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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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고 간결한 문체가 전달하는 강렬한 문학적 힘!

인생 영화가 나의 삶에 미치는 기막힌 반전 그리고 아름다운 반란!

 

 

   누구에게나 소위 ‘인생 영화’, ‘인생 배우’ 혹은 ‘인생 노래’ 같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장 기쁜 순간 또는 가장 절박했던 순간에 마치 나를 구원해주는 듯했던 어떤 모델 같은 것 말이다. 문득 나에게도 인생 영화란 것이 있었나를 고민하다가 독특하게도 영화 <타이타닉>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왜 하필이면 <타이타닉>? 그러고 보니 영화 <타이타닉>이 내 인생 최초의 덕질이었다는 게 퍼뜩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군인인 친구를 따라 사령부 내에서 개봉했던 <타이타닉>을 우연히 보러 간 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최초의 경험이었던 탓일까. 영화를 본 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나는 내내 영화 장면을 잊을 수 없었고, 결국 용돈을 털어 OST 테이프를 구매하고 당시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던 이모를 졸라 비디오테이프까지 구입해 틈만 나면 돌려보곤 했다.

 

 

 

   그때 나를 <타이타닉>에 빠져들게 한 것은 잘생긴 디카프리오도 아니고, 화려한 스케일의 대작이란 사실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당시에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 거대한 운명 같은 게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게 분명했다. 고작 그 짧은 만남에 온 마음을 내던질 수 있는 힘이란 게 무엇일까, 심해로 가라앉는 거대한 배를 바라보며 뱃조각에 의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의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무엇일까, 나는 그 ‘감정’이란 것에 무척 이끌렸던 것 같다. 어쩌면 그 덕분에 나는 글이라는 것을 직접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소설이란 걸 썼고, 결국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으며 나의 여정은 줄곧 글 혹은 책과 함께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 <타이타닉> 때문에.

 

 

인생 영화가 나에 미치는 기막힌 삶의 반전들

 

 

   빰 빠바밤 빠바밤…….

   영화를 본 적은 없어도 음악은 모두가 들어봤을 법한 영화 <록키> 시리즈. 주인공인 실베스타 스탤론을 당대 최고의 인기 흥행 배우로 거듭나게 만들었다던 그 영화!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1983년 1월, 우연히 영화 <록키3>을 보러 갔다가 인생의 기막힌 반전을 실현하게 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록키> 시리즈가 정말 한 여자의 인생을 바꿨다고? 복싱으로 인생 승리라는 대역전의 드라마를 보여준 이 영화의 상징성과 당시 전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던 희열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의 마지막 히어로> 소설 속의 그것처럼 한 여자의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나. 책의 소개에 따르면 엠마뉘엘 베르네임 작가 자신이 실제 영화 <록키3>를 보러 갔다가 40도에 이르는 고열로 몸져누웠고, 이후 첫 소설 『잭 나이프』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변신한 자신의 삶을 반영한 자전 소설이자 영화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바치는 소설이라 하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의아함과 흥미로움을 감출 수 없었다.

 

 

 

영화 초반의 록키 발보아처럼 그녀는 되는 대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 16p

 

 

 

 

 

 

   소설 속 주인공 리즈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 <록키3>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고열로 쓰러진다. 영화 속에서 되는 대로 살며 매너리즘에 빠져 살던 세계 챔피언 록키가 다시 재기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녀는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중단했던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여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라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스탤론 덕분에 그녀의 인생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부터는 스탤론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를 보러 다닐 것이다.

전부 다. 한 작품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 맹세를 한다.

앞으로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하길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관에 가서 표를 사서 볼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한다. 스탤론 덕분에 그녀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25p

 

 

 

   그녀는 록키를 따라서 권투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가 그곳에서 거울 제조업자 장을 만나 결혼을 한다. 이후 토마스와 앙투안 두 아들까지 낳고 전에 없던 행복한 삶을 살며 매순간 스탤론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때로 스탤론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스탤론이 후에 가난해지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그녀가 버는 돈의 10퍼센트를 저금하는 예금 계좌를 개설하기까지 한다. 뭐랄까, 정말 유쾌하고도 황당한 일이지만 그만큼 스탤론을 향한 리즈의 애정이 각별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남편. 남편을 만난 것은 스탤론 덕분이었다. 가정을 갖게 된 것은 스탤론 덕분이었다. 의사가 된 것도 스탤론 덕분이었다.

