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위대하게 - 소설
혜경 지음, 최종훈 원작 / 걸리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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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이라는 소련도 죽의 장막이라던 중국도 이제는 문을 열고 세상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건만

북한만은 여전히 동토의 구역이다.

한 핏줄을 나눈 동족이라는 것도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 되어가고 그들은 지구촌에 외계인처럼

외톨이처럼 그렇게 버티고 있다.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수없이 많았다.

손을 잡아주기에도 손을 놓기에도 어려운 그들을 이렇게라도 만나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웹툰으로 이미 많은 사랑을 받아온 이 작품은 영화로 제작되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류환과 해랑은 꽃미남 배우인 김수현과 박기웅이 맡았고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고창석과 연기의 달인 손현주가 원작의 느낌을 아낌없이 살려주었을 것이다.

 

 

 

일단 설정은 무척이나 황당하다.

남한으로 침투시킬 특수공작원을 양성하는 5446부대의 조장인 류환과 해랑은 남한으로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동네바보로 설정된 류환과 로커로 변신한 해랑은 2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이

맡은 이 이상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만신창이가 되어 흘러 들어온 류환을 걷어준 수퍼할머니와 그의 아들 두석, 그리고

전직 경찰인 고씨 아저씨와 외롭게 살아가는 유란과 유준, 동네의 악동 꼬마인 치웅과 성민.

재즈가수인 란은 이제는 동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류환이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수퍼에서 배달과 잔심부름을 하며 충실하게 바보역할을 하던 류환은 뒤이어 남파한

해랑과 해진과 조우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5446부대의 빼어난 전사로서 남한사회에 침투하여 남한사람이 되는데

성공하지만 갑작스런 남북기류의 이상으로 모두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자신이 죽는 것은 영광이지만 북에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류환은 자신들을

전사로 키워준 김태원을 찾아가고 숨겨져있던 비밀들을 알게된다.

과연 죽음의 전사로 키워진 이들이 선택한 길은 무엇일까.

 

 

이미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읽는 내내 한 권의 대본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속의 인물들과 겹쳐져 좀 더 생생한 전사들을 만난 것 같다.

남파된 간첩들이 남한의 풍요로운 현실과 마주쳐도 변절하지 않고 충성을 다할 것인가.

충실하게 간첩의 임무를 수행하던 전사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전원 자결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훈련받은대로 충실하게 따를 것인가.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비장하게 이어지는 스토리에는 절절한 가족애가 녹아있다.

아무리 목숨하나쯤 눈하나 꿈쩍하지 않고 해치우는 전사라 할지라도 두고온 가족들과

자신을 영웅처럼 따르는 대원들의 사랑을 모른척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은 비장하고 슬프다.

류환과 해랑, 해진을 처치하기 위해 파견된 북쪽의 저격수들과 남한의 요원들이 벌이는

끔직한 사투에서 서서히 목숨들을 잃어가는 전사들.

과연 류환과 해랑, 해진은 살아남았을까.

세월이 흘러 류환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슈퍼할머니의 염원이 담긴 낙서밑에 글귀하나가

그의 생존을 희미하게 짐작할 뿐이다.

'동구야,살아 있거든 소식이라도 전해 주거라.'

'엄마, 아프지 마요.'

 

다소 엉뚱한 코믹한 설정으로 웃기는 소설이 될지도 모르지만 남북의 비참한 현실과

전사로 길러져야하는 어린 소년들의 비애가 잘 녹아있는 작품이다.

얼마 전 자유세계로 탈출을 시도하다 송환되었다는 북한소년들의 안위가 궁금해졌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잠시 전쟁이 중단된 휴전국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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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아이 창비청소년문학 50
공선옥 외 지음, 박숙경 엮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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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순으로 사람의 무게를 잴 순없다.

고작 열 몇살즈음에 들어선 아이들의 삶의 무게는 얼마쯤 되는 것일까.

그 아이들의 두 배 혹은 세 배쯤 살아낸 어른들은 과연 엉성하게 보이는 아이들의 세상보다

훨씬 꽉찬 인생들을 살고 있는 것일까.

 

참으로 특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일곱명의 이름이 새겨진 모음집이라 반가웠다.

