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YTN 지식카페 라디오 북클럽>의 진행자가
들려주는 명작 이야기!
지난해에 읽은 책들을 쭉 세어 보니 무려 백 하고도 세 권을 더 읽었더라고요. 특별히 많이 읽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숫자에 무척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육아에만 전념하고 있던 단조로운 일상에 책이 주는 즐거움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또 상상할 수 없었던 낯선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책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겠지요. 뭐,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저는 애초에 '이야기'라는 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레 책에 이끌렸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주지 않아도, 내가 들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그 자체로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존재라고요.
<YTN 자식카페 라디오 북클럽>의 진행자로 무려 천 권에 달하는 책을 읽었다던 이미령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은 '무지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기도 하였고, 콘크리트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가슴을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져주기도 하였고, 딱 내 눈알
크기 밖에는 보지 못하는 세상을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도록 동공을 홀짝 열어주기도' 하였다고요. 쉬지 않고 '천 권에 가까운 책을 읽어대자
그제야 사색이 일렁이고 나와 다른 자에 대한 여유 있는 관조의 틈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독서의 양이 삶의 질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저자는 그동안 읽었던 책 중에 울림이 컸던 책들, 나의 벗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들을 고민 끝에 골라 그것으로
하여금 인생의 소중한 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 나누고 싶었나봅니다. <이미령의 명작 산책>은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어느 지점을 함께 해준 책에 대한 진솔한 독서 일기이자, '나는 왜 책을 읽을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을 담아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꿈이 커지고 사색을 일렁이게 하는 지성들과의
만남
<이미령의 명작 산책>은 총 48편의 명작을 크게 다섯 장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찬란하지만 서글픈
인생을 관조하고, 청춘의 시간을 더듬어가기도 하며, 자연이 들려주는 생명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품들뿐만 아니라 오만한 세상에 뒤통수를
날리기도 하고 인생의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는 지점에 이르러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찬란하게 슬픈 생명의 법칙을 다룬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존재를 쫓는 인간의 단상을 그린 <고도를 기다리며>, 자연주의자의
삶을 다룬 <월든>과 같은 명작들은 꽤나 익숙하지만 그 외에는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살짝 망설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간 저는 독서론에 관한 책이라 하면 약간의 편견이 있던
터였습니다.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에는 저자의 생각에 크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입니다. 저의 생각을 비교판단하기보다 그저 저자의 생각대로
작품을 판단하게 되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이러한 저의 고민은 기우에 그쳤습니다. 마치 라디오 방송에서 사연을 들려주듯 저자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책의 한 단편들은 굳이 읽어보지 않았다하더라도 쉽게 공감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이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했으니까요.
여러 책들 중에서 외투 한 벌에 담긴 쓸쓸한 실존을 다룬 니콜라이 고골의 <외투>라는 작품이 퍽 인상에
남습니다. 관청의 9등 문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너무나 낡아서 걸레로도 쓰지 못할 자신의 외투가 더 이상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칼날 같은
한파를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솜씨 좋은 재단사는 더 이상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낡은 그의 외투를 보며 이참에 새로운 외투 한
벌을 마련하라고 권했어요. 외투 한 벌을 마련하는 일이란 그의 봉급을 다 털어 넣어야 할 정도로 사치와 다름없었지만, 그는 돈을 아끼고 아껴서
결국 아주 멋진 외투를 마련합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고급 천을 써서 맵시가 나는 이 외투를 입는 순간 그는 자신에게 새로운 날개가 달린 것처럼
황홀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한밤중에 광장에서 강도에게 외투를 빼앗기고 맙니다. 그는 곧 혈안이 되어서
외투를 찾아 나서지만 상심만이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이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하고 혀를 찰 법도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느끼게 되는 절망감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쓸쓸한 실존, 그
덧없으면서도 가장 버거운 삶의 무게! 우리는 저마다 그런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더욱 씁쓸하게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그 쓸쓸한 실존.
아까끼가 평생에 단 한 번 장만한 고급 외투는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신분들의
눈에는 허섭스레기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령이 되어버린 아까끼가 자기 몸에 딱 맞는 관리의 외투를 빼앗은 뒤 사라지고 말았다는 내용은,
인간 희로애락의 무게와 부피는 누구에게나 아주 똑같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요. 더 가지려고 머리를 굴리고 뺏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작품입니다. / '외투' 중에서 29p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며 살면 명예나 체면이 상실되는 시기에 쉽게 감정이 상하여
나약해지며",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어쩔 수 없이 불안감을 가지고 살게 되므로 일상이 단조롭고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만들어낸 그의 정체성"일 수도 있으며, 이렇게 남이 만들어낸 정체성에 휘말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늘 자신을 설명해주어야 하고", 이런 삶을 반복하다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 '내 인생의
탐나는 영혼의 책 50' 중에서 102p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역시 단연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에 관해 배우기를, '신과의 소통이 소수 특권층에게만 허락되었다고 고집하던 세력들에게 분연히
맞서 피로써 쟁취해낸 자유의 역사'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를 주도한 칼뱅이 사실은 구교의 교황이나 황제보다 더 무시무시한 힘으로
종교의 자유를 외치던 시민들을 자신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사상의 자유도 빼앗았으며 그야 말로 '칼뱅이 법이요, 법이 칼뱅이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철저히 배척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그런데 어느 무명의 신학자 한 사람이 칼뱅의 종교적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막 스무 살을 넘긴 미셀
세르베투스는 참으로 맹랑하고 무모할 정도로 칼뱅에게 신학적 견해를 묻는 대범함을 보였습니다. 이에 칼뱅은 하늘 아래 '자기와 다른 의견'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였습니다. 이를 비판한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은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라고요. 오늘날이라고 이와 다를까요. 우리는 누구나 의견을 낼 권리가 있고 다양한 견해를 포용해야
한다고 배워왔지만 때때로 다른 사람이 자신과 견해가 같지 않을 때 불쾌감을 느끼거나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념비만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수백만의 존재를 망가뜨리고 그
무덤 위에 자신들의 허망한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인류의 진짜 영웅이 아니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 230p
이렇듯 <이미령의 명작 산책>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명작을 엄선하여 이를 통해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스스로에게 선물해볼 것을 권합니다. 그것은 결국 '책 읽기'라는 행위를 필요로 하겠지요. <천천히 읽기를
권함> 편에서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있는 동안 행복하고, 천천히 읽어가는 동안 행복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책을 덮으면서
행복하면 됐지 더 바랄 것이 뭐 있을까요' 라고 하였듯 그저 책을 가까이 하고 일상처럼 여기면 되는 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책장을 채우고 있는 책들을 보며 힘들 때는 위안이 되고, 행복한 상상을 하게 해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그저
감동을 느낍니다. <이미령의 명작 산책> 덕분에 꽤 오랜만에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게 되었네요.
누군가에게도 이 책이 그런 소중한 계기를 선물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