1983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록키3>를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 46p

 

 

 

   책의 말미에 《씨네21》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스탤론을 향한 리즈의 무한한 애정을 이와 같이 해석한다. ‘스탤론이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계속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여자의 강한 의지가 삶을 변화시킨 거고, 단지 스탤론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에요. 그 점이 덕질을 연상시켰어요. 내 배우 덕분에 산다, 하는 거죠. 누구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어떤 힘과 계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해줘요. 결국 사람들 마음 안에 자신을 바꿀 힘이 있는 거고, 스타는 그 힘을 끌어내줄 버튼인 셈이죠.’ 라고. 어쩌면 리즈는 인생의 변화를 내내 갈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꿀 만큼의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사리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스탤론이 그 버튼이었던 것이다. 하긴, 공부와 담쌓고 지내던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다니는 대학교에 같이 다니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해 합격했다는 일화들을 우리는 종종 듣게 되지 않는가.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 그 안에서 전달되는 강렬한 문학의 힘

 

 

   100페이지의 미학이라 불릴 만큼 <나의 마지막 히어로>는 분량이 매우 짧다. 일종의 중편소설 정도의 분량을 읽는 정도인데, <록키3>를 본 뒤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고 또 느닷없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이 겪는 방대한 서사에 비하면 내용은 지극히 간결하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구체적인 묘사와 감정 서술에 집중하여 문학적 완성도를 높인다면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소설은 그러한 서술 방식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점은 이런 과감한 간극 사이를 독자가 상상하여 메우게 하고 또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항상 문장을 길게 쓰는 게 버릇이 된 나에게 ‘아, 이렇게도 글을 쓸 수 있구나.’ 하는 충격을 준다고나 할까.

 

 

 

종산_ 저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노출 콘크리트를 쓴 공간들이 자꾸 떠올랐어요. 그런 건축 기법을 ‘브루탈리즘(brutalism)'이라고 하더라고요. 브루탈리즘이란 건축물 본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사상으로 재료나 구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인데, 모든 장식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골격만 남겼다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72p

 

 

 

 

 

 

   내 인생의 청춘스타,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을 울렸던 노래들이 떠올라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나의 마지막 히어로>. 그래서 나는 또 내 삶의 2막을 변화시켜줄 그 무언가를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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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모자가 좋아
번 코스키 지음, 김경희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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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아기곰 헤럴드가 따스한 온기로 마음을 보듬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우리 아이가 사랑하는 그림책!

 

 

   육아를 하다보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저마다 특별하게 여기는 물건들이 있더라고요. 이를 테면 폭신폭신한 촉감의 인형이라든지 포근한 잠자리 이불이나 베개, 장난감 등등이 있지요. 저희 아이는 자동차 장난감에 유달리 애착을 보여서 잘 때도 꼭 자기가 좋아하는 자동차를 옆에다 두고 자고, 일어나서도 자동차를 먼저 찾는답니다. 제 지인 중에는 딸이 베개가 노랗게 꼬질꼬질해졌는데도 씻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엄마도 있답니다.

 

 

 

   이처럼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에 애착을 보이는 현상을 두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하지요. 부모와 같은 안정감을 주는 상대로 여김으로써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거나, 분리불안과 같은 불안감을 가라앉혀주기도 하며, 애착하는 물건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사회성을 길러주고, 여러 가지 감정적 표현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자신이 애착하는 물건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이 서럽게 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토록 집착하던 물건에 다른 친구나 동생이 관심을 보일 때 잠시 빌려주기도 하는 등의 행동을 보일 때는 ‘아, 우리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하고 대견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고 배려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거구나 싶지요.

 

 

 

   2018년 볼로냐 도서전 대표작으로 손꼽혀 화제가 된 <털모자가 좋아> 속 아기곰 헤럴드를 보며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자신이 무척 아끼는 물건을 누군가에게 빼앗겼을 때의 그 상실감, 하지만 그것을 주변에 나눌 줄 아는 법을 배워나가면서 자신이 더욱 특별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담은 이 따뜻한 그림책에 제 마음까지 뭉클해졌으니까요.

