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남
오빠에게> 이후 계속되는 우리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저마다 달라도 너무도 익숙한 그녀와 나의 이야기!
최근 연예 뉴스 게시판이 브라를 하지 않고 공공장소에 나타난 한 여자 연예인에 대한 기사로 연일 뜨겁다. 분명 성적 비하 및
노골적이라 여겨질 만큼 민망한 댓글이 득시글거릴 것 같아서 기사를 미처 다 읽지도 않고 창을 닫아버렸다. 특히 꼴펨이니 워마드니 메갈이니 남자와
여자의 대결 구도로 번져서 서로 물고 뜯는 댓글이라면 이전에도 수없이 보았다. 사실 이 땅에서 서른여섯 해를 살아온 여자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실천한 그녀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드러내고’, ‘뱉어내고자’ 하는 자유
의지를 더 이상 감추고 짓누를 수만은 없을 만큼 변화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스스로도 놀라워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두 해 전, 페미니즘을 화두에 내걸고 <현남 오빠에게>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조남주 작가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젊은 작가들이
한 데 모여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하고자 쓴 소설집으로 당시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책으로 읽는 페미니즘과 SNS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 내가 아는 페미니즘과 희망하는 페미니즘, 내 집에서의
페미니즘-딸들에게 설명하는 페미니즘과 남편을 설득하는 페미니즘,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 속의 페미니즘과 결국 내 소설 속에 갇혀버리고 만
페미니즘이 모두 다 다른 언어’여서 ‘무엇보다도 실제의 내가 실천하는 페미니즘이 그 모든 페미니즘을 따라잡을 수 없어 나는 너무 자주 곤란해지곤
했다’는 김이설 작가의 고백처럼 여성들의 삶에 대해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와 고민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고, 이는 많은
독자들에게 페미니즘의 진정성과 가치를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던 여성의 언어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
함께 공감하고, 고민하고 또 이야기해볼 수 있는 이러한 시도들이 있었기에 비록 더디지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야만 한다
<현남 오빠에게> 후속작 <새벽의 방문자들>이 출간되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 장류진, 하유지, 정지향,
박민정, 김현, 김현진 등의 6인이 모여 저마다 다르지만 어쩌면 모두가 익숙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충격적이리만큼 사실적이고,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소외를 솔직하게 다룬 이 여섯 편의 작품들은 소설이라 하기에는 나와 내 이웃 혹은 친구들에게도 충분히 있어났을 법한
일들이어서, 마음이 불편해지다가도 금세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는 여러 여성들이 등장한다. 포털사이트 관계사에서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하며 홀로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는 삼십대의
나(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무례한 남자 상사를 대차게 한 방 먹이고 자발적으로 공장을 나온 나 그리고 아이를 잃은 상처로 인해
버스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는 룰루(하유지, 「룰루와 랄라」), 클럽의 밴드 멤버와 그루피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성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요구하는 섹스를 받아들여야 하는 나 그리고 태연한 척 했으나 이혼한 부모의 힘 싸움에 상처를 받고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는
초(정지향, 「베이비 그루피」), 자신의 정치적 신념만 앞세우며 곁에 있는 연인에게조차 훈계와 조소를 퍼붓는 연인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보라’(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선생들의 추행을 고발하기 위해 학교 복도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유미(김현, 「유미의 기분」), 사내 추행
때문에 그만둔 여자 친구를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그녀를 꾸짖고 함께 저축한 데이트 통장까지 들고 가버린 남자 친구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린
나(김현진, 「누구세요?」)가 있다.
