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 소녀시대
김용희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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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의 열병처럼 뜨겁고, 민들레 솜털처럼 순수했던 추억의 그 시절, 그 소녀들!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진 1979년의 시대를 통과해온 소녀들의 발칙한 성장기!

 

 

 

 

 

   무릎과 허벅지 사이, 1cm 차이에도 예민하게 굴었던 교복 치마 길이만큼 사소하지만 나를 둘러싼 세상의 그 모든 것들에 한없이 민감했던 시기가 있다면 바로 사춘기 혹은 여고 시절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그 시절은 총총거리던 단발머리를 귀 밑 몇 센티까지 자로 잰 듯 검열을 하곤 했던 시대로부터 막 해방을 맞이하던 때였고, 낯모르는 이와 주고받던 펜팔 편지를 누구 볼세라 우편함을 하루에도 몇 번씩 기웃거릴 때였으며, 손수 엽서에 사연을 적어 보내거나 듣고 싶은 음악이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기를 고대하며 빈 카세트테이프에 심혈을 기울여 녹음 해대던 시대였다. 하고 싶은 게 많았으나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았던 때였고, 철은 들었으나 세상의 이치에는 아직 어리숙하고 늘 어리둥절할 때였다.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때였으나 돌이켜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말하게 되는, 짧지만 생애 가장 반짝이는 청춘으로 아름다웠던 바로 그 시절.

 

 

 

   허벅지를 뚫고 올라오는 호르몬의 왕성한 활동과 호기심을 <선데이 서울>과 <야담과 실화> 같은 잡지로 은밀하게 해소하는 와중에도,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연습장에 '황칠'을 해가며 외웠다던 고백이 어쩐지 낯설지 않을 이들에게 반가울 만한 소설 한 권이 출간되었다. 바로 <란제리 소녀시대>다. 현재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동명 드라마 '란제리 소녀시대'의 원작소설로,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두환 군사정권이 집권을 시작할 무렵의 대구를 배경으로 18세 여고생 소녀들의 일상과 그들이 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작가 소개를 읽고서야 알았지만 2009년에 이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 문학 도서에 선정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재편집되어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란제리 소녀시대>는 소녀소녀한 감성이 돋보이는 표지이미지와 달리 소녀를 수식하는 '란제리'라는 단어가 어쩐지 낯설고 기이하게 느껴져서 유독 시선을 끈다. 특히나 197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란제리'라는 여성 속옷을 뜻하는 외래어가 '소녀'와 어울릴 만한 단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금기와 억압된 욕망, 혹은 민감한 감성으로 충만한 시절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과감하게 이를 문학적으로 차용한 저자의 의도가 무척 궁금해지는 것은 곧 이 책을 향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은 이제 한 딸아이의 엄마가 된 주인공 정희가 딸과 공유하며 사용하던 생리대와 칠칠맞게 얼룩처럼 묻어나온 생리혈의 흔적을 보며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곤 했던 청춘의 상흔을 떠올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단순히 추억 소환이나 하이틴 로맨스로 점철된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 아니라 변혁을 맞았으나 다시 또 공포의 시대이기도 했던 그 시절 수많은 소녀들의 상처와 성장통이 피부처럼 들러붙는 경험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언니들, 혹은 엄마의 이야기이도 한 소녀시대

 

 

그리고 다시 쪽문을 나오면 장미 넝쿨이 있는 우리 집이었다. 정원에는 붓꽃과 라일락이 한창 꽃을 피워 올리느라 숨가빠했고 장독 안에는 구더기가 맹렬하게 꿈틀거리며 생의 한때를 건너고 있었다. 소녀들은 첫 생리혈이 묻은 속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고, 소년들은 이불 속에서 몰래 정액을 뿜어내며 남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책상 위에 써놓은 명구를 보면서 소년들은 야망이 뭔지 모르지만 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소녀들은 우릴 무얼 품어야 하나 혼란스러워했다. / 42p

 

 

 

  문득 열여덟의 나이란, 많은 상상과 착각 속에서 설렘과 상실을 반복하게 되는 때라는 생각이 든다. '하면 된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문구로 선동될 수 있는 나이여서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도 뭔가를 해낼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자주 품게 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슨 야망을 품으면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막연한 때이기도 했다. 그저 고3이라는 인생 최대의 시험 앞에서 가족들의 집요한 위로와 응원을 받아가며 기계처럼 문제집을 풀어대고 책상에 눌러 붙어 앉아 있으면 좋은 대학을 가 잘 살 수 있겠지, 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소설 속 정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모호한 기대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이 활시위의 긴장처럼 온몸의 신경을 팽팽하게 당기는 나이를 통과해오고 있었다. 짝사랑 하던 상대를 본의 아니게 친구와 공유하고, 그것을 잃게 되는 순간 감기처럼 찾아오는 열병들에 몸살을 앓기도 하고, 그러다가 우반과 열반으로 나뉘는 입시 생존 경쟁에 자연스럽게 등 떠밀려 현실로부터 살짝 비켜난 어느 낯선 곳에서 비현실적인 체험 같은 것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레슬링이 쇼고 김일도 먹고살기 위해 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쯤은 주머니칼처럼 가지고 다닌다. 호랑이 가운을 휘익 바람에 넘기며 김일이 사각의 링 펜스를 넘어올 때,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호랑이 가운을 코치에게 휙 던질 때, 철창 매치를 하다 극본에 짜여진 대로 머리에 피를 내고 괴로워할 때, 인생은 먹고살기 위한 어떤 쇼라는 생각을 했다. / 67p 

 

 

 

 

 

 

  이렇듯 소설은 정희와 혜주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의 관습과 변혁의 시대 사이에서 여전히 고립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소녀들의 고민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성장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고백한다. 특히, 혜주는 서울에서 전학을 와 시와 철학을 가까이 했던 소녀로 여성을 옥죄는 사회적 제도 및 관습과 규율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목소리를 냈던 강단 있는 소녀였다. 정희의 관점에서 혜주는 하얗고 고운 얼굴로 지성미를 뽐내며 질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서울 소녀'이기도 했지만 문학과 철학으로 이 시대의 불행을 위로받고 또 그것을 고민할 줄 아는 또 다른 자아상이기도 했다.

