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 뷔페
류즈위 지음, 김이삭 옮김 / 민음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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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억압과 상처의 족쇄를 예민하게 포착해낸 작품!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






  다행이었다. 딸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류즈위의 단편소설 「동창회」에서 주인공 자스민은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온몸이 격렬히 떨리는 충격으로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다. 정신 차려. 네게는 딸이 없어! 이미 남편과는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지 않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자신을 성폭행한 선배가 꿈에 나타나 휴대전화 속의 딸 사진을 들여다보려하자, 딸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절박함에 강렬히 사로잡혔다. 내. 딸. 을. 만. 지. 지. 마. 실제로 그 소리를 내 뱉었는지 아니면 마음속으로만 폭발하듯 터뜨렸는지 깨닫기도 전에 꿈에서 깨어나지만, 여운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껴안든 실천하든, 

심지어는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여성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120p




  『여신 뷔페』는 타이완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류즈위의 단편소설집이다. 일단 이 책의 제목이 눈길을 끄는데, 여성이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먹는다는 뜻의 페미니즘 백래시 표현인 ‘여권 뷔페’의 변형어라고 한다.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을 향한 대립이 보다 극렬해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듯, 작가 류즈위는 여덟 편의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처해있는 상황을 투명하게 직시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언어로 여성을 묘사하는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제한하는지, 때로는 여성 스스로가 가해자이자 공모자가 되기도 하는 현실까지 다소 발칙하고 도발적인 언어로 재현한다.




여자의 울음은 어떤 울음이든 참된 감정이 아니라 히스테리일 뿐이니까. 그녀는 울 수 없었다. / 「남의 아이」 중에서 89p



“남성이 바라는 이상형의 역할을 여성이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문화적 속박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어요. 전형적인 역할에서 벗어났을 때 수반되는 결과를, 그 책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강가 모래섬에서」 중에서 98p











  「강가 모래섬에서」의 주인공 샤오뤄는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강의하며 남녀의 사회적 평등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젊은 연인 앞에서는 넓어진 모공과 잔주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기검열에 매달린다. 학식과 경력을 얼마나 쌓았건 간에 마흔 둘과 스물 다섯 사이에 존재하는 나이 차는 계급으로 작동할 뿐이다. 데이트 상대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느끼며 상대에게 모든 걸 맞추는 리즈(「리치 사용 설명서」), 늦은 밤 택시 기사가 자신의 몸매를 칭찬하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사이렌이 울리는 항아(「항아는 응당 후회하리라」), 업무 결과가 안정적이며 팀원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사내 진급 경쟁에서 남성 직원에게 밀려나고 마는 메두사(「여신 뷔페」), 이 여성 화자들은 불안과 억압 그리고 트라우마로 점철된 ‘여성’이란 이름의 모든 언어들이다.



선생님은 자기 몸을 느끼면서 자기 내면을 바라보라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껏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언하오에게 줄 정교한 선물을 다듬고 있는 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었으니까.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57p


가정 수호와 아이 사랑의 깃발을 내세우면서 성평등 교육에 반대하는 단체들을 이제껏 혐오해 온 리즈였지만, 성교육은 반드시 일찍 시작해야 한다고 늘 주장해 온 리즈였지만, 지금은 그들의 마음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 아이와 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이 성교육을 받지 않기를 바라는, 심지어는 자기 아이가 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영원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부모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 「리치 사용 설명서」 중에서 164p



“내가 쟤를 도와주는 게 이번이 세 번째야.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양해해 준 거 아냐? 내 사정은 누가 알아주는데? 다른 사람한테 피해 줄까 봐 걱정했다지만 결국 피해 준 건 사실이잖아. 나는 나중에 결혼해도 아이는 절대 안 낳을 거야. 이거야말로 남한테 피, 해, 를, 안, 주, 는, 거, 라, 고. 알겠어?” / 「여신 뷔페」 중에서 175p



전동 유축기 전선으로도 자살을 할 수 있나? 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그렇게 죽지? / 「여신 뷔페」 중에서 225p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결국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이라서 상당히 몰입해서 읽었다. 한편, 이미 나는 이들의 언어를 써왔고, 또 쓰고 있으며,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읽는 내내 힘겹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써나가기를,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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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운 보수 의로운 진보 - 최강 형제가 들려주는 최소한의 정치 교양
최강욱.최강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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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이 책을 읽게 된 건 정당이 무엇이냐던 첫째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 당시 아이가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정당과 정치의 현실이 이러했기에 대답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실 정당 정치의 가치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험을 수차례 겪고 보니, 가치판단은커녕 무엇이 보수이고 진보인지조차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워진 까닭이다.




