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을 파고드는 답답한
고민들을 해결해줄 20가지 생각 도구들!
고리타분한 철학이 아닌 삶의 기술이 되는 생활 철학을
전수해줄 철학서!
‘철학’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유독 떠오르는 아찔한 순간이 있다. 호기롭게 수강 신청한 철학과 수업에서 조별 토론이 있던 날이었다.
6명이 되는 조원들이 앞에 나와 해당 주제를 가지고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과 주장, 반론을 펼치는 시간이었다. 나는 내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고 진땀만 흘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대체 어쩌자고 철학 수업을 신청한 것인지 자책하면서.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동경했지만, 학문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결국 그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여러 다양한 철학서를 읽어봤지만
그 순간에만 잠시 ‘아, 알 것도 같다’는 막연함만 얻었을 뿐 여전히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출간된 대부분의 철학서들이
실용적인 생활 철학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아직은 내게 어렵고 또 어렵다. 이 정도면 난 정말 철학과 가까워질 수 없는 게 분명하다.
<한입 매일 철학>을 읽기 전만 하더라도 나는 또 한번 겪어야 할 좌절을 미리 염두에 둔 것도 사실이다. 어, 그런데 이 책은
이상하게 재미있게 잘 읽힌다. 철학자가 주장하는 개념이 이해가 가지 않을까봐 쉬운 말로 설명하고 또 그것도 어려울까봐 더 쉽게 설명하려 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책을 읽고 필기해가며 개념을 정리해보는 일이 여느 때보다 수월한 느낌이다. 뭔가 인생철학서 한 권 만난 기분이다.
이제는 삶을 위한 앎이 되는 철학을 해야 할
때
<한입 매일 철학>은 철학 오타쿠를 자처하며 7년 동안 다닌 직장에 사표를 내고 집필실로 들어가 철학의 ‘쓸모’를 발견해
내는 일을 하고 싶었던 저자의 뜻이 담긴 교양 철학서다. 기존의 철학서들이 방대한 철학사와 철학가들의 이론을 정립해 설명하는 데 그친다면, 이
책은 현대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 흔히 하게 되는 일상의 고민들을 철학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 입 한 입 떠먹여주듯 차근차근
설명해주고 독려해주는 저자 덕분에 스무 가지의 주제와 철학 이론 앞에서도 얼어붙지 않고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철학을 무기처럼
이용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기술들을 얻음으로써 내 삶이 좀 더 단단해지고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는 그가 앎에만
그치는 철학이 아니라 ‘삶을 위한 앎이 되는 철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우리는 숱한 고민들을 마주하게 된다. 얼마 전, 다섯 살 된 아들이 습관처럼 ‘원래’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는 둥 원래 그런 거라는 둥 마치 처음부터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기 위해서 꼭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우게 되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내가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이나 그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뿔싸. 범인이 나라니.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때 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원래는
이렇게 해야 하는데~”와 같은 말은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인 내가 일종의 선입견이자 편견을 아이에게 심어주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흔히 “남자는 원래 다 그래!”,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저자는 선입견과 편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입견과 편견에 갇힌 만큼 불행하고, 선입견과 편견을 극복한 만큼 행복하다’고 했다. 전자의 편견은 새로운
이성을 만나 다채롭고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 가능성을 막고, 후자는 돈 이외에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가치를 발견할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입견과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바로 의심이다. 내가 확실하다고, 옳다고 믿는 것들을 처음부터 모조리 의심해 보면
된다. 이에 저자는 의심의 철학자 데카르트를 불러온다. 철학이 불확실한 지식에 확실한 기초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통해 익숙한 삶을 부정하고, 낯설게 하고, 불편하게 하고, 위험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집요하게 의심하기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의심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태도라고 말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사유하고 의심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을 살라고 독려한다.
데카르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코기토’라는 철학적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의심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익숙함이나 편안함과 결별하고, 낯섦, 불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들까지 과감하게 의심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데카르트에게 배워야 할 철학은 엄격하게 의심하는 태도와 권위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나는 믿고 있다. 그런 태도로 우리에게
집요하게 들러붙은 선입견을 하나씩 떼어내면 좋겠다. 그렇게 각자 조금 더 밝고 유쾌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중에서 26p
‘나는 100명의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야!’라는 허영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결국 더 불안하고, 허무하고,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이 사람은 누구에게 관심이나 인정, 칭찬을 받고 싶었을까? 지나가는 동네 사람, 옆집 성주와 같은 불특정
다수일 테다. 속 깊은 대화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는 ‘피상적 관계’ 맺음의 대상이다. SNS가 내면의
자해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사진을 보여주고 싶은 대상이 언제나 ‘피상적 관계’를 맺고 있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던가. SNS는 불특정 다수에게
관심이나 인정, 칭찬을 받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기에 그 끝에는 필연적으로 불안, 허무, 외로움이 도사린다. /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싶은가요?’ 중에서 41p