 

 

 

 

 

 

귀여운 아기곰 해럴드를 소개합니다.

 

 

해럴드는 털모자를 정말 좋아해요.

무더운 여름에도 쓰고 다니고, 학교에도 쓰고 가고, 잠잘 때도 쓰고 자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할 때조차 털모자를 썼어요.

해럴드는 털모자를 쓰면 특별해지는 느낌이 든대요.

그런데 누군가 털모자를 탐내는 것 같은데요!

 

 

 

 

 

내 털모자 돌려줘!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쌩 내려오더니

해럴드의 털모자를 훔쳐가는 게 아니겠어요?

해럴드는 더 이상 자신이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는 상실감에

그때부터 소중한 털모자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좀처럼 털모자를 되돌려주지 않고,

화가 난 해럴드는 까마귀 둥지에 직접 올라가 털모자를 가져오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둥지 속에는 뜻밖에도 아기 까마귀들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털모자가 없어도 괜찮아. 그래도 난 특별한 곰이야.

 

 

자신의 털모자를 덮고 있는 아기 까마귀들의 모습을 보며

해럴드는 자신의 털모자를 기꺼이 양보하기로 합니다.

자신이 아끼던 물건이 아기 까마귀들에게

더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에요.

그때야 비로소 해럴드는 털모자가 없어도

자신이 특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난 친구를 돕는 곰, 해럴드거든.”

 

 

 

   책의 마지막 장면에 해럴드와 까마귀가 나란히 앉아 어깨동무를 하고, 마침내 아기 까마귀들이 둥지 밖을 날아오는 장면을 지켜보는 광경은 어쩐지 부모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이 책을 읽고서 제 아이도 “나도 봄이 태어나면 자동차 줄 수 있어.” 라고 말하며 곧 태어날 동생에게 자신이 아끼는 자동차를 나눠줄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해럴드 덕분에 아이가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된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나눔의 기쁨을 배우게 된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곰 해럴드처럼 우리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그런 따뜻한 마음이 피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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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 권기태 장편소설
권기태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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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이 전하는 따뜻한 소설!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우주적인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스토리!

 

 

 

   최근 몇 년간 우주과학을 소재로 한 책을 자주 접한 듯하다. <씁니다, 우주일지>, <태고의 시간들>, <보헤미안 우주인>, <인류의 가장 위대한 모험 아폴로 8> 등이 그러한데, 어떤 작품은 미래 산업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와 우려를 보다 현실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이기도 하고 설정 자체는 허무맹랑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가슴속에 품고 있는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유쾌하게 자극하는 작품들도 다수 보인다는 점에서 상상이란 무대는 우주만큼 무한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중 권기태 소설의 <중력>은 조금 독특하다. 앞서 밝힌 기존의 여러 작품들이 천문학에 관한 전문 지식 혹은 우주의 신비, 특별한 미션을 지닌 채 우주로 나아가 그곳에서 적응하거나 사고를 겪는 등의 에피소드에 집중이 되어 있다면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되려는 이들의 꿈, 고단한 현실에서 부딪쳐야 하는 좌절과 치열한 경쟁 등을 통해 무중력의 미지가 아닌 ‘중력이 이끄는 오늘, 우리의 삶’을 보듬는 데 더욱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인 선발 과정이라는 흥미로운 여정에서 오는 흡인력과 높은 몰입도는 물론이거니와 삶에 대한 통찰력까지 고루 갖춘 이 작품의 깊은 울림에 진동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과 현실 그 사이에서 떠도는 우리들

 

 

   <중력>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되고자 하는 어느 평범한 샐러리맨이 그의 경쟁자들과 함께 겪는 도전과 좌절, 경쟁과 우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은 구상하고 취재를 시작한 지 십삼 년 만에 나왔고 집필하는 사 년 동안 적어도 서른다섯 번 개고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우주인 선발이라는 소재에 맞춰 탄탄한 서사와 현장감 있는 묘사로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갖춘 것은 물론, 입체감 있는 캐릭터로 저마다 다른 시선에서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포착해내 극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이진우는 국립자연원 산하에 있는 생태보호연구원이다. 어느 날, 그는 과기부와 우주산업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우주인 선발 공고를 발견하고 지원한다. 연구원답게 그는 평소 ‘우주에서 벌레들을 데리고 이런저런 실험을 해본다면 어떤 게 좋을까, 중력이 없으면 식물은 어떻게 자라날 방향을 알까? 중력이 없어도 그 속의 염색체와 디엔에이가 무사히 나눠질까?’ 등의 의문을 품고 언젠가 우주로 올라가 꼭 실험을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아뇌종양으로 열 살 때 죽은 누이 수영이에게 꼭 들려줘야 할 말이 있었다.

