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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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몰고 온 광풍 속에서 다채롭게 피어오르는 음식의 향연,

한중일 동아시아적 세계관을 품은 거대한 상상력이 탄생하다!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난설헌>으로부터 시작하여 제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밤의 눈>까지, 꽤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문학상이 그려온 궤적을 나 역시 함께 따라왔다. 격동의 민족사를 치열하게 다룬 소설가 최명희를 추모하고자 만든 문학상인 만큼 그간의 수상작들이 대체로 우리 민족과 역사에 밀착한 깊이 있는 상상력을 돋보인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달리 지난 수상작 <고요한 밤의 눈>에서는 사회 구조 속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를 다루어 혼불문학상의 수상작이라기에는 다소 의외의 선택이라는 생각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문학이 이 시대를 돌파할 힘이라는 작가의 강렬한 메시지 앞에서 혼불문학상이 점점 더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때문에 이번 제7회 수상작인 <칼과 혀>는 다시금 혼불문학상만의 색채감을 재확인하면서도 한중일이라는 동아시아적 세계관으로 확장되는, 더욱 거대해진 상상력의 과감한 돌파 앞에 묵직한 한 방을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호수공원 한 귀퉁이에서 한중일 역사의 무대 만주로 나아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꼽았다는 수상작에 대한 설명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놀라워하고, 또 놀라워하며 연신 압도되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운명의 소용돌이, 만주에서 휘몰아치다

 

 

   <칼과 혀>는 1945년 만주에 주둔해있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그를 암살하려는 광둥인 천재 요리사 첸, 사회혁명주의자인 오빠의 부름 앞에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 여인 길순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기도 한 야마다 오토조는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으로 실제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 겁쟁이였다고 알려진 점이 꽤 흥미롭다.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이 덧입혀져 소비에트와의 전쟁을 치러낼 의지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무능을 비난하고, 사령부를 자주 비운 채 극락사에 앉혀진 조선의 반가사유상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더욱 의아한 점은 군인이라는 신분과 곧 닥쳐올 전쟁의 광풍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요리의 미학을 앞세워 궁극의 맛을 쫓는 기이한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사령관 암살 계획을 세우고 황궁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일부러 붙잡힌 듯한 요리사 첸을 사살하지 않고 끝끝내 그가 선보이는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놀라운 집착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내 눈을 탐했던 적(敵)을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혀에 와 닿는 맛으로 경험했던 그날, 나는 커서 결코 군인 따위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적을 죽이다가 끝내는 자신마저 그 죽음 속으로 밀어넣어야 하는 미련함,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품평을 강제당한 채 통일된 동작으로 뜨겁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획일화된 세계에 대하여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 내 혀에 와 닿던 백숙의 맛은, 간장의 달착지근함이 더해진 그 연한 고기의 맛은, 적을 향한 그 어떤 사나운 증오심조차 그 연한 속살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외피를 둘러싼 단단한 껍질과는 상관없는 가장 순수하고 정제된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자애로움으로 가득했던 내 어머니의 외피 속에 숨겨진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날의 의식처럼. / 217p

 

 

전쟁은 반복된다. 두려움은 간부나 사병이나 민간인이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받기 싫은 선물처럼 진주해 있다. 그 속에서도 인간은 부지런히 먹고 마신다. 두려움 속에서도 매일 세끼의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인가. 매일 아침저녁 장교식당을 찾는 머릿수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그들은 잘 먹어야 잘 싸울 수 있다고 자위한다. 사령부가 적들에 둘러싸일 때, 과연 저 머저리들 가운에 몇 명이나 착검을 하고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있을까? 부하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려놓고 뒤에서 머뭇거릴 인간들이 태반이다. 나 역시 그러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다만 나는 내 마지막 순간이 그런 무모함 가운데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 248p

 

 

 

   한편 볼품없는 외모를 지닌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중국 광둥인 요리사 첸은 유년시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요리사의 숙명과 비밀 자경단원이라는 또 다른 신분 사이에 놓인 매우 극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오토조 사령관 앞에 붙잡혀 와 죽기 직전, 자신이 광둥 최고의 요리사임을 증명해야 하는 운명의 시험 앞에서 그는 요리사로서의 혼을 담아 의연하게 이를 치러냄은 물론, 오토조 사령관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이른다. 하지만 비밀 자경단원으로서는 그저 적일뿐인 오토조 앞에서 그는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적일지라도 자신의 요리를 먹어주는 이의 입맛을 사로잡고 싶은 요리사의 사명 또한 그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지만 재료를 앞에 놓아두고 칼집을 넣기 직전만큼 겸허한 시간은 드물다.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고 다섯 마디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산 것들의 욕망을 죄 갈라놓을 때, 그리하여 그것이 불과 섞이고 양념이 덧발려 여백을 거부하는 수무요 위에 가지런히 담길 때 나의 욕망은 끝난다. 아버지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요리사는 그 누구의 입맛도 아닌,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싸워야 한다. 어떤 식재료도 완전히 굴복시켜 불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열의, 그 수고로움이 식탁 위에서 인간의 혀에 얹힐 때 비로소 요리사의 임무가 끝난다. / 57p

