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도는 영혼들의
기척들, 그 스산한 광경들의 문학!
폐허와 상실의 시대를 덤덤하게 묘사하고 기록하는
제발트 문학의 정수!
현대 독일문학은 제발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했던가. 생전에 단 네 권의 소설을 남겼을 뿐이지만 ‘제발디언(Sevaldian)’이라는
용어가 생길 만큼 전세계적으로 추종자를 양산한 20세기 말 독일문학의 거장 W. G. 제발트. 때문에 탄생 75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이민자들>과 <토성의 고리>가 재출간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어쩐지 반드시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에 파묻힌 개별자들을 기억하기 위해’라는 수식이 첨부된 책 소개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읽은 적이 있는
다비드 그로스만의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 베른하트르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가 그러했듯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독일 문학가들의 공통된 의식 같은 것들에 유독
관심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현대 독일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제발트는 이 암울하고 처절했던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떤 목소리를 낼
것인가. 나는 역사와 기억의 관계 앞에서 극도로 절제하면서도 강렬한 시적 관찰로 이루어진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민자들>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꿈꾸는 디아스포라와 지독한 향수 사이를 부유하는 이민자들
<이민자들>은 네 명의 이민자들을 통해 낯선 땅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헛돌면서 고향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네 편에 걸쳐 공통으로 등장하는 ‘나’는 모두 다른 인물이거나 혹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영국에서 세 들어 산 집의 주인인 헨리 쎌윈 박사, 독일 고향 마을의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파울 베라이터, 친척 할아버지 암브로스
아델바르트와 독일 출신의 유대인 화가 막스 페르버의 삶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겪고 또 시대가 남긴 상흔들을 관찰자적인 시선에서 섬세하게
묘사한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은 작중 주요 인물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들을 생생하게 기록해 써내려간 듯한 구성과 사실감 높은 흑백사진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이것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도 입체적인 글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헬리 쎌윈 박사는 화자인 ‘나’가 세를 들어 사는 집의 주인으로 처음 집을 보러간 날, 이 집 실제 주인은
아내이고 자신은 그저 장식용 은둔자일 뿐이라고 소개받는다. 입주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저녁 식사에 초대된 나는 쎌윈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스위스 베른에서 지내던 시절에 알게 된 산악인 네겔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시 쎌윈은 21세였고 네겔리는 65세의 나이였지만 그와
함께 있을 때 느낀 편안함을 그 후로 다시는 느끼지 못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쎌윈은 네겔리와의 추억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해 영국으로
돌아온 쎌윈은 네겔리가 실종됐다는 편지를 받고 우울증을 겪을 정도로 깊은 상실감에 빠진다. 거기다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혈통 때문에 전쟁을 겪으며
부인과의 사이도 나빠지고 지난 몇 년 사이에는 향수병마저도 심해진 상태다.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군요. 돈일 수도
있고, 결국 발각되고 만 내 혈통에 대한 비밀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그저 사랑이 식어서일 수도 있겠지요. 제2차세계대전과 그 뒤의
수십년간은 내게 암흑과도 같은 불운한 시기였습니다”던 그의 고백은 결국 자살로 귀결되고 만다. 그런데 얼마 뒤, 실종된 지 7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산악인 네겔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914년 여름에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베른의 등산안내인 요한네스 네겔리의 유골이 칠십이년 만에
오버아르 빙하에서 발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자(死者)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 / 34p