 

 

 

   진우는 그때부터 우주인이 되기 위한 각종 체력, 의학 테스트들을 거친다. 우주인이 되겠다고 모인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이 분야는 알게 될수록 내공이 센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자칫 중력 가속도 테스트에서 실격처리가 되었다가 테스트 속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지적해 기사회생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만큼 그가 우주인 선발 테스트에 자원한 것이 못마땅한 상사의 부당한 시선도 능력으로 이겨내려 애쓰고, 평가 점수도 잃지 않기 위해 야근과 피로를 친구 삼아가며 직장인과 우주인이 되겠다는 꿈 그 사이에서 어느 하나 게을리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보인다. 덕분에 우리는 그간 ‘우주인’이라는 이 멋진 이름이 주는 허울뿐인 찬란함 대신 누군가의 간절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다시 현실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좌절과 고충을 조금씩 엿보게 된다.

 

 

 

달의 빛나지만 메마른 표면 위로 떠오르는 희고 우아한 지구. 아래 절반은 우주의 어둠에 잠겼고 둥근 상반신이 태양광에 고요하게 드러나 있다. 푸른색 흰색이 실타래처럼 신비롭게 엉킨.

그것은 일출도, 월출도 아니고 지구가 솟아나는 지출의 광경. (중략)

그것은 아주 먼 태초에 지구를 구술처럼 빚어낸 신비로운 힘이 멀찍이서 자기 작품을 감상하던 시야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우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지구를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고 나면 내가 확 달라질 게 분명했다. / 73p

 

 

나는 중력을 탓하며 쓰러지지만 중력은 나에게 관심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지금 중력은 누구에게나 힘을 미친다. 누구나 똑같이 바닥에 닿게 하고, 서든 눕든 제 무게를 되살려준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나 있고, 태양도 지녔지만 티끌도 가졌다. 그래서 중력은 모든 것이 제가끔 움직이고 저마다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조건이고 운명이다. / 152p

 

 

지구가 사과라면 하늘은 사과껍질 정도라고. 지구 지름에 비한다면 대기의 두께라고 해봐야 백 분의 일도 안 되니까. 그토록 얇은 껍질 속에서 유성이 타오르며 떨어진다. 봄비가 내려오고 적란운이 솟구치고 여름 장마가 진다. 회오리가 몰아치고 우박이 떨어지고 폭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내가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투명한 껍질을 올려다보면서 깊고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그 뒤에 끝없이 아득한 우주가 있어서다. 겨우 티끌만 한 크기로 매일 숨가쁘게 살아가더라도 언제든 고개만 들어보면 무한을 볼 수 있다니. / 199p

 

 

 

 

 

 

   우여곡절 끝에 진우는 최종 4인에 선발된다. 1조에 진우와 김태우, 2조에 정우성과 김유진 이렇게 4명이다. 진우의 회사는 이미 구조조정이 시작되어 대기반 발령이라는 좌천 통보가 떨어진 상태였고, 최종 1인이 되지 못하면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내가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되겠다는 꿈 혹은 열망은 네 사람 모두에게 다 있을 수밖에 없었고, 사소한 소문이나 의심으로 인해 네 사람의 관계가 때로는 사이좋은 공생 관계였다가 일순간 나빠지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을 겪어나간다.