 

 

 

 

 

 

   첸과 마찬가지로 길순 또한 오토조를 죽여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를 향한 연민 사이에서 고뇌하는 조선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사회혁명주의자인 오빠를 찾아 만주로 오는 길에 꾐을 당해 위안부 생활을 하게 된 그녀는 어쩌다 첸의 도움으로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만 운명은 그녀를 그곳에서 머무르게 하지 않고, 결국 오토조 사령관의 여인이 되어 그를 죽여야 한다는 위기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녀가 조선의 여인이여서일까. 혹은 유일하게 구어체를 사용하여서일까. 작가는 길순의 사연을 애써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모든 사내들을 믿지 않는다는 그녀의 담담한 고백에서 당시 조선의 여인들이 겪었을 한의 정서와 그 속에서 꿋꿋이 움켜쥐려는 자존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나는 물어봤어야 해. 도대체 사람을 죽여 무얼 얻지? 오빠는 화를 냈을 거야. 계집들 때문에 집안이 망한다고. 그 얘긴 아버지가 즐겨 내뱉던 말이기도 했어. 숙영이가 죽었어도 오빠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지. 자신 때문에 한목숨이 끊어졌는데도 앞날에 방해가 되게 생겼다며 욕을 해댔어. 숙영인 자살한 게 아니라 오빠의 무관심이 죽인 거야. 썩어 악취를 풍기는 혁명주의자. 내가 죽여야 하는 건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이 아니라 오빠라는 사내들인지도 몰라. 오빠라는 뜨거운 생명을 건너가면 대웅전 부처처럼 열반에 들 수 있을까? 오늘은 그 질문에 답을 듣고 싶어. / 45p

 

 

전쟁이 나면 멍청한 남자들일수록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정의를 짊어지고 불속으로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잖아? 그건 때가 되면 규칙적으로 여자들에게로 찾아오는 이름 모를 일본 병정들이나, 남부식 권총 하나로 세상의 부조리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내 오빠나, 도마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첸이나 모두 매한가지야. 그래서 난 사내들을 믿지 않아. / 92p

 

 

   이 세 인물의 시점과 입장에 따라 각각의 이야기가 한 데로 얽히는 소설의 구조는 한중일이라는 각기 다른 세 나라 고유의 민족관과 소통의 가능성을 확장시킴으로써 입체적이고도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한다. 오랫동안 실타래처럼 얽혀있지만 그 누구도 풀어낼 수 없는 세 나라의 복잡한 역사와 날 서린 긴장감을 이 세 인물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 작가의 대담한 발상이 높이 평가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칼과 혀,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하다

 

 

   절대 공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세 인물을 한 데로 엮을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바로 '칼과 혀'이다. 한중일 세 나라의 깊은 갈등 구조를 단순히 정치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라면 굳이 그것을 소설에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때문에 정치와는 무관한, 인류 보편의 문화인 '요리'라는 영역을 통해 갈등을 공감과 이해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사용한 점이 무척 흥미롭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지만 그녀가 만들어준 분고규를 그리워하는 야마다 오토조, 일곱 살 때 아버지로부터 조리용 칼을 쥐는 법을 배우고 난 뒤 요리사의 수고로움과 욕망에 사로잡힌 첸, 야마다 오토조가 쫓기어 들어간 공양간에서 길순이 만들어준 고향의 맛 청국장까지. 요리가 상징하는 칼과 혀라는 매개물을 통해 누구나 한번쯤은 아련하게 지니고 있을 맛에 관한 추억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 추억의 자리를 서로가 어루만져줌으로써 공감과 화해의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한 작가의 시도들이 이 소설을 남다른 지점으로 끌어올리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도마에 놓인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생명이야. 칼은 그들의 생명을 끊는 도구가 아니라 그들을 굴복시키는 도구야. 칼을 다룰 때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재료들은 접시에 오르는 순간까지 말썽을 부리잖아. 칼은 등을 보여서도 안 돼. 칼날로 재료를 지그시 눌러가면서 놈들의 눈을 제압해. 숨통을 단박에 끊어놓은 듯 위협하면서 동시에 재료 고유의 빛깔과 싱싱함에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 / 98p

 

 

"너의 혀를 느껴봐, 뇌가 아니라 스스로 혀가 되어 다가오는 감각을 느껴봐. 혀는 신이 만든 모든 기관 중에서 가장 완벽하다. 또한 아름답다. 너는 그 이유를 아니?"