  그런 가운데 최강욱 전 국회의원과 그의 형제가 썼다던 이 책의 소개글이 눈에 딱 들어왔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욕할 때 하더라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보수와 진보의 편가르기와 혐오, 경쟁으로 과열된 바로 지금이야말로, 무엇이 진짜 보수이고 진짜 진보인지 우리 스스로가 제대로 알고 판단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보수와 진보는 세상과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들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보다 균형감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 민주 시민으로서 그에 대한 이해와 해답을 얻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에 꼭 주목해보시길 바란다.




보수는 왜? 진보는 왜?



  책에 따르면 한 시대의 보수와 진보는 세상과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 변화를 꾀하는 ‘속도’ 등을 기준으로 나뉜다고 한다. 필요한 사회 변화에 대해 ‘천천히 신중하게 최소한으로’ 라고 생각하는 쪽이 보수, ‘빠르고 과감하게 전면적으로’ 라고 말하는 쪽이 진보다. 다시 말해 보수는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바뀐다 하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핵심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반면, 진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시대와 문화의 요구에 따라 상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는 가족·질서·법·역사·전통·권위·안보·애국심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진보는 인권·정의·해방·관용·미래·참여·연대·변화·혁신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입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느냐 아니냐를 놓고, 민주주의와 독재가 갈립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독재’입니다.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정치가 아니라 경제체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반대말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국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같은 민주주의이면서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나라가 어디인가를 놓고 생각해야 우리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에 이런 장단점이 있고 스웨덴과 핀란드에 이런 장단점이 있겠지, 그렇다면 좀 더 미국 쪽으로? 아니, 좀 더 스웨덴 쪽으로? 늘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게 좋습니다. / 81p










  ‘보수와 진보’를 논할 때면 꼭 ‘우파와 좌파’라는 단어가 잇달아 등장하곤 한다. 나는 이제껏 좀 더 극단적인 성향의 보수를 우파, 또는 극단적인 성향의 진보를 좌파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책을 읽고 그간 상당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에서는 우파와 좌파에 대해 ‘자본주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에 따라 나뉘는 개념이라 정의한다. 시장에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쪽이 우파, 국가의 개입이나 역할이 좀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좌파다. 즉 자본주의의 ‘장점’과 사회주의의 ‘단점’ 쪽에 조금 더 내 관심이 가면 우파이고, 자본주의의 ‘단점’과 사회주의의 ‘장점’ 쪽에 조금 더 내 관심이 가면 좌파인 것이다. 만약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진보를 지향하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우파를 지향한다면 나는 진보우파라고 설명하는 것이 옳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보수=우파 또는 우익’ ‘진보=좌파 또는 좌익’이라는 도식적 구분을 벗어나 각각이 지향하는 바를 좀 더 사려 깊게 헤아리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공동체의 질서를 훼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공권력과 법의 힘을 빌려서 알아들을 만큼 응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두 이기적인 존재인 만큼 내가 이익을 볼 때 누군가 손해 보는 일이 생기겠지만, 인간이 서로 다른 존재로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난 이상 ‘사람과 사람 사이의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하다’라는 건 받아들여야 해요. 나는 전통과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보수의 역사적 성취를 믿습니다. 헌법과 자유를 최고의 가치고 여기고, 시장경제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번영을 이끌어 낸 자랑스러운 역사, 이것이 보수의 성취입니다. / 118p



인간은 환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전쟁 대신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고, 인간의 삶 전반을 함께 나아지게 할 수 있어요. 자기 개성과 정체성을 마음껏 표현할 권리도 있지요. 성별, 성적 지향, 인종, 종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불평등과 편견, 약자를 위해 싸운 이타와 투쟁의 역사, 그래서 생긴 세상의 모든 변화.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진보의 모습입니다. / 119p