 

 

 

   특히 우리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과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은 기억하지만 두 번째 우주인 혹은 그 이후의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랜 백업 생활과 2인자라는 명명 하에 잊혀져간 사람들의 그늘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은 그 어느 작품에서도 보지 못한 부분이어서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무엇보다 러시아 내부의 불공평한 교육 시스템과 접근 제한, 파벌싸움에 눈치를 봐야하는 장면들은 우주라는 꿈의 공간마저도 모든 게 기득권자들의 셈법에 의해 돌아가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는 점에서 허탈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똑같이 발사 날 아침에 일어나 마주 보며 식사하고 나란히 우주복으로 갈아입고 버스에 앞뒤로 올라타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발사장으로 가는 얼굴. 가가린은 결언하다 못해 관조적인 위엄마저 띄는데 뒤에는 존재감마저 없는 한 사내가 허탈한 체념으로 눈을 감았어요. 한 걸음 앞에서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을 기회를 영영 놓쳐 버린 사내가. 모든 세상을 잃어버린 듯이…… 그 사람이 바로 이등이었던 티토프였지요. / 231p

 

 

이반 이바노비치는 선내의 자질구레한 쓰레기를 꽉 채워서 꼭 사람처럼 보이는 낡은 우주복과 헬멧을 말한다. 배출구 조리개를 열고 우주의 칠흑으로 내가 버리는. 그런데 너무나 자질이 안 되는 우주인 후보를 가리키기도 했다. 카페에서 멀리서라도 그런 속삭임이 우연히 드려오면 혹시 나한테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우주인들은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놀러나 구경 간다면 이럴 필요도 없으리라. 우리가 가만있기를 바라는 이 사람들과, 배워서 우주인다워지겠다는 우리의 기대는 애초부터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 379p

 

 

 

   이렇듯 <중력>은 전문 지식과 기막힌 상상력이 동반된 여타의 우주과학소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퍽 인상적이다. 과연 누가 최종 선발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이 될까, 하는 단순한 기대감에서 출발하였다가 이 치열하고 지독한 경쟁의 순간에 있어서 인간답게 사는 일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갈무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런 힘이 나타나요. 끌어안거나 품어주는 힘이요. 중력 같은 힘 말이에요. 늘 그런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차츰 차츰 강해졌어요. 우리는 그런 힘이 너무 없는 곳에서 살고 있잖아요. …… 밀치는 힘, 내쫓는 힘, 책임지지 않는 힘…… 그런 게 많잖아요. 하지만 그는 다른 힘을 보여줄 때가 있었어요. 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어요. / 424p

 

 

내가 가가린센터에서 떠나기 전에 그녀가 평범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우리는 무중력에서 오래 살 수가 없어요. 지상으로 돌아와야 해요. 우리는 잠시 비범한 듯이 주목받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때가 되면 평범으로 돌아와야 해요.’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의 안착을 보고 나서는 내 것이 된 것 같았다. / 437p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우주란 온갖 첨단 장비로 둘러싸인 우주선을 타고 날아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어떤 그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현실 그 사이에서 떠도는 우리야말로 이미 우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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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문신한 소녀
조던 하퍼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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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전역에 내려진 사형 명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소녀와 아버지의 로드 스릴러!

묵직한 액션과 가족애, 쫓고 쫓기는 긴박한 추격전이 난무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

 

 

   ‘온 세상이 널 쫓고 있어!’

 

   <죽음을 문신한 소녀>는 일단 새빨간 표지의 강렬함에 압도당하고, 자동차 한 대가 조준경에 정확히 포착된 속표지를 보며 숨 막히는 추격전을 향한 기대감으로 한껏 차오르게 된다. 또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범죄심리수사물 <멘탈리스트>와 영화 ‘배트맨’의 프리퀄로, 고든 경감이 형사로 재직하던 시절을 다룬 드라마 <고담>을 제작한 조던 하퍼가 이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완벽해 보인다.

 

 

 

 

 

 

냉혹한 액션, 숨막히는 추격전, 살아남기 위해 내가 강해져야 한다

 

 

   잔혹한 범죄자들이 모여 있는 펠리칸 베이 교도소. 그곳에 ‘아리안 스틸’이라고 하는 범죄조직의 두목 크레이그 홀링턴이 복역 중이다. 다른 죄수와의 접촉을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다른 이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적인 존재다. 그에게는 발과 입, 눈과 손이 되어줄 많은 이들이 있다. 그가 쓴 복수의 영장을 대신 집행해 줄 이라면 감옥 안이든, 감옥 밖이든 어디든지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추종하는 미국 전역의 조직원들에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린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네이트 맥클루스키와 그의 여자 에비스, 그리고 그의 딸 폴리까지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이다.