사내는 규칙적인 움직임 속으로 찾아드는 중이야.

"스스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야.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바로 피다. 혀가 붉은 건 세포 속에 피를 한가득 머금고 있기 때문이야. 맛을 갈구하는 것은 혀가 아닌 피다. 인간들이 끝없이 입속으로 음식을 집어넣는 이유를 이제 알겠니?" / 194p

 

마술사과 요리사 모두 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 다만 마술사는 상대의 눈을 속이지만 요리사는 상대의 혀를 속여야 해. 맛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모든 사물은 그대로 있을 뿐이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게 맛이야. 의미란 공통의 관습에 따라 좌우되기도 하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의미를 부여받기도 하는 거고. 유능한 요리사는 그런 개인의 습성, 집단의 습성을 빠르게 간파하여 그들의 혀를 속일 수 있어야 해. 마술사들이 젊은 연인들을 앉혀놓고 모자 속에서 빨간 장미를 뽑아내듯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맛을 대령하는 거지. 곧 죽어갈 머저리들에게. 응, 알겠나?" / 239p

 

 

 

   <칼과 혀>는 뛰어난 수작으로써 강렬한 서사, 탄탄한 묘사, 가독성이 높은 작법까지 모두 만족스럽게 읽은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인물 설정 면에서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으나 이런 과감한 시도들이 칭찬받을만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없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작가가 탄생했나, 놀라며 다시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니 눈에 익은 작품이 더러 있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혼불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그의 작품이 더욱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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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류바
박사랑 지음 / 창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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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한 현대인의 권태로운 일상을 동반하는 고독, 그 생생한 질감들!

현실과 텍스트의 병치를 절묘하게 이끌어낸 작가의 영민함이 빛나는 단편소설들!

 

 

 

   살얼음이 붙은 스크류바를 막 입에 넣자마자 습관적으로 배배 돌렸다. 그때 악, 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차가운 스크류바가 입술 안쪽 살갗에 들러 붙은지도 모르고 재미삼아 빙글 돌렸다가 찢어진 것이다. 찢겨진 살갗 위로 붉은 피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달콤한 스크류바에 배신당해버린 그 쓰라린 감각이라니. 핑크빛 스크류바에 덕지덕지 묻은 붉은 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찢겨진 살갗을 달래가며 막대에 달라붙은 달콤함을 끝까지 다 먹어치웠던 그 날. 박사랑의 소설집 「스크류바」의 표지를 마주한 순간, 그 선연한 기억이 하얀 백지 위에 흘러내리는 스크류바의 흔적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다시 되살아났다. 그 와중에도 집요하게 스크류바를 먹어치웠던 내 안의 욕망이 쭈뼛 일어서는 듯한 느낌,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느낌을 쉽게 떨칠 수 없었다.

 

 

 

권태가 쌓아올린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

 

 

   박사랑의 「스크류바」는 총 10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소설집이다. 첫 번째 수록작인 <#권태_이상>은 이상의 「권태」를 닮은 소설로, 갑자기 얻은 보름의 휴가를 할머니가 지냈던 시골에서 친구 매앵과 주인공이 전기 없이, 자동차와 휴대폰 배터리마저 방전되어 그저 먹고 자고 마시는 것 말고 할 것이란 게 없는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며 늘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과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내일을 두려워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그려놓았다. <높이에의 강요> 역시 취업에 대한 피로감, 마놀로 블라닉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구두로 대변되는 속물 근성, 타인으로부터 받는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는 오늘의 청년들을 사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뒤에 있는 고층 건물에서는 아직도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옆 건물에서도, 또 그 옆 건물에서도, 길 건너편 건물에서도 불빛은 반짝였다. 늦은 밤까지 쉬지 못하는 저 불빛 속의 누군가와 이 자리에 서서 위만 쳐다보고 있는 나, 이 중에 누가 더 나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높이에의 강요> 중에서 58p

 

 

 

   앞선 두 작품과 유사한 궤를 달리는 <어제의 콘스탄체>는 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모차르트라며 열살 때 전생을 자각했다는 남자로부터 느닷없이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라 불리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다. 별 미친 사람 다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지만, 우연히 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기게 되면서 그가 속해 있는 예스터데이라는 모임에 이끌리듯 따라가게 된다. 예스터데이는 어제를 사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그곳에는 전생에 자신이 니체, 버지니아 울프,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사도라 던컨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황당무계한 사람들 사이에서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할 회사를 걱정하는 주인공에게 "집에 돌아가면 아마 나는 글을 쓸 거야. 물이 새는 옥탑방에 앉아 세숫대야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쓰겠지. 하지만 그 글은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을 거야. 내 컴퓨터 안에만 있다가 어느날 휴지통으로 들어가겠지. 나는 그렇게 살아. 내일은 생각하지 않아도 뻔해.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너는 우리가 돌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는 넌 네가 제정신이라고 생각해?"라며 냉소를 던지는 버지니아의 말은 뼈아프다. 과거보다 더 이전의 전생에 갇혀버린 사람들, 그렇게 해서라도 오늘을 잊고 살고 싶은 20~30대 젊은이들의 불완전한 자아를 마주보는 것 같은 그 불편한 감정들.

