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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류바
박사랑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평점 :

무력한 현대인의 권태로운
일상을 동반하는 고독, 그 생생한 질감들!
현실과 텍스트의 병치를 절묘하게 이끌어낸 작가의 영민함이
빛나는 단편소설들!
살얼음이 붙은 스크류바를 막 입에 넣자마자 습관적으로 배배 돌렸다. 그때 악,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차가운 스크류바가 입술 안쪽 살갗에 들러 붙은지도 모르고 재미삼아 빙글 돌렸다가 찢어진 것이다. 찢겨진 살갗 위로 붉은 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달콤한 스크류바에 배신당해버린 그 쓰라린 감각이라니. 핑크빛 스크류바에 덕지덕지 묻은 붉은 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겨진
살갗을 달래가며 막대에 달라붙은 달콤함을 끝까지 다 먹어치웠던 그 날. 박사랑의 소설집 「스크류바」의 표지를 마주한 순간, 그 선연한 기억이
하얀 백지 위에 흘러내리는 스크류바의 흔적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다시 되살아났다. 그 와중에도 집요하게 스크류바를 먹어치웠던 내 안의 욕망이
쭈뼛 일어서는 듯한 느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느낌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권태가 쌓아올린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
박사랑의 「스크류바」는 총 10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소설집이다. 첫 번째 수록작인 <#권태_이상>은
이상의 「권태」를 닮은 소설로, 갑자기 얻은 보름의 휴가를 할머니가 지냈던 시골에서 친구 매앵과 주인공이 전기 없이, 자동차와 휴대폰 배터리마저
방전되어 그저 먹고 자고 마시는 것 말고 할 것이란 게 없는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며 늘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과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내일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려놓았다. <높이에의 강요> 역시 취업에 대한 피로감, 마놀로 블라닉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구두로
대변되는 속물 근성,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는 오늘의 청년들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뒤에 있는 고층 건물에서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옆 건물에서도, 또 그 옆
건물에서도, 길 건너편 건물에서도 불빛은 반짝였다. 늦은 밤까지 쉬지 못하는 저 불빛 속의 누군가와 이 자리에 서서 위만 쳐다보고 있는 나, 이
중에 누가 더 나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높이에의 강요> 중에서 58p
앞선 두 작품과 유사한 궤를 달리는 <어제의 콘스탄체>는 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모차르트라며 열살
때 전생을 자각했다는 남자로부터 느닷없이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라 불리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다. 별 미친 사람 다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지만, 우연히 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게 되면서 그가 속해 있는 예스터데이라는 모임에 이끌리듯 따라가게 된다. 예스터데이는 어제를 사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곳에는 전생에 자신이 니체, 버지니아 울프,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사도라 던컨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황당무계한
사람들 사이에서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할 회사를 걱정하는 주인공에게 "집에 돌아가면 아마 나는 글을 쓸 거야. 물이 새는 옥탑방에 앉아 세숫대야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겠지. 하지만 그 글은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을 거야. 내 컴퓨터 안에만 있다가 어느날 휴지통으로
들어가겠지. 나는 그렇게 살아. 내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뻔해.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는 우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는 넌 네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해?"라며 냉소를 던지는 버지니아의 말은 뼈아프다. 과거보다 더 이전의 전생에 갇혀버린 사람들, 그렇게 해서라도 오늘을 잊고
살고 싶은 20~30대 젊은이들의 불완전한 자아를 마주보는 것 같은 그 불편한 감정들.
등 떠밀린, 지쳐버린 모성의 존재들
박사랑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 <스크류바>다. 버스에서 잠깐 잠든 사이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이야기로, 그녀가 아연실색해진 상태에서 아이를 찾기 위해 신고를 하고 버스정류장을 되짚어가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소설의
큰 맥락이다. 이쯤하면 나 때문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엄마의 모습과, 필사적으로 아이를 찾아 헤매며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이를 잃은 와중에도 스타벅스를 찾아가 지독한 더위와 갈증을 해결하며 이대로 자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남편과 들렀던 모텔 카운터에서 열다섯 살쯤 되는 여학생이 핥아먹고 있던 스크류바를 먹고픈 강렬한 충돌에 사로잡히는 등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비켜난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미쳤다고 자조하면서도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그 높은 체온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 했다. 때로는 숨이 막혔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의 머리를 밀어내고 싶기도 했다. 내 가슴을 물어뜯는 아이에게 더이상
가슴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어쩌면 그녀는 아이를 찾아 헤매던 것과 동시에 억눌려왔던 자신의 욕망과 엄마로서의 의무 혹은 모성 사이에서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모골이 송연해졌다. 엄마라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고, 세상이 강요하는
모성에 순응하듯 등 떠밀려 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본 까닭이었다. 톡, 톡. 이것이 불온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저 스크류바에게서 불안한
모성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게 하는 작가의 생생한 감각이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녹은 스크류바가 발끝으로 톡, 떨어졌다. 분홍색 동그라미가 발끝에서 터지자 그리로
무언가 스멀스멀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톡, 톡 퍼져나가는 분홍색 동그라미, 달콤하고 끈적한 그 흔적. 나는 발끝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마치
전기가 오른 것처럼 발끝이 찌릿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점차 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온 정신을 모아 그 감각만을 따라갔다. 무릎을 지나
사타구니에 그 찌릿함이 전달되자 몸에 있는 모든 혈관에 빠른 속도로 피가 돌기 시작했다. / <스크류바> 중에서 79p
<울음터>, <하우스> 역시 <스크류바>와 주제를 함께 하는데, 이 또한 버거운
모성의 무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의지하게 되는 그것에 안부를 전한다. 31~42밀리미터에 5그램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한
생명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하고, 하우스에서 화투에 빠져 사는 엄마에게 속으로 '저런 건 엄마도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도 집으로 왔을 때 엄마가 있기를 바라는 소녀를 보며 모성이 머무르는 자리에서 가족의 안녕을 찾게 되는 그 큰 존재감을 쓸쓸히
어루어 만진다.
