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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가도이 요시노부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2월
평점 :

일본 최고의 계획도시를
만들기 위한 야심찬 계획이 시작되다!
회색빛 저습지에서 오늘날의 도쿄를 탄생시킨 장인들의
위대함을 담은 역사 소설!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 속 인물하면 단연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 하면 평범한 신분으로 성장해 무장이자 정치가가 되어 마침내 일본 최고 권력자에 이르는 상징적인 인물로 손꼽히지만, 조선
침략의 원흉을 제공한 의미로 우리 민족에게는 뼈아픈 역사를 남긴 침략자로 통한다. 이렇듯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상처를 안겨다준 것과 동시에
가장 위대한 전투를 남기게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경우 그 유명세와 일본에 남긴 업적에 비례했을 때 우리에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기껏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그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전국시대를 수습함으로써 무려 260년간
평화의 시대를 이끌었다는 정도에만 그칠 따름이다.
그러다 최근 <금색기계>라는 일본의 한 소설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에도 시대'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잠깐이나마 검색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나는 전후 혼란기를 수습하고 통일을 주도하여 일본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여러 일본 소설이나 인문학 관련 저서 등을 접하다보면 유독 이 '에도 시대'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이 시기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그에게까지 가 닿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때문에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라는 도서가 출간되자 이건 읽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인내의 제왕, 견뎌서
이겨내라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불모지나 다름없던 에도를 새 시대로 열어가는 과정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지형, 화폐, 식수, 에도성 축조와 천수각 건설에 이르기까지. 도시 건설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이룩하기 위한 그 장대한 여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빛나는 통찰력과 인내, 이를 완성시키기 위한 장인들의 피나는 노력들이 담긴 한 편의
드라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랫동안 눈엣가시 같았던 이에야스에게 간토 8주와 기존의 영지를 교체할 것을
명령한다. 표면적으로는 오다와라 정벌의 공로에 보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야스를 대대로 섬기던 무사와 백성들을 빼앗아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맹렬하게 반대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만다.
더군다나 도시의 크기와 접근성을 고려했을 때 적격이라고 판단되는 오다와라를 제외하고 에도로 가겠노라 선언한다.
에도는 오늘날의 도쿄를 이르는 곳으로, 당시 옛 수도인 교토와 오사카에 비하면 에도는 그저 회색빛 저습지에 불과한
황폐한 땅이었다고 한다. 그의 가신들은 이에야스가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간토에는 무궁한 발전의 여지가
있음을 직감했다. 잘 다듬어 논을 개답하고 도시를 조성하면 가미가타보다 나은 생산지역과 소비지역이 될 것이며, 그 중심지로 에도를 선택한 것도
여러 가지 지형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라 여긴 까닭이다.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과 쌀과 흙과 돈을
투입한 거대한 모험 앞에서 그는 오직 새 시대를 열 이 땅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기다림의 천재였다. 가학적이라고 할 만큼 '견뎌서 이겨내는' 것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간토 8주로 가시오.'
육 년 전 히데요시의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인 것도 가장 밑바닥에는 이에야스의 이런
기질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를 비롯해 간토 8주야말로 기다리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견뎌내면 일본에서 으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야스가 가장 선호하는 형태의 땅이었다. / 139p
이에야스는 비만 오면 홍수가 나기 일쑤인 에도 땅의 정지 작업을 이나 다다쓰구에게 지시함으로써 도네강을 동쪽으로
옮기는 등 에도의 수로 정비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겁쟁이처럼 늘 몸을 숙이고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주는 이에야스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이나 다다쓰구는 장남 구마조, 차남인 다다하루, 또 그의 아들 장남 한자에몬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쳐 도시 정비 사업에 모든 것을 바친다. 이들의 장구한 노고와 숭고한 열정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재해 예방 혹은 인공제방의 힘을 과신하지
않는 하천공사"를 근간으로 하는 공법에 따라 마침내 에도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된다.
