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김애란의 어느 한 시절과 사람이 있던 자리를
더듬어본 이야기들!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났을 때
발화하는 순간들에 대한 단상!
나는 무슨 이유로 글을 쓰겠다고 한 것일까.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넣어가며 드문드문 소설 쓰는 재미에 빠져있던 나는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것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쓰고 싶은 소재가 하나 떠올라 그걸 내내 붙들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시험을 망쳤고(꼭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길로 인터넷에 소설을 올리기 시작해 나름 유명세를 얻었다. 날이면 날마다 독자들이 늘어가는 재미에 비례해 소설을 쓰는 재미도
늘어났고, 그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문예창작학과에 대뜸 가보겠다고 호기롭게 지원까지 했다. 하지만 높아진 나의 어깨는 학과 선배들이 가득한
동아리 학회 첫 시간부터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이건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고.
문학이 대체 뭔데. 흙빛이 된 얼굴로 내 언젠가 저들보다 잘 써서 먼저 등단하겠노라 다짐하며 그때부터 이혜영, 김연수, 천운영,
박민규, 편혜영, 김애란 같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정말 말도 안 되게 끊임없이 읽어나갔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좌절하게 한 것은 이 평이한 삶에서는 문학이란 게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고, 내게는 그들과 나란히 설 만한 재주가 없다는 뼈아픈 자책뿐이었다.
언젠가 김애란 작가가 학과에서 주최하는 문학포럼에 초대되어 왔던 날,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차마 하지
못해 삼킨 말은 “나도 당신 같은 글을 쓰고 싶어요.” 였다. 또 “어쩌면 이름도 그렇게 문학스러워요?” 라고 묻고 싶었다. 대체 당신의 눈은
나의 눈과 어디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예민한 구석구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것이냐고,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상상하면 문장을, 이야기를 그렇게 쓸
수 있는 건가요, 속으로만 집요하게 묻고 또 물었다. 유치하게 보일까봐. 결국 이러한 시도들에서 머뭇거렸던 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는 문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건 아닌지. 그냥, 문득, 김애란이란 이름 석 자만 생각하면 그 날 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내가 작가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처럼 자꾸 생각이 난다.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 사이에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김애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 출간되었다. 산문집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로 그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가족 혹은 청춘에 관한 보편적인 주제를 유려하게 다루어왔던 작가는 이번 산문집을
통해 호흡을 늦추고, 자신의 내밀한 어느 순간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것은 나의 기원을 발견하는 순수한 자기고백이자 말 주변에서
더듬거리는 문학가로서의 사정이며 발화하는 어떤 순간들에 대한 단상이다.

