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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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랬었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줄것 같았던 천지가 오늘....죽었다.

생전 안하던 투정을 부리던 아침에도 죽음의 예감같은건 없었다. 그렇게라도 저답지 않은 모습 하나쯤은

남겨두고 가야 남은 사람들의 짐이 덜어진다는걸 알았고 온전한  용서는 아닌 용서를 하고 -사실은 용서할 맘도 없었지만-

무거워진 몸이 버거워 먼저 떠난것을 사과하고...그렇게 너는 떠났다. 마지막 소망이라던 강을 따라서..

 

자식이 종교이고 신이라고 믿는 에미품을 떠나면서 네몸 가벼워질일만 생각했니.

사랑했든 상처를 주었든 너를 기억하고 떠나보내지 못할 사람들을 위해 면죄부를 빨강털실속에 숨겨놓고

 아무도 찾지못할 곳에 너를 위한 마지막 편지를 숨기고 죽음을 준비한 너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투명인간 같았다던 너의 존재를 그렇게 묻어버려야 비로소 모두가 너를 볼 수 있을거란걸.알았던 거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준다는 거...그래서 더 아플수 밖에 없다는거...짧은 생을 살다간 네가 알게 된건

순전히 우리모두의 무관심이고 잘못이었다. 마지막 전화벨이 그치기 전에 모두 알았어야 했어.

아직 너를 붙들수도 있었다는것을..

 

천지는 아직 솜털도 벗지 못한 1학년 여중생이다.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대신해 하루종일 앉지도 못한채

두부를 구워 두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와 세상만사 건성건성인 언니 만지와 가난하지만 그럭저럭 살았었다.

화연이의 장난질만 아니었다면 살아남아서 멋진 남자와 재혼한 엄마에게 손자를 안겨주었을지도 모를 그런 착한

아이였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낼줄 몰라 위험해 보였던 언니를 대신해서 활달해보이고 문제가 없어 보이던 천지가

그렇게 배신을 할줄은 몰랐다. 결국 아무도 천지를 몰랐다. 울던지 가출을 해보던지 반항이라도 해보지 그랬을까.

차라리 그렇게 자신을 풀어놓았더라면 혼자서 죽음의 강을 넘어가는 일같은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빨강 털실밑에 숨겨놓은 편지에 썼던 말들을 그냥 했더라면...좋았잖아.

 

자식을 제아비가 떠난 강물에 띄워보낸 에미가 너무 씩씩하다고 원망하지마. 그렇게라도 버티지 않음 에미도

너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거..에미가 살아 남아야 할 이유가 될 건성건성한 자식이 남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세상은 정작 건성건성한 인간들이 너무 많이 남고 살아남아 세상을 받쳐줘야 할 사람들은 먼저 떠난다.

병든 아내를 개 패듯이 때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그인간도 같이 좀 데려갈 일이지..

 

도대체 저자의 과거속에 한때 생을 놓아 버리고 싶었던 어둠은 무엇이었을까.

'완득이'도 그러했지만 도무지 빛이 보이지 않는 현실속에서도 웃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것일까.

울다가 웃다가 나는 그녀에게 꼼짝없이 붙들렸다는걸 알았다.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체육복속에 갇혔지만 모두 다른 소를 가진  붕어빵 아이들이 배를 툭 갈라서

잠깐 달콤한 맛만보고 자신을 낭비하는 삶을 살게 될까봐 나도 두려워졌다.

나도 천지가 넘지 못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와 시시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밖에 해줄얘기가 없었다.

'얘들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리 생을 내려 놓지마..너무 비겁하잖아...그게 잘한일이었는지 잘못한 일이었는지

적어도 나만큼 살아서 판단할수도 있잖아. 그때까지 제발 생을 내려놓지 말아. 그리고 천지야

너를 붙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가슴이 아파서 어찌 이책을 썼을까...김려령씨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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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 송
질 르루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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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소설이 픽션인지 전기인지 읽는내내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실제 위대한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데 

피츠제럴드가 딸아이에게 남긴 편지와 몇몇 작은조각들의 진실이 있긴 하지만 '픽션'임을 강조한 이 책을

저세상에 가있는 두 주인공이 이책을 본다면 혹시 놀라지는 않을까?

 

자신들도 몰랐던 모습들이 너무 실랄하게 표현되어 자신들이 걸어왔던 열정의 시간들을 왁자하게 추억했을것만

같았다.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색깔차이만큼이나 같은듯 다른 두 사람의 만남부터가 말그대로 드라마이다.