 

 

 

"오히려 삶은 긴장하지 않으면 어느 틈에나 공격할 복병처럼 우리에게 쳐들어와. 희망이라는 것도 삶을 위한 마약 같은 거라고 봐."

"그래, 삶이 어떤 공격을 해올지 모르니까 우리는 삶에 대해 조심해야 할 거야. 그러나 상상의 영역들, 희망의 영역들이 꼭 허구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야. 그것은 인생의 과정 혹은 그 자체의 깊은 이해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우리 삶에서 불행을 돌보듯 희망도 돌봐줘야 하는 거야." / 131p

 

 

 

   이 소설의 거대한 반전과도 같은 혜주의 상처는 그래서 더욱 뼈아프다. 불만족스러운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일 줄 알았던 이 고매한 소녀를 무릎 꿇게 만든 낡은 관습과 폭력, 억압의 존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낯부끄러운 회피들. 유독 소녀들에게 훨씬 변덕스럽고 부당한 현실을 고백하며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만든 '란제리'가 오히려 자신의 몸을 조여 오는 비정한 현실을 꼬집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이 날카롭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인간이란 세계와 불화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라고, 누구나 자신의 세계와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독려하던 김화순 선생님의 말은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온다.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은 되풀이되어왔다는 생각도 든다. 이미 세상이 만들어놓은 지도 위에서 여자들이 단단하게 몸을 감싸고 다시 그 몸을 찢는 일 말이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투명하고 얇은 막 같은 거 말이다. 란제리처럼 몸을 보호하던 것이 오히려 몸을 조여오는 거 말이다.

소녀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과 여자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소녀는 훈육과 통제 안에서 '여자'가 된다. 훈육과 통제에서 벗어나려하면 누구라도 한번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두운 연못 속에 빠지고 만다. 삶의 폭력이 부당하다고 소리쳐 말할 수도 없다. 폭력은 또 다른 2차 폭력을 가져올 뿐이니까. 소녀들에게 삶은 훨씬 변덕스럽고 심술궂다.

그래서 소녀는 자란다. 세상이 우리의 갈망에 순순히 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 277p

 

 

"모두들 조금씩 자기 모습에 불만족하면서 세계와 싸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세계와 불화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지. 누구나 자신의 세계와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지옥과 마주 싸울 각오도 의욕도 없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노?" / 275p 

 

 

 

 

 

 

   앞서 쓴 글로 인해 소설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마치 한때 유행했던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러했듯 지난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요소와 남녀 고교생들이 나누는 미묘한 감정들, 대구 사투리 특유의 퉁명스럽지만 은근 간드러지는 말투 등 가독성을 높이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극의 재미를 더한다. 비틀즈, 조다쉬 청바지, 지글지글 끓는 방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즐겼던 추억의 전기게임 등 당시 시대를 엿볼 수 있는 추억의 아이템은 물론, 운 좋게도 나와 같은 대구 토박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동성로, 반월당, 만경관, 자갈마당 등 지역적 색깔을 덧입힌 사실적인 배경 묘사들은 극적 완성도를 높인다. 개인적으로 정화여고를 졸업한 까닭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정희와 혜주가 다닌 학교가 정화여고인 점은 더욱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으니 이제는 드라마를 찾아서 감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작은 원작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매력과 재미가 있기 마련이지만 원작소설이 있다는 것은 은근 어느 쪽이 더 괜찮다고 저울질하는 재미도 있으니 말이다. 희망보다 상실이 더 많은 시대를 통과해야했지만 그 속에서도 속살거리고 깔깔거림을 멈추지 않았던 나와 나의 언니들, 엄마들의 삶을 응원하게 되었던 소설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작품, <란제리 소녀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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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미래 - 편견과 한계가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라
신미남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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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가정과 일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여성들을 위한 담대한 메시지!

낡은 편견과 심리적 장벽을 깨부수고 밝은 미래로 도약하기 위한 성공 전략! 

 

   "여성은 티백과 같다. 뜨거운 물에 담그기 전까지는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른다."

   미국의 전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내 엘리너 루즈벨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전히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평가절하하거나 기회의 문턱에서 주저하고 있다. 지속적인 저성장시대에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지만, 우리 사회 구조는 여전히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능한 여성들의 사회력을 박탈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여성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고, 다양한 기술 혁신으로 인해 가사 노동에서 일정 부분 해방되었음은 물론, 사회 및 기업 조직의 형태와 문화도 여성들이 지닌 강점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출산과 육아를 앞두게 되면 무력하게 일터를 떠나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해야만 한다.

 

 

 

   <여자의 미래>의 저자 신미남은 입학생 1000명 중 거의 유일한 여학생으로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해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삼성 연구원과 맥킨지 컨설턴트를 거쳐 (주)퓨얼셀파워를 창업하여 국내 최초로 '연료전지'개발에 도전한 창업가로, 끊임없이 유리천장을 깨며 커리어를 도약시켜온 대표적인 여성 리더 중 하나이다. 그녀는 30여 년간 두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으로 살아오면서 온갖 편견과 포기를 강요하게 하는 현실에 부딪히면서도 '절대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망으로 스스로 인생의 중심에 우뚝 섰다. <여자의 미래>는 이처럼 일과 가정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유의미한 경험과 실수를 통해 어떻게 하면 자신처럼 여성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잃지 않고 꾸준히 경력과 성장을 동시에 이루어나갈 수 있을지 그 방안을 모색하고 독려하는 자기계발서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여성에게 전문가이자 리더가 될 커다란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굳게 믿으며 이 책이 삶의 단계마다, 일을 하며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용기 얻을 수 있기를 염원한다.