 

 

 

 

 

   출소를 한 주 앞두고 있던 ‘파란 명사수’ 네이트는 크레이그 홀링턴의 동생인 척이 밖에서 활동할 조직원으로 포섭하려는 시도를 단숨에 거절한다. 이 일을 맡으면 감옥에서 나와 아리안 스틸이란 조직의 감옥에 다시 들어가는 꼴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거절이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네이트는 그 자리에서 척의 목숨을 거둔다. 결국 동생인 척을 죽인 자가 네이트라는 사실을 알게 된 크레이크 홀링턴은 잔혹한 살인 명령을 내리고, 네이트는 출소하자마자 에비스와 그녀의 현재 남편인 톰을 찾아갔다가 이미 집안에서 살해당한 것을 목격하고 만다. 명령이 떨어진 순간 이미 살인은 집행되었고, 이제 남은 자는 자신과 딸 폴리만 남았을 뿐이다.

 

 

 

   명사수의 눈이란 별명을 가진 네이트의 딸 답게 파란 눈을 가진 폴리는 평소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보다 애착 인형인 갈색 곰 인형에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고, 자신이 금성에서 왔다고 생각할 만큼 독특한 구석이 있는 열한 살 소녀다. 엄마와 톰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던 그녀 앞에 느닷없이 아빠인 네이트가 나타난다. 감옥을 탈출하지 않고서야 학교 앞에 아빠가 나타날 리 없다고 생각한 폴리는 특유의 영민함으로 뭔가가 평소와 많이 달라졌음을 직감하고, 그때부터 아빠를 따라 도망자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폴리는 그 책을 계속 읽었는데 거기서 금성이 겉보기에는 아주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 금성에 가서 보면 그 고요한 표면은 사실 산성물질로 이뤄진 구름 덩어리들이고, 그 밑에 있는 고요한 하늘 밑에는 들쭉날쭉한 바위와 울부짖는 폭풍 밖에 없다고 했다. 안에서 격렬하게 폭풍이 치는 이 진주 빛 행성에 대해 읽고 나서 그 생각이 폴리의 뇌 속에서 점점 커져가면서 뚜렷한 형태를 갖췄다. 나는 금성에서 왔다는 생각이. 폴리는 그렇게 느꼈다. 그녀도 밖에서 보면 조용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마음속은 산성 폭풍이 울부짖고 있다고.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왜 밖은 조용하지만 마음속에는 그렇게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다.

나는 금성에서 왔으니까. / 28p

 

 

 

   네이트는 자신과 딸의 목숨을 조여 오는 아리안 스틸 조직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먼저 폴리를 데리고 스톡턴으로 가서 거기 있는 사촌들에게 아이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죽은 에비스와 톰을 위해 복수를 하고, 자신과 딸에게 내려진 사형 집행 명령을 철회하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곳곳에 놓인 덫과 감시망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그는 이제 이 아이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 하나만이 그의 인생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네이트는 딸 폴리가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고, 자신이 형으로부터 배운 삶에 대한 이치들을 공유하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강해지려면 먼저 약해지는 걸 느껴야 해.” 네이트가 말했다.

“에?”

“닉 삼촌이 예전에 자주 이렇게 말했어. 근육을 강하게 카우고 싶으면, 근육의 힘이 다 풀리면서 스스로 약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밀어 붙여야 한다고. 인생의 이치가 대부분 그래. 시종일관 자신이 강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더 이상 강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야.” / 143p

 

 

“세상은 네가 그냥 두 손 놓고 앉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그냥 당하고 있기만 바라지.” 그는 그녀에게 계속 잽을 날려서 그녀를 쓰라리게 만드는 동시에 자신도 가슴 아파 하고 있었다.

