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돌, 팬픽,
이반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소녀들의 이야기!
한 때 내가 머물러 앉아있던 자리를 더듬듯 그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설!
“야, 야, 야. 내가 오늘 누구 봤는지 알아?”
고등학생 시절,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호들갑을 떨었다. 과장된 말투와 어조로 소문이란 소문은 죄다 옮기고 다니는 친구였던지라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심드렁해지려는 찰나에 뜻밖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와 잠시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친구들만 해도 서너 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후배들 사이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언니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언니의 단짝이었던 다른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고
했었는데……. 아무튼 친구는 바로 그 언니의 이름을 떠올리며 주말에 집근처에서 보았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믿겨 지냐? 머리카락을 거의 허리까지 길러서 못 알아볼 뻔했다, 야.”
그래, 그 언니도 짧은 커트 머리를 했었지. 2000년대 초반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들은 ‘귀 밑머리 3cm 단발머리’를 준수하는
것이 학교 교칙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뒷머리는 남자 아이들처럼 짧게 자르고 상대적으로 앞머리는 길게 내려서 얼굴을 반쯤 가리거나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가방도 한쪽으로만 메고 다니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갔다. 그 중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어딘지 모르게 중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는 친구들이 하나씩은 꼭 있었고, 그들은 후배 혹은 친구들의 인기를 차지했다. 여기에 춤까지 잘 추면 거의 아이돌과 다름없었으니, 그 언니
역시 그런 축에 줄곧 속해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더니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러서 뭔가 가발을 쓴 것처럼 이상해보이더라고, 친구는 마치 징그러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또 어마어마하게 웃긴 일이라는 듯 떠들어댔다. 너 그 언니 엄청 좋아했었잖아, 언니가 창밖으로 지나가면 모두가 보란 듯이 언니의 이름을
큰 소리고 부르고, 또 언니가 손을 흔들어주면 방방 뛰어다닐 정도로 좋아했던 그 시절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언니의 변해버린 외모만큼이나 마음이 싹
바뀐 친구의 말투에 나는 얼마간 씁쓸함을 느꼈다. 그때 그건 뭐였나. ‘한때’라는 건 다 그런 건가. 그 시절 우리를 내내 달뜨게 했던 것들,
내 모든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것들, 마치 모든 것을 상실한 것처럼 밤새워 울게 만들었던 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그 시절 우리를 사로잡았던 건 뭐였을까?
나는 내가 보고 겪은 일들이 목포라는 작은 항구도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음을, 그것이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 같은 시기에 놀라울 만큼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연구 작업 안에서 소녀들은 종종 ‘팬픽이반’이라 불렸다. 그것이
그녀들이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여받은 이름이었다. 엄격한 논문의 형식과 문장으로 이뤄졌으나 한때 내가 잘 알던 세계의 친숙하고 낯 뜨거운 예시로
가득한 글을 읽으면서 잊고 있던 많은 일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 35p
2000년대 초반은 H.O.T와 젝스키스를 필두로 한 아이돌 문화가 성행하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팬픽’이 공공연하게 읽히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주인공 ‘나’ 역시 동성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팬픽 문화에 빠져들었고, 그 무렵 인기를 끌던 여느
가수들처럼 칼머리를 하고 힙합 스타일에 건들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또 그들 사이에서 몇 반의 어느 누구가 실제 사귀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니. 그건 어딘지 마음을 꽤나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항구의 사랑>은 바로 그 시절, 한 여자아이가 자라나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마주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목포에서
자라나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오기까지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세 여자들과의 일화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는 펼쳐진다. 초등학생 때 다른 아이들보다
한 해 빨리 학교에 입학해 상대적으로 외소한 편이었던 나를 보호자처럼 보살펴줬던 친구 인희,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 데다
냉소적이지만 꽤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친구 규인, 그리고 단 한 번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선배 민선이 그들이다.
주인공인 나는 초등학생 때와 달리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만난 인희가 갑자기 칼머리를 하고 힙합바지를 입고선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복도 먼발치에서 목격한다. 머리 모양하며 허세 가득한 인희의 태도가 불편했던 나는 그녀와 거리를 두었고, 인희의 첫사랑이 자신이라는 소문까지
들려왔지만 모른 척 해두고 만다. 그런데 그녀에게도 뜻밖의 감정이 찾아온다. 규인의 소개로 연극부 공연의 대본을 쓰는 데 도움을 주러 갔다가
주인공인 리더 역을 맡은 3학년의 민선 선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활달한 성격에 어딘지 모르게 천진한 면이 있는 선배는 주목받는 걸 좋아했지만
주목받아 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 되는 상황을 즐기고 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깊이가 없다고 보일 수
있는 면이었지만 나는 그 어린아이 같은 면에 오히려 마음이 갔고, 남다른 에너지에 끌렸다. 그때부터 민선 선배가 하는 사소한 말들이 자신에 대한
관심처럼 여겨졌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위협적일 만큼 자극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본능적으로 그에 이끌리고 만다.
왜 누군가를 사랑하면 갑자기 주변 모든 사람들이 위협적일 만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나는 울고 싶어진다. 그들은 모두 아름답고, 모두 나의 적이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볼 것만 같아서 나는 애가 탄다. 그들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 82p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강물의 표면에 붙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무토막처럼 눈에 보이지
않고 파악할 수도 없는 심오한 물살에 고통스럽게 휩쓸려 다녔던 것만 같다. 그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전까지는 계속 그렇게 붙들려 실려 가는
수밖에 없었다. / 103p