 

 

 

여성은 그 자체로 21세기에 알맞은 경쟁력을 타고났다. 조직과 업무 환경, 기업 문화도 여성 친화적으로 변하고 있다. 시대가 일하는 여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 많은 여성이 가정과 일 사이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일을 그만두는 선택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중요한 시기에 커리어 도약을 이루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대를 이끌어나갈 여성 리더들이 많이 배출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면 여성이 가진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성을 금방 갖추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고 이 시대에 필요한 여성의 진정한 강점이다. / 100p 

 

 

여자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

 

 

  책의 첫 번째 장에서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 회사에 입사해 경력을 쌓아가던 유능한 여성들이 '육아', '사회적 편견', 그리고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심리적 장벽'을 넘지 못한 채 일터를 떠나야만 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본다. 사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 문제 앞에서 더욱 가혹하게 뒤따르는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인해 다니고 있던 직장을 정리하고 집에서 육아를 전담한다. 나만 하더라도 친정이 먼 곳에 있고, 시댁 어른은 몸이 불편해서 아이를 봐줄 수 없는 상황이며 남편이 사업으로 인해 육아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철저한 '독박육아'의 상태이다 보니 계약직이나 시간당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는 처지다. 하물며 아이가 둘 이상인 엄마들은 육아휴직을 이용해 어떻게 해서든 일터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결국 포기하고 만다.

 

 

 

   2015년에 실시한 통계 조사에 따르면 여성의 50.5퍼센트, 남성의 44.4퍼센트가 여성이 취업하는 데 심각한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육아'를 꼽았다고 하니 가장 현실적으로 여성들이 느끼는 가장 거대한 산이라는 점은 자명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지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불평등과 사회적 편견, 스스로 '여자의 역할'이라는 틀에 한계를 두는 내면의 적들 역시 여성의 사회진출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다.

 

 

 

   저자 신미남 역시 피부로 느낀 위와 같은 거대한 산과 이를 넘어야만 했던 자신의 고충과 아픔을 토로한다. 유아원을 나서는 다리에 매달린 채 울부짖는 아이들을 뒤로 해야 했던 시간들, 엄마들의 살뜰한 보살핌 안에서 옆집 아이는 다재다능하고 안정감 있게 자라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했으며,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직원에게만 핵심 업무를 넘겨주어 몇번이고 가로막혀야 했던 승진의 기회들, 남자들이 일을 잘하면 으레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자들이 일을 잘하면 '독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 근거 없는 비난들, 유능한 리더로 성장했지만 대다수가 극복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주저앉는 주위의 여성들을 보며 더욱 크게 느껴지던 장벽들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가 더 자라 세상을 알게 되면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 일을 해나가고 있는 전문가 엄마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는 믿음과 남편 혼자 벌어서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일이 어렵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멋지고 당당하게 또 다른 산을 넘는 일' 뿐이라고 단단히 마음먹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는 지금까지의 세상보다 훨씬 더 일하는 여성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기에 이러한 변화에 대비하기 위해 여성 스스로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의지를 가지고 자기 안의 의식을 혁명할 수 있기를 설파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회

 

 

   저자는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기계적인 특징보다는 인간적인 특징이, 육체노동보다는 정신노동의 특성을 지닌 업무들이 미래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즉,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창의성과 공감 능력이 필요한 소프트한 서비스 분야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전망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창의성이 높고 공감 능력이 탁월하며, 서비스 역량이 강하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통에도 능하고, 투명하며, 변화에 적응하는 융통성도 높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낸 IT 활용 능력만 갖출 수 있다면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생겨날 일자리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여성들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새로운 세상이 요구하는 중요한 역량으로 '창의성', '공감력', '소통력', '윤리성', 유연성', 적응력'을 예시로 들며 여성들에게 이와 같은 능력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또한 여성들에게 보다 편리하게 변화될 것으로 기대되는 재택 근무 환경, 여성을 주눅 들게 하는 권위주의식 기업 문화의 탈피가 일정 부분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독려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변화하는 시대에 발빠르게 대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쟁취할 것을 전한다.

 

 

 

GE의 최고경영자 제프리 이멜트가 "가장 큰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끝까지 모른 채 시간만 보내는 꼴이 된다. 한번 생각해보라. 찻잔 속에서 향기를 내는 차가 될 것인가, 찬장 속에서 묵어가는 티백으로만 존재하고 말 것인가? 뜨거운 물에 스스로를 내던질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강하고 빛나는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여성은 이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찻잔 속 뜨거운 물이 생각처럼 두려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나만의 진정한 향기를 낼 수 있는 곳임을 깨달아야 한다. 마침 세상은 여성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전망 좋은 출발선에 서 있다. / 101p

 

 

 

가슴 뛰는 삶을 위해 기회에 달려들어라

 

 

   <여자의 미래>는 제목 그대로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변화하는 미래 세대를 전망하며 여성들이 가슴 뛰는 삶을 위해 기회에 달려들 것을 응원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인생의 중심에 서서 뻔히 보이는 결말에 따르지 말고, 두려움을 뛰어 넘어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을 응원하는 이 시대의 큰 언니 같은 마음으로 쓴 그녀의 글에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되니 말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물론, 앞으로 살아갈 많은 딸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시지이자 자기계발을 위한 첫 단추가 되어줄 좋은 책인 것은 분명한 듯하다. 다만, 불가피한 이유로 가정에 보다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의 입장에서는 이 대담하고 강렬한 조언들이 여전히 완벽하게 현실에 반영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로 다가온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말고 어떠한 선택이든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빛나는 삶을 살 것에 집중하자고 나를 응원해보게 된다.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직진'. 결국 내 삶을 빛나게 하는 건 누구도 아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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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상식사전 - 내 안의 바리스타를 위한
트리스탄 스티븐슨 지음, 정영은 옮김 / 길벗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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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마시면 커피가 더 좋아질 것이다!