실제등장하는 영화배우들의 모습이 겹쳐서일까. 바람과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케이블과 비비안리의 모습이

주인공들과 겹쳐지는것은 왜일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까...하고 뇌이던 스카렛 오하라의 독백이 젤다

세이어의 말과 겹치고 레트비틀러의 고뇌가 피츠제럴드와 묘하게 비슷하다.

 

완벽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역시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현실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항상 같거나 다른 젤다의 모습이 있었고 실제로 젤다는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자신의 못다한

열정을 불꽃속에 잠재워야 했다. 좀 순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무엇이 그들은 미치게 하고 술먹게 했는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같은 극을 가진 사람들처럼 서로를 밀쳐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했던 두사람의 사랑은 능력을 꽃피웠던 피츠제럴드의 뒤에서 그림자로 남아야 했던 젤다의 이상과 자신의

작품속에 늘 시퍼렇게 살릴 수 밖에 없었으면서도 자신보다 앞서는걸 두려워했던 피츠제럴드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충돌했던것은 아니었을지..작가가  얘기한 로댕과 연인 까미유클로델과의 애증관계와도 흡사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재능이 남자보다 우월했을때...특히 연인이거나 부부일때는 둘다 불행해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술과 약으로 찌든 인생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작품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것은 그들의 불행에서

싹텄는지도 모를일이다. 행복하게 잘살았다...했었으면 치열하고 위대한 작품이 나왔을지 의문이 생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천재였고 위대한 작가였고 패배자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느껴진다.

용기 잃지 않기, 늘 몸을 청결히 하기, 승마 연습하기...

남들의 말에 신경쓰지 않기,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기, 다가올 일을 미리 걱정하기 않기..

특히 하지 말아야할 일들이 바짝 내마음을 당기는건 왜일까...어쩌면 피츠제럴드도 이부분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딸아이만큼은 자신을 옭죄는 족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글을 남겼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 하더라도 결국 자신을 넘어선다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아직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시대에서 앨라배마의 토네이도처럼 폭풍처럼 살다간 두사람의 삶이

내마음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지금 다시 이시대에 온다면 또 얼마나 앞선 삶을 살고

파란을 일으켰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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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새
후안 에슬라바 갈란 지음, 조영실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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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필요악(惡)이다. 객체의 적절한 보존을 위해 자연발생적인 원인으로

시작되었던 원시시대의 전쟁과는 달리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이기와 권력의 탐욕 그리고 가장

큰 원인인 종교에 의해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지금까지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스페인내전이 6.25전쟁과 비슷한점은 민주파와 공산파간의 세력다툼이었고 같은 민족간의 전쟁이었던

데다가 주변 강대국들의 이권개입이 있었다는 점일것이다. 물론 우리처럼 둘로 나뉘는 불행만은 피했지만..


어느전쟁이든 명분이 있든 없든 환영받거나 축복받거나 아름다운 전쟁은 없다.

대체로 권력을 가진자들이 권력을 지키거나 키우고 싶을때  혹은 불손한 사상을 가진이가 반란을 꿈꿀때

더이상 물러설곳이 없는 약자가 최후의 발악으로...그리고 그들 각자가 가진 신(神)의 이름으로 인간은

너무나 많은 전쟁놀음을 해온것이 사실이다.

결국 승자든 패자이든 희생없는 결과는 없는 전쟁은 왜 꼭 일어나야만 하는가.

그와중에도 권력있고 힘있는 놈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뒤쪽에 멀치감치 물러앉아 목숨을 보전하고

때로는 그 상황을 이용하여 떼부자가되기도 한다. 항상 죽어나가는건 힘없고 가난한 최하층의 사람들이고

가장큰 상처를 받는것은 여자와 아이들이다.


주인공 카스트로는 후작의 하인의 아들이다. 간신히 글을 깨치긴 했으나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뜨기

청년일 뿐이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두편으로 갈려야 하는지 자신이 어느편에 서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선량한 하층민일뿐이다. 모든것을 평등히 나누자는 공산당편에 서야 마땅해보이는 그가

반대편 국민당으로 도망친 이유는 자신이 모셨던 후작이 자신들을 굶어죽지 않을만큼은 보살펴주었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에서 였다. 그당시에 가난은 일상일뿐이고 굶는이들이 허다했으므로 자신들을 부리고

단지 굶어죽지 않을정도로는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 충성의 이유일만큼 선량한 시골뜨기 카스트로.