사실 동성인 선배라는 것만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는 여느 사람들의 감정과 다를 바 없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이
있고 싶고,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고, 그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절친했던 규인이와의 사이까지 멀어질 만큼, 내 안에서 울리는 경고 신호마저 무시하게 될 만큼 민선 선배를 향한 감정이 커져버린 나는 선배와 간
바닷가에서 선배가 쓴 ‘사랑해’라는 글씨를 보고 마침내 입을 맞춘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감정이었던 걸까, 선배는 그 뒤로 나와 거리를 두었고
졸업 후 남자친구와 사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은 한때 어찌어찌 일어난 일, 이제는 지나간 일로 여겨졌다. 나는 그때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 그 일들이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난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여자조차 한
여자에게 가장 커다란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새로운 세상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존재했으나 오래전 까마득히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대륙에 관해 생각해 볼 때처럼. / 153p


이제 스무 살이 된 주인공은 목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여느 대학 친구들처럼 남자친구들과 연애하고, 하이힐을 신고, 외모를 꾸미는 일에
집중한다. 남자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애인이 된 남자 선배에게 자신이 한 때 여자 선배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결코 세상에 드러낼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제고 파도에 휩쓸리고 말 모래 위에 새겨진 ‘사랑해’라는 글자처럼 견고하지 않았던 한 때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으며 묻어두어야 할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인희가 그녀를 찾아온다. 고등학생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때, 그 모습대로.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때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온 힘을 다해 나 자신을 억제했다. 내 옆을 걷고 있는 그 아이에 대한 경멸감이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래. 넌 그런 걸 찾아다니는구나. 가십이 듣고 싶구나. 부풀리고, 색칠하고, 호들갑 떨고 싶겠지. 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은 얼마나 초라했는지. 그 감정이 실은 얼마나 빈약하고, 가볍고, 누추했는지. 그걸 똑바로 직면해야만 할 때 얼마나 비참한지. /
116p
그때 나는 그것이 그 애 자신의 표현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난 짧은 머리와 힙합 바지를 자동적으로 남성에 대한 모방이라고 여겼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말해지는 특성들이 당연히 남성들에게
속하는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자들도 짧은 머리를 원할 수 있고, 그것이 -당연히-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음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남자처럼 짧은 머리’라는 표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차린 뒤로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 159p

절대 세상 밖으로 드러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가 이렇게 쓰인 것은 어쩌면 인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주인공은
고백한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앞에 인희가 찾아왔던 날, 여전히 그 시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머물러 있는 그녀가, ‘이반’과 ‘레즈비언’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감정이 부끄럽기만 했던 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야 비로소 인희를 제대로 봐준 적이 없었음을 느끼게 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거리며 걷는 인희의 걸음걸이를 보고 남자를 흉내 내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그녀 자신의 표현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민선 선배를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봐주지 않았던 친구 규인에게 섭섭했던 것처럼 어쩌면 인희 역시 마음속으로는
내내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나라고. 이런 모습도 나라고. 이렇듯 <항구의 사랑>은 한때 속절없이 빠져들어 있던
것들에서 물러났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 나는 누구이며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들에 대해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어투로 다가간다.
덕분에 같은 시대와 문화를 공유했던 한 사람으로서 시절에 대한 교감과 감정을 누구보다도 공감할 수 있었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작은
것에도 달뜨고 설렜던 우리들의 마음을.
인희를 떠올리게 하는 한 친구가 생각난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짝이었던 그 친구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여자이고, 며칠 전에
손잡고 집까지 걸어갔다고 고백해왔다. 나는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그날부터 친구가 여자 친구와 만나며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을 때마다 꽤 진지하게
들어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얘기해도 괜찮아?” 하고 물었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적어도 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해해주려고
하잖아.” 라고. 여자를 좋아하는 친구의 감정을 모두 공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주려는 마음만으로도 친구는 고마웠나보다.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