 

 

 

 

 

 

등 떠밀린, 지쳐버린 모성의 존재들

 

 

   박사랑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 <스크류바>다. 버스에서 잠깐 잠든 사이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이야기로, 그녀가 아연실색해진 상태에서 아이를 찾기 위해 신고를 하고 버스정류장을 되짚어가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소설의 큰 맥락이다. 이쯤하면 나 때문에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엄마의 모습과, 필사적으로 아이를 찾아 헤매며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이를 잃은 와중에도 스타벅스를 찾아가 지독한 더위와 갈증을 해결하며 이대로 자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남편과 들렀던 모텔 카운터에서 열다섯 살쯤 되는 여학생이 핥아먹고 있던 스크류바를 먹고픈 강렬한 충돌에 사로잡히는 등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서 비켜난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미쳤다고 자조하면서도 주인공은 이렇게 고백하기도 한다. '아이를 안고 있으면 그 높은 체온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 했다. 때로는 숨이 막혔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의 머리를 밀어내고 싶기도 했다. 내 가슴을 물어뜯는 아이에게 더이상 가슴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고. 어쩌면 그녀는 아이를 찾아 헤매던 것과 동시에 억눌려왔던 자신의 욕망과 엄마로서의 의무 혹은 모성 사이에서 어지럽게 떠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모골이 송연해졌다. 엄마라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리고, 세상이 강요하는 모성에 순응하듯 등 떠밀려 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들여다본 까닭이었다. 톡, 톡. 이것이 불온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저 스크류바에게서 불안한 모성의 현주소를 들여다보게 하는 작가의 생생한 감각이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녹은 스크류바가 발끝으로 톡, 떨어졌다. 분홍색 동그라미가 발끝에서 터지자 그리로 무언가 스멀스멀 모이는 기분이 들었다. 톡, 톡 퍼져나가는 분홍색 동그라미, 달콤하고 끈적한 그 흔적. 나는 발끝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마치 전기가 오른 것처럼 발끝이 찌릿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점차 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온 정신을 모아 그 감각만을 따라갔다. 무릎을 지나 사타구니에 그 찌릿함이 전달되자 몸에 있는 모든 혈관에 빠른 속도로 피가 돌기 시작했다. / <스크류바> 중에서 79p

 

 

 

 

 

 

   <울음터>, <하우스> 역시 <스크류바>와 주제를 함께 하는데, 이 또한 버거운 모성의 무게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의지하게 되는 그것에 안부를 전한다. 31~42밀리미터에 5그램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한 생명이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고 위로하고, 하우스에서 화투에 빠져 사는 엄마에게 속으로 '저런 건 엄마도 아니야' 라고 말하면서도 집으로 왔을 때 엄마가 있기를 바라는 소녀를 보며 모성이 머무르는 자리에서 가족의 안녕을 찾게 되는 그 큰 존재감을 쓸쓸히 어루어 만진다.

 

 

 

엄마, 지수 몸무게가 몇이야? 10.6킬로그램. 무겁네. 그럼, 무겁지. 지수의 손이 내 뺨을 만졌다. 너도 5그램이었던 때가 있었겠지. 그때는 가벼웠는지, 아니면 그때도 너는 누군가에게 무거웠던 건지. / <울음터> 중에서 198p

 

 

 

현실과 텍스트의 병치, 그 환상의 미학

 

 