책의 첫장에 쓰여있던 글처럼 내전에서 편자공이자 수송병이었던 작가의 아버지가 이책을 쓰게한

모티브가 된 모양이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노새한마리..얼렁뚱땅 노새 수송병이 되었던 카스트로는

이 잘생긴 노새를 몰래 들여와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고향집으로 끌고갈 궁리를 한다.

이 노새는 카스트로에게 있어 전쟁을 견디는 힘이고 친구이고 자유의 상징이다.

폭탄이 빗발치는 어느날 사라져버린 노새를 찾아 상대편 진지로 갈수밖에 없었던 카스트로는

졸지에 전쟁의 영웅이 된다.


갑자기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하인의 아들이란 것이 밝혀진후 멀어졌던 애인도 다시 꼬리를 치고

귀족의 딸이었던 여자도 전쟁영웅으로 변신한 그와의 멋진 정사를 꿈꾼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숨을

담보로 권력을 향한 전쟁을 벌이나보다. 하인으로서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귀족과의 하룻밤을 보낸

카스트로는 그의 동료에게 큰소리치며 허풍을 떤다. 매춘부와 그럴듯한 밤을 보냈노라고..

그것이 단순히 힘좋을것 같은 멍청이 영웅과의 하룻밤을 허락한 귀족여인에게 한방먹일 방법이었을테니..


결국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꿈처럼 노새는 그의 고향에 가지 못한다. 전쟁이 끝난순간부터 권력자들은

그동안 손실되었던 '자신의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버리고 얻은 전쟁의 승리는

죽은자의 것이 아니라 산자..거기에서도 그동안 움츠렸던 가진자들의 몫일뿐이다.


멋진 르포기사로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언론의 행태또한 얼마나 많은 오류와 눈가림이었는지가 실랄하다.

무식하고 단순하고 순진한 카스트로는 포장된 전쟁영웅의 영화를 찍으면서 또 한방먹인다.

멋진 독일여자의 냄새에 발정난 나귀의 거시기를 잠재우는 방법을 아시는가..

단지 예민한 나귀의 귓바퀴부분에 담뱃불을 살짝만 갖다 대면 될일이라는걸 알지만...

후방에서 군인놀음이나 하는 건달중령에게 그 비법을 이렇게 말한다.

'저 안경쓴 신사가 네 거시기를 빨아주고 싶어 할지도 몰라'라고 속삭여 주었읍죠.

뭐 그렇게 놀렸다고 아무도 카스트로를 욕할사람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놀림감이었다는것조차

알수 없었을테니....어쩌겠는가 힘없고 가난하고 순진한 시골뜨기 노새수송병이 할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는 더 있겠는가. 전쟁은 그저 목숨을 잃었느냐 안 잃었느냐의 차이일뿐 그가 건진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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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이별'이라는게 있을까요? 책 제목을 보면서 지나온 이별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잠시 만나고 스쳐가는 인연들을 빼고는 좋은이별이라고 말할 이별이 없었던것 같습니다.

가슴아팠고 용서할 수 없었고 진저리 쳐지는 이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좋은이별'이란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했었습니다.

 

어제는 연이은 추위가 물러가고 모처럼 푸근한 겨울저녁이었습니다.

일찍 도착하여 MBC PD 쌀집아저씨가 썼다는 아프리카기행집을 읽고 있었는데요.

장소를 못찾아서 헤맸다는 작가님이 일찌감치 도착하셨네요.

 

첫인상은 뭐랄까 자그마한 몸집에 아주 귀여운(?)인상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자기표현과 마음을 치유하는 법'입니다.

 

마음을 치유하는 법은 자기얘기를 하는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처음 만나고 와서 하는 얘기가

'의사가 아무것도 하는게 없어. 그냥 듣기만 해'그럽니다.

심리치료의 본질은 아무도 몰래 눌러놓은 무의식의 자아를 찾아내는것.

정작 자신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감정이 무엇인지...꺼내놓아야 할것이 무엇인지

알지못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처음에는 얘기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그저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보면...자기내면(성찰)을 발견하게 됩니다.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이란 책에는 많은 우울증환자에서 돌아 올수 있었던

사람들의 사례가 실려있는데..

우울증은 둘중에 하나입니다. 빠져나오거나 목을 매달거나..

우울증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탐구심'이거나'호기심'이었습니다.