“세상은 네가 스스로를 두렵게 느끼길 원해. 넌 주먹이 날아오도록 놔둬야 해. 그것을 받아들여. 그럴 준비가 돼 있어야 해. 한 대 맞았다고 해서 정신을 놓고 미쳐버리면 안 돼.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져도 안 되고. 넌 그 주먹을 맞고 거기 맞서 주먹을 날려야 하는 거야.” / 158p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여느 스릴러 영화처럼 연약한 소녀인 딸을 지키기 위한 아빠의 강인한 액션을 부각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특한 구석이 있지만 영특하고도 아빠의 유전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딸 폴리가 제 몸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을 터득해가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죽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며 아빠와 딸이 점차 가족애를 찾아가는 모습 역시 신파적이지 않으면서도 담백하게 연출되어 있다.

 

 

 

   무엇보다 한 편의 드라마처럼 각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가면서도 속도감 있는 전개를 펼침으로써 스릴러라는 소설적 장르를 제대로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를 더한다. 간간이 코리아타운 및 한국 음식,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존 박이라는 이름의 형사가 등장한다는 것도 한국 독자들에게는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심장이 쫄깃쫄깃 끝까지 기대감과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하는 <죽음을 문신한 소녀>는 한 번 손에 쥐면 주르륵 읽힐 만큼 흡인력 있는 소재와 전개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책이다. 과연 이들 부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족 모두에게 사형 집행을 내린 크레이그 홀링턴에게 복수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등장인물을 가상 캐스팅 해보는 재미도 있고, 어쩐지 후속작을 기대하게 되는 부분도 있어서 작가의 차기작도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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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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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축, 신화와 전설의 축을 정교하게 얽어낸 폴란드 문학의 정수!

놀랍도록 신비한 문학적 정취를 이루어낸 올가 토카르축만의 기묘한 판타지!

 

   ‘폴란드’ 하면 내겐 무엇보다 아우슈비츠의 역사로 통하는 나라다. 일명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며 나치스가 유대인 대량학살을 감행한 바로 그곳. 1939년 나치스 독일의 침입을 시작으로 서부 지역은 독일에, 동부 지역은 소련에 분할 점령된 뒤 유대인 학살과 냉전 체제, 사회주의 시대가 중첩된 그 거칠고 무거운 역사를 견뎌온 만큼 폴란드 문학하면 독립에의 갈망,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개인의 역사들이 무게를 이루는 작품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그래서 현재 폴란드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며 가장 권위 있다는 니케 문학상에서 ‘독자들이 뽑은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이유로, 비교적 근래에 읽었던 고전 <이별 없는 세대>를 떠올리며 전쟁이라는 공포의 상흔들을 문학이라는 힘을 빌려 남기려 했던 또 하나의 작품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한편으로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어쩌면 인류에 대한 이야기다

 

 

   ‘태고는 우주의 중심에 놓은 작은 마을이다.’

   <태고의 시간들>은 마치 ‘아주 멀고도 먼 아득한 옛날’을 더듬게 하는 어느 신화 속의 마을 혹은 실제 폴란드 어느 작은 마을의 지명 같은 낯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마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이곳은 대천사 라파엘, 가브리엘, 미카엘, 우리엘이 동서남북의 경계를 지키고, 깊고 어두운 흑강과 생기발랄한 백강이 가로지르며 온갖 욕망과 성스러운 우화들이 뒤섞인 공간이다.

 

 

 

 

 

 

   이야기는 1914년 여름, 느닷없이 러시아 군인이 찾아와 남편 미하우를 전쟁터로 끌고 가면서 홀로 뱃속의 아이를 키워야 했던 게노베파를 중심으로, 어떤 식으로든 전쟁을 견뎌내야 했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술 취한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것으로 삶을 연명하다 숲속에서 홀로 아이를 낳고 치유와 예언의 능력을 갖게 된 크워스카, 호황을 누렸던 사업이 전쟁으로 인해 몰락하고 기묘한 게임에 빠져 스스로 침잠의 상태에 빠진 상속자 포피엘스키, 독일군과 러시아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부유한 우클레야와 사랑 없는 결혼을 하지만 늘 태고 너머의 세상을 동경하는 크워스카의 딸 루타 등 한 가정의 삼대에 걸친 장엄한 서사를 여러 인물들과 매우 유기적으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태고의 시간들>은 바로 이 현실 같기도 허구 같기도 한 태고라는 마을 속에 20세기 폴란드 역사의 처절한 현실을 담아냄과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어디에도 없지만,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판타지를 펼쳐나간다.