  이 외에도 책은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고 한국 정치사에 뿌리를 내렸는지 역사적 배경은 물론, 이들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입장 차이를 구체적인 사례와 영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려준다. 빈자는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나오는 어르신들의 심리는 무엇인지,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또 극우가 준동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그간 납득할 수 없었던 현실 정치의 면면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보수와 사람과 세상을 의롭게 하는 진보가 어떻게 하면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균형 있게 나아갈 수 있느냐다. 이 책으로 하여금 나의 정치적 성향은 무엇인지,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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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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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에겐 위기, 도전,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었던 내 일상과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






  “힘들게 뭐 하러 계단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 타자.” 한때는 계단이 경이로운 효율성을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등장하고 마찬가지로 보다 편리한 이동수단인 엘리베이터가 나타나자 굳이 계단을 오르내릴 이유가 사라졌다. 예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겼던 불편함이 새롭게 등장한 편안함에 의해 선택지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편안함의 습격의 저자인 마이클 이스터는 이를 편안함에 의한 잠식이라 표현한다. 새로 등장한 편안함에 적응하면 이전의 편안함은 더는 수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편안함의 기준을 옮겨가는 것. 이에 잠식되고만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뜻밖에도 현재 인류가 직면한 신체적, 정신적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 이 책은 지적한다.




 

편안함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진정한 삶은 불편한 곳에 있다

 


  편리함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현대인의 문명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오늘날, 이에 과감하게 의문을 던지는 책이다. 내가 해야만 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하기 위해 최대한 낭비되는 시간들을 줄여줄 도구처럼 사용했던 편리함이 실은 나의 신체 기능을 저하시키고 따분함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 상태로 만들고 있었던 것에 대해 책은 다양한 관점에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한다.

 



  그 중에서도 알래스카에서 보낸 33일간의 야생 경험은 독자들로 하여금 낯설지만 매우 특별한 감각을 선사한다. 냉난방 걱정이 없는 집에서 차로, 사무실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22도 생활양식에 익숙해져 있던 신체와 정신이 위기와 도전, 불편함으로 가득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간의 편리함이 나로부터 무엇을 앗아갔는지를 저절로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은 동그라미 안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내 잠재력이다하면서,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울타리를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이건정말로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거죠.” / 65p


 

그러니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진화적 메커니즘은 이제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삶에서 정말로 위대한 것은 결코 완전한 성공이 보장되어 있을 때 오지 않습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실행하더라도 실패 확률이 높은 도전에 참여하는 것, 그런 상황에 과감히 뛰어드는 행동은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주고, 내 안의 잠재력을 알게 해주죠.” / 76p


 

현대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따분함의 결핍이야말로 인류의 정신적 피로를 거의 위기 수준까지 몰아가고 있는 원인일지 모른다. 한 미디어 분석가의 연구에 따르면, 스크린 기반 미디어의 맹습이 미국인들을 갈수록 별스럽고 조급하고 산만하고 까탈스러운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줄이면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었다. 과로 속에서 제대로 돌보지 못한 마음들은 우울증, 삶에 대한 불만족, 인생이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이 느긋하게 방랑하면서 화면 밖의 것들을 인식할 때에만 그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놓친다. / 158p

 


지금 여기를 자각한다는 이 개념은 요가 수행자가 추구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뇌 스캔 결과 부드러운 매혹상태는 명상의 마음챙김 상태와 동일했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생각, 창조, 정보 처리, 임무 수행 등에 필요한 자원들을 회복하고 구축한다. 자연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한마디로 명상 없는 마음챙김이다. 매일 잠깐이라도 자연 속에서 산책하는 것은 명상의 훌륭한 대안이다. 물론 숲속 걷기가 마음의 치료제가 되려면 휴대폰을 멀리하고, 어떠한 정보도 귀에 흘러 들어오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 190p

 










  저자는 의식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목적 있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즉 편안함이 점점 우리의 삶에 침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수록 더 약하고 병든 존재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완전한 편안함보다는 적절한 스트레스와 도전이 오히려 우리를 더 강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그간 얼마나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인가를 내내 생각했다. 스마트폰으로 시작해 스마트폰으로 마감하는 일상, 냉동 제품과 에어프라이기의 편리함으로 채우는 식탁, 걸어갈까 운전해서 갈까 망설이다 이끌리듯 주차장으로 향하고야마는 연속된 하루들에 대하여. 그래서 적어도 하루에 두세 번은 내가 불편해할 만한 것들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수고로운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작정 빠른 길만을 선택하지 않는 여유로움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너그러움까지도 끌어안자고 다짐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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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떠나는 수밖에 - 여행가 김남희가 길 위에서 알게 된 것들
김남희 지음 / 수오서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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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내게 알려준 것들!