  일상적 상황과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다루는 박사랑 작가의 화법은 사실 단순하지만, '이야기' 즉 텍스트를 소설 내부로 끌어들이는 치밀하고 집요한 고민은 그녀의 남다른 성과라 자부할 만하다. <스크류바>가 이 소설집의 가장 강렬한 인상을 차지한다면 <바람의 책>과 <이야기 속으로>는 그녀만의 개성, 혹은 여느 소설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남다른 매력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바람의 책>의 경우 강박신경증에 관한 책을 쓰고 있던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등장하는데, 선배의 부탁으로 한 남자를 상담하다 그로부터 보르헤스의 작품 「모래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자신 역시 그 모래의 책을 찾아 기이한 환상적 체험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이한 환상이란 책을 펼칠 때마다 페이지가 끝없이 늘어나는 것이었는데, 오로지 알 수 없는 문자로 가득 채워진 책이 불어난다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든다. 종래에 이 모래의 책은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눈앞에서 글자가 사라지기까지 하는데, 무한한 책이 아닌 무(無)의 책이 되어가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인공은 논문의 주제로 삼고 있던 강박 증세를 몸소 체험하며 마침내 쓰고 있던 논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어 <이야기 속으로>의 경우에는 아예 기존의 텍스트 내부로 들어가기까지 한다. 기존의 텍스트란 김승옥의 작품 「서울, 1964년 겨울」로, 술을 마시다 옆자리에서 이 소설의 내용과 똑같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내내 훔쳐보듯 소설 속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고만 있던 주인공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내가 자살을 하리란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를 막아보고자 마침내 인물들 사이로 끼어들기까지 한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고, 안과 김 그리고 사내와 1964년 서울의 거리, 그 날 주머니 속에 넣어둔 여관 열쇠가 마치 꿈이 아니었음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후 그는 1964년의 사내와 절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은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또다시 죽음이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남자가 풀어놓고 간 넥타이가 사실은 친구의 것이었고, 주머니에 있던 열쇠마저 아버지의 헌책방 문을 열던 열쇠였음을 깨닫게 된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이 낯선 체험은 어쩌면 소설을 써야 한다는 이 등단 작가의 강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케 한다. <바람의 책>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그랬던 것처럼.

 

 

 

1964년 겨울, 서울의 거리는 추웠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바람에 옷깃을 여몄다. 안은 심드렁한 말투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했고 김은 약간 과정하며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했다. 김이 나에게 이형은 알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김과 안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당신은 소설가이지 않습니까? 하는 표정 같았다. / <이야기 속으로> 중에서 119p

 

 

 

   이는 곧 박사랑이란 소설가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의 발현이며, 문학이 시대에 반응하고 가져야 할 사명 같은 것을 고민하게 하는 부분이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색다를 게 나올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재생산으로 무한 증식하는 듯한 문학에 여전히 기대하고, 그 존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박사랑 작가의 「스크류바」 속 단편들은 그런 기대에 부응한 훌륭한 작품들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매우 흡족했다. 흡인력 있는 스토리 전개, 생의 불가해함과 권태로운 일상이 동반하는 고독의 질감을 생생하게 전달함은 물론, 기존의 문학을 상상력으로 끌어낸 영민함까지.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서 지켜보고 싶은 작가가 생겨서 더욱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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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세우는 단단한 힘 문사철
이지성.스토리베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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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속에 길이 있다!

문학, 역사, 철학으로 복잡한 현실을 극복하고 나아갈 인생에 해답을 찾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히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계 발전 중심의 산업에서 인간 중심의 기계 산업 시대로 변화하면서 기업에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을 더욱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 타인과 공감하여 소통할 줄 알면서 회복탄력성이 높은 인재들이 곧 미래형 인재들이라 전망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곳곳에서 인문학을 다룬 다양한 강의와 매체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알쓸신잡'을 비롯하여 '어쩌다 어른'과 같은 특강 형식의 방송을 통해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도와 친숙도가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서점가에도 이와 관련된 도서들이 상당수 눈에 띈다.

 

 

 

   내 아이를 위해 알아야 할 부모 인문학을 비롯하여 어린이가 읽는 인문학, 걷기, 커피, 투자자를 위한 인문학까지.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인문학에 대한 인기가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인문학을 통해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들을 치유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혼란과 오류로 점철된 사회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삶에 대한 고민과 상처들, 문사철을 통해 해답을 찾다

 

 

   <꿈꾸는 다락방>, <리딩으로 리드하라>로 익히 알려진 저자 이지성의 신간 <나를 세우는 단단한 힘 문사철> 역시 캄캄한 인생길 앞에서 헤매고 있을 많은 이들에게 인문 고전 독서로 해답 찾기를 권하는 인문학 책이자 자기계발서이다. 인문 고전 독서의 바이블로 정평이 난 <리딩으로 리드하라>가 인문 고전 독서의 힘과 그 중요성을 원론적인 입장에서 강조했다면, 이번 책의 경우에는 풀리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에 고민하고 답답해하는 세 명의 주인공이 문사철을 만나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인생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극화 형식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이 꽤 흥미롭다.

 

 

 

   책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들이란 우연히 직장 상사의 비리를 알게 되어 이를 바로 잡으려다 도리어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위기에 처한 제갈대로, 선배로부터 디자인을 도용당한 유명환, 손님이 점점 줄어들어 걱정인 카페 주인 한방인으로 이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남성들의 애환과 말못할 속사정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직장 생활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들에게 길을 알려줄 인생 멘토와 같은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던 중이었다. 그때 제갈대로가 직장 내 동기인 주리를 통해 문사철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방인의 카페에서 우연히 옛 스승인 멘토 황희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셋은 문사철이라는 세계에 대해 알게 된다.