커피의 역사부터 커피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커피학 입문서! 

 

 

 

   끊어질 듯 연약하지만 험난한 여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만들어지는 완벽한 한 잔의 아름다움. 피곤에 지친 일상을 위로하고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며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한 잔의 여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커피를 사랑하는 이유다. 세상에 이만큼 중독성 깊은 음료가 또 있을까. 정성들여 내린 커피 한 잔도,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 커피 한 잔도 모두가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어서 반드시 하루에 한 잔은 꼭 찾게 된다. 내게 있어 캔 커피는 학창 시절 아침잠을 견디게 해주는 보약 같은 존재였고, 커피를 마시자는 것인지 설탕 시럽을 마시자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잔뜩 시럽을 넣어 마시는 난감한 기호를 가졌을 때도 있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열정적으로 찾게 되는 것은 역시 커피다.

 

 

   프랜차이즈 카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이색 카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커피의 다양성과 맛에 보다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최근에 들린 카페에서는 인도네시아와 엘살바도르, 케냐산 원두 중에 직접 기호에 맞게 골라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원산지에 따라 산미와 풍미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도 자연스레 뒤따르다보니 '아, 매일 마시는 커피인데 나도 알고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커피와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커피 입문자가 읽기에 부담이 없고 커피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만한 정보가 가득한 책을 선별한 끝에 <커피 상식사전>을 선택하게 되었다.

 

 

   <커피 상식사전>은 제이미 올리버와 함께 일을 시작하여 각종 바리스타 대회에서 수차례 수상한 바 있으며, 영국에서 각종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커피에 관한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유명한 트리스탄 스티븐스의 저서이다. 책에는 커피의 역사부터 홈메이드 레시피까지 흥미로운 커피 이야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커피의 원산지, 로스팅 과정, 추출법에 관한 중요한 정보까지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는 커피를 이해하는 단계를 7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커피의 역사에 얽힌 재미난 뒷이야기를 시작으로 커피의 맛과 향을 결정짓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본 다음 인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에스프레소가 탄생하는 원리와 머신, 에스프레소를 더욱 매력적으로 마시는 법까지 소개한다. 이어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모든 생산 과정과 향기로운 커피의 향을 만들어내는 로스팅 과정에 대해서 알아본다. 또한 분쇄의 기술을 통해 커피 맛의 상관관계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추출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 맛의 비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만큼이나 커피에 얽힌 역사는 특히 흥미롭다. 정치, 언론, 과학, 문학, 경제 등 우리 생활 및 인류 발전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피를 즐기던 장소에서는 끊임없이 혁신적인 사고방식이 태어났고, 계급제도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으며, 교육과 토론이 꽃을 피웠다. 커피의 영향으로 혁명이나 내전, 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던 까닭에 심한 경우 커피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커피를 처음 발견한 이는 칼디라는 젊은 에티오피아 목동이라고 한다. 염소를 돌보는 일을 했던 목동은 한 식물의 잎사귀와 빨간 열매를 먹은 염소들이 유난히 힘차게 뛰노는 광경을 보고 자신이 그것을 직접 먹어보았더니 정신이 번쩍 들며 힘이 펄펄 났다고 한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약물, 즉 카페인은 이렇게 한 목동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예멘의 도시 모카의 성벽 밖으로 추방된 오마르라는 남자가 우연히 커피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그 덕에 힘을 얻어 다시 도시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커피는 아랍에서 밤샘 기도가 필요한 종교의식에 자주 활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와 함께 퍼져나갔고, 오스만 제국은 예멘을 정복하면서 커피의 높은 상품성을 깨닫고는 다른 지역에서 커피가 재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커피 수출을 법으로 엄격하게 통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씨앗을 몰래 빼냈고, 이렇게 반출된 커피는 인도와 투르크를 거쳐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즐겨 찾는 카페의 시초는 커피하우스로,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런던에서 문을 열었다. 존 스타키는 당시의 커피하우스 문화에 대해서 "커피하우스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다. 평등이라는 이러한 위대한 특권은 인류의 황금시대와 커피하우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그만큼 커피하우스는 정치와 사회, 과학 등 지식이 넘쳐나던 1페니 대학이라 불릴 만큼 영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사실 이 때의 커피는 '끓인 잿물', '말 씻긴 물 맛이 나는 술', '뜨거운 지옥의 국물'이라 표현될 정도로 그 맛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 같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유럽인들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불과 400년 전이다. 커피가 대서양을 건너 신세계에 전해진 지는 고작 3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 동안 커피는 놀랍도록 많은 일을 해냈다. 국가의 형성, 노예제도, 거대 무역회사의 탄생, 주요 언론지의 등장 그리고 현재 국제경제 구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금융기관의 설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커피가 남긴 유산은 정치, 언론, 과학, 문학 등 우리 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 15p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 대화와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1674년 무명의 한 영국 시인은 커피를 일컬어 "아픈 속을 낫게 하고, 천재를 더욱 기민하게 하며, 기억을 돕고, 슬픈 이를 되살리며, 기운을 북돋는, 그러나 취하지는 않는, 엄숙하고 건전한 술"이라고 칭송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커피하우스가 유행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다. / 21p

 

 

 

 

 

 