이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해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행하는 삶을 살아온 김남희 작가의 여행에세이다. 무려 23년 동안 길 위에서 여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마음인 걸까. 낯선 세계에 나를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일종의 도전 정신 같은 걸까, 변화와 새로운 순간을 갈망하는 호기심 같은 걸까. 고행과 타협, 적응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일단 떠나 보자’ 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마음의 동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궁금했다.




여행을 통해 어떤 곳에 머문다는 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기울여 그곳의 자연이나 사람들과 

이어지는 일이다. / 337p




  그런 나에게 책은 이렇게 답한다. 여행은 무수한 발자국을 이곳저곳에 남기면서 우리 모두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여행지를 기억하게 되는 건 그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흔적이자, 평소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소수자들, 경계인들)의 목소리이자, 낯선 여행자들에게 내미는 그들의 호의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중앙아시아와 유럽, 남미를 아우르는 이 책의 여정 속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뜻밖에도 사람이었다. ‘사람들 사이의 좁은 거리를 견디지 못해 밖으로 돌다가, 그렇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사람이 되었다’던 그녀의 고백처럼, 결국 홀로는 살 수 없다는 감각 같은 것이 우리를 더 다정하게 만들고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끔 하는 게 아닐까.




일에 찌든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을 다해 손님을 대접한다. 키우는 가축을 돌보는 태도도 다정하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만, 돈이 결코 전부가 아닌 사람의 태도다.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이의 존엄이 그녀에게 배어 있었다. 그 집을 떠나던 날, 안젤리카는 마당의 포도와 사과, 직접 구운 케이크와 과자를 가득 담아 건넸다. “우리의 첫 한국인 손님이 되어줘서 정말 기뻤어”라는 말과 함께. / 53p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걷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순례자들의 전용 숙소인 어느 알베르게 벽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우정보다 귀한 카미노는 없다.”

걷기에 급급해 그녀가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모른 척했다면 제대로 카미노를 걸었다고 말하기에 부끄러울 것이다. 그녀 또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걸어야 했다면 좀 서글프지 않았을까? 지금껏 여덟 번 카미노를 걸었지만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걷고 싶은 이유는 바로 길 위에서 만나는 순례자의 열린 마음 때문이다. / 146p












  나에게 있어 여행은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다. 마치 미션에 몰두하듯 다녀온 것에 보다 의미를 두었다. 이곳보다 저곳이 좋았던 이유는 무엇인지 비교하면서 즐거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쌓아가는 것 역시 여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나에게 작가는 20년 동안 질리는 일 없이 여행만 하며 살 수 있었던 비결을 ‘어제 본 것은 다 잊고,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이구아수 폭포를 봤다고 오늘의 정방 폭포를 시시하게 여기지 않는 것, 눈앞의 풍경에 오롯이 몰두하며 주어진 것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는 것,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장면이라 여기는 것. 무엇이든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시간과 장소가 있고, 그럴 때만 느낄 수 있는 어떤 결의 감정과 사유가 있다는 여행자의 태도가 내게도 필요하다.




아무렇지 않던 것들,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원래 지닌 고귀한 가치를 알려주는 땅이었다, 

그곳은. / 24p




  이 책을 읽으며 낯선 여행지에서의 불안과 불편이 타인의 온기와 친절로 회복되는 순간들을 자주 목격했다. 현지인의 삶을 훼손하지 않는 여행을 위한 질문과, 기후 위기의 심각성 속에서 지속가능한 여행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의 삶이 이토록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할 수 있었다. 길 위에서의 사유와 경험을 나누어준 그녀의 글 덕분에 마치 아주 오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으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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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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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라는 이름을 머리에 꽉 박히게 하는 작품이다!