책은 ‘나를 부른 이름’, ‘너와 부른 이름’, ‘우릴 부른 이름들’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나를 부른 이름에서는 작가의 유년
시절, 학창 시절, 한 가족의 딸로 일상 속에서 겪은 소소한 추억을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맛나당’이라는 이름의 가게에서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에 대한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던 어머니를 추억하고,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잔뜩 난
열다섯 살의 얼굴과 듀스를 좋아했던 한 남자애를 떠올리게 하는 <여름 안에서>란 노래를 생각하며, 무더위에 너무 지친 나머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들러 얼렁뚱땅 계약을 했던 집에서는 그곳에 머물다 간 다른 이들의 흔적을 상상해본다. 고대하던 대산문학상 시상식 날, 새 신발을
신고 부푼 가슴으로 시상식장으로 가다가 결국 시상대에 오를 때엔 다리를 절지 않으려 애써야 했던 일이나,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동네
어른들이 마련해준 현수막에는 38회여야 할 것이 33회로 되어 있었던 약간의 촌극까지.
이 중 「여름의 풍속」이란 산문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8년 전 여름, 고려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 만난 『언어학사』란 책에 얽힌
이야기다. 처음부터 그 책을 사려 했던 건 아닌데, 그것은 학교 휴게실에 있는 낡은 고동색 소파에 앉았다가 우연히 같은 과 동기이자 한참
연장자인 B와 책방 순례를 다니기로 약속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B는 고려대 앞 책방에서 적어온 목록을 들고 능숙하게 책장 사이를 돌며 보물처럼
찾아낸 책을 앞에 내놓았다. 작가는 책방의 구조나 책이 배열된 원리에 어두워 좀 소극적으로 굴었던 탓에 B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가
아니라 『언어학사』를 읽으라고 건네줬음에도 이렇다 할 반론을 펴지 못했다.
덕분에 내내 묵혀두었던 책은 그로부터 3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빛을 보게 되었고, 이때 작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책의 활자가 아니라
20학번의 황진구란 남자와 92학번의 박선미라는 여자에게로 이어져온 서사였다. 책 속에 곱게 포개져 있던 그들의 수강신청서로 미루어 보건데 분명
연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혼자 드라마틱한 상상에 취해서였을까, 혹은 치기 탓이었을까. 문득 작가는 수강신청서 하단에 적힌 집 번호 중 남자의 집
번호로 전화를 거는 무모함까지 서슴지 않았는데, 아쉽게도 그는 진작 하숙집을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여자의 번호에라도 전화를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한다. ‘옛날옛날 안암동에 박선미와 황진구가 『언어학사』를 배우고 사랑하며 살았습니다’란 사실을 기억하며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기로 한다. 이렇듯 하나의 소파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는 모든 게 난데없고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 일이 타인과
연결되고 연결되어 또 언젠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이야기까지 나아가는 어떤 거대한 순환을 상상하게 한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다시 오게
되고, 만날 줄 몰랐고 만났을 리 없는 것들이 만나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면 결혼해서 친정을 나왔을 때 전봇대 앞에 내놓았던 내 전공책은 누가
가져갔을까. 거기 적힌 내 이름 석 자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것이 좀 불편했다. 내가 여름을 피해 들어온 곳이, 비지땀을 흘려가며 힘들게 도착한 곳이 결국
비슷한 삶이 떠나오고 떠나가는, 붙인 별을 보고서야 ‘아, 밤이구나’ 안도할 수 있는 범박한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말 당황스러운 건
그 방의 크기와 높이를 떠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잘도 기어들어 오는 그 가짜 빛들과 그 별들의 운동 안에서 나 역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야간 비행」 중에서 29p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들국화 노래를 듣자 그 생각이 났다. 어쩌면 1년 내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고
있을 어떤 이들이. 기념 세일, 감가 세일, 마지막 세일, 특별 세일. 세상은 언제나 축제 중이고 즐거워할 명분투성이인데. 자기 몸 하나 제대로
가눌 곳 없이 그 축제의 변두리에서, 하늘을 어깨로 받친 채 벌 받는 아틀라스처럼 맨손으로 그 축제를 받치고 있을, 누군가의 즐거움을 떠받치고
있을 많은 이들이, 도시의 안녕이, 떠올랐다. / 「한여름 밤의 라디오」 중에서 42p
하지만 중간에 코르크 마개가 부서진 와인을 따기 위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동원해 합심하는 지인들 곁에
앉았을 때, 아버지가 얹어준 고기를 꿀꺽 삼키며, 문학이란 어쩌면 당신들을 초대한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여기까지 기꺼이 와준
당신, 바로 그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문학은 하나의 선을 편드는 문학이 아니라, 이제 막 사람들 앞에 선
당선자의 허영, 그 헛폼 안에조차 삶의 이면을 비출 수 있는 뭔가가 있다고 손들어주는,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문학이었다. / 「당신과 조우」
중에서 51p
2부인 너와 부른 이름들에서는 동료 문인들을 향한 깊고 다정한 마음을 읊조리듯 이야기한다. 여기에서는 작가 김연수의 문장을 통해 삶을
골몰하고, 작가 편혜영에게서 사귐이란 조촐하고 편안해 막역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작품도 좋고 사람도 좋은 작가 윤성희의
덜렁거림과 엉뚱함에 문학하는 자의 허울도 슬쩍 벗겨본다. 한편, 3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작가로서 ‘당신을 왜 글을 쓰는가’란 질문과
마주했던 순간들 혹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세월호 같은 사회 문제를 통해 사람과 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 중
「빛과 빚」편에서 한 한국 작가가 독일의 출판기념회에서 했던 말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한국의 근대와 분열, 분단을 다룬 소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독일 기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결국 어느 편이란 말인가? 오른편인가? 왼편인가?’ 작가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대답했다 한다. ‘나는 죽은 사람 편입니다.’라고. 어쩌면 문학이란 죽은 사람 편에 설 수 있는 것, 잊거나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려는 것에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사는 동안 읽는 글이니 그렇고, 글에 담긴 시간을 함께 ‘살아낸’거니
그럴 거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선배는 그렇게 ‘자신이 읽은 문장이 아닌 산 문장’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누군가 오래 쓴 문장을 알아보고 그
문장의 바깥을 짐작하며, 그 둘레에 자기 이야기를 입혀 설명한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1p
어찌 보면 쉬운 말 같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처럼 단순한 말들을 어렵게 이해해가는 과정의 연속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여름의 속셈」 중에서 146p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269p



이 외에 글을 쓰는 소설가답게 고전 작품이나 시를 비롯해 문학에 대한 사유나 우리말 어휘에 대해 재치 있고 감각적으로 써내려간
산문들도 돋보인다. 이를 테면 누군가는 문장론에서 ‘부사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썼을 만큼 작가들이 유독 꺼려하는 부사를 ‘부사는 세계를
우아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지만 흥미롭고 맛깔나게 해준다. 그러니 부사가 있을 곳은 지옥이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다급하고 복잡한 세상, 유려한
표현 대신 불쑥 부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속세, 그 세속에서 쓰이는 소설 안일 것’이라 변호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말의 약점을 떠올리며 ‘종종
보다 잘 번식하기 위해 보다 불완전해지기로 결심한 어떤 종처럼 보인다’고 표현하거나 두보가 쓴 「곡강」을 두고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며 문학의 의미와 진정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는 점도 퍽
인상적이다.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작가라 ‘이해’를 당위처럼 이야기해야 할 것 같지만 나 역시 치수 맞지 않는 옷을 입으면
불편하다.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2p
연필 쥔 손에 힘을 주면 책에 흐릿한 홈이 파인다. 그 홈에는 내가 어느 문장에 줄 그은 순간 느낀
시간과 감정이 고인다. 그래서 가끔 그 홈이 물고랑 밭고랑 할 때 ‘고랑’처럼 느껴진다. 나와 나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우리와 타자를 잇는
먹 고랑처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그 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이야기도 언젠가 두보의 시구처럼 누군가의 삶과 만나게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 「점, 선, 면, 겹」 중에서 254p


잊기 ‘쉬운’ 이름이라면 몰라도 잊기 ‘좋은’ 이름이라 제목을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녀는 계속해서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고 얘기해 온 것 같다. 우연히 발견한 헌책방의 책에서 낯선 두 이름을 건져 올린
것처럼, 이전 세입자가 붙여놓았을 천장의 야광별 무더기와 그 아래에서 꼼짝 않고 누워서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입자들을 떠올렸던
것처럼, 그녀는 글을 씀으로써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작업을 해나가려는 게 아닐까. 덕분에 이런 작가가, 이런 사람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 참
좋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당신이란 사람은, 이름마저도 문학스러운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