'우울증의 본질은 무엇이지?' 그러다가..자기를 돌아다 보고..내면을 발견하고

결국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작가님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무슨병인지 모르거나 대단치 않을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첫걸음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저도 언제부터인가..누구에겐가 자신을 얘기하지 않게 되면서..병이 시작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미카엘 엔데의 '모모'처럼 귀를 열고 누군가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준다는

일이 직업이 되어버린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나도 간절하게 누구에겐가 제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점에서..작가님의 저 자그맣고 고운 자태와 마음을 끄는 말한마디 한마디가

얼어붙은 내마음을 녹이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그녀의 글에 치유가 되는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느순간..좋은 이별도 생길것 같고 용서도 해줄것 같은 여유가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강연회였습니다. 아름답고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 인상적인 작가님..좋은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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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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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눈이(hjmjkklll)
 


http://cafe.naver.com/wisdomhouse/5670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먼저 떠난 사람과 평생 같이 하고 싶었던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낸사람중

누가 더 불행할까....그리고 그만남이 이생의 마지막 이었다고 한다면 혹시 그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아직 이곳에 살아남을수 있었을까....운명이란게 있기는 한것일까...

내내 이 물음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분명 예쁘거나 잘생기거나 부자인 사람들이 세상을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을것이다. 아니 불편함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든든한 빽하나가 뒤에서 삶을 지긋이 밀어주는 큰힘이 될것이다.

그저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출발선에서 부터 멀치감치 뒤에서 처져 터덜터덜 걸어야 하는 삶이

너무나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뛰어봐야 앞서 나간 인간들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일테니까.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185P

 

그렇다. 우린 서로가 서로의 영혼에게 불을 밝혀주어야 하는 인간일 뿐이다. 제 스스로 빛을 발해서

불을 밝히는 찬란한 전구가 되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걸 우리는 알지 못한채 살아가거나

알았다 해도 너무나 빨리 잊어버린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고독하다. 나도 이미 오래전에

그빛을 잃었다. 한때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이책을 읽고서야 기억해 냈으니까..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213P

 

때로는 영원하지 못할뿐 더러 불완전하기까지한 내가 그 영원한 기억때문에 고통스럽다.

슬프고 아픈 기억일수록 망각의 행운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실제보다 늘 긴 시간이었다.

 

'보잘것 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 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219P

 

그래 남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삶이라면 이렇게 내 초라함이 부끄럽지 않을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느끼는

고통과 열등감은 결국 보여지지 위해 세상을 살아왔던 나이기 때문이란걸..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삶과 생활에 경계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삶을 사는 것일까 생활하는 것일까. 그의 말처럼 나도 기억에도

가물한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생활의 느낌이 아닌 진정한 삶과 헤어졌기 때문에 슬픈것은 아닐까..

그런데 나는 과연 잠시라도 꿈틀거리는 진정한 삶을 살아보기는 한것일까. 막막하다.

 

이책을 읽는내내 나는 그들과 켄터키옛집에서 같이 맥주를 마시고 마이클잭슨의 빌리진을 들었고

그들이 걸었던 길을 걸었다. 그를이 살았던 그시간에 나도 분명 그들과 같이 있었다.

그래서 문득 그들이 내가 알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는지 한참이나 기억속을 헤메였다. 

끝까지 예수의 주검을 지켰던 요한처럼 어떤 이유이든 낙오자의 십자가를 진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본 요한은 끝끝내 내곁에 붙들어 두고 싶은 친구이다. 정작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한

주인공보다 더 그를 알만큼 그는 모모의 귀와 심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그것만으로도 치유가 될수 있는

사람...이 내게도 필요하다.

스무살적에 내사랑은 이들처럼 고결하지 못했다. 호프를 홀짝거리고 많이 걸었던 기억은 비슷한데

라흐마니노프도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도 알지 못했다. 나름대로 죽을만큼 치열했던것도같은데

눈오는 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오다 죽어버린 기억이 없기때문만은 아닌데 아직도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두사람의 에필로그에서 갑자기 무게감이 없어져 버렸다.

떠나지 못한 사람은 죽은것이 아니다. 다 잊고 두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 보다..

-늙어감으로 비로소 평범한 사람들속에 섞이는 시간들이 필요하겠지만-

두사람이 마지막까지 그를 껴안고 살아주기를 바란다면 너무 가혹한 요구가 될까.

그리고 그때까지 모두 잘지내시기 바랍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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