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가족에게 몰아닥친
우울증이라는 병이 할퀴고 간 상처와 극복의 정서들!
어둡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슬프지만 따뜻한 감동이 있는
사람 사는 이야기!
나는 살인자다. 그게 내 정체다. 난
삶을 훔치고 있다. / 125p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날, 엄마의 표정이 내 머릿속에 들러붙어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직장으로 암이 퍼졌다네." 불과 2년 전에 자궁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던 엄마는 자신의 몸에 또 다른 암세포가 번지고 있었음을 꽤 담담하게
말했다. 회사에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모아놓은 월급을 엄마의 첫 수술에 고스란히 보탰던 나는 2년 뒤, 학자금 대출 상환을 목전에
두고 다시 또 엄마의 수술 비용을 대어야 할 것이란 생각에 당장 엄마의 아픔보다 내 앞일이 더 막막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당시 무너진 회사를
수습하느라 엄마를 제대로 돌볼 여력이 없었고, 직장과 병원을 오가며 고군분투 해야만 했던 나는 마치 내가 그 질병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렇게 엄마의 아픔은 나에게로까지 전이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상처와 상흔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당신 몸의
아픔보다 가족이 짊어져야 할 무게에 더 숨막혀했던 것 같다. 자신이 가족 모두에게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 삶을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염려해 하던 그 자괴감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을까. 소설 속의 존과 마이클이 그러했던 것처럼.
당신이 최선을 다해
가족들을 사랑했다는 점을 알아두세요
<내가 없다면>은 우울과 불안이라는 강박에 시달리는 가족을 둔 한 가정의 상처와 극복과정을 담아낸
소설이다. "일이 생겼어요. 제 형에게요." 입 밖으로 꺼내버리는 순간 형에게 닥친 비극이 현실이 되어 버릴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 앨릭,
비상사태 직전에 연결되지 못한 담당의사의 음성사서함을 통해 형인 마이클에게 닥친 비극이란 것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독자를
흥분과 충격에 빠져들게 하는 도입부는 이미 그 어느 소설보다도 강렬하다.
흥미롭게도 소설은 곧장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인 마거릿의 시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여느 미국 여자들처럼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사교계에 데뷔하고 적당한 남자를 골라 결혼을 하는 전형적인 삶을 뒤로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그녀는 그곳에서 영국식 예의범절과
형식을 중시하는 존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미국적 사고관을 가진 여자, 영국식 사고관을 가진 남자의 만남은 서로가 너무나 달랐기에 마음을
이끌기에 충분했고, 결국 영원을 맹세할 날만을 앞둔 어느 날 존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마거릿은 그가 이미 한 번의 병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17년 동안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마이클,
실리아, 앨릭을 낳아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예정된 불안은 언제고 마주하게 될 운명이었을까. 우울증이라는 괴물은 존을 끊임없이 따라다녔고 마침내
일상이 뒤틀리고 가족 모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지경에 이르게 된다.
소설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존의 강박 증세를 매우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냄으로써 마치 괴물과도 같은 그 존재가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어떤 방식으로 전이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스스로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리는 살인자에 비유하며 점점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과 아이들을 분리시키려는 준비를 하는 모습을 비롯하여, 괴물이 마침내 아들인 마이클에게로까지 손길을 뻗는 모습에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로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극적이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눈앞에서 털갈이 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런던의 그 병원에 있는 작고 낯선 방에서 그 의사가 내게 아니라고,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재고해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고, 결혼을
연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면, 그 의사가 내게 존을 사랑하는지 묻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마이클이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이클이란 말을 혼자서 수도 없이 되뇌다 보면 그 의미가 사라져버리지만, 내 첫 아이의 신비는 마이클 외에 그 어떤
말로도 나타낼 수 없다. / 55p
이제 아이의 눈에서 날 동정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가 보였다. 이게
바로 내가 식구들에게 하고 있는 짓이다. 끝도 없이 계속. 그러다 지금 앨릭의 얼굴이 그렇듯 식구들의 얼굴은 날 고문하기 위해 야수가 사용하는
가면이 된다. 옛날에는 앨릭을 위해 이야기들을 지어내 들려주면서 내 목소리로 앨릭을 지켜줬다. 유령들로부터 앨릭을 보호했다. 이제는 내가 앨릭의
집에 갇힌 유령이 돼버렸다. / 114p


가족과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자살이 가족 전체에 미치는 트라우마는 모두의 삶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회복되지 않는 가난, 서로를 돌봐야 한다는 연대 의식이 낳는 피로감, 타인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기대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외로움까지. 특히 아무리 가족이라 하여도 오빠마저 상태가 바닥을 치는 광경을 보며 자신의 몸부터 사릴 수밖에 없게 되는 이 지난한 현실에 대한
실리아의 고백들은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의 우울 증세가 맏아들인 마이클에게 유전되는 이 비극을 어떻게 해서든 바로잡아
가족 모두가 안정되기를 소원하는 마거릿,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해 더 깊은 우울과 불안에 사로잡히는 와중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했던 마이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족의 정서적 불안을 최대한 돌보며 치유하고자 애썼던 실리아, 가장 이기적인 성격이지만
종래에는 형의 고통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게 하려 했던 막내 앨릭까지. 우울증과 불안으로 고통 받는 가족의 상처를 모두가 감내하고
함께 치유하려는 이러한 시도들은 깊은 감동을 준다.
마이클도 메신저백에서 10달러 지폐를 꺼내서 수줍게 내밀었다. 앨릭은 보지도 않고 그
돈을 받아서 같이 셌고 그 모습을 실리아가 테이블 맞은편에서 보고 있었다. 앨릭은 현금을 지갑에 넣고 계산서 위에 비자카드를 놓고, 계산서
덮개를 덮은 후에 테이블 가장자리로 밀었다. 나는 계속 신용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앨릭이 무시했다. 좀 덜 비싼 곳으로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날 좋은 곳에 데려와서 대접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솔직히 집에서 먹었더라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
232p
한 번이라도 진정한 공포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속에 구체적인 두려움의 대상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자체가 공포로 꽉 차서 자신이란 존재가 공포 자체란 걸 깨닫게 된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공포를 표현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는
이유는 이것 말고 다가올 1초 1초를 달리 어떻게 견뎌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의 조건이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이 두려움의 순간들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간절하고 절박한 소망으로 가득한 이 삶. / 316p
마이클이 우리 곁은 떠났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구하려는 노력을 멈춘 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게 된 것이다. 그 노력은 줄어들었지만 사라지진 않았다. 그건 우리가 겪는 혼란의 일부이자 동기 없는 활동이 됐지만 어쨌든
기이하게도 그 나름대로 계속 이어졌다. / 419p
'내게 상담하러 오는 여자들과 그들의 애인이나 남편,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는 무너지고 있어. 돈
때문이든 정신적인 문제든 이유가 뭐든 말이야. 그런데 그들은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절망하고 있어. 엄마는 우리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거지. 우리가 함께했던 세계가 변하지 않도록 말이야. 나도 이젠 그걸 이해해.' 결혼식 당일, 실비아가 엄마와 나누는
대화가 유독 마음에 많이 남는다.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지, 어떤 정서가 우리를 연대하게 하는지, 어떠한 질병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어서가 아닐까.
<내가 없다면>은 우울증과 불안에 관한 이야기이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며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극복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퓰리처상 최종후보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입체적인
캐릭터와 섬세한 문장, 시대상이 낳은 인간사에 대한 철학까지 깊이 있게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잘 다룬 소설이라 특히 더 기억에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