엄마, 지수 몸무게가 몇이야? 10.6킬로그램. 무겁네. 그럼, 무겁지. 지수의 손이
내 뺨을 만졌다. 너도 5그램이었던 때가 있었겠지. 그때는 가벼웠는지, 아니면 그때도 너는 누군가에게 무거웠던 건지. / <울음터>
중에서 198p
현실과 텍스트의 병치, 그 환상의 미학
일상적 상황과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다루는 박사랑 작가의 화법은 사실 단순하지만, '이야기' 즉 텍스트를 소설 내부로
끌어들이는 치밀하고 집요한 고민은 그녀의 남다른 성과라 자부할 만하다. <스크류바>가 이 소설집의 가장 강렬한 인상을 차지한다면
<바람의 책>과 <이야기 속으로>는 그녀만의 개성, 혹은 여느 소설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남다른 매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의 책>의 경우 강박신경증에 관한 책을 쓰고 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등장하는데, 선배의 부탁으로
한 남자를 상담하다 그로부터 보르헤스의 작품 「모래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자신 역시 그 모래의 책을 찾아 기이한 환상적 체험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이한 환상이란 책을 펼칠 때마다 페이지가 끝없이 늘어나는 것이었는데, 오로지 알 수 없는 문자로 가득 채워진
책이 불어난다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든다. 종래에 이 모래의 책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눈앞에서 글자가 사라지기까지 하는데, 무한한
책이 아닌 무(無)의 책이 되어가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인공은 논문의 주제로 삼고 있던 강박 증세를 몸소 체험하며 마침내 쓰고 있던
논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어 <이야기 속으로>의 경우에는 아예 기존의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기까지 한다. 기존의 텍스트란 김승옥의
작품 「서울, 1964년 겨울」로, 술을 마시다 옆자리에서 이 소설의 내용과 똑같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내 훔쳐보듯 소설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고만 있던 주인공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내가
자살을 하리란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를 막아보고자 마침내 인물들 사이로 끼어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고, 안과 김 그리고 사내와 1964년 서울의 거리, 그 날 주머니 속에 넣어둔 여관 열쇠가 마치 꿈이 아니었음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후 그는 1964년의 사내와 절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은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또다시 죽음이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남자가 풀어놓고 간 넥타이가 사실은 친구의 것이었고, 주머니에 있던 열쇠마저 아버지의 헌책방 문을 열던
열쇠였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이 낯선 체험은 어쩌면 소설을 써야 한다는 이 등단 작가의 강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케 한다. <바람의 책>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그랬던 것처럼.
1964년 겨울, 서울의 거리는 추웠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안은 심드렁한 말투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했고 김은 약간 과정하며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했다. 김이 나에게 이형은 알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김과 안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당신은 소설가이지 않습니까? 하는 표정 같았다.
/ <이야기 속으로> 중에서 119p
이는 곧 박사랑이란 소설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의 발현이며, 문학이 시대에 반응하고 가져야 할
사명 같은 것을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색다를 게 나올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재생산으로 무한 증식하는 듯한
문학에 여전히 기대하고, 그 존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박사랑 작가의 「스크류바」 속 단편들은 그런 기대에 부응한 훌륭한
작품들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매우 흡족했다.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 생의 불가해함과 권태로운 일상이 동반하는 고독의 질감을 생생하게 전달함은
물론, 기존의 문학을 상상력으로 끌어낸 영민함까지.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서 지켜보고 싶은 작가가 생겨서 더욱 즐거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