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날도 좋은 날,
영화 <일일시호일>의 원작!
다도를 통해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잊지 말고 사는
법을 배우게 되는 따뜻한 에세이!
다도(茶道)는 차를 달이거나 마실 때의 방식이나 예의범절을 가리키는 말로, 일본에서는 16세기의 정치가이자 승려인 센노 리큐라는
사람에 의해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차 문화는 한국의 차 문화에 비해 정교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 것은 물론 예의와 몸짓, 손짓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해서 ‘일본 예술의 집대성’이자 ‘데마에를 통해서 무를 지향하는 미의 종교’라 불리기도 한다. 좀 더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차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수고 덕분에 이제는 가정에서도 쉽게 차를 즐길 수가 있게 되었지만, 굳이 수고로움을 더해서라도
고즈넉한 정경 아래에서 정성스럽게 내린 차 한 잔의 품격을 제대로 체험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때문에 나는 <매일매일 좋은 날>이란
책을 읽으며 차 한 잔에 인생을 녹여내는 정성이란 것은 무엇인지, 차를 통해 인생을 남김없이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이란 또 무엇인지 더욱 진하게
느껴보고 싶어졌다.
천천히 알아가다 보면 인생이 풍요로워질
거예요
<일일시호일>이란 이름으로 개봉되는 영화의 원작 <매일매일 좋은 날>은 한 여성이 다도를 배우고 이를 통해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내 일생을 걸 만한 무언가를 찾고 싶었던 노리코는 문득 다도를 배워 보지
않겠냐는 엄마의 제안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다.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세계, 부자들의 사회적 지위나 이유 모를 권위주의 문화, 여자들의
허영심 경쟁, 결혼을 취직으로 여기는 보수적인 부모들 아래에서 자란 자제들이 받는 일종의 신부 수업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부들이 남편의 출세와 자식의 입시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던 그 시대의 여느 여인들과는 달리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싹싹하지만
어딘가 의연한 다케다 아주머니로부터 배우게 될 거라는 말에 호기심에 가까운 마음으로 사촌인 미치코와 다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청결한 공기, 오랜 세월 손때가 탄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다케다 아주머니의 집에서 그들이 가장 처음 배운 것은 다구를 닦거나 받치거나
할 때 쓰는 ‘후쿠사’를 다루는 일이었다. 후쿠사의 양쪽 끝을 잡아 “팡!” 하고 울리며 잡아당기고, 말차는 남기지 말고 마지막에는 소리를 내어
끝까지 마시는 거라는 아주머니의 첫 가르침에서부터 그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또 차선이니, 차건이니 복잡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도 이유는
상관없이 원래 다도라는 건 그런 거라고만 말하는 아주머니의 대답 역시 그들을 난감하게 만든다. 다실에 걸려 있는 ‘일일시호일’이라는 글귀는 또
뭐란 말인가. 다도의 작법이 무척 까다롭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걸음걸이, 도구를 다루는 법까지 수많은 주의 사항이 요구된다는 것을 거듭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라는 건 말이지, ‘형태’가 그 첫걸음이란다. 먼저 ‘형태’를 만들어 두고 그 안에 ‘마음’을 담는
거야.” / 49p
무엇이든 머리로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된 노리코를 지적하며 다케다 아주머니는 머리로 의식하기보다 다도는 그냥 한 번이라도 더 많이
연습해 손이 저절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몸이 이끄는 대로, 물 흐르는 듯 데마에를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노리코는 그간 다도를 얕잡아 보고 교만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상대방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제로’ 상태의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비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채울 수 없다는 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정신이 들자 나는 그저 묵묵히 진한 차를 개고 있었다. 가마 앞에 앉아 말차를 개는 감각에, 그 진한
차 한 잔을 개는 일에만 나의 ‘마음’ 전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도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서 어디론가
내달리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어느새 초조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때 나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온전히 ‘여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
170p



노리코는 차를 배우면서 점차 새로운 감각에 눈을 떠간다.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하여 계절감까지 가미된 화과자의 매력과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이 멋과 재치가 깃든 다도구, 다실에 놓는 자연의 풀꽃이나 꽃가지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다화, 붓 한 자루의 감동과
재치를 느낄 수 있는 족자까지. 화과자를 먹고, 도구를 만지고, 꽃을 바라보고, 족자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과 물을 느낌으로써 시각과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오감 전부를 통해 지금이라는 계절을 맛보고 상상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된 것이다.
분명 옛사람들도 이렇게 계절과 마음을 동일시하면서 살아남으려고 했을 것이다.
절분, 입춘, 우수. 그렇게 손꼽아 세어 가며 자기 자신을 격려하고, 몇 번이나 겨울로 되돌아갈 때마다
시험에 들면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인생의 어느 계절을 넘어서려고 한 것이겠지.
그래서 다인들은 명절이나 계절의 행사를 하나하나 소중히 축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계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 184p
해가 거듭될수록 노리코는 취업이나 연애가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남들과 달리 자신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다도를
배운 지도 3년 차, 5년 차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어렵고 자신에게 소질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때 그녀는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제대로 마음을 담고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빠릿빠릿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만의 다도를 해 나가면 되는 것이라고.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듣고,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보는 것,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보며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기는
거라고. 다도란 그런 ‘삶의 방식’이라고. 날마다 좋은 날, 그제야 그녀는 다실에 한결같이 걸려있던 액자 속 ‘일일시호일’의 참뜻을 체득하게
된다. 결국 ‘차’라는 것은 인생의 계절을 넘나드는 일이며 이 순간의 감각을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그곳은 나를 이루는 넓은 저변이었다.
계속 여기에 있었고 어딘가에 갈 필요도 없었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야만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부족한 것도 무엇 하나 없다.
나는 그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온전히 충족시키고 있었다. / 254p
다도의 풍경은 밖에서 보면 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동시에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정적은 농밀하다.
달려 나가 이 기분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는 가슴속 열기와, 말이 따라가지 못하는 덧없음과,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서로 다투어 만들어 내는 침묵.
침묵이 이렇게 뜨거운 것이었나. / 263p



노리코는 무려 25년 동안 다도를 배우고 익혀나가며 배움이란, 일생을 다해 자신의 성장을 깨달아가는 과정임을 몸과 마음으로 느낀다.
다도를 처음 접할 때만 하더라도 복잡한 절차와 예의범절, 격식을 요구하는 그 까다로움에 어쩜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이제껏 흔들리는 자신을 지탱해주고 ‘인생은 긴 안목으로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는’ 거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노라 고백한다.
어쩌면 노리코가 배운 것은 차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법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책을 읽는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다도에 담아내는 마음을 섬세하게 꾸려낸 이 이야기는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차 한 잔 같은 책이었다. 차마 문장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
감성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해낼지 궁금하기도 해서, 조만간 영화관을 찾아가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