  타살 혐의점이 없는 자살 사건이었다. 날마다 다양한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고, 고작해야 하루 이틀 기사에 오르내리거나 몇몇 인터넷 가십거리로 소비되고 마는 현실 속에서 이 사건도 그렇게 조용히 마무리될 것이라 생각했다. 무심코 열어본 옷장에서 조각난 신체가 담긴 스물다섯 개의 유리병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셰바이천, 41세, 무직. 홍콩 경찰은 마흔이 넘도록 직업도 없이 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며 살아온 은둔형 외톨이인 셰바이천을 이 기괴한 토막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의 방에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처럼, 시신을 수집품처럼 보관하고 있다가 죄책감에 자살을 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하지만 셰바이천 어머니로부터 터져 나온 뜻밖의 증언이 이들의 발목을 붙든다. “바이천은 20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요!”




오랫동안 은둔한 채 지낸 자기 삶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진화한 인류의 선택이자 새로운 시대의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 116p




  홍콩 출신의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소설 『고독한 용의자』는 은둔형 외톨이였던 한 남자가 자살을 한 뒤, 그의 방에 감추어져 있던 토막 살인사건의 흔적까지 세상에 드러나면서 이에 대한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범죄추리소설이다. 20년 동안 집에서만 은거했다던 남자가 어떻게 두 차례에 걸쳐 살해를 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시체를 보관할 수 있었을까? 한사코 셰바이천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와 셰바이천의 자살을 최초로 목격한 친구이자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증언은 믿을 만한 것인가? 소설은 너무나 뻔해 보였던 용의자와 그렇지 않은 사건의 내막이 과거-망자의 일기-출간 예정된 소설-현재와 유기적으로 얽혀 거듭해서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




나는 원래 사람의 시신을 토막 내는 것은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잔인한 악행이자 금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책을 읽고 나서 여러 토막을 이어 붙여 완벽한 사람을 만든다는 발상에 매료되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신을 무기물로 바라보고 세속의 시선과 윤리의 족쇄까지 벗어던진 채 절묘한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나중에 나도 이런 예술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생명을 대가로 내놓는다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 76p



인생은 원래 고독한 여정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도 혼자이고, 세상을 떠날 때도 역시 혼자일 수밖에 없다. 아바이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무리 지어 사는 것은 통치자가 사회와 국가, 민족을 만들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자 속임수라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익이나 자기만의 이상을 위해 스스로를 기만하고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라는 본질을 망각한다. / 115p



이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그걸 ‘게임’으로만 여기고, 애들 놀이이자 장사꾼의 돈벌이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바이에게는 게임이 창조해내는 사이버 ‘사회’가 현실 세계보다 더 진짜 같고, 그와 그의 동족들이 생존하기에 더 적합한 곳이었다. / 116p












  범죄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 이 소설은 홍콩 사회 전반의 우울한 현실을 고스란히 비춘다. 주요 소재인 자발적 은둔자들, 빈곤 계층과 약자를 따돌리고 외면하는 사회 구조, 렌털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성상품화되는 여성들의 고통 등을 섬세하고 무겁게 묘사한다. 자신을 감추고, 자신과 사회의 연결을 끊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우고, 고독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을 양산해내는 기형적인 사회 구조와 범죄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이 도시에 외로운 사람이 이렇게나 많군, 이라고 쉬유이는 생각했다. 렌털 애인은 단순한 성매매가 아니라 연극에 더 가깝다. 고객의 연인을 연기하며 상대에게 생리적인 욕구 충족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위안까지 제공한다. 애인 렌털업이 일반 성매매보다 더 호황이라는 사실은 이 도시 사람들이 단순히 성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욕구가 더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 235p



“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해요. 그들이 죽든 살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죠. 부자가 10달러를 도둑맞으면 경찰은 그의 지위와 신분에 눌려 호들갑을 떨면서 도둑을 잡으러 다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한 가정이 통째로 사라져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 328p












  마지막까지 흡인력있는 전개로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위적인 요소들이 아쉬움을 남긴다.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이 경찰인 쉬유이와 날카로운 추리 대결을 펼치고, 의표를 찌르는 논리로 압도하는 장면을 기대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맛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점도 아쉽다(칸즈위안의 의도대로 이끌려가는 흐름이어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받은 이유는 사회문제와 인간 본성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줄곧 의도적으로 흘려온 떡밥들을 완벽하게 회수해가며 완성도 높은 추리소설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찬호께이라는 이름을 머리에 꽉 박히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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