두 번째 이민자이자 화자인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인 파울 베라이터의 이야기는 그가 기차선로에 누워 자살을 했다는 소식으로 시작된다.
타고난 선생으로 학생을 끔찍이 사랑하고 독창적인 수업방식으로 교실을 활기차게 해줬던 파울이 어째서 그런 끔찍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몇 년 동안 그를 떠올리다 마침내 그에게 대해 몰랐던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고,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란다우 부인과의 대화를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파울의 불운한 생애를 들추어본다. 여기에서는 연인을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떠나보내고, 파울이 나치군에 복무하면서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비열하고 치졸한 일들이 하나씩 드러나는데,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자신의 혈통 때문에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슬픈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파괴의 시간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커피가게 주인 쇠페를레가 파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파울의 어머니 테클라는 뉘른베르크의 시립극장에서 한동안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쇠페를레는 테클라에게
반유대인과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상점에 드나들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할 수 있으니,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건대 앞으로는 자신의 가게에 매일 드나드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베라이터 가족이 겪어야 했던 그런 비열하고 치졸한 일들을 당신이 몰랐다는 것이 내겐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 S시처럼 비참한 소굴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고, 시절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런 태도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어요. 이 이야기
전체의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니 놀랍지도 않습니다. / 66p
소위 ‘수정의 밤’(1938년 11월, 나치에 의해 조직된 유대인 학살사건.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의
시발점이 되었다)이 있기 여러해 전 일이었는데, 유대인집들의 창문이 깨어졌고, 지하실에 숨은 유대인들은 밖으로 붙잡혀나와 거리에서 질질
끌려다녔다. 파울이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날 일어난 악독한 공격과 폭력 들, 예컨대 당시 일흔다섯이었던 아론 로젠펠트가 칼에 찔려 죽은
것이나 당시 서른살이었던 지크프리트 로제나우가 창살에 목이 묶여 교살된 것만이 아니었다. 파울은 그 사건과 관련된 당시의 신문기사를 읽게
되었는데, 군첸하우젠의 아이들이 다음 날 아침부터 거리 곳곳에서 열린 공짜 바자회에서 온갖 물건을 선물받았으며, 그뒤로도 몇주 동안 폐허가 된
상점들에서 머리핀이나 초콜릿, 색연필, 분말청량제 따위를 마음껏 가져갈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유대인들의 비극을 고소해하는 태도가 읽히는
기사였다. 그런 일들은 끔찍한 폭력만큼이나 파울에게는 충격적이었다. / 70p
세 번째는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가난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암브로스는
특유의 성실함과 능력으로 미국 대부호의 집사가 되어 스위스로, 일본으로, 주인을 모시고 떠돌아다니며 오로지 그들 가족의 일에만 매달려 살았다.
수많은 일이 그에게 있었지만 그런 기억들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켜주는 추억은 거의 갖고 있지 못한 채 살았던 그는 결국, 말년에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전기충격요법으로 자신의 사고와 기억능력을 가능한 한 근본적이고 철저하게 말살함으로써 최후를 맞게 되고 이는 우리에게 씁쓸함을 남긴다.
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기산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185p


네 번째는 영국 맨체스터로 연구를 하러 이민을 간 화자가 매일 하루 열 시간씩 이젤 앞에 서 있는 막스 페르버를 통해 유대인이
겪어야했던 오랜 고통의 상흔들을 살펴본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여기서는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벗어나보려
노력했지만 불행은 마치 박아놓은 듯 깊이 뿌리를 내렸노라 고백하는 페르버의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아릿한 맛을 남긴다. 특히, 한때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의 집합소였던 맨체스터가 거대한 영안실이나 묘지로 변해 황량해보이기까지 한 모습은 꿈꾸는 디아스포라의 정착할 길 없는
스산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이따금 나를 엄습하는 단편적인 기억의 영상들은 차라리 강박관념들이라고 해야 할 거야. 내게 떠오르는
독일이란, 머릿속의 광상(狂想) 같은 것이네. 내가 여태껏 한번도 독일땅을 밟지 않았던 것은, 이런 광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걸세. 내가 생각하는 독일이란 낙후되고 파괴된, 어떤 영역 밖의 나라라는 것, 내게 독일인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무시무시한 얼굴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아야 하네. / 229p
돌이켜보면, 당시의 일들이 내 삶의 구석구석까지 결정해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부모님이 강제이송당한
것뿐만 아니라 그 믿기지 않는 사망 소식이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도착했던 것, 처음에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그 소식의 의미를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런 일들 말이야.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 242p

이처럼 소설은 네 이민자의 삶을 통해 세계대전이라는 역사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간 개별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복원한다. 어떤 기막힌
반전이나 위대한 이름 하나 없지만, 거대한 불운의 역사 앞에서 우리 개개인은 죽는 날까지 쉽게 화해할 수도 지울 수도 없을 만큼 큰 상처와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꿈꾸는 디아스포라와 지독한 향수 사이를 부유하는 이민자들의 삶을 매우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문장으로
묘파한 제발트식 문학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였다. 단 네 편의 작품 중 한 작품을 읽었으니 나머지 작품들도 꼭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