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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교토
주아현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달, 살아보는 여행을
택한 여행자의 소소한 일기!
삶의 잔잔한 잔상이 머물러 있는 교토의 골목에서 일상
같은 여행을 꿈꾸다!
느리게 걷고,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어도 괜찮고, 일주일 전에 들렀던 식당을 다시 한번 불쑥 찾아가볼 수 있는
여행이란 건 참 특별한 일인 것 같다. 비록 누구나 다 아는 관광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광경에 숨 막힐 것 같은 이채로운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잠깐의 여행자가 아닌 '살아보는' 여행을 택한 <하루하루 교토>의 저자 주아현은 부러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일상 같은
여행이 하고 싶어 교토를 찾았다.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중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는다'는 대사처럼,
한가로운 일상이 묻어난 골목에서, 병아리처럼 줄을 지어 걸어가던 귀여운 유치원생들과 따뜻한 미소로 아이들을 보듬던 선생님에게서, 남편이 커피를
내리고 아내가 케이크와 타르트를 굽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교토의 언어들을, 그 소소함을 사랑했다.
사소해서 더욱 아름다운, 느리지만 행복한
여행
<하루하루 교토>는 저자가 한 달 동안 교토에 머무르면서 기록한 소소한 일기와 사진들을 담은
여행에세이다. 교토는 일본의 옛 수도이자 예스러운 분위기와 현대의 모습이 조화롭게 공존하여 가장 '일본스러운' 분위기를 담고 있는 도시라 알려진
바로 그곳이다. 저자는 처음 오사카 여행 차 교토를 방문했을 때, 버스를 타고 기요미즈데라로 향하는 동안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동네의 풍경
때문에 다시 꼭 이곳을 찾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해 질 녘 가와라마치 거리를 걸으며 바라보았던 가모가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달간 교토에서 살아보기'를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거나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채워나가지도 않는다. 미리 세워놓은 위시리스트라는
것도 대단히 특별할 게 없다.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카페나 장소는 미련이 없을 만큼 몇 번이나 가기, 빈티지 숍에서 예쁜 원피스를 사서 하루
종일 입고 다니기, 자전거 바구니에 오니기리를 담고 산책하다가 아무 데서나 털썩 앉아 먹기, <시간을 달리는 소녀> 속 마코토가 된
듯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전철 타고 아무 곳이나 가서 즉흥 여행하기' 등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곰곰이 떠올려보니 3박 4일, 4박 5일 일정으로 여행할 때는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이란 생각에, 오히려 이 소소한 것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게으름을 피워도 되는 여행, 어울리는 노래 몇 곡을 듣다가 느긋하게 나갈 준비를 해도 되는 여행, 오늘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만 아는 맛집이었다면 그 우연함이 예상 외의 기쁨이 되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여행 그리고 낯선 땅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 게다가 교토라는 조미료가 뿌려져 완성된
이 모든 리스트는 내게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쉬어 가는 여행에서 내게는 나름의 할 일이기도 했고, 매일 밤마다 오늘 이룬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치 학교 다닐 적 스터디 플래너에 적어둔 오늘의 공부를 끝냈을 때 뿌듯해하며 체크하던 어린 날의 나처럼. /
114p
삶의 잔잔한 잔상이 주는
여운, 교토의 골목
실제로 <하루하루 교토>에는 우연함이 가져다주는 여행의 행복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유독 날씨가 더웠던
날, 그녀는 빙수를 먹으러 나섰다가 조금 더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가 그림 같은 풍경에 사로잡힌다. 푸른
하늘과 잘 어울리는 초록색 나뭇잎들, 그리고 분홍색 벚꽃, 보석을 물에 풀어 놓은 듯 반짝거리며 흐르는 강물. 그곳은 기야마치, 버스를 타고
이동했으면 절대 보지 못했을 아름다운 거리다.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 같은 곳으로 외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카페 '앤 셜리'의 방문도 의외의
행운이었다. 휴무일이 잦고, 따로 휴무일을 확인할 수 있는 매체마저도 없는 곳이라 혹시나 이곳을 찾아갔을 때 문이 열려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행운아라고. 그녀는 그곳에서 잠시 어느 만화 속으로 들어간 기분을 만끽하며 주인분이 직접 우려 주신 밀크티 한 잔으로 특별한 손님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하루하루 교토> 속에는 '앤 셜리'처럼 그녀의 애정이 듬뿍 담긴 공간들이 자주 등장한다. 노조미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스타의 사랑스러운 라테 아트를 즐길 수 있는 '퍼센트 아라비카', 남편과 아내가 함께 운영하는 카페여서 그런지 더욱 포근하게
느껴지는 '와이프 앤 허즈번드', 교토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물어봐도 좋다는 할아버지의 'Ask me!', 교토에 온
기분을 실감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는 '브랑슈' 등이 그러하다. 그녀의 사진 속에 담긴 식당과 카페의 풍경들은 오직 교토 만의,
교토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시선을 끈다. 어쩌면 이것이 유독 그녀의 에세이에 식당이나 카페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소중한 기억을 선물하는 공간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그곳을 찾게 되는 법이니까.
교토에 있는 가게들은 맛이나 인테리어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있는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가게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카페는 교토에 자리하고 있음을 카페 그 자체가 알려준다고 해야 할까. 교토에 있는
공간들은 참으로 교토와 잘 어울린다. 그 공간 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단순히 머문다거나
먹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중한 기억을 선물해준다. / 48p
매일의 여행이 늘 즐거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홀로 하는 여행에서 때때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찾아와 그늘지게 만드는
나날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도 그녀를 위로한 것은 '공간'이었다.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위치하여 자주 찾았던 카페 '키토네'다. 오늘도 여전히
조용하고 평화로운 그곳에서 그녀는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이스커피 한 잔과 치즈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패니욜로의 기타 소리와 가게 안에 울리는 작은 소음들이 점차 그녀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기운을 선물해주었다. 누군가의 말로도, 여행 자체가
주는 행복도,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았던 그녀에게 이 좋은 공간이 주는 힘은 그렇게 큰 것이었다. 그렇게 다정한 공간이 주는 위로에 기대어
보고, 다시 평안을 얻어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얻는 것이 또한 여행의 힘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게 한 번 더 귀를 기울여주고 손길을 뻗어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주는 마법 같은 곳. 유행하는 것, 세련된 것만 따라가기 급급한 요즘의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키토네나 교토 대부분의 카페들은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옛것, 촌스럽지만 아날로그하고 투박한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지켜내고 있었다. 이들이 만든 소중한 공간에서 따뜻한 기억과 많은 영감, 좋은
기운까지 얻어 가자니 커피 한 잔 값만 지불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나는 이 공간에 머물 때마다, 나중에 나이가 좀 들면 키토네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생각하곤 했다. / 139p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날, 헤이안 신궁 앞에 있는 츠타야 서점을 찾아 책을 읽으며 보낸 그녀의 시간이 유독 인상에
남는다. 시간이 금인 여행객이 타지에서 하루를 서점에 몽땅 서버린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살아보는' 여행이었기에 가능한
일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루하루 교토>를 읽으며 낯선 곳에서 마치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처럼 일상을 누리는 여행을 나도 한번쯤은
해보고 싶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오는 강가를 사랑한다, 동네를 걷다가 잠시 앉아서 쉬고 있으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작은 놀이터를 사랑한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비록 대단한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의 평안과 여유로움을 주는 그런 바로 그런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