 

 

 

예슈코틀레는 색채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흑백이거나 회색빛이었다. 광장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사내들은 전쟁 얘기에 열을 올렸다. 도시는 파괴되었고 시민의 소유물들이 거리 곳곳에 널려 있다, 사람들은 총탄 앞에서 도망치고 있다, 형제가 형제를 찾아 헤맨다, 러시아인과 독일인 중에 누가 더 나쁜 놈들인지 알 수가 없다, 독일인들이 살포하는 독가스로 인해 사람들의 눈이 터져나가고 있다, 기근이 수확기보다 먼저 찾아올 것이다 등등. 전쟁을 첫 번째로 발견된 병균과도 같아서 뒤를 이어 또 다른 병균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 11p

 

 

상속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러움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고난과 죽음, 부패를 목격했다. 예슈코틀레 곳곳을 걸었다. 유대식 도살장과 고리에 걸린 신선하지 못한 고기, 셴베르트의 가게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 얼어붙은 걸인, 아이의 관을 운반하는 작은 장례 행렬, 광장 옆 나지막한 집들 위를 낮게 유영하는 구름과 사방으로 내려앉아 모든 걸 지배하는 어스름을 보았다. 이 광경은 서서히, 그리고 부단히 거듭되는 분신을 떠올리게 했다. 그 속에는 시간의 불길에 희생양으로 던져진 인류의 운명, 모든 생이 깃들어 있다. / 43p

 

 

 

 

 

   흥미로운 것은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시간’, ‘파베우 보스키의 시간’,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짤막한 단편 또는 에피소드들을 전혀 이질감 없이 유기적으로 엮어나간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집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과수원의 시간’과 같이 동식물, 신과 천사, 마을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주체들을 의인화하여 태고의 모든 것들이 지닌 존재의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는 점 역시 독특하다. 한 마을의 역사 혹은 전체 인류의 역사란 이 모든 개개인의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어 쌓아올려지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왕풍뎅이 언덕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한 번, 내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밤이 되면, 그녀가 거기에서 내게 저주를 퍼붓곤 하거든.’ 그래서 달에게 물었어요. ‘무엇 때문에 그녀가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거죠? 인간의 용서가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러자 달이 대답했죠. ‘인간들의 고통이 내 얼굴에 검은 주름을 새기거든. 이러다 언젠가는 인간의 아픔 때문에 사그라들고 말 거야.’ 달이 이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랍니다.” / 137p

 

 

버섯균은 식물도, 동물도 아니다. 천성적으로 햇볕에 친화적이지 않기에 태양으로부터 아무런 힘도 흡수하지 못한다. 따뜻한 것이나 살아 있는 것들은 버섯균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천성적으로 따뜻하지도 않고, 생기도 없기 때문이다. 버섯균이 존재하는 건 땅속에 배어들어 있는 즙 또는 썩거나 죽은 것들의 찌꺼기에 남아 있는 즙을 빨아 마시기 때문이다. 버섯균은 죽음의 생이고, 부패의 생이며, 모든 죽은 것들의 생이다. / 225p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독단적이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는 아버지를 떠나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고자 했던 딸 아델카가 시간이 흘러 아버지의 집으로 잠시 돌아왔다가 몰래 들고 나온 어머니의 커피 그라인더를 꺼내어 버스 안에서 천천히 돌리는 모습이다. 비록 아버지의 집은 예전의 온기를 잃고 여전히 완고한 뜻에 가로막혀 있지만 외할머니인 게노베파가 그러했듯, 어머니인 미시아가 그러했듯 아델카 역시 어머니의 삶이 연속될 것이라는 것과 그러한 모성이 삶과 우주를 지탱하며 순환될 것임을 전하고자하는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전달되는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태고의 시간들>은 근래에 드물 정도로 정교하고 매혹적인 서사를 갖춘 작품이다. 20세기 폴란드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위에 환상적인 소재가 가미되어 한편의 우화 혹은 신화 같은 현실을 펼치는 이와 같은 전개는 가히 독창적이면서도 완성도가 높아서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각종 수식들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다만 은유적인 표현 및 현실인지 허구인지 모를 초현실적인 어법들이 소설을 담백하게 읽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그만큼 깊이 있고 독자적인 힘을 갖춘 작품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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