   한 잔의 커피가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가 만나는 커피의 시작은 씨앗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인의 커피를 책임지는 씨앗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로 나뉘는데, 상업 재배 커피 중 70%가량이 아라비카 종으로 대부분의 경작지에서 수확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로부스타는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에서 주로 재배되는 것으로 카페인 함량이 높아서 병충해에 강하며 재배면적당 수확량이 높은 장점이 있지만 풍미가 떨어지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아라비카 종은 깊은 풍미를 지니고 있으며 로부스타에 비해 섬세하고 미묘한 맛을 선사하고, 커피의 스타일에 있어서도 각각 개성이 뚜렷하고 독특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커피가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 수확, 건조 후 탈곡, 품질 평가, 결점두 선별, 샘플 작업, 포장 작업 등 많은 이들의 땀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커피 한 잔을 알기 위해서는 커피나무의 특징, 커피의 종류뿐 아니라 커피 재배를 위한 식민지 노동자들의 애환까지도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책은 커피를 커피답게 만드는 로스팅 기술과 커피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분쇄와 추출 과정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맛과 멋에 따라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12가지 커피 추출법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한다. 각 챕터 뒤에는 '아포가토', '에스프레소 마티니', '버터커피', '펌프킨 스파이스 라테', '커피 리큐어' 등 스페셜로 만들어보면 좋을 홈메이트 팁까지 함께 제공하고 있으니 따라해봄직 할 듯하다. 책의 마지막 특별부록에는 지식과 교양을 갖출 수 있는 커피 3종 상식을 다루고 있는데 지도로 보는 커피 생산국과 생산국별 특징, 타이피카나 버번 등 커피 품종별 특징을 비롯하여 각종 커피 용어도 소개하고 있어 매우 유용하다. 이렇듯 <커피 상식사전>은 바리스타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입문자에게도, 커피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에게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 참고삼아 읽어보기 좋을 것 같다.

 

 

 

 

   그간 몰랐던 커피에 관한 상식들을 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었다. 역시, 알고마시면 더 좋은 법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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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 - 박상 본격 뮤직 에쎄-이 슬로북 Slow Book 2
박상 지음 / 작가정신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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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있어 기억될 그 시절, 그 공간, 그 끈적끈적한 추억들! 

무료한 일상을 펑키펑키함으로 채워줄 박상 작가의 위트 만점 감성충전 에세이!  

 

 

 

  평범하게 흘러가고 마는 찰나의 순간에 음악이라는 아이템이 더해지면 끈적하게 달라붙는 추억으로 돌변해버리고 마는 기이한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대로 '인생 노래' 한 곡 쯤은 있지 않은가 말이다. 거창하게 인생 노래라는 말로 수식하지 않더라도 축축 처질 때 기분을 업 시키기 위해서 빅뱅의 'FANTASTIC BABY'를 찾아 듣거나 현란한 랩핑과 넘치는 스웩을 내 안에 채우고 싶을 때는 비와이의 'The Time Goes On'을 듣기도 하고, 힘들어보이는 내 사람을 위로하며 힘이 되어 주고 싶을 때는 박장현의 '두 사람'을 찾아듣는 등 인생의 순간순간에 꼭 찾아듣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비상한 기억력을 지닌 나의 남편은 심지어 발매년도와 몇 집에 수록된 곡인지까지 말하며 당시에 그 곡에 얽힌 추억들을 비장하게 말하곤 할 때가 있다. 그래, 그랬지. 머릿속 어느 한 구석에 밀려나있었던 그 시절, 그 공간, 그 끈적끈적한 추억들을 다시끔 생생하게 재현해낼 수 있게 하는 힘은 역시 음악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자칭 문학 천재인 줄 알고 바보 같은 행동만 골라서 하고 다닌다는 작가 박상의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은 작가의 그런 순간순간들이 기록된 뮤직에세이다. 인생이란 어느 정도 흥겨워야만 유연하게 유지된다는 메시지를 얻은 다프트 펑크의 '겟 럭키'로 시작하여 울고 싶을 땐 암울한 마이너톤의 블론드 레드헤드의 'Misery Is A Butterfly'로 감정을 차분하게 가다듬으며, 부조리가 만연한 사회에 일침을 던질 땐 역시 헤비메탈이라며 블랙홀의 '라이어'를 소개하는 그의 음악 세계는 가요, 록, 팝, 클래식 등 다양한 일탈과 변주를 오간다. 특히, 대형마트의 소음같은 광고음악과 어설픈 음질과 선곡으로 식당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작가 특유의 까칠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펑키한 감성과 올드 메탈 같이 낡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그의 선곡들에 귀가 솔깃해지는 경험을 몇 번이나 하게 되게 된다. 

 

 

어릴 땐 스펀지처럼 수많은 음악을 흡수하고, 소화해내면서도 계속 배가 고팠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심지어 체하기도 한다. 아, 쓸 만한 기능을 하나씩 세월에게 내주다 보면 어느 순간 정말 좋은 음악을 만나도 시큰둥한 꼰대가 될까 봐 무척 쫄린다. 뱀파이어가 아닌 이상 주름살은 어쩔 수 없지만 감각의 쇠락에 대책 없이 당하긴 싫다. / 53p  

 

 

  사실 음악이 아름다운 것은 그 음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수식하는 우리의 일상과 삶 속에서 묻어나오는 다양한 해석들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뮤직 에세이라는 축의 또 다른 이면에는 환락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비사 섬과 비현실적일 정도로 감상적인 이탈리아의 플랫폼, 오토바이 퍼레이드로 식겁하게 만드는 베트남 하노이, 항공권이 싸다는 이유로 다녀온 이스탄불에서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그의 여행기가 그것을 추억하게 하는 음악과 함께 자유롭게 펼쳐진다. 단지 속초 앞바다가 잘생겼다는 이유로 연고도 없는 속초로 이사를 가서 모텔 프런트에서 일했던 경험과 함께 버스커버스커의 '봄바람'에 함께 실려온 가장 낭만적인 한 때를 추억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헬조선에서 기 빨리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일상과 시국 비판을 담아내다가도 찌질한 궁핍함이 얽히고설킨 방구석 이야기까지 늘어놓는 정말이지 '웃기는 짜장' 같은 에세이(책을 비하하는 것이 아님, 쿨럭)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일부 착한) 음악들은 묘하게 지친 마음을 위안하는 영적인 힘이 있다. 어떤 음악을 오랫동안 좋아하면 신앙심이 생기는 걸까. 그들도 나처럼 힘들었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런던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 중 하나였고, 감자만 먹으며 버티던 그 시절의 씁쓸함을 조건반사로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일까. 아무튼 보컬 루 리드 아저씨가 발성하는 차분하면서도 쓸쓸한 목소리와 멜로디에서 록 정신의 기본 교리중 하나인 소외와 고통의 근원적인 심장을 느꼈다./ 56p   