 

 

 

   이쯤에서 이 책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궁금해지는 것, 바로 문사철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문사철이란, 문학적 감수성과 역사를 통해 얻는 지혜, 깊이 있는 질문과 사유에서 나오는 철학을 아우르는 말로 쉽게 말해 '문학, 역사, 철학'의 줄임말이다. 이는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축적한 지식이자 인문학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것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를 테면 리더십의 고전이자 소통과 실천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오긍의 <정관정요>, 국가와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애사심과 사명감을 생각하게 해주는 플라톤의 <국가>, 자본주의 속에서 삶의 여유를 찾는 방법을 느낄 수 있는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깨닫게 해주는 <방법서설>, 사람은 무엇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장 지글러의 <인간의 길을 가다>에 이르는 비교적 최근작까지. 여기에서 황희 선생님은 세 청년들에게 이와 같은 고전을 추천하여 읽게 한 다음,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대화 방식을 통해 그 안에서 각자의 고민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스스로에게 좋은 질문을 많이 하세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하는 것을 가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중략)… "좋은 질문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죠. 질문의 질이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고 할까요. 질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워주지요." / 40p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하잖아요? 고전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죠. 지금 내 삶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비추어 재조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당대 사회가 지녔던 문제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모색해보는 거예요. 아무 문제의식 없이 읽는다면 시간 낭비에 불과할 뿐이예요. 정확한 목표 없이 소일거리로 읽는다면 아마 지루해서 한 장도 읽지 못할걸요." / 51p

 

 

"좋은 글을 읽는 것도 그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도를 닦는 방법 중에 하나일 거예요. 그것을 궁리라고 해요. 무엇인가를 행하기 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실천으로 옮기잖아요. 궁리를 많이 한다는 것은 자기 행동도 많이 살펴본다는 거예요." / 135p

 

 

 

 

 

 

   사실 고전의 좋은 점이야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전이라하면 일단 막막함,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나만 하더라도 읽는 다음에 생각을 바로 정리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고전 독서에 어려움을 느끼니 말이다. 책에 등장하는 세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책을 전부 읽는 것조차 어려움을 토할 정도로 처음에는 막막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한 권씩, 한 권씩 읽어나가며 점차 인문 고전 독서의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나아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행동에 변화를 꾀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시작의 두려움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깨달음이 꽤나 가치 있게 느껴진다. 고전에 대한 딱딱하고도 진지한 담론 대신 대화를 통해 자유롭게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의 글을 쓴 것 역시 인문학을 어렵지 않게 느끼기를 바라는 저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행복은 가만히 있는다고 오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자기를 세우고 자기가 생각한 옳은 방법을 실천하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성현들의 생각이겠지요. 중용이라고 해서 무조건 중간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중용이란 우리가 하려는 행동의 가장 참되고 변하지 않는 이치를 말해요." / 138p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쓴 시를 보면 자연에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도 있지요. 물론 자기 위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신념이 있는 이들에게 장소가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이들이라면 자리가 중요했을까요?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을.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어때요? 어쩌면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유배지가 아닐까요? 어떤 이에게는 한없이 힘든 곳이고 어떤 이에게는 자기를 갈고 다듬는 수양의 장이 되니 말이에요." / 238p

 

 

 

 

 

 

 

   책 속에서 '고전의 훌륭한 말도 제대로 이용하지 않으면 책 속의 갇힌 글자일 뿐'이라는 말이 유독 인상에 남는다. 저자 이지성은 <나를 세우는 단단한 힘 문사철>을 통해 독서란 읽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체화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삼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정관정요>를 쓴 오긍 역시 아는 것이 어려운 데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어렵고,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지키는 게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실천을 이끄는 힘을 지녔기에 더 큰 의미를 지닌 고전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문사철의 마지막 과정을 봉사라고 하신 거군요. 봉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데 문사철의 기본 사상도 '사랑'이잖아요. 그리고 봉사에는 사람과의 소통이 있어요. 문사철에서 말하는 내용도 결국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지요. 우리는 봉사를 하는 동안 그들과 힘들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행복을 느낄 수 있지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어요." / 310p

 

 

 

   시중에 나온 많은 인문학 책들이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설명에 비해 이 또한 상당히 까다롭게 읽혔던 것과 달리 <나를 세우는 단단한 힘 문사철>은 소설의 구성을 지닌 대화체 형식을 글을 통해 정말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에서 장점이 많은 책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그 소설의 구성이란 게 미화적인 면이 많아서 진부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문사철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혜안을 제시하며 자기 안에서 혁명을 도모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는 점에서 만큼은 좋은 자기계발서의 한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 책에 실린 많은 고전 중에 어찌 읽은 책이 10퍼센트도 되지 않는 것인지 좀 부끄러워진다. 책에 수록된 고전을 찾아 꼭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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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5분 쓰면 돈 버는 2018 가계북
상상출판 편집부 지음 / 상상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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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리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가계 살림 코칭북!