이는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에도의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쿠보 도고로와 로쿠지로 등의 노력에서도 빛을
발한다. 입체교차라는 공법, 암거 즉 지하에 매설하는 획기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비전문가에 의한 각종 시행착오에서 비롯하여 전문가 집단에 의한
고도의 개발 사업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단순히 식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과 애환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도시 정비와 식수 문제 해결 외에 "화폐를 여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이에야스는 화폐 주조의
기술을 보유하기 위한 노력에도 힘을 기울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서도 건방질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금공 기술과 화폐 주조를 담당하는 고토
가문의 고토 초조는 화폐 주조법을 익히고자 하는 이에야스에게 자신을 보좌하는 직공 한 명을 떠넘기다시피 하고 교토로 돌아간다. 그러나 일개
직공에 불과한 줄 알았던 쇼자부로는 사실 야망이 있는 인물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어 점차 이에야스를 만족시키기에 이른다.
드디어 결심을 굳힌 이에야스는 그로 하여금 오반 주조를 금지시키고 도쿠가와 식의 새로운 화폐인 고반 주조를 명한다.
이는 히데요시를 반하는 일이며, 화폐 전쟁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치밀하고 정교하며 기다림과 인내라는 과정이 요구되었다. 히데요시를 몰아내고 마침내 도쿠가와가 정권을 차지하기 이르러서야 마침내 일본
화폐사는 완전히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기다림의 결실 끝에 이루어진 성공이라 할 수 있겠다.
위대한 장인과 묵묵하게 이들을 따르는 작업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의 에도성이 없었을 제4화 '석벽을
쌓다'편에서는 그 어느 이야기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빛을 발휘한 이들의 애환이 엿보인다. 채석장에서 석수장이인 고헤이는 돌의 결, 즉 절리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 '투시안 고헤이'라 불리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다이칸가시라인 오쿠보 나가야스의 부름을 통해 천하제일의 성의 석벽을 쌓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역할은 천하제일의 돌을 발견하는 것으로, 자신을 따르던 요이치의 목숨을 잃은 대가로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뛰어난 돌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것을 에도성에까지 옮길 수단이 없던 그는 마침내 에도로 입성하게 되고 그곳에서 돌의 무게와 기울기를
투시하는 듯 돌쌓기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산타를 만나 마침내 자신의 돌이 에도성에 이르는 광경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비록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흔적으로 인해 당시 이즈산 정상에서 발견한 이 돌이 지금과 같은 것인지 보장을 할 수는 없으나 석벽 하나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어린 위대한 유산임을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천수각을 짓고자 하는 이에야스의 뜻과 마침내 천수각에 올라 그의 후계자 히데타다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뻗어가는 에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귀결된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곳에 수로와 식수, 화폐가 정비되고 도시가 완성되어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
활기찬 도시가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란 어떤 기분일까. 이에야스가 천수각을 통해 이 사업에 희생되고 위대한 정신을 드높인 장인들의
노력에 애도를 보낸 마지막 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보이는 곳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장인 정신을 빛낸 이들을
기리고자하는 저자의 의도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흰색은 죽음의 색……"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무수히 죽은 사람들 덕분이니까."
이에야스를 기른 부친 마쓰히라 히로타다. 미카와노쿠니 오카자키에서 처음으로 집안의
세력을 크게 확장한 조부 기요야스, 나루세 마사요시나 도리이 모토타다 같은 가신을 대신해 처절한 죽음을 맞이한 다른 가신들, 이에야스를 세상에
나오게 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엇보다 지금까지 건축, 도장, 채굴, 매립, 개간, 조선, 운반…… 위험한 일터에서
목숨을 바쳐 열심히 일하며 성을 짓고 도시를 조성하는 데에 공헌한 무명의 사람들.
"그렇게 첩첩이 쌓인 시체 위에 내가 있어 너도 있는 것이다. 히데타다, 이 천수각은
그들의 혼령을 모시는 새하얀 묘석이니라. 정성을 다하여라." / 368p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곳에서 빛날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많은 이들의 염원을 읽는 일이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감동을 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삶의 발전을 이끌고 오늘을 기회의 시대로 열어준 과거의
선조들에게 특히 감사함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