적어도 아이들의 가늠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해 말하기에는 충분히 자격이 있는 작가들이었다.

 

 

엄마와 스 무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경수는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살던 집이

불이 나자 고향인 여수를 떠난다. 한 트럭분의 짐이 초라하게 실린 차를 타고 엄마가

사귀고 있는 서울 남자집으로...하지만 그는 흔적도 없고 트럭기사의 고향인 강릉으로

향한다.

"나한테는 여수건 강릉이건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정착한 강릉에서 엄마는 다시 식당일을 시작했다.

여수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강릉으로 오는 사이에 경수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아이가 되어 버렸다.

공선옥, 그녀의 색깔이 한껏 묻어나는 이야기이다. 스 무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경수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문득 그녀가 느껴졌다. -공선옥의 '아무도 모르게'-

 

구병모의 글은 늘 이런 식이다. 깊숙한 어둠같은데서 오송송 피어나는 화려한 독버섯같은 그런.

성냥팔이소녀의 빈곤 벗어나기 프로젝트는 결국 21세기에서도 변함없이 질긴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어느 시대이건 상위층을 떠받히는 하위층의 가여운 희생을 피를 다 빨려 사라져간 소녀를 투영해

고발한다. -구병모의 '화갑소녀전'-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에게도 자기 영역이 있다고 한다.

비록 거지처럼 쓰레기를 뒤지고 숨어살지만 어미 고양이는 이제 자신의 품에서

떠나야 하는 새끼고양이에게 말한다.

'두렵니? 고양이의 눈은 하늘 가까운 곳에 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

맞다 우린 저마다의 영역에서 저마다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이현의 '고양이의 날'-

 

죽은 딸아이를 잊지못해 뒤이어 태어난 아들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주고 딸아이처럼 아들을

키우는 에미는 파란 입술을 가진 아이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아이에게 덧씌워진 누이의 삶이 아이에게 버겁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일까.

시골 할머니집에 다녀온 파란 아이는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이름을 바꿔 주세요. 그리고 사진...그냥 꺼내놓고 보세요, 괜찮아요.:

"많이 컸다. 우리 아들."

"중학생이잖아요."

그래 우리는 아이가 지금 어디 서있는지 모를 때가 너무 많다. 어느 새 훌쩍 자라 외로운 에미의

등을 토닥이는 걸 보면서 문득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깨닫게 된다. -김려령의 '파란아이'-

 

'열 여섯이면 집을 떠날 만하다.'

그럴까? 아이들의 인권이 존중된다는 미국에서도 열 여덟은 넘어야 한다는데.

수몰된 고향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아이가 하는 말은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것같은

안스러움이 묻어난다. 꼭 나이만큼만 세상을 안다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구나.

내품에 있는 내 아이도 이제 마음에서 떠나 보내도 되는 걸까.

뒤를 돌아다 보며 떠나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꾸 아들놈의 얼굴이 겹쳐온다.  -전성태의 '졸업'-

 

창비의 청소년문학집은 항상 특별했다.

내가 지나온 길임에도 자각하지 못했던 아픔들을 그린 아이들의 이야기가 항상 나를 부끄럽게 했었다.

50권의 기념하여 나온 이 소설집은 또 한번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달라고

말한다. 그렇다. 지나온 길이라고 그 길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아이들을 보면서 생경하게 다가오는 막막함이 느껴질 때,

창비의 청소년문학집은 기억나지 않은 내 사춘기를 끄집어내고 내아이가 지나는 그 길에 이정표처럼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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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맞는 죽음
한스 팔라다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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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본질을 파헤친 소설을 볼때마다 느끼는 것은 '과연 인간의 선과 악의 어느쪽에 서있는가'하는 것이다. 

동물의 본성에 가까운 존재이면서 대를 이은 교육이나 습관등에 의해 잘 포장이 되어있다가 어느 순간

본성이 뛰쳐나오는 것은 아닐지 생각케된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있는 시기는 바로 전쟁이나 폭력과 같은 위기의 순간일 것이다.

이 소설의 무대는 인류 최악의 전쟁이었으며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줄 수있는 참혹한 집단 살인이 연출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1940년에서 1942년까지 베를린의 한 노동자 부부의 저항 일지이다.

하지만 단순한 저항일지를 떠나 위기의 순간에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간본성일지'이기도 하다.