하루 5분, 내 손으로 직접 쓰고 살뜰하게 챙기는 가정 살림 재테크!

 

 

 

   최근에 KBS에서 가계 재테크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한 방송이 연일 화제가 되었다. 바로 김생민의 <영수증>이란 프로그램이다. 영수증 내역을 꼼꼼하게 체크해 무의미하게 소비한 품목을 체크해 새어나가는 지출을 막고 저축과 적금으로 돈 모으는 방법들을 일러주는 꽤나 유익한 방송이었다. 무조건 절약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내 꿈과 가정의 안녕에 사용되는 현명한 소비는 반드시 챙기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가계 살림 운영에도 정확한 기준과 가치관 정립이 우선임을 생각하게 했다.

 

 

 

   방송을 보고는 언제부턴가 쓰기를 중단했던 스마트폰의 가계부 앱을 다시 정리해 각종 지출과 수입 내역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카드 사용액은 문자메시지가 오면 자동으로 앱에 등록이 되고 자동 이체 내역도 마찬가지로 고정적으로 관리되고 있으니 참 편했다. 그런데 이 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저 습관적으로 금액만 기입할 뿐, 따로 정산을 해본다거나 소비의 문제점을 들여다보고 극복할 만한 시도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이 달에 얼마를 쓴 것인지 지출액만 따져볼 뿐, 다시 달이 바뀌면 또 똑같은 수순의 소비는 계속되었다.

 

 

 

   사정이 이러고 보니 가계부란 것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마트폰의 가계부 앱도 편리하기는 하지만 소비를 체감할 수는 없는 듯하여 차라리 아날로그적이라 할지라도 소비 패턴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게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얀 연습장을 가져다가 일단 써보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며칠을 못 가서 아니다 싶었다. 일일이 소비 유형과 결제 수단들을 손으로 쓰는 일의 번거로움이란 금세 가계부 쓰는 즐거움과 의욕을 시들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일, 월, 연 단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가계부 책을 마련해 작성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 같았다.

 

 

 

꿈을 생각하며 쓰는 가계 살림 코칭북

 

 

   2018년을 대비해 서점가에 서서히 가계부 책들의 출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 중 <하루 5분 쓰면 돈 버는 2018 가계북>이라는 조금은 독특한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끈다. 가계부도 아니고 가계북이라니? 이런 책도 있었던가, 하는 의아함을 품게 된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2018년에 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꿈 통장 마련을 권유한다. 이왕이면 단순 저축이 아니라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꿈 통장 마련을 통해 보다 저축의 실효성과 필요성을 가깝게 느끼고 즐거움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내 통장에 꿈이라는 의미를 더하는 이 사소한 행위 하나가 뜻밖의 에너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다음으로 한 해 동안의 주요 행사를 적는 캘린더가 실려 있는데, 가계부이자 주요 행사를 기입하면서 큰 소비를 챙길 수 있도록 하는 다이어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굳이 2018년용 다이어리를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기에는 한 해 동안의 목표, 예상 수입과 소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면서 월초에 이달의 예상 수입과 예상 지출을 미리 적어보는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 더욱 유용하다. 더욱이 2018년 1월이 아니라 2017년 11월부터 써볼 수 있으니 당장 활용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다.

 

 

 

 

 

   중요한 가계부 공간에는 독특하게도 오늘의 날씨를 체크해볼 수도 있게 되어 있는데, 날씨에 따른 소비 패턴도 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상기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하루의 수입과 지출을 적을 수 있는 공간에는 현금,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나만의 지불 수단을 구분해서 표기할 수 있고 그날의 인상적이었던 일들을 적을 수 있는 작은 메모 공간도 있다. 또한 주 단위로 우리 집의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장부 대조란, 즉 소비 유형을 적을 수 있는 공간도 우측에 마련되어 있으니 이 또한 유용하게 활용해봄직하다.