나에게는 한 가지 트라우마가 있다. 바로 “착한 척 하지 마”라는 말이다.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반에 유독 키가 크고 가슴도
발달하여 신체적으로 조숙한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말을 하는 게 어눌한 면이 있어서 남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자주 당하곤 했다.
하루는 아이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좀 짓궂게 그 친구를 괴롭힌 일이 있었는데, 마침 근처를 지나가다 내가 “야, 좀 하지 마라. 어린애들도
아니고.”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불똥이 나에게 튀고 말았다. 몇몇 친구들이 몰려와 나에게 착한 척 하지 말라며
그때부터 왕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작해야 며칠 정도였지만 나는 일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사실 그들은 어울려도 그만 어울리지 않아도
그만인 친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때부터 ‘~ 척’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착한 척을 한 걸까? 책에서는 “착함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데이비드 흄의
‘동정심’이라는 이론을 데리고 온다. 흄은 선, 윤리, 도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착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내면에서 동정심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바로 착함이다. 이러한 동정심이 바탕이 된다면, 어떠한 행동도 착한 행동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한 걸인이 돈을 구걸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돈을 주면 안 돼”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가 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테지만, 남자가
걸인의 고통에 절절하게 공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립을 위해서 돈을 주지 않았다면 그 행동은 선하고 윤리적이며 도덕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착함에서 중요한 것은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나 행동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행동이 전혀 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동이 무엇보다 착한 것일 수도 있다. 선거철에 보육원을 방문해 아이들을 안아주는 국회의원보다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아이들의 종아리를 때리는 수녀가 더 선하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흄의 이론에 의하면 나는 착한 척을 한 게 맞는 것 같다. 놀림 당했던 그 여자 친구가 이후에 살짝 경기를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애를 도왔다가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일 때문에 꼭 필요한 순간에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게다가 놀리는 아이들에게 핀잔을 준 것도 어쩌면
놀림당한 그 친구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 나의 선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친구들이 나를 제대로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성은 정념(감정)들의 노예여야만 한다.” 흄의 이 말을 기억하자.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선,
윤리, 도덕이 무엇인지, 또 그런 행동과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 그 이성의 작용을 멈추고, 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공감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런 동정심 없이 하는 어떠한 행동, 설사 세상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송하는 행동도 선하거나 윤리적이지 않다. 반대로 그런 동정심이 있다면, 어떠한 행동, 설사 세상 사람들이 나쁘다고 비난하는 행동도 선하고
윤리적이다. /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중에서 77p
피히테가 ‘자아’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보다 나의 관념이 더 중요하기에
‘자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주목하라. 너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의 내적 삶에 주의를 집중하라. 우리의
관심은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이제 피히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나와 대상에서 중요한 것은 ‘나’다.
‘자아’가 만들어내는 관념이 실재(물질)보다 우선하니까. /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까요?’ 중에서 114p
진짜 꿈을 이루려는 사람은 ‘받아들여 할 현실’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 할
현실’까지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진짜 꿈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자다. / ‘꿈과 현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중에서 126p


앞선 나의 사례처럼 <한입 매일 철학>에는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는, 혹은 고민해본 적이 있는 보편적인 고민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SNS에 열광하는 이유를 파스칼의 ‘허영’을 통해 해답을 찾고, 진정한 ‘나’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피히테의 ‘자아’
이론을 설명하고, 꿈과 현실의 선택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답을 건넨다.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니체의 ‘힘의 의지’를, 남자와 여자는 왜 다른지에 대한 질문에는 라캉의 ‘신경증’을, 계획 없이 사는 삶에 대한 의문에는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 이론으로 해답을 찾는다. 이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푸코의 ‘생체권력’, 들뢰즈의
‘아장스망’ 등으로 삶의 모순을 짚고 나아갈 방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개념을 다르게 생각하게 한 베르그손의 ‘지속’
이론편을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초자아는 낡은 유물이다. 우리네 삶을 피곤하게 하는 낡은 유물, 그 유물을 우리의 마음에서 떼어 내는
만큼 자아는 변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 집 정리를 하지 않아서 불안할 때, 샤워하지 않아서 잠이 안 올 때, 평일에 쉰다는 이유로
죄책감이 들 때, 이렇게 되뇌자. “초자아라는 귀신이 내 마음속에서 나를 조종하고 있구나!” 그 불안, 불면, 죄책감은 내 것이 아니라 부모,
선생, 사회가 남긴 금지의 목소리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아차리자. 그 첫걸음을 뗄 수 있다면, 조금씩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다. / ‘마음이 왜 마음대로 안 될까요?’ 중에서 184p
신경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 신경증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남자는 강박증을 잘
통제해서 히스테리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 욕망이 아니라 상대의 욕망을 살피는 연습을 해야 한다. 반대로 여자는 히스테리를 잘 통제해서
강박증적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상대의 욕망이 아니라 내 욕망에 집중하고 표현해야 한다. 그럴 때, 신경증의 사랑이 아닌 성숙한 사랑이
가능할 테다. / ‘남자와 여자는 왜 이렇게 다를까요?’ 중에서 217p
결국 중요한 건 호명이다. ‘항상-이미’ 구성된 사회적 관계의 호명에 의해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니까. 지금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다른 호명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나를 다르게 불러줄 사람을 찾고, 그들과 연대해 호명 관계를 바꿔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주눅 들어
눈치 보고 굽실거리는 삶이 아니라 누구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일 할 때 왜 주눅이 들까요?’ 중에서 239p

<한입 매일 철학>이 좋았던 것은 그간 철학을 오로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삼았던 나에게 그것보다 나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현재의 나를 점검해보는 ‘사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는 점이다. 또 알게 모르게 스무 명의 철학자를
따라가다 보니 근현대 서양철학사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던 점도 인상 깊었다. 만약 나처럼 철학을 알고 싶고 배우고는 싶은데 시도할
때마다 막막하고 어려웠던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혹시 잊어버린다 해도 다시 들춰보는 일이 겁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