 

 

 

 

 

 

이로운 전염성을 가진 감성 바이러스, 감성 백신 

 

 

  때로 음악은 혼란스럽고 정체되어있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반전시킬 만한 평화를 선사한다. 무엇에 그리도 예민해 있었던 것인지 뒤틀린 감정으로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느라 거의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을 무렵,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올라탄 뒤로 나는 크로스오버 장르의 음악을 구사하는 두번째 달의 앨범을 구입해 내내 그것만 듣고 돌아다녔다. 그들의 1집 앨범에 수록된 '얼음연못'과 '서쪽하늘에'는 가사 하나 없는 연주곡이지만 오직 선율의 힘으로 내부에 침투해 살얼음처럼 변해버린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라고, 그리고 서쪽하늘로 지는 태양은 다시금 너를 향해 뜰 거라는 희망이 내 안에 가득차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작가 박상의 에세이에도 음악이라는 이로운 전염성으로 하여금 반전을 맞이하는 순간들이 여럿 포착된다. 베트남 하노이 구시가를 걸으며 삭막한 오토바이 떼와 매캐한 매연과, 자비 없는 경적 소리에 영혼을 빼앗길 무렵 그는 서울 거리가 베트남처럼 무척 혼란스럽고 시끄러웠던 시절을 추억한다. 서울의 기동대에서 군 복무를 한 그가 대규모 시위 현장에 투입되어 공권력의 앞잡이로 거리에 나가 시위대의 샌드백이 되어야 했을 때였다. 그날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던 상황이었는데, 해산 안내 방송이 나와야 할 페퍼포그 차량에서 뜬금없이 카멜의 'Stationary Traveller'가 흘러나오는 실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시위대와 전경들이 뒤섞인 그 혼란스럽고 삭막한 현장 한복판에서 퍼지는 한편의 나레이션 같은 기타 선율과 아름다운 팬플루트의 황홀함이라니!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수류탄이 터지며 창고에 들어 있는 옥수수가 팝콘처럼 한가득 하늘에 팡팡 터질 때 흘러나오던 'Falls of the Popcorn'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카멜의 음악은 싸우기 직전의 대치 국면에 마치 '뽀샵질'을 하는 듯했다. 수많은 시위대와 전경들이 내 눈엔 카멜 콘서트에 몰린 팬들로 보였다. 무거운 국방색 진압복과, 시위대의 처절한 눈빛과, 등 뒤에 숨긴 쇠파이프와, 땀에 전 방독면과, 지휘관의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 또한 평소와는 다르게 꿈을 꾸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대로 음악을 계속 틀었다면 모두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라는 마음이 들어 진압도 안 하고, 시위도 그만두고 그것참 좋은 선곡이었다며 악수한 뒤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 70p 

 

 

음악이야말로 삭막함의 반대말이다. 경제고 사회고 정치고, 삭막하게 정체된 우리의 지금 여행이 음악의 '뽀샵빨'로라도 좀 아름다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 72p 

 

 

  메르스 사태로 나라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을 무렵, 작가는 크리스 가르노의 'Relief'를 들으며 음악이라는 감성 백신을 통해 후진 감성을 몰아내고 섬세한 사회적 항체가 형성되기를 상상하기도 한다. 마치 담백한 곡물 빵에 저염 버터를 부드럽게 발라놓은 느낌과 유사한 크리스 가르노의 나른하고 차분한 음색을 들으면 강력한 항체가 형성되면서 몸 안의 짜증 바이러스가 쫓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음악이 꼭 무슨 효능을 가져야 한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제목 그대로 안도, 안심, 경감, 완화 등을 선사하는 이 노래라면 잔뜩 예민해져 있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을 듯하다. 마침 이사를 마친 후에 새로운 집에서 맞은 첫 아침, 나는 크리스 가르노를 검색하고 이 노래를 재생해 들었는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묘한 음색에 머릿속에 짙게 깔려져있던 복잡한 감정들이 가만히 밀려나는 광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작가 역시 이런 광경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내 안의 많은 무게들이 덜어지고 덜어지는 그런 광경 말이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그러니 찬란한 거야 

 

 

  우리의 영원한 '마왕' 신해철. 마왕의 라디오 <고스트네이션>을 듣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없이 낮지만 일그러진 세상을 향해 또렷한 일침을 내뱉을 줄 아는 그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사실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록이라는 장르를 좋아하기엔 이미 나의 시대는 10대 아이돌 문화에 몸과 마음을 바친(?) 빠순이가 되지 않고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감히 마왕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마성의 매력을 내뿜는 그의 당당함이 좋아서 라디오만큼은 반드시 챙겨듣곤 했다. 작가 박상에게도 '신해철이 없는 세상만큼 개뿔 같은 것도 없을' 만큼 신해철은 역시 남다른 존재였나 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정말 고마운 존재, 땅이 꺼지도록 더 깔아도 되니까 함께 인생의 기찻길을 달리는 중이기만 하면 좋을 것 같은 존재로 말이다. 영원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더 찬란하게 남아 있는 존재, 신해철이 남긴 '불멸에 관하여'의 가사를 읽어보면 정말이지 요즘의 흔한 가사들이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철학이란 게 담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회성 소비에 치우쳐 있는 대중 문화와 음악의 가치를 보다 단단하게 채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작가의 마음에 유독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다.      