 

 

나치가 독일을 통치하고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의 승리를 위해 독일의 많은 청년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갔다.

가구공장의 작업반장인 크방엘과 그의 아내 안나는 어느 날 자신의 외동아들 오토의 사망통지서를 받아든다.

당시 독일은 프랑스 점령을 축하하는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으며 곧 영국도 점령하리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다.

모든 국민들을 당원으로 흡수하여 충성을 맹약하게 하려는 시도와 국내에 있던 유대인을 색출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크방엘부부와 유대인노파 로젠탈, SS친위대에 세아들을 보내고 충성을 맹세한 페어지케가족과 전직 최고 재판관 크롬,

방관자같은 게쉬부인등이 사는 임대아파트는 또하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무대이다.

착한 아내를 배신하고 놀음에 빠진 에노와 모사꾼이며 첩자인 바르크하우젠과 같은 인간이 뒤섞인 인간세상의

모든 것은 보여주는 무대인 것이다.

 

크방엘은 소심하고 깐깐한 전형적인 소시민으로 신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성실하게 일했던 공장은 단지

당원이라는 이유로 하찮은 인간들은 승진을 하고 월급을 더받는 상황이 되면서 나치 정권에 환멸을 느낀다.

크방엘은 외동아들의 전사를 계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어머니, 총통이 제 아들을 죽였어요...당신 아들도 죽일 거에요'

 

크방엘은 엽서를 써 배포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나치에게 대항하기로 한다.

하긴 평범한 가구공장직원이었던 크방엘이 나치독일에게 어떤 거창한 항거를 할 수나 있겠는가.

결국 엽서들은 게쉬타포의 손에 들어가고 기필코 범인을 잡겠다는 애셔리히경감에 의해 2년만에 잡히게 된다.

 

편파적인 재판과 보호받지 못한 변호로 크방엘부부는 재판에 넘겨지고 결국 사형을 선고 받는다.

사형을 기다리는 크방엘부부는 지난날을 회상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이란 죽음의 존재를 가장 크게 느끼며 더불어 생존의 의지를 부추기게 된다.

크방엘부부에게 죽음은 장렬하며 고귀한 것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죽음들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온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비열한 인간들과 숭고한

죽음으로 승화시키는 인간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죽음의 무게를 그린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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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박연 - 하 - 벨테브레,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은 이름 조선인 박연
홍순목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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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 조선 인조때 귀화한 네덜란드인.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도에 상륙한 후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한많은 한 사나이의 일생을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내용이다.

그가 불운하여 조선에 당도하였지만 그의 삶을 서너 줄의 글로 남기기에는 너무도

조선을 사랑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공헌한 삶이었기에 4백년간 잠들어 있던 그를

세상에 알린 작가의 헌신이 감사하기만 하다.

작가를 그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 기이한 광채로 빛나는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그를 다시 떠나보내려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단다. 10년동안.

 

 

전생에 아마도 그의 고향 친구였거나 가족이 아니었을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작가가 그린 박연은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었다. 얼마 안되는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완성된 '박연'자체였다.

분명 벽안의 벨테브레는 '박연'으로서의 삶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태를 묻은 고향으로 가지 못한 한이야 어쩔 수없지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인물로 우리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도깨비라고 놀림을 받고 기생방에 불려가 억지 춤을 춰야 했던 참담함을 보면서

당시 조선인들의 무지와 한심함에 치가 떨려왔다.

당시 해상을 주름잡았던 네덜란드의 문화를 받았들였더라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몇 현자들이 박연을 주목했지만 판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조선의 멍청한 임금중 하나인 인조가 다스리는 시대에 그가 온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종이나 정종시대라면 그의 일생이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그 소용돌이속에서도 출중한 총솜씨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간절히 필요했던 무기들을 개발했던 일에 헌신했던 박연의 도움은 분명 조선역사의 한 축을

지탱했던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한 조선인들의 편견이 참으로 한심하던차에 이렇게

되살아 났으니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어 다행이다.

 

심약한 효종이 끝내 북벌의 꿈을 이뤘더라면 박연의 쓰임새가 더 중했을텐데 그 것또한 안타깝다.

