해 삼킨 말은 “나도 당신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였다. 또 “어쩌면 이름도 그렇게 문학스러워요?” 라고 묻고 싶었다. 대체 당신의 눈은 나의 눈과 어디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예민한 구석구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이냐고,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문장을, 이야기를 그렇게 쓸 수 있는 건가요, 속으로만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유치하게 보일까봐. 결국 이러한 시도들에서 머뭇거렸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문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건 아닌지. 그냥, 문득, 김애란이란 이름 석 자만 생각하면 그 날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내가 작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처럼 자꾸 생각이 난다.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 사이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 출간되었다.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로 그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가족 혹은 청춘에 관한 보편적인 주제를 유려하게 다루어왔던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호흡을 늦추고, 자신의 내밀한 어느 순간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것은 나의 기원을 발견하는 순수한 자기고백이자 말 주변에서 더듬거리는 문학가로서의 사정이며 발화하는 어떤 순간들에 대한 단상이다.

 

 

 

 

 

 

   책은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나를 부른 이름에서는 작가의 유년 시절, 학창 시절, 한 가족의 딸로 일상 속에서 겪은 소소한 추억을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맛나당’이라는 이름의 가게에서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에 대한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잔뜩 난 열다섯 살의 얼굴과 듀스를 좋아했던 한 남자애를 떠올리게 하는 <여름 안에서>란 노래를 생각하며, 무더위에 너무 지친 나머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던 집에서는 그곳에 머물다 간 다른 이들의 흔적을 상상해본다. 고대하던 대산문학상 시상식 날, 새 신발을 신고 부푼 가슴으로 시상식장으로 가다가 결국 시상대에 오를 때엔 다리를 절지 않으려 애써야 했던 일이나,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동네 어른들이 마련해준 현수막에는 38회여야 할 것이 33회로 되어 있었던 약간의 촌극까지.

 

 

 

   이 중 「여름의 풍속」이란 산문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8년 전 여름, 고려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만난 『언어학사』란 책에 얽힌 이야기다. 처음부터 그 책을 사려 했던 건 아닌데, 그것은 학교 휴게실에 있는 낡은 고동색 소파에 앉았다가 우연히 같은 과 동기이자 한참 연장자인 B와 책방 순례를 다니기로 약속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B는 고려대 앞 책방에서 적어온 목록을 들고 능숙하게 책장 사이를 돌며 보물처럼 찾아낸 책을 앞에 내놓았다. 작가는 책방의 구조나 책이 배열된 원리에 어두워 좀 소극적으로 굴었던 탓에 B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아니라 『언어학사』를 읽으라고 건네줬음에도 이렇다 할 반론을 펴지 못했다.

 

 

 

   덕분에 내내 묵혀두었던 책은 그로부터 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빛을 보게 되었고, 이때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책의 활자가 아니라 20학번의 황진구란 남자와 92학번의 박선미라는 여자에게로 이어져온 서사였다. 책 속에 곱게 포개져 있던 그들의 수강신청서로 미루어 보건데 분명 연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혼자 드라마틱한 상상에 취해서였을까, 혹은 치기 탓이었을까. 문득 작가는 수강신청서 하단에 적힌 집 번호 중 남자의 집 번호로 전화를 거는 무모함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그는 진작 하숙집을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여자의 번호에라도 전화를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옛날옛날 안암동에 박선미와 황진구가 『언어학사』를 배우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란 사실을 기억하며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듯 하나의 소파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모든 게 난데없고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 타인과 연결되고 연결되어 또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이야기까지 나아가는 어떤 거대한 순환을 상상하게 한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다시 오게 되고,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결혼해서 친정을 나왔을 때 전봇대 앞에 내놓았던 내 전공책은 누가 가져갔을까. 거기 적힌 내 이름 석 자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 안도할 수 있는 범박한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운 건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잘도 기어들어 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야간 비행」 중에서 29p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들국화 노래를 듣자 그 생각이 났다. 어쩌면 1년 내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고 있을 어떤 이들이. 기념 세일, 감가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 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 / 「한여름 밤의 라디오」 중에서 42p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 「당신과 조우」 중에서 51p  

 

 

 

   2부인 너와 부른 이름들에서는 동료 문인들을 향한 깊고 다정한 마음을 읊조리듯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는 작가 김연수의 문장을 통해 삶을 골몰하고, 작가 편혜영에게서 사귐이란 조촐하고 편안해 막역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작품도 좋고 사람도 좋은 작가 윤성희의 덜렁거림과 엉뚱함에 문학하는 자의 허울도 슬쩍 벗겨본다. 한편, 3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작가로서 ‘당신을 왜 글을 쓰는가’란 질문과 마주했던 순간들 혹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세월호 같은 사회 문제를 통해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중 「빛과 빚」편에서 한 한국 작가가 독일의 출판기념회에서 했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근대와 분열, 분단을 다룬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독일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결국 어느 편이란 말인가?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작가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나는 죽은 사람 편입니다.’라고. 어쩌면 문학이란 죽은 사람 편에 설 수 있는 것, 잊거나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군가 오래 쓴 문장을 알아보고 그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둘레에 자기 이야기를 입혀 설명한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1p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6p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269p

 

 

 

 

 

 

   이 외에 글을 쓰는 소설가답게 고전 작품이나 시를 비롯해 문학에 대한 사유나 우리말 어휘에 대해 재치 있고 감각적으로 써내려간 산문들도 돋보인다. 이를 테면 누군가는 문장론에서 ‘부사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썼을 만큼 작가들이 유독 꺼려하는 부사를 ‘부사는 세계를 우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흥미롭고 맛깔나게 해준다. 그러니 부사가 있을 곳은 지옥이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다급하고 복잡한 세상, 유려한 표현 대신 불쑥 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속세, 그 세속에서 쓰이는 소설 안일 것’이라 변호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말의 약점을 떠올리며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 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고 표현하거나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며 문학의 의미와 진정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는 점도 퍽 인상적이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2p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4p

 

 

 

 

 

 

   잊기 ‘쉬운’ 이름이라면 몰라도 잊기 ‘좋은’ 이름이라 제목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녀는 계속해서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고 얘기해 온 것 같다.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의 책에서 낯선 두 이름을 건져 올린 것처럼, 이전 세입자가 붙여놓았을 천장의 야광별 무더기와 그 아래에서 꼼짝 않고 누워서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입자들을 떠올렸던 것처럼,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을 해나가려는 게 아닐까. 덕분에 이런 작가가, 이런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 참 좋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당신이란 사람은, 이름마저도 문학스러운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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