 

 

 

 

 

   이 외에도 스페셜 페이지에는 가계 재테크를 현명하게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각종 팁과 정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2018년에 새롭게 재편되는 연말정산 및 절세 재테크, 카드 재테크, 건강 보험 재테크, 스마트폰뱅킹 활용법 등 알아두면 좋은 정보들이 있으니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돈을 모으기 전에 경제지도에서 우리집의 위치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현 수입과 지출을 파악하는데, 가급적이면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 본다. 그런 후에 예‧적금, 전세금 대출 잔액, 카드 할부 잔액, 자동차 대출 잔액, 보험, 펀드 등의 내역을 꼼꼼하게 체크한다. 그렇게 하면 순자산과 부채를 파악할 수 있다. 경제지도에서 우리집의 위치를 확인하면 ‘100세 인생’의 시대 빈곤하지 않은 노후를 준비함은 물론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기 위함이다. / 46p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중학교 입학, 고등학교 입학, 대학교 입학 시기를 점 찍는다. 또 목돈이 필요한 시기를 예측하여 점찍는다. 이렇게 지출 그래프를 그려보면 어느 시기에 목돈이 필요하고 또 저축을 많이 할 수 있는 시기가 한눈에 보일 것이다. 지출 그래프를 그려보면 매달 얼마를 모아야 하는지 눈에 들어온다. 돈을 관리하고 모으는 것도 기술이다. / 46p        

 

 

 

 

 

  끝으로 마지막 스페셜 페이지에서는 한 해를 마감하며 살림 결산, 선물 결산, 추억 공간, 2019년에 꼭 이루고 싶은 꿈과 그 꿈을 이루기 위한 ‘2019 꿈 통장’ 코너도 마련되어 있으니 다음 한 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다듬어보는 것도 좋겠다.

 

 

 

 

 

   사실 가계부라 해봐야 별 거 있겠나 싶지만 보다 체계적이고, 쓰기 쉬우면서, 나의 소비패턴을 한눈에 들여다보기 쉬운 책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꿈을 응원하고 그 꿈을 위해 나의 살림을 정비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이 하나의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도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아닐까. 2018년에는 내 영수증과 내 통장에 슈퍼그뤠잇을 마구 외쳐줄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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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작가정신 시그림책
함민복 지음, 한성옥 그림 / 작가정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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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순간 삶을 뒤흔드는 상념과 시련에 중심을 잡고 살아야했던

생의 의지에 시와 그림이 전하는 가슴 따뜻한 위로!

 

 

 

   바람이 흩날리자 내내 달려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낙엽비가 되어 쏟아진다. 봄에 맞는 꽃비와는 사뭇 다르게 마음이 헛헛해진다. 그간 생을 온몸으로 움켜쥐고 있었을 나무의 고단함이 애처로워서, 오늘도 따뜻한 보금자리 단단히 떠받치려고 차가운 바람 맞아가며 바깥일을 하고 있을 남편이 떠올라서, 나무를 흔들어 겨울을 재우치는 날카로운 바람이 유독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다가올 겨울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게서 나의 생과 누군가의 생을 엿본다. 차가운 현실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담아내는 함민복 시인의 시 「흔들린다」에서도 참나무 한 그루에 담긴 생의 모든 사명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시인은 단단한 땅 속 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최선을 다해 뿌리를 내려 중심을 잡고자 했던 참나무의 단단한 고집과 함께 수시로 이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무성히 가지를 내려 이파리를 틔우는 유연하고도 의연한 삶을 목도한다.

 

 

 

 

 

 

   어쩌다 시 한 편 읽어 보지 못하고 지낸 지 오래되었는데, 공원을 산책하러 나가는 길에 시그림책 <흔들린다>를 선택했더니 이렇게 절묘하게 내가 마주하고 있는 풍경과 시가 어우러진다. 책 <흔들린다>는 앞서 함민복 시인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흔들린다」에 우리나라 1세대 그림책 작가로 알려진 한성옥 작가의 동양화적 감각을 더한 시그림책이다. 일종에 시화집인 셈인데 이를 시그림책으로 표현해 구성한 출판사의 의도가 사뭇 흥미롭다. 그도 그럴 것이 먹색이 지닌 탁한 질감과 강렬함, 그 안에 은은하게 번져있는 푸른 색채감이 잘 어우러져 제법 묵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시 한 구절 한 구절이 지닌 언어적 감각이 시각적 감각을 만나 페이지 한 장 한 장에 매우 진중하게 담겨져 있음은 물론, 한층 입체감 있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이미 '흔들리는 것'들에 대한 예찬은 꽤나 익숙하다. 누군가는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하였고, 또 누군가는 흔들림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관계는 시작되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라고도 하였다. 흔들리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데,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이 삶이 왜 이리 고단한 것인지 모르겠다. 흔들리지 마라는, 흔들리는 게 인생이라는 말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니까. 그래서일까, 그 어떤 자기계발서의 훌륭한 조언이나 문구보다 <흔들린다>를 통해 생의 모든 순간순간이 흔들림의 연속인 나무 앞에서 우리네 삶에 대한 위안과 의지를 보다 크게 얻게 된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그러므로 이 난해한 시적 표현 앞에서 우리는 정확한 해석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고단하고 힘든 세상살이, 흔들리면서 버티고 버팀으로 또 흔들리는 이 삶에 그저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를 숭고하게 여기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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