 

 

그대 불멸을 꿈꾸는 자여 시작은 있었으나 

끝은 없으라 말하는가 왜 왜 너의 공허는 

채워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처음부터 그것은 텅 빈 채로 완성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내릴 곳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인생이든 여행이든 텅 빈 채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원고의 의미가 텅 비어 보이더라도, 그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이다. / 296p 

 

 

문화적으로 사려 깊고 단단한 것들이 많이 나타나 유치하고 헐렁한 것들을 점점 밀어내는 분위기가 판치면 좋겠다. 오래된 음악들이 자꾸 머그잔처럼 묵직하게 다시 소비되는 건 말입니다. 일회용 종이컵 같은 음악들이 너무 범람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 262p  

 

 

  이처럼 박상의 <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음악'을 넣어도 무방할 만큼 인생을 달달하고 끈적하게 만드는 순간순간에 함께 한 음악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은데 나는 왜 그간 모르고 살아온 건지, 그의 에세이를 읽으며 사는 게 버거워서 감각보다 실존에 치우쳐 살아오느라 놓치고 있었던 음악들을 다시금 찾아 듣고 싶어졌다. "모쪼록 달콤한 사랑이 쩍쩍 달라붙는 날들 되시기를!" 하고 기원하던 그의 글귀처럼 내 인생에도 달달한 감성으로 가득한 추억이 가득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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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플라이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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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이라는 이익 앞에 노출된 욕망과 부조리가 낳은 끔찍한 사건!

조작된 진실과 증명되지 않는 의문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을 쫓아가기 위한 가부라기 특수반의 활약상! 

 

 

 

   요즘 들어 산책을 할 때면 여러 마리의 잠자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하곤 한다. 내 앞에 보란 듯이 나타났다 어느 틈에 파르르 날아가 버리곤 하는 잠자리를 바라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치 바람결을 느끼듯 공중을 유영하는 잠자리를 보며 나는 문득 '드래곤플라이'라는 영문 이름에 낯선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유독 서정적이고 시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우리 이름 '잠자리'와 달리 '드래곤플라이'는 어쩐지 특별한 기운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이름 같다. 가와이 간지의 추리소설 <단델라이언> 을 읽은 이후 민들레가 예사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전작인 <드래곤플라이>를 읽고 있으려니 또 다시 그때와 같은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었다.

 

 

 

   일상성의 반전이 주는 묘미랄까, 나는 <단델라이언> 이후 읽고 싶은 추리소설로 주저하지 않고 <드래곤플라이>를 손꼽았다. <단델라이언>의 민들레가 그래했듯, <드래곤플라이>에서 잠자리의 상징성과 이미지는 그 어느 작품보다 강하게 서사의 힘을 떠받치며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굳이 말하자면 <단델라이언>보다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이며 근래에 읽은 추리소설 중 단연 수작이라 할 만하다.

 

 

 

행운의 상징이 슬픔의 메신저가 되어 돌아오다

 

 

   어느 날, 니코타마가와 강변에서 불에 탄 시신이 발견된다. 그 시신의 모습이란 목에서 아랫배까지 일직선으로 배가 갈라져 폐를 제외한 장기들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복부를 찌른 후 사후에 배를 가른 것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형태였다. 게다가 입 안에는 돌이 들어 있어 입이 쩍 벌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다. 노련한 직감이 뛰어난 형사 가부라기와 그의 부하인 엘리트 히메노가 즉시 사건에 투입되어 현장에 나타난다. 시신이 불에 탔으니 사망 추정 시간이나 흉기조차 짐작하기 어려워 수사가 난항으로 이어질 찰나, 시신의 목에 걸려 있었던 잠자리 장식의 팬던트가 눈길을 끈다.

 

 

 

"잠자리는 말이야, 유럽에서는 재수 없는 곤충으로 취급해. 때론 사람을 문다는 오해까지 받는데 일본에선 아주 친숙한 곤충이지. 어디 그뿐인가? 예로부터 잠자리는 '승리의 곤충'으로 불리며 행운을 가져다주는 곤충으로 여겨졌어. 그래서 무사들이 칼이나 투구, 겉옷 장식이나 무늬로 즐겨 사용한 거야. 그뿐인가? 잠자리는 그 자체가 참으로 신비한 생물이야." / 221p 

 

 

 

   잠자리는 신이 보낸 심부름꾼이라고 했던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곤충인 잠자리는 유독 일본에서는 행운, 기쁨과 제국을 상징한다고 한다. 사건으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히류무라의 두메산골에 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 이즈미는 많은 생물들 중에서도 잠자리를 특히 좋아했다.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 없었던 이즈미는 늘 혼자였던 탓에, 자신에게 다가와 어디선가 날아와 자신의 어깨나 무릎, 단발로 깎은 머리 꼭대기에 가만히 내려앉곤 하는 잠자리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놀러 와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두 남자 아이, 유스케와 겐이 이즈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들은 잠자리를 매개로 친해졌다. 죽마고우인 유스케와 겐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즈미를 항상 지켜주기로 약속하고, 이후 함께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기도 하고 이제는 화석으로만 남아 있는 옛날 잠자리 '메가네우라'를 보았다던 유스케의 말에 따라 함께 이 광경을 보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날아다니는 용을 뜻하는 이곳 지명 역시 '히류무라'. 마치 용이 날아오르는 것 같은 모습의 거대한 메가네우라를 발견한 이 세 아이의 믿기지 않는 이 날의 경험은 훗날 그들 앞에 펼쳐지는 끔찍한 운명의 전조처럼 다가온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 장기를 훼손당하고 불에 탄 시신은 혹시 유스케와 겐 둘 중에 한 명이 아닐까. 앞서 읽었던 이즈미와 두 소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이끄는 잠자리의 흔적이 훗날 그 목걸이로 이어지는 것만 같아 불길한 예감이 드는 가운데, 불에 탄 시신이 결국 유스케라는 사실을 드러나고 만다. 행운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잠자리가 슬픔의 메신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진실 같은 건 없다