마치 그 시대에 들어가 박연의 집 곁에 살았던 것 같은 생생함에 박연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를 깨우기 위해 숨죽였던 10년동안 그는 박연이 살았던 그 시대로 얼마나

많이 오갔을 것인가.

 

 

26년후에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의 통역을 위해 그를 만나 박연이 한 말은 그의 일생을

그대로 반추한다.

"언젠가 자네는 이 땅에서 보낸 날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네. 그대가 고통과 슬픔뿐이었다고

기억하는 이 땅에도 무언가 아름답고 귀하고 따뜻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걸세."

-下권409p

 

과연 박연은 조선에서 귀하고 따뜻한 것을 발견했는지 묻고 싶다.

어디에 묻혔는지 그의 후손은 살아 남았는지 모든게 너무 궁금하지만 이쯤에서 만족해야겠다.

제비淵이란 이름처럼 귀한 손님으로 왔다가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져간 그를 이만큼이나

되살려낸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여겨야겠다. 어디엔가 남아있다면 그의 후손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정녕 그대의 아버지 벨테브레는 잊혀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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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박연 - 상 - 벨테브레, 역사가 기억해주지 않은 이름 조선인 박연
홍순목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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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 조선 인조때 귀화한 네덜란드인.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동료 두 명과 함께 제주도에 상륙한 후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한많은 한 사나이의 일생을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내용이다.

그가 불운하여 조선에 당도하였지만 그의 삶을 서너 줄의 글로 남기기에는 너무도

조선을 사랑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공헌한 삶이었기에 4백년간 잠들어 있던 그를

세상에 알린 작가의 헌신이 감사하기만 하다.

작가를 그를 처음 대면하였을 때 기이한 광채로 빛나는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라고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그를 다시 떠나보내려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단다. 10년동안.

 

 

전생에 아마도 그의 고향 친구였거나 가족이 아니었을까. 잠깐 생각에 잠겼다.

작가가 그린 박연은 허구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었다. 얼마 안되는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완성된 '박연'자체였다.

분명 벽안의 벨테브레는 '박연'으로서의 삶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태를 묻은 고향으로 가지 못한 한이야 어쩔 수없지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했던

인물로 우리민족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도깨비라고 놀림을 받고 기생방에 불려가 억지 춤을 춰야 했던 참담함을 보면서

당시 조선인들의 무지와 한심함에 치가 떨려왔다.

당시 해상을 주름잡았던 네덜란드의 문화를 받았들였더라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몇 몇 현자들이 박연을 주목했지만 판을 돌려놓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필이면 조선의 멍청한 임금중 하나인 인조가 다스리는 시대에 그가 온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세종이나 정종시대라면 그의 일생이 조금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그 소용돌이속에서도 출중한 총솜씨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간절히 필요했던 무기들을 개발했던 일에 헌신했던 박연의 도움은 분명 조선역사의 한 축을

지탱했던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그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지 못한 조선인들의 편견이 참으로 한심하던차에 이렇게

되살아 났으니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어 다행이다.

 

심약한 효종이 끝내 북벌의 꿈을 이뤘더라면 박연의 쓰임새가 더 중했을텐데 그 것또한 안타깝다.

마치 그 시대에 들어가 박연의 집 곁에 살았던 것 같은 생생함에 박연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를 깨우기 위해 숨죽였던 10년동안 그는 박연이 살았던 그 시대로 얼마나

많이 오갔을 것인가.

 

 

26년후에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의 통역을 위해 그를 만나 박연이 한 말은 그의 일생을

그대로 반추한다.

"언젠가 자네는 이 땅에서 보낸 날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네. 그대가 고통과 슬픔뿐이었다고

기억하는 이 땅에도 무언가 아름답고 귀하고 따뜻한 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걸세."

-下권409p

 

과연 박연은 조선에서 귀하고 따뜻한 것을 발견했는지 묻고 싶다.

어디에 묻혔는지 그의 후손은 살아 남았는지 모든게 너무 궁금하지만 이쯤에서 만족해야겠다.

제비淵이란 이름처럼 귀한 손님으로 왔다가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져간 그를 이만큼이나

되살려낸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여겨야겠다. 어디엔가 남아있다면 그의 후손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정녕 그대의 아버지 벨테브레는 잊혀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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