누구에게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고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김과 함께
있으면 어딘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갑갑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단지 그런 모호한 이유로 김과의 결혼을 포기한 여자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고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렸다고도 했다. 네 주제에, 라는 말도 들었다. 여자는 그런 말들을 흘려보낼 정도로 덤덤하지는
못했다. 왜 결국에는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고 남들이 미쳤다고 할 때마다 내가 정말 미친 짓을 한 거면 어쩌지, 라는
생각에 초조한 적도 있었다. / 「새벽의 방문자들」 중에서 16p
가난하고 불안정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도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 어머니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빛깔이고 어떤 소리인지 안다. 가난에서는 쓴맛이 아니라 짠맛이 난다. 그 소금기를 혀끝에서 느껴본
사람은 부르르 몸서리치게 되고, 인생에 시간과 사랑의 양념을 치는 일에 인색해진다.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없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 「룰루와
랄라」 중에서 51p
지긋지긋하다고, 작작 좀 하라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내가 지겨워졌다. 평화와 고요를 원하는
사람에게 얘기 좀 하자며 추근거리기는 싫었다. 어차피 우리는 싸움닭 체질이 아니었다. 도전을 포기하자 관계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결혼, 거기가
우리의 목적지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진했을까, 후퇴했을까. 아니면 결혼이란 관계의 제자리걸음인 것일까. / 「룰루와 랄라」 중에서 62p


각각의 소설에는 여성들이 아직도 뿌리깊이 박혀 있는 각종 편견과 배려 없는 농담들에 좌절하는
순간들이 등장한다. 느닷없이 침범하곤 하는 초인종 소리에 혼자 사는 여성으로써 불안에 떨고, 성적 판타지를 해소하는 출구로 거래를 하는 남자들과
그들의 소비 대상이 되는 여성들은 길바닥에 뿌려진 전단지만큼 하찮은 것이 되며(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결혼을 앞두고 동거 중인 남자의
바나나를 손수 칼로 잘라 먹이는 정성은 들여도 정작 자신이 먹을 건 챙기지 못하는 것이나, 상사라는 권위를 앞세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과장의
권위의식은 번번이 불쾌하기 짝이 없다(하유지, 「룰루와 랄라」).
P가 섹스를 하면서 콘돔을 쓰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 하는 사이 나는 생리가 하루만 늦어져도 아침저녁으로 테스트기를 사러 다닐
만큼 불안해해야 하고(정지향, 「베이비 그루피」), 월급다운 월급을 받지는 못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내 삶을 살기로 자처한다는 것이
고모의 눈에는 안정적이지 못한 일에 빌빌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다(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또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는 얘기’를 농담이라고 던지는 남자들이 도처에 존재하고(김현, 「유미의 기분」), 밤낮 미스 리 미스 리 어쩌고 하며 툭하면
허벅지며 엉덩이를 주물럭대고 은근슬쩍 점심 먹으러 가는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제 물건을 밀어대던 직원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데, 정작
연인이라는 자는 “네가 사회생활 하는 법을 몰라서 그래!”하고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김현진, 「누구세요?」).
사리 판단에 어두운 유권자일수록 선택의 기로에서 그저 익숙한 쪽을 선택할 것이다. 보라의 생각에 그따위
선택이란 폭력을 일삼는 남편에게 돌아가는 촌부들의 그것 같았지만 그런 이유라고 해도 간단히 무시해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 「예의 바른
악당」 중에서 159p
그 종이 한 장 한 장은,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한 놈 한 놈을 떠올리게 했다. 그 노랗고 작은
것들이, 그 보잘것없는 종이 쪼가리가 한데 모이자 크고 넓고 거대한 것이 이루어졌다. 많은 여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네모난 세계에
연결됐다. 그것이 마치 자유로의 입구라도 되는 양 환호했다. 또한 많은 남학생들이 포스트잇으로 이루어진 그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눈을 돌렸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내면으로 향하는 입구라도 되는 양 헐, 존나, 대박, 메갈, 꼴펨, 진지충이라는 말을 내뱉고 사라졌다. / 「유미의 기분」
중에서 214p
그 통장의 체크카드는 언제나 재영의 지갑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가끔 근사한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떠날 때 실은 각자 먹은 대로 낸 셈이건만, 나는 늘 이 정도는 한다는 듯 여유롭게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 자연스럽게 서버에게 건네는 그의 손짓이
늘 이런 파인 다이닝에서 여자 친구를 호강시켜주는 남자 행세를 하는 것 같아 간혹 찜찜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누구 하나라도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그의 말에 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 「누구세요?」 중에서 248p
하여 소설 속의 여성들은 부조리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을 시도하거나 연대를 도모한다. 성매매를 하기 위해
찾아온 새벽의 낯선 방문자들의 얼굴을 캡처하고(장류진, 「새벽의 방문자들」), 첫 아이를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잃고 홀로 심연에
빠진 룰루에게 다가가 자신도 함께 기억해주겠노라 말해주기도 하며(하유지, 「룰루와 랄라」), 연예와 우정 사이에서 소외를 느끼면서도 늘
침묵하기만 했던 보라는 결국 스스로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간 친절함으로 포장된 위선과 기만에 이제 저항하려 한다(박민정, 「예의 바른 악당」).