 

 

   유스케에게 끔찍한 일을 벌인 살인자가 누구일지, 도쿄 경시청 소속 형사들과 가부라기 특수반이 추적을 거듭하는 가운데 드디어 가장 유력한 용의자 한 명이 떠오른다. 바로 히류무라 마을의 촌장인 다누마다. 과거부터 이 지역은 잠자리의 성지라 불리는 천혜의 생태환경지로, 마을 사람들의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댐 건설이 계속해서 추진되어 온 곳이었다. 촌장인 다누마는 자신이 앞장 서 댐 건설을 반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오랫동안 촌장직을 유지해왔지만, 결국 댐 건설은 추진되고 마을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히류댐이 완공을 앞두게 된 상황에 유스케의 시신이 발견되고 이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그간 촌장이 건설사와 내통해 댐 건설에 반대하는 척 공사 기간을 질질 끌어 국가로부터 돈을 계속 부풀려 받는 데 일조 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살 만한 정확히 포착된다. 즉, 유스케는 자신이 아끼는 잠자리의 성지가 히류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던 인물로 다누마로서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의심은 범인을 촌장 다누마로 향하기 시작한다.

 

 

 

   분명, 누가 봐도 범인은 촌장 다누마이고 모든 증거가 다누마를 향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시신 역시 유스케임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오~ 내가 생각한 게 맞나보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 하고 뭔가 사건이 금방 해결될 것만 같은 쾌감 같은 것이 이미 중반부부터 들곤 할 것이다. 그런데 묘한 이질감이랄까. 누구보다도 직감이 발달한 가부라기가 그러했듯 이게 정말 진실일까? 의문이 든다. 자꾸만 중요한 것을 못보고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증명되지 않은 사소하지만 매우 중요한 듯한 의문들이 계속해서 가부라기의 발목을 붙든다.

 

 

 

"어떤 사실에 맞닥뜨렸을 때 우선 그걸 '의외로 놀라운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진실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죠. 이 '의외로 놀라운 사실'에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비로소 '추론'이란 행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진실에 이를 수가 있죠. 그걸 애브덕션(abduction)이라고 하죠." / 183p

 

 

 

   애브덕션. 누구보다도 직감이 발달해 엉뚱한 어림직작과 같은 애브덕션법 추리력을 빛내곤 하는 가부라기는 이미 정해진 수사방향과 다른 노선을 그리며 이제 모든 가설을 깨부수고 다시 시작한다. 과연,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은폐되고 조작된 진실은 무엇일까. 소설은 줄곧 잠자리가 가리키는 진실이 무엇인지 또 다른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개성 있는 캐릭터의 다양한 활약상이 추리소설의 활력을 높이다

 

 

   앞서 <단델라이언>을 읽었을 때만 하더라도, 여타의 추리 소설 및 형사 소설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형사의 개성과 인상이 가와이 간지의 소설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표한 적이 있다. 그나마 위로 할 만한 것은 가부라기 형사의 일방적인 활약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팀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사건을 해결해나는 과정에서 진정성을 느꼈다는 점이다. <드래곤플라이>를 탄탄하게 받치는 힘 역시 가부라기 외 주변 형사들의 개성 있는 캐릭터와 이들의 단단한 팀워크에 존재한다. 가부라기와 오랜 동료로 성질이 급하고 괄괄한 면이 있으나 시종일관 유머 있게 팀의 분위기를 띄우는 마사키, 26세라는 젊은 나이의 프로파일러로 범죄 심리 분석에 능하고 사건의 단서로 진실을 추론해가는 능력이 탁월한 엘리트 사와다, 형사 오타쿠라고 불리며 뛰어난 외모와 스타일로 기동력을 자랑하는 젊은 에너지 히메노는 단서를 조합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다.

 

 

 

   뿐만 아니라, 시종일관 가부라기의 돌출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냉정한 태도로 수사방향을 지휘하는 사이키 역시 누구보다도 가부라기 특수반이 마음껏 수사할 수 있도록 뒤에서 은근히 지원해주는 모습이 멋지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드래곤플라이>에서는 진중하지만 특유의 직감이 이끄는 방향으로 획일화 된 수사에 새로운 가설을 끊임없이 재기할 줄 아는 가부라기의 뚝심이 빛난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이들 형사들이 어떠한 사명을 가지고서 사건에 다가가는지 그 소신과 철학을 진정성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타의 추리 소설과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의 감정을 '희로애락'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원한'이나 '증오'는 없다. 마치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듯. 아니, 존재할까봐 두려운 듯이. 그건 자기 안에 원한이나 증오 같은 감정이 존재한다는 걸 누구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인간은 왜 이런 골치 아픈 감정을 짊어지고 사는 걸까. / 74p

 

 

"인간은 언젠가 틀림없이 변할 겁니다. 그리고 동족을 죽인다는, 있어서는 안 될 습성을 버릴 날이 반드시 올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하지만 그날까지는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지켜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경찰관이 필요하죠. 저는 그래서 경찰관이 된 겁니다." / 487p 

 

 

 

   가만 보면 <단델라이언>과 <드래곤플라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인류애 같은 철학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우리는 왜 같은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것인가. 왜 이러한 비극은 계속되는 것인가. 자극적인 살인사건에 얽매이지 않고 일그러진 욕망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우리 인간들의 고뇌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작가의 사명 같은 것이 엿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앞으로도 가와이 간지의 작품만큼은 줄곧 찾아보고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쭉 이와 같은 작품이 계속해서 출간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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