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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평점 :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이덕무의 삶과 철학으로부터 얻는 진정한 가치!
이덕무의 문장으로부터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온기를
얻다!
두 해 전 겨울, <조선 최고의 문장 이덕무를 읽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18세기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초정 박제가와 더불어 당대를 빛낸 위대한 지식인이지만, 상대적으로 오늘날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덕무의 삶과
그가 담긴 기록들을 조명한 책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18세기 지식인의 기록들을 살펴보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를 벗어나 개성 넘치는 그의 문장과 당대의 풍속을 현미경 들여다보듯 면밀히 살펴보는 재미는
물론, 오늘의 이치에도 닿는 훌륭한 철학을 엿볼 수 있어 유독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로부터 2년 뒤, 이덕무의 문장이 또 다른 한 권의 책으로
찾아왔다. 색감이 고운 복숭아를 담은 예쁜 표지와 함께. 따스한 온도를 품고서.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특별한 것을 아는 것
'조선의 국풍', '조선의 시문',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 '박물학자' 등 이덕무를 수식하는 말은 참으로
많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덕무를 아는 이가 많지 않은 점은 참으로 애석하다. 그는 성리학 담론 속에서만 글을 썼던 당대의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
출신 지식인과는 다른 유형의 지식인이었으며 중국 시문을 모방하거나 답습하지 않고 조선의 산천과 풍속은 물론 조선 사람의 정서와 취향을 진실하게
드러낸 보기 드문 문장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생전 진정한 조선의 모습과 자신의 철학을 담기 위해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문장의
온도>에서는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라는 두 산문집을 중심으로 읽을수록 매료되고 곱씹게 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인가? 이 물음에 대해 저자는 두 산문집으로 하여금 별반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무시하고 지나쳤던
우리 주변의 사소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함으로써 삶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는 위로와 따스한 온기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자연을 취해 글로 표현한 그의 아름다운 문장과 사실적인 묘사를 엿볼 수 있는 '진경
시문의 대가'로서의 면모와 사소하고 하찮은 것들의 아름다움 가운데 하나인 '우언소품의 미학'을 느낄 수 있으며 자연과 사물의 현상을 낱낱이
기록한 '박물학자'로서의 기록까지 살펴봄으로써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거리낌이 없고 자유로운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귀하게 여기고,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이를 통해 삶의 철학을 구하고자 한 그의 독서 정신을 배울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처럼 곳곳에서 그의 문장이 지닌 저마다의
다채로운 온도를 체감하다보면 어느새 내 삶에 온기를 채우는 법에 대해 저절로 깨닫게 된다.
말똥구리와 여의주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 「선귤당농소」
| 비록 상상의 존재지만 우주 만물 중 가장 귀한 동물로 여겨지는 용의 여의주와 가장
미천한 동물로 여겨지는 말똥구리의 말똥의 가치는 동등하다. 이제 우열과 존귀와 시비의 이분법은 전복되고 해체된다. 사람의 시각이 아닌 하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주 만물의 가치는 모두 균등하다. 단지 차이와 다양성이 존재할 뿐이다. / 35p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에는 과거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던 동식물을 통해 천하 만물의 이치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과
세태까지 포착하는 소품문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개미, 누에, 벌, 말똥구리, 뱀, 족제비, 쥐 등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동물이 등장하고, 오동나무, 소나무, 매화나무, 봉선화 등 식물에 대한 우화 역시 적지 않게 실려 있다. 그 중 말똥구리와 여의주라는 제목의
문장이 인상적이다. 말똥구리는 용이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신이 지닌 여의주를 자랑하지 않고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는 자연과 생명과 진화의 세계를 어떤 흑백 혹은 이분법의 논리로 보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아주 미미하고 꺼려하는
것들에서조차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이 자연에게 부리는 이기와 교만을 반성하게 한다.
매화와 유자
매화가 있는 감실 가운데 유자를 놓아두는 것은 매화를 모욕하는 짓이다. 예전부터
매화는 맑은 덕과 깨끗한 지조가 있다고 하는데, 어찌 다른 물건의 향기를 빌려 매화를 돕는단 말인가. - 「이목구심서 2」
| 다른 향기가 더 좋다고 나의 향기를 지우고, 다른 색깔이 더 빛난다고 나의 색깔을
없애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다른 사람의 향기가 아무리 좋고 색깔이 아무리 빛난다고 해도 나만의 향기와 색깔을 지니는 것만
못하다. / 38p
언제부턴가 '저 사람이 하니까 나도 해야지'라는 생각을 스스럼없이 하는 내 자신을 자주 발견하곤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없으면 뒤쳐진 것 같고, 다른 집 아이들도 다 하니까 우리 아이도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에
계획에도 없던 지출을 하게 된다. 다른 물건의 향기를 빌려 매화의 향기를 덮는 일을 경계하고자 한 이덕무의 뜻이 그 어느 문장보다 강하게 와
닿는 이유다. 마땅히 자신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퍼져 나가는 곳, 자신의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하는 곳에 자리해야 할 것이라는 저자의
글을 내 마음 속에 진하게 새겨둘 일이다.
이기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을 만난다
편의에 안주하는 사람은 큰 고비를 만나면 어찌할 줄 모른다. 자신이 해오던 대로만
하는 사람은 큰 기회가 와도 붙들지 못한다. 임시방편으로 그때그때를 넘기는 사람은 큰 근심거리를 만나게 마련이다. 남에게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큰 적수를 만나게 된다. 일의 형세가 그렇다. - 「이목구심서 2」
| 편한 것만 좇다 보면 안일함에 빠지기 쉽다.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변화에 둔감해 큰 기회가 찾아와도 잡지 못한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환난이 쌓이고 쌓여 끝내 큰 위기에 봉착한다.
이기려고만 하다보면 종국에는 천적을 만나 낭패를 겪게 된다. 편안하면서도 안일하지 않고, 옛것에 머물면서도 혁신할 줄 알고, 임시방편에
능숙하면서도 일의 질서를 잃지 않고, 이기려고 하면서도 패배를 용납할 줄 안다면 그야말로 고상한 인덕의 소유자라 할 만하다. /
146p
부쩍 나를 위한 핑계가 많아진 것 같다. 시간이 없으니까, 아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이런 말들로
일상에 안주하고, 변화에 덜컥 겁을 내기도 했다. 때문에 몇 번이고 나를 위한 좋은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현재에 만족하고 오늘에 머무르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결국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말 것이란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이라도 언젠가 찾아올 기회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를 단련시켜야만 한다. 핑계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자.
문재인 대통령은 "내 청춘을 이끈 힘은 이덕무의 글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세상의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삶을
변화를 독려하는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나 역시 내 마음과 정신을 이끄는 것은 오히려 18세기를 빛낸 이 조선의 지식인이 쓴 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이덕무의 문장과 더불어 고전연구가 한정주의 번역과 해석이 빛난 <문장의 온도>는 소소한 일상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답답한 현실을 위로하면서 성찰까지 가능하게 하는 가슴 따뜻한 책이었다. 혹여 거대한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그의 글이 고루하지는
않을까, 이 책 앞에서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