수많은 여학생들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까발리고(김현, 「유미의 기분」), 대상화되기만 했던 ‘보이는
자’에서 스스로 ‘보는 자’가 되어보기 위해 발칙한 시도를 감행한 (김현진, 「누구세요?」) ‘나’ 역시 그러하다.
룰루의 눈 속에서, 조그만 꼬맹이가 조그만 손으로 터뜨린 조그만 폭죽 같은 불빛이 타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룰루의 그리움은 나의 고독이 되었다. 우리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눈부시고 고결한 고통을 받아들였다. 내 뒤에 올 또 다른 여자의
고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룰루,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당신의 권리예요. 그러니까 계속 싸워줘요. / 「룰루와 랄라」 중에서 82p
그러니까 나는 그때 내가 가진 밑천을 모두 털어 초대되지 않은 세계에 편법으로 침투했다는 생각. 그리고
끝내는 부끄러운 몰골로 추방당하고 말았다는 생각.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걸어 다닐 때마다 몰려드는 그런 감정을 아주 오래 의심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힘들었겠네.
초가 말했다.
너도. 힘들었겠네. / 「베이비 그루피」 중에서 143p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을 평생 기억하는 인간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이라고 생각했다. / 「유미의 기분」 중에서 221p


여섯 편의 작품 중 특별히 의미 있게 읽힌 작품이 있다면 바로 「유미의 기분」이다. 5편의 작품이 모두 화자가 여자인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주인공이 남자다. 특히 형석은 동성애자이지만 이를 숨긴 채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다. 어느 날 수업을 15분 정도 남겨두고
학생들과 드라마 이야기를 나누다가 농담 삼아 “여자는 꼬리가 아홉이라서 꼬리를 잘 친다”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 중 유일하게 유미가 정색을 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이들 앞에서 멋쩍게 되었다. 이 때문에 형석은 유미의 그 거침없는 행동에 속으로는 ‘뻣뻣한 년’이라고 뇌까린다. 그런데 복도
한쪽 벽면에 그간 여학생들에게 성적 수치심이 가득 담긴 말을 함부로 내뱉고, 예의 없이 굴었던 선생들을 고발하는 포스트잇이 나붙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간 유미에게 불쾌감을 느꼈던 형석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마땅히 보호되고 존중되어야 할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려한 유미의 용기
있는 행동에 이제 그녀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하기에 이른다. 이 땅의 수많은 유미들에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우리 모두가 고민해봐야
하는 것처럼.

김현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피해의 이야기를 생존의 이야기로 바꿔 쓰고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전한다. 계속
말하겠다.’고 써 놓았다. 언제부턴가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나와도 불편함과 불쾌감을 드러내고, 대체 언제까지 그런 소리를 해댈 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말은 많고 해야만 하는 말도 많다. 변화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현남 오빠에게>를
비롯하여 <새벽의 방문자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시도와 또 계속된 새로